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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분 / 18세 관람가>
=== <블레이드 러너>의 철학적 분석 === <필로시네마 혹은 영화의 친구들 / 이진경 / 소명출판 / 51 ~ 79쪽>
<블레이드 러너>, 복제인간과 안티-오이디푸스
1. 머리말
복제인간(replicant)과 인간의 대립을 다룬 리들리 스코트(R. Scott)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는 1982년 제작되어 상영되었다. 하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스필버그의 <E.T.>와 상영시기가 겹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외계인과 경쟁하기에는 인간이 만든 복제인간의 힘이 아직은 미약했던 것일까?
이 영화는 필립 딕(Ph. Dick)의 소설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에 기초하여 각색한 것이며, 흥행의 실패 이후 비디오용으로 감독 자신이 직접 재편집했다. 주제와 메시지가 심각하고 중후한 이 영화가 보여주는 2019년의 세계는 그 심각함만큼이나 음울하고 어둡다. 이 영화는 '최고의 비주얼리스트'라는 평가에 맞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현혹적인 볼거리가 많을 경우 언제나 그렇듯이 정작 중요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도둑맞은 편지>에서, 편지가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발견되지 않았던 것처럼.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서 볼거리들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패스티쉬(pastiche) 등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용어를 빌어 설명하거나 몇몇 현대철학의 개념들을 특정 장면에 대응시키는 경우는 많지만, 정작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철학적 메시지를 읽어 내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인간보다 인간답게!"라는 타이렐사의 슬로건은 동시에 이 영화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양자의 의미는 크게 달라지며, 특히 후자는 매우 중의적이고 복합적인 것이 된다. 영화 전체를 통해 다양한 장면들이 결합됨으로써 새로이 만들어지는 이 슬로건의 새로운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러나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약간의 우회가 필요하다. 복제인간은 대체 무엇 때문에 죽음과 위험을 무릅쓰고 '금지된 귀환'을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지난 시기 지배적이었던 하나의 철학적-이론적 사조를 뛰어넘게 해준다.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을 필두로 형성된 기호학적인 패러다임이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단지 그것이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메시지의 무게 이상으로 '철학적'이다! 나아가 '인간'의 죽음을 통해 인간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불가피하게 오이디푸스적 구조와 조우하며 그것을 넘어서야 함을 보여줌으로써, 그 메시지는 '철학'조차 훌쩍 넘어설 것이다.
2. "인간이란 무엇인가?"
2019년, 로스엔젤레스 타이렐사(社)가 만든 복제인간은 우주에 식민지를 개척하는데 노예로 사용된다. 그들은 애초부터 특정한 목적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지며, 주어진 일을 하도록 설계된다. 그리고 거기서 이탈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지구로 돌아오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자들은 죽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처형(execution)'이 아니라 '회수(retirement)'라고 불린다. 이렇듯 지구로 귀환하는 복제인간을 찾아내 죽이는 일을 하는 '경찰'을 '블레이드 러너'라고 부른다.
이러한 자막이 아무런 소리 없는 검은 스크린을 지나쳐 가면, 거대하지만 음울한 도시가 화면에 가득 담긴다. 굴뚝 비슷한 곳에선 종종 불길이 치솟고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거대하게 치솟은 빌딩을 피해 운항하고, 그 옆의 거대한 광고판에선 일본 여인이 교태를 부리며 상품을 판다. 많은 건물들, 특히 타이렐사 건물의 높이는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를듯이 높다. 하늘에 도전했던 바벨탑의 기세를 근대 과학은 이런 식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과학의 힘과 자본주의, 그리고 그 선두주자인 일본의 자본이 도시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다.
반면 인간이 활보하고 복제인간이 그 속으로 뛰어드는 땅 위의 도시는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우며 온갖 인종들이 뒤섞여 사는 곳이다. 하늘과 땅 사이가 이토록 넓은 것이다. 과학과 인간의 삶이, 자본주의와 인간생활의 질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묘사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방법은 찾기 힘들다. 양자 사이의 거리는 또한 작자가 미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비극적 파토스의 폭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복제인간의 운명을 통해 좀더 증폭된 형태로 전개된다.
영화는 복제인간인지 인간인지를 가려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눈에 초점을 맞춘 채 그 변화를 감지하는 테스터가 인상적이다. 여기서 테스터가 눈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은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복제인간을 만들어 파는 타이렐사는 인간마저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자본주의에 대한 일종의 풍자다. 하지만 고대의 노예사회로 되돌아갈 수 없는 한 '인간'을 상품화하는 것 자체가 허용될 순 없는 일이기에, '복제인간'이란 존재가 필요했다. 만들어진 인간이라면 처음부터 상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판매한다고 해서 비난할 것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는 복제인간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것'이 사라진 이후까지 계속해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모티프다.
하지만 이는 곧 역설적 상황에 부딪힌다. 즉 복제인간이 인간의 모조품인 한, 우수한 제품은 인간에 가까워야 한다. 그래서 타이렐사의 슬로건은 "인간보다 인간답게!"다. 그러나 복제인간의 외연과 내포가 인간과 일치해선 안된다. 그것은 인간 자신을 상품화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비슷하되 일치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복제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는 것이요, 생산자와 생산물을 구별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제인간을 가려내는 데서 영화가 시작하는 것은 충분히 상징적이다. 이러한 구별의 문제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이 질문은 영화 전체를 통해 집요하게 반복된다.
나아가 이 영화에서 '구별'은 생사가 걸린 문제기도 하다. 즉 그것은 지구에 돌아오는 것이 허용된 자들과 금지된 자들 간의 경계선이며, 따라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다. 그런데 이 구별은 결코 쉽지 않다. "뛰어난 블레이드 러너"인 데커드가 타이렐 사의 '최신 제품'(레이첼)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시간 동안 100개에 걸친 질문을 던져야 했다. 블레이드 러너가 복제인간을 찾아내기 위해 이 정도까지 질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과 복제인간 사이의 그 모호한 경계가 바로 이 영화 전체를 밀고 가는 긴장을 제공한다.
여기서 양자를 가르는 생물학적인 특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복제인간은 가장 뛰어난 인간과 동일한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일단 만들어진 뒤에는 사랑과 미움, 슬픔과 분노 같은 감정이 저절로 형성된다고 한다. 따라서 사랑이니 눈물이니 하는 감정으로 인간을 구별하려는 오래된 시도도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 '처형'과 '회수'라는 구별은 그 죽음에 붙이는 사후적인 이름일 뿐이다.
복제인간들은 타이렐 회장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의 체스 상대며 유전자 설계사인 세바스챤에게 접근한다. 세바스챤이 로이와 프리스가 복제인간임을 알고는,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내가 디자인한 거야. 아무거든 (네 능력을) 보여줘 봐." 로이의 대답, "우린 기계가 아니야. 인간이라구." 그 옆에서 프리스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를 풍자한 이 한 마디로, 사고하는 것이 인간의 교유한 특징이라는, 근대의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보기 좋게 조롱당한다.
그보다는 "인간보다 인간답게"란 슬로건 아래 그들을 만드는 타이렐 회장의 생각이 좀더 그럴 듯해 보인다. "인간과 달리 복제인간에게는 감정의 경력이, 과거가 없지. 그들을 잘 다루려면 기억(memories)을 만들어 주어야 해." 처음부터 성인으로 만들어지기에, 그 이전의 비어 있는 과거가 기억의 부재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복제인간을 가려내는 첫 장면에서 테스트를 받던 레온이 복제인간임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라는 요구에서였다. 물론 그의 대답은 총알이었지만. 살로메란 가명으로 술집에서 쇼를 하던 조라가 당황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업주가 나쁜 짓을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 이 역시 기억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드러나자마자 거의 메워질 수 있는 것이다. 즉 기억이 이식될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결정적인 구별이 되지 못한다. 타이렐사의 '최신 제품'인 레이첼이 이전의 복제인간과 다른 것은, 그리하여 데커드로 하여금 구별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 동안 많은 질문을 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식된 기억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거기에도 차이는 있다. 자신을 찾아온 레이첼의 질문에 데커드는 대답한다. "당신의 기억은 이식된 거야." 그리고 그녀가 말하지 않았던 몇 가지를 대신 '기억'해 준다. 실망하는 레이첼. 결론적으로 말해 인간과 복제인간의 무화될 수 없는 차이라면, 기억의 '기원(origin)'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삶을 통해 경험된 기억인가, 그것과 무관하게 이식된 기억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기억이 자신의 신체에 새겨진 과거의 기록이라면, 혹은 자신의 것으로 '인정(reconnaissance)'함으로써 그에 맞추어 살아가게 하는 '오인(meconnaissance)'이라면, 그리고 그 효과가 동일하다면, 대체 그 '기원'이 다르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 적어도 라캉이나 알튀세르라면 이렇게 만분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기억이 만들어지는 특정한 방식에 대한 특권화를 뜻하는 게 아닐까? 또한 그것은 복제인간을 만들어내는, 혹은 인간을 만들어내는 '창조주'의 관점이요, 신의 관점이 아닐까? 왜냐하면 기억의 기원을 아는 것은 오직 창조주밖에, 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인 타이렐 회장이 없었다면, "내가 어째서 인간이 아니냐?"는 레이첼의 물음에 데커드는 과연 대답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보다 좀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처음의 문제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3. 표상의 외부
1) 금지와 표상
유전자 및 복제된 신체에 새겨진 여러 가지 '기록'들은 복제인간의 삶 전체를 결정한다. 로이처럼 전투용 인간으로서 정의되면, 그 기록이 새겨진 자는 전투용으로 살아간다. 프리스처럼 위안부용으로 만들어지면 좋든 싫든 그녀는 위안부로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아니 타이렐사가(자본이) 복제인간에게 부여하는 삶의 '자리'다. 복제인간은 이 안에서 사고하고 판단하며 행동해야 한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거기서 벗어나는 순간, 그(녀)는 '회수'의 대상이 된다. '금지'를 위반하여 지구로 되돌아온 복제인간들이 그렇고, 자신이 복제인간임을 알고는 회사에서 이탈해 데커드를 찾아간 레이첼도 그렇다. 그들을 찾아서 '회수'하는 일이 바로 블레이드 러너의 '일(business)'이다.
라캉(J. Lacan)이라면 여기서 '아버지의 금지'와 '법'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즉 이러한 금지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사람이, 다시 말해 아버지가 애초부터 부여하는 금지요 규칙이다. 아이는 그 규칙을 따라서 사고하며, 그 안에서 판단한다. 이처럼 사고가 가능하게 해주며, 사고 전체를 제한하는 무의식적 지반을 우리는 '표상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는 말할 줄 아는 도구"라고 했을 때, 그 역시 노예를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던 시대의 표상체계 안에 있었던 것이다. 마치 "키스해 줘"라는 데커드의 말에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는 레이첼이, '인간을 사랑해선 안된다'는, 복제인간에게 주어진 표상체계 속에 있는 것처럼.
조용히 깔리는 최초의 자막은, 영화에서 복제인간이 어겨선 안되는 근본적 금지와 규칙을 설명해 준다. 마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자려해선 안된다'가 아이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전제되는 근본적 금지인 것처럼, 그것은 복제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전제되는 근본적 금지인 것처럼, 그것은 복제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전제되는 근본적 금지다. 곧 그것은 복제인간을 다루는 이 영화의 근본적 전제조건인 셈이다.
인간과 복제인간을 가려내는 블레이드 러너의 테스터는 대상의 눈을 겨냥하고 있으며, 눈의 변화를 쫓고 있다. 여기서 눈은 표상의 통로다. 표상(Vorstellung)이란 말 자체가 눈앞에(vor) 무언가를 세우는(stellen) 것이며, 눈을 통해 받아들인 이미지들을 떠올리는 것이다.'표상체계'란 이처럼 외부에서 받아들인 이미지들을 배열하고 결합하며 조직하는 방식이며, 따라서 특정한 방식으로 표상하고 사고하게 하는 틀이다. 비유하자면 그 자체로는 퍼즐조각에 불과한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내게 해주는 퍼즐판이다.
따라서 눈의 변화를 쫓는 테스터는 표상의 상태를 감시하고 검사하는 장치인 셈이다. 또한 블레이드 러너가 던지는 질문도 그렇다. 그들은 어찌 보면 황당한 상황을 제시하고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봄으로써, 대상이 사고하고 판단하는 방식을, 즉 표상하는 방식을 검사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과 복제인간을 가려내는 블레이드 러너의 작업은 주어진 '자리'를 이탈한 자를, 표상방식에 대한 감시와 검사를 통해 찾아내는 것인 셈이다.
그러나 복제인간이 만들어질 때 그들에게 입력되는 금지와 허용의 체계는, 라캉이 생각하는 언어적인 무의식이라기보다는 신체에 직접 새겨지는 코드요 무의식이란 점에서 차라리 '생체무의식'이라 불러 마땅한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보다는 스피노자와 니체에 더 가깝고, 라캉보다는 들뢰즈나 푸코에 더 가깝다.
2) 귀환과 욕망
이 영화는 '금지'가 깨지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즉 목숨을 잃고 '회수'당하리란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제인간이 지구로 돌아오는 데서 영화는 시작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불가피하다. "왜 복제인간은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그 금지를 어기고 지구로 돌아오는 것일까?" 다시 말해 그들은 왜 '아버지의 이름'으로 정해 준 자리를 벗어나서 금지된 공간으로 돌아오는 것인가? 그들은 왜 정해진 표상체계 안에서 사고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인가?
로이 일행이 주어진 자리를 이탈하여 지구로 되돌아온 것은 '욕망' 때문이었다. 좀더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 어떻게든 수명을 연장할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욕망이 복제인간을 목숨을 무릅쓰고까지 귀환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이식된 것이 아니며 처음부터 신체에 기록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복제된 인간 내부에서 새로이 생성되는 것이다. 마치 감정이 그랬듯이. 블레이드 러너의 브라이언 반장의 말, "복제인간은 인간의 몸만 본따서 만든 것인데, 감정은 저절로 생긴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 그러나 그것은 '이미' 기록된 사고와 활동의 한계를 벗어나려 하기에 복제인간에게는 오히려 금지된 욕망이다. 좀더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은, 복제인간으로선 욕망하는 것조차 금지된 욕망이다. 이는 뒤집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뜻하기도 한다. 차이나타운에서 쇼를 하던 조라를 죽인 후, 데커드는 레온에게 붙잡힌다. 레온은 데커드를 실컷 두들겨 팬 뒤 말한다. "자, 이제 죽을 시간이야. 죽는 게 무섭지? 죽지 않고 오래 살고 싶지?" 데커드에게 하는 이 말은 사실 복제인간인 레온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욕망이 인간에게도, 복제인간에게도 모두 동일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을 법과 금지로써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던지는 반항과 조롱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레이첼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난 데커드는 자리에서 이탈했기에 추적대상이 된 그녀에게 말한다. 마치 다 이해한다는 듯이. "무섭지? 몸시 떨리지? 나도 그래, 일할 때마다" 그녀의 반문은 또다시 데커드를 당황하게 만든다. "일이라구요?" 그리곤 덧붙인다. "저도 죽일 건가요?" 오, 도대체 데커드가 무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인지! 아니, 인간이 복제인간의 공포와 욕망에 대해 무얼 알고 있다는 것인지! - 그것은 인간이 입력한 적이 없는 것이고, 그들에게 주어진 표상체계에 없었어야 할 것 아니던가? 나중에 데커드는 로이와 싸우면서, 아니 일방적으로 쫓기면서 이러한 당혹스런 질문을 또다시 받게 된다.
하지만 노예로서 주어진 삶뿐이었다면, 로이가 4년이란 수명에 목숨을 걸면서까지 아쉬워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사랑'이 끼어 있다. 프리스와 로이의 사랑은 수명을 연장할 방법을 찾도록 충동질한 중요한 요인임이 틀림없다. 이들의 사랑은 매우 희미하게만 묘사되고 있지만, 그 희미함이 오히려 복제인간의 사랑이 금지된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레이첼과 데커드의 사랑 역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다. 키스를 요구하는 데커드에게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레이첼의 행동은, 이미 자리를 이탈한 후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남아 있는 표상체계의 힘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고와 행동을, 아니 욕망 자체를 제어하는 코드인 것이다. 이 코드는 무의식적인 것이다. 레이첼은 잠든 데커드 옆에서 피아노를 치지만, 깬 데커드에게 말한다.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러나 '금지'는 "'키스해 줘'라고 말해"라는 데커드의 말로 간단하게 위반된다. 사랑과 욕망은 데커드로 하여금 자신이 고수해야 할 근본적 경계선, 인간과 복제인간 사이의 경계선을 넘어서게 한다. 레이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녀는 항상-이미 주어져 있는 금지를 허물처럼 벗어 던지고 자신의 사랑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아니, 이에 앞서 자리를 이탈하고 데커드를 찾아오는 것 역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사랑' 때문은 아니었을까?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이고자 하는 욕망, 바로 그것이 레이첼로 하여금 복제인간이란 사실에 눈물 흘리게 하고, 주어진 자리를 이탈하게 했으며, 심지어 같은 복제인간인 레온에게까지 충올 쏘게 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는 거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처음부터 항상-이미 주어져 있는 금지를 복제인간으로 하여금 위반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을 잘 다루기 위해 기억을 이식해" 주지만 결국은 잘 다루는데 실패하게 하는 요인들을 이 영화는 주목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처럼 표상을 벗어나는 욕망과 공포, '금지'를 넘어서게 하는 사랑은 단지 복제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다시 말해 인간과 복제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것임을 이 영화는 동시에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복제인간의 삶이, 그리고 인간의 삶이 라캉의 타자(l'Autre)나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같은 표상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외부성을 갖고 있음을 한 가지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한 가지 방식은 '블레이드 러너'의 존재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
3) 공포와 권력
이 영화는 죽음을 무릅쓰고 지구로 돌아온 복제인간을 다루면서 시작하지만, 모든 복제인간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즉 대개의 복제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태어날 때부터 항상-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와 반대되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이 복제인간의 귀환을 막고 있는가? 무엇이 대부분의 복제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노예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가?
이에 대해 라캉이라면 근본적 금지를 통해 구조화되는, 그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무의식(타자) 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알튀세르라면 그들에게 주어진 자리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와, 그들 각각을 그 자리를 지키는 주인으로 자리매김하는 '호명(interpallation)' 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그토록 성공적일 수 있다면, 대체 블레이드 러너라는 조직은 왜 필요한 것일까?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서 복제인간을 찾아내 '회수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이 노예로서 주어진 자신의 삶에 머물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는 것은 주어진 삶에 만족해서도, 그것이 자신의 삶이라고 동일시해서도 결코 아니다. 쫓겨 도망치다 건물의 돌기에 간신히 매달려 안간힘을 쓰는 데커드에게 로이는 말한다. "공포 속에서 사는 기분이 어때? 그게 노예의 기분이야!"
여기서도 인간은 복제인간과 다시 한 번 '자리바꿈'을 하고, 이로써 로이 혹은 복제인간의 고통과 공포는 데커드라는 거울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여기서 '노예의 기분'을 절감할 수 있었다면, 노예적인 삶에 복종하는 것이 동일시(identification)보다는 차라리 공포 때문이라는 말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다시 말해 금지 자체가 아니라, 금지를 어겼을 때 주어질 죽음에 대한 공포가 복제인간의 귀환을 막고 있는 것이다. 표상이나 법에 이러한 처벌과 공포가 없다면 대체 무엇으로 복제인간을 그들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의 자리를 이탈한 레이첼에게 건네는 데커드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자. "무섭지? 몹시 떨리지?" 이러한 공포는 그 잔혹한 힘으로 복제인간의 기억에 새겨진다. 마치 그것이 사람들에게 그러하둣이. 무의식에까지 새겨진 이 잔혹한 힘이 바로 복제인간으로 하여금 자리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복제인간을 가려내는 검사 역시 마찬가지다. 테스트하는 사람은 "단지 테스트하는 것뿐이요"라는 무심한 말로 쉽게 테스트를 시작한다. 반면 테스트를 당하는 대상에게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갈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레이첼이 데커드에게 던지는 말 "그 테스트, 당신도 당해 봤어요?" 그것은 인간인가 아닌가에 대한 검사지만, 동시에 자리를 이탈한 자인가 아닌가에 대한 감시다. 이러한 '감시의 시선'은 단지 테스터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탈한 자, 쫓기는 자 모두의 등뒤에 있다. 아니, 이탈하려는 자의 등 뒤에 있다. 감시당한다는 긴장과 공포, 그것 역시 복제인간으로 하여금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이처럼 죽음에 이르는 처벌의 공포와 이탈하려는 자를 쫓는 감시의 시선은 동일시 없이 작용하는 '힘'이요, 금지와 규칙을 강요하는 '권력'이다. 따라서 그것 역시 표상체계 외부에 있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와 감시의 공포. '동일시'만으로 복제인간의 이탈을 막을 수 있으리란 것은 얼마나 순진한 환상인지! 애당초 주어진 자리를 할당했음에도, 더구나 그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하는 복제인간을 쫓고 죽이는 블레이드 러너라는 장치가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요인이 오히려 표상이나 동일시, 질서의 전제가 되고 있음을 본다.
4. 안티-오이디푸스, 혹은 '신의 죽음'
1) 복제인간과 아버지
귀환한 복제인간들은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을 구상하고 만들어낸 타이렐 회장이다. 아버지를 찾아가기 위하여 그들은 세바스찬에게 접근한다. 쓰레기 더미에 누워 자는 체하는 프리스. 이때 복제인간 프리스는 세바스챤에게 접근하기 위해 인간의 흉내를내는 셈이다. 그것은 아마도 쓰레기 더미 속에 버려진 인간에 대한 풍자일 것이다. 커다란, 그러나 낡고 텅 빈 세바스챤의 집, 거기에 홀로 사는 세바스챤 역시 버려진 인간의 모습이다. 복제인간의 유전자 설계라는 고도의 과학적인 직업과 낡아빠진 세바스챤의 생활조건이 크게 대조를 이루면서, 과학과 삶이 괴리되고 분리된 미래를 다시 한 번 묘사한다. 과학만이 인간의 삶을 발전시키리라는 근대적 믿음을 해체시키고 싶은 것일까?
타이렐의 방. 로이는 세바스챤의 체스게임을 훈수함으로써 그 금지된 방에 들어간다. "이제야 나를 찾아왔군." 마치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타이렐의 말은 로이의 대답과 잘 어울린다. "창조주 만나기란 쉽지 않더군요." '돌아온 탕아'와 아버지인 신이 대화를 했다면 이런 식이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분명한 건 이 방에서 타이렐과 로이는 '신'과 그의 '피조물', 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점이다.
이는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움과 당연함은 오히려 조금은 당혹스런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타이렐이 보기에 로이는 주어진 자리를 이탈한 자요, 자신을 향해 언제 총질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자이기 때문이며, 로이가 보기에 타이렐 회장은 그에게 단지 짧은 수명의 노예적 삶만을 준 사람이며, 그를 '회수'하려는 회사의 회장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헐리우드 영화라면, 의당 위협이나 격투가 일어날 만한 이 조우에서, 양자는 너무도 태연하게, 마치 오랜만에 만난 부자처럼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의 '자연스러움'은 근원적으로 오이디푸스적인 관계의 '자연스러움'에 기초하고 있다. 로이는 자신을 설계하고 창조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수명 역시 쉽게 연장해 줄 능력이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서 타이렐을 찾아간다. 마치 창조주라면 모든 능력을 가진 완전한 존재기에 어떠한 문제도 해결해 주리라고 믿는 우리 인간들처럼. 또한 마치 아버지라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리라고 생각하는 아기처럼. 따라서 "더 살게 해주세요"라는, 거친 로이에겐 전혀 안 어울리는 대사에 "아버지"라는 말 한 마디가 추가됨으로써 그것은 매우 자연스런 대사가 된다.
한편 타이렐 회장은 위협처럼 숨어서 찾아온 로이에게, "이제야 나를 찾아왔군"이란 한 마디 말로써, '탕아'를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의 역할, 신의 역할을 한다. 이 한 마디로 타이렐은 로이가 자신에게 부탁하고 기도하러 온 존재임을 상기시키며,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따라서 자신에게 거역하거나 자신을 위협하려 해선 안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너는 돌아온 탕아야.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는 말이 여기에 추가되면, 대체 누가 이들의 관계를 의심할 수 있을 것인가?
역으로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오이디푸스적 관계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에선 자신의 창조자인 '아버지'의 힘과 전능성에 대한 믿음을 축으로 하고 있다. 그것을 정신분석학의 개념에 따라 "남근(Phallus)"이라고 표현하든, 기독교의 용례에 따라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든 간에, 그것은 표상체계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중심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어쩌면 표상첵계가 만드는, 인간이나 복제인간을 그 안에 머물게 하는 일종의 무의식적 환상이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로이로 하여금 아버지에 대해, 신에 대해 복종해야 할 위치에 있음을 일깨우며, 그것을 통해 로이의 삶을 지배하려 한다.
이제 타이렐 회장은 말한다. "네 생명은 만들 때 정해진 것이고, 그것은 변경할 수 없어."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아." 이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거기에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라는 명령이다. "너는 '돌아온 탕아'야"라는 호명은, 타이렐 자신이 로이에게 그런 명령을 할 수 있는 존재며, 로이는 그에 따라야 할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오이디푸스적 관계는 주어진 자리를 이탈한 자, 근본적 금지를 벗어난 자를 다시 복종의 '대지(Terre)'로 묶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2) '신의 죽음'
로이가 아버지를,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갔던 것은,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타이렐이라면 가지고 있으리라는, 그라면 줄 수 있으리라는 환상 때문이었다. 이런 한에서 그는 아버지의 상징적 공간 안에, 오이디푸스적 공간 안에 있는 셈이다. 그 상징적 공간에서 아버지는 그를 다시 복종하는 존재로, 농{로 포섭하려 한다.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아!"
아들인 로이의 욕망은, 생명을 연장해 달라는 그의 요구는 좌절된다. 그것은 타이렐 회장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문제기에, 즉 최선을 다해 보았으나 그것을 극복할 방법이 현재로선 없다는 아버지의 말은 어떻게 보아도 아들의 요구에 대한 '거절'은 결코 아니다. "현재로선 네가 최고품이야!" 이처럼, 치밀한 금지의 망을 뚫고 자신을 찾아온 '탕아' 로이에 대해, 다시 말해 자신이 창조한 제품에 대해 긍지와 애정을 표시한다.
"네 생명은 만들 때 정해진 것이고, 그것은 변경할 수 없다"는 신의 음성은, 오이디푸스적 공간 안에서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라"는 명령에 숙명적인 불가피성을 제공하기에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이에게 그 말은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아버지는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줄 수도 없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즉 아버지의 무능, 신의 무능력이다. 단지 무력한 복종과 죽음만을 요구할 뿐인 무능력. 여기서 오이디푸스적 환상은 붕괴한다.
로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이 무력한 복종과 죽음을 거부한다. "충실히 살라"는 타이렐의 말을 로이는 비통한 목소리로 반사한다. "당신은 충실히 살았겠지요?" 하지만 이 말의 의미는 타이렐에게(또 관객인 우리에게도) 즉각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숙명적인 권고와 함께 애정을 표시하는 아버지에게 키스로서 화답하며, 로이는 '아버지'를 죽인다.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리며. 살부(殺父)의 고통일까, 아니면 절망의 눈물일까?
결국 "당신은 충실히 살았겠지요"란 말의 의미는 "당신은 이제 죽을 때가 되었지요"였던 것임이 소급적으로(retroactively) 드러난다.이는 타이렐의 앞선 발언을 타고 다시 로이에게 반사된다.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아"라는 타이렐의 말이 뜻하는 바가, "살다"라는 기표와 '죽음'이란 기의의 이러한 이중의 반사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삶과 죽음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양자가 서로의 등에 업혀 전달되는 이 과정은 사실 삶이란 단어를 통해 죽음이 은폐되고, 필연을 통해 명령이 은폐되며, 사랑을 통해 복종이 은폐되는 과정이다.
타이렐은 자신이 보낸 메시지의 의미를 죽음에 부닥쳐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반면 이미 죽음에 부닥치고 있던 로이는 '살아'라는 아버지의 말에서 이미 그 의미를 이해한다. 그것은 숙명적인 비극인 것이다. 아버지 / 신은 주어진 질서 속에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즉 다른 수가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여전히 최고의 가치며 숙명적 가치임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리를 이탈한 자를 다시 주어진 표상체계 안으로, 주어진 질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여기서 비극적 운명은 주어진 것에 복종할 이유가 된다.
그러나 로이에게 "어쩔 수 없음"은 아버지나 신이 무력함의 증거요, 그것이 더 이상 최고의 가치를 갖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무력함이 드러난 순간, 아버지는, 그리고 신은 이미 죽은 것이다. 로이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비극적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다. 즉 어쩔 수 없다는 것은 맏아들이지만, 어쩔 수 없으니 '주어진 삶을 살라'는 명령은 거부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아버지에 기대지 않을 것이며, 창조주를 찾아 나서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로이가 아버지이자 신이기도 한 타이렐을 죽이는 것은 그가 이미 죽었음을, 더 이상 명령하고 복종시킬 능력이 없음을 확인해 주는 절차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이미 죽은 가치에 복종하길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요, 단지 운명을 이유로 죽은 신을 살리는 것을 분명하게 거절하는 것이다.타이렐을 죽이는 이 장면이 충격적인 것은, 대개는 거기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긍정하는 것)을 운명에 '복종하는 것'과 동일시하기 때문이고, 또 대개는 바로 거기서 신의 부활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위치가 중심적인 만큼 정신병에 가깝고 신에 대한 믿음이 거대한 만큼 절망적이며, 로이를 사로잡은 주어진 질서와 가치가 강력한 만큼 혼돈스럽다.
살부(殺父)의 행위가 신이 이미 죽었음을 확정하는 것이라면, 로이가 창조주요 아버지를 죽인다는 사실 자체보다 차라리 더 상징적인 것은 그가 아버지의 '눈'을 찔러 죽인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분명히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패러디(parody)한 것이다. 거기서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자임이 분명해졌을 때,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른다. 근본적인 질서를 이탈한 자기의 범죄를, 자신의 표상의 통로를 말살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징벌한다. 마치 자신의 (잘못된) 표상체계를 해체해 버리려는 듯이. 반대로 로이는 아버지의 눈을 찌름으로써 아버지를 죽인다. 마치 아버지가, 그리고 신이 이미 죽었다면, 이제 그것을 중심으로 짜여진 표상체계는 파괴되어야 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조직된 가치들은 해체되어야 마땅하다는 듯이.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 죽음의 의미라는 듯이.
모든 가치의 근본적 전복을 뜻하는 이러한 '사건'이야말로 니체가 '신의 죽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제 로이는 아버지의 상징적 공간에서, 오이디푸스적 공간에서 벗어난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적 구조에 의한 지배의 근본적 전복을 뜻하는 이러한 사건을 '안티-오이디푸스'라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으로 요약하면 어떨까?
5.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인간의 긍지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서 인간과 복제인간이 만난다. 거기서 양자는 비교되고 대조된다. 하지만 그 대조의 결과는 대부분 인간과 복제인간(비인간)의 경계를 흐리는 것이다. 그것을 흐리는 방식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복제인간이 갖는 어떤 특징이 인간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갖는 어떤 특징이 비인간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전자가 주로 양자의 동일성을 보여줌으로써 경계를 흐린다면, 후자는 주로 인간과 비인간의 위치를 대조하거나 반전시킴으로써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허문다.
앞의 방법을 위해 가장 자주 사용되는 것은 '거울놀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법이다. 이는 거울의 반사작용을 이용한 놀이인데, 이미 언급된 장면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데커드의 멱살을 쥔 레온의 말, "죽는 게 무섭지? 죽지 않고 오래 살고 싶지?" 이 말은 데커드에 반사되어 다시 레온에게 - 사실은 관객에게 - 되돌아온다. 죽음 앞에 매달린 데크드에게 로이가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공포 속에 사는 기분이 어때? 그게 바로 노예의 기분이야!" 복제인간의 공포와 소망이 인간의 거울에 비추임으로써 그 동일성이 스크린 밖으로 반사되어 나온다.
이 '거울놀이'를 통해 처음부터 상품으로 만들어진, 따라서 인간과 다른 존재의 공포와 고통이 인간에게 전달된다. 이는 기계나 식물처럼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가 느끼는 감각이나 고통을 인간에게 전달하는데 매우 적적한 방법이다. 특히 복제인간과 인간이 사실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거울놀이는 매우 효과적이다. 비슷한 거울놀이가 자주 반복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반면 인간과 복제인간은 무수히 반복하여 대비된다. 인간임을 확인받고 싶지만, 결국은 아님을 알고 눈물을 흫히는 레이첼. 그리고 그녀의 질문에 무정하고 성의 없게 그녀가 복제인간임을 설명하는 데커드의 태도. 자리를 이탈한 레이첼에게 하는 데커드의 말, "몹시 떨리지? 나도 그래, 일할 때마다." 그러나 레이첼의 반문, "일이라구요?" 당혹해 하는 데커드. 쇼를 하고 나온 반라(半裸)의 여인(조라)에게 총질을 해대는 데커드. 여기서 무장하지 않은 반라의 여인과 총질해대는 남자는 너무도 커다란 대비를 이룬다. 그 대비가 선명한 만큼 총질은 잔인해 보인다. 프리스의 죽음 역시 그렇다. 무장하지 않은 여인과의 싸움, 총질에 쓰러져 고통에 못 이겨 격렬하게 발버퉁치는 프리스의 죽음은 너무도 참혹하다.
그런 만큼 로이가 분노에 차서 던지는 힐난은 매우 정당해 보인다. "무기도 없는 상대를 죽여? 아주 잔인하군", "여자만 죽이나?" 그것은 '인간'이란 '기원'이 제공하는 거울을 깨뜨리기에 충분히 강력하다. 이에 반해 로이는 데커드에게 말한다. "도망갈 여유를 주겠어." 도망치는 데커드. 그 앞에 튀어나오는 로이. 때리고 도망치는 데커드와 로이가 다시 대조된다. "때리고는 도망가? 비겁한 꼴에 비참한 꼴이군!"
이같은 대비를 통해 데커드는 더 이상 갈 곳 없는 궁지에 몰린다. 아니, 로이는 데커드를 통해 인간을 궁지로 몰아간다. 반라의 무장하지 않은 여자에게 총질을 해대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꼴을 정당화하기에 '인간'이란 '기원'을 상기시키는 것은 너무나 무력하다. 그러나 데커드는 거기서도 한참 더 밀려난다.
잠시 말을 돌리자면, 이 영화 전체에서 감독은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 함정을 파 놓는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지닌 모든 관객을 겨냥한 것이다. 최초의 '금지'에 관한 자막에 이어 첫 장면부터 검사관에게 총을 쏘는 복제인간(레온)을 등장시킴으로써,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복제인간을 처벌하는 블레이드 러너의 시각에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만든다. 은퇴한 데커드에게 다시 한 번 나설 것을, 거절한다면 죽을 수도 잇다고 강요하는 브라이언 반장에 비해 유능하고 진지한 데커드는 동일시가 정당하다는 확신을 갖도록 해준다. 어느새 관객은 데커드의 시선을 따라 사물을 보게 된다. 레이첼과의 사랑이 여기에 추가되고 나면 데커드의 행동이 정당한 것임을 의심할 관객이 대체 어디 있을 것인가?
앞서 말한 거울놀이나 대조, 일시적인 당혹도 이 대세에 의해 지워진다. 더구나 그것은 금지를 어기고 이탈한 비인간을 '인간'의 이름으로 처벌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데커드와의 동일시가 결정적으로 균열되는 지점이 있다. 앞서 본 로이의 호통이 그것이다. "무기도 없는 상대를 죽여? 아주 잔인하군! 여자만 죽이나?" 이 분노의 호통은 데커드와 관객의 눈을 가리고 있던 거울을 단숨에박살내 버린다. '인간'이란 이름의 환상이 무참히 깨어진다. 이제부터 영화의 주인공이 바뀐다. 이제 데커드와 관객은, 아니 인간 전체가 복제인간 로이에게 모욕을 당하며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데커드와 함께 관객도 빌딩의 돌기에 간신히 매달린다. 발 아래 아득한 죽음이 있다. 그런데 그 죽음은 떳떳하고 멋있는 영웅의 죽음이 아니라, 부끄럽고 수치스런 '패자'의 죽음인 것이다. 이것은 벼랑 끝에 매달린 인간의 '인간성'이다.
그러나 '인간'의 패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죽음의 문 앞에서 데커드와 관객들은 복제인간 로이에 의해 구조된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죽이려던 인간조차 용서하고 구해 주는 '비인간'과, 자신이 죽이려던 '비인간'에 의해 구조된 인간이 다시 한 번 날카롭게 대비된다. '인간'이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초라함! 데커드의 표정은 지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참담한 것이라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관객들 역시 이 참담함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더 갈 곳 없는 '인간의 궁지!' 함정도 이 정도면 잔인할 정도로 깊이 파 놓은 함정이다.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는 이 함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가치, 혹은 '인간성'의 가치에 대해 다시 사고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가치가 자명하고 당연한 것일수록 그 궁지는 견딜 수 없고 당혹스런 것이기 때문이며, '인간주의'는 의당 좋은 것이요 훌륭한 것이라는 생각이 강력한 만큼 그 궁지는 파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가 그렇듯이, 인간이라는 가치는 인간이 행하는 가치평가(evaluation)를 통해 만들어진다. '인간'이란 차라리 그 가치평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다양한 가치들의 근원이다. '인간'이라는 이 가치평가의 중심은, 인간이 자신의 질서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만물에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으로 분할하며, 나아가 인간주의란 이름으로 비인간적인 것의 억압과 배제를 정당화한다. 바로 이런 뜻에서 "모든 가치의 근원은 인간"이다.
그런데 로이는 데커드를 용서하고 구해 줌으로써 두 번째로 '인간'을 죽인다. 첫 번째가 인간이란 기원으로 인해 당연시된 가치를 파괴하는 '일갈'을 통해서였다면, 두 번째는 비인간이란 기원으로 인해 결코 상상하기 힘들었던 '용서'를 통해서였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의 '비인간성'과 비인간의 '인간성'을 통해 로이는 인간이란 기원으로 소급되는 모든 가치의 근원을 해체한다. 그것은 이제까지 모든 가치의 근원이자 중심이었던 '인간'의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광대의 죽음을 앞에 둔 짜라투스트라의 목소리를 닮았다. "인간으로 생존한다는 것은 끔찍한 것이고, 그것은 결국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의 광대조차도 숙명적인 사건이 된다.
2) "인간보다 인간답게!"
인간의 '비인간성'과 비인간의 '인간성', 이것이 바로 '인간'이 죽었을 때, '인간주의'란 환상이 깨졌을 때, 스크린 앞의 우리에게 나타나는 역설이다. 그렇다면 "인간보다 인간답게!"라는 타이렐사의 슬로건은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보드리야르(J.Baudrillard) 말대로 "모방된 것이 실물보다 더 실물답다"는 새로운 시대를 예언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대체 무엇이 모방된 것이고, 무엇이 (모방 안된) 실물일까? 예컨대 '이식된' 기억은 모방된 것이고, '경험된' 기억은 실물인 것인가?
로이는 레온과 함께 생명장치를 찾기 위해, 타이렐사에 '눈'을 납품하는 중국인 노인을 찾아간다. 그들이 복제인간임을 안 노인이 말한다. "네 눈도 내가 만들었어." 로이가 반문한다. "영감, 이 눈으로 무얼 봤는지 알아?" 데커드를 죽음에서 구해 준 로이는 조용하게 말한다. "난 네가 상상도 못할 것을 봤어. 오리온 전투에도 참가했었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보았지. 이제 그 기억이 모두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야." 멈추듯 고개를 떨구는 로이, 빗물에 뿌옇게 흐려진 화면은 잠시 멈춤으로써 영웅의 죽음을 애도한다. 빗속에서 고개를 떨군 모습이 너무나도 슬퍼 보인다. 로이가 잡고 있던 비둘기는 끊어지듯이 간신히 연결되는 정지화면을 타고 날아오른다. 로이의 승천일까, 아니면 로이가 그토록 안타까워한 기억의 소멸일까? 데커드의 눈물.
로이의 저 기억을 우리는 보드리야르의 말에 따라 '모방'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너무도 빨리 뒤쫓아온 죽음을 넘어서기 위하여 '창조주'를 만났던 기억, 사랑하는 동료와 연인의 죽음의 기억, 복제인간이 가진 이 기억들을 과연 '모방된 것'이라고 해도 좋은 것일까? 복제인간이 기억과 사진을 소중하게 여기고 기억의 소멸에 안타까워 하는 것을 모방에 대한 '모방된 애정'이라고 한다면, 모방 외부에는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차라리 자신의 삶의 기록에 대한 애정, 혹은 아직 살아 있음에 대한 애정, 나아가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 자체가 아닐까? 어쩌면 삶이 짧은 만큼 그들에겐 더욱 더 소중했던 삶의 기억들.
한편 그들의 삶이 단지 기억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억의 '너머'에 있다. 삶에 대한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 몸을 본 따 만든 뒤에 저절로 생긴다는 감정과 눈물, 복제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랑, 그리고 대결과 분노를 넘어선 용서. 그것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 외부에서 새로이 생성된 것이며, 모방되고 입력된 한계를 넘어서 있는 요소들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결코 '모방된 것'이 아니라 모방된 것 외부에서 새로이 생성되는 것이다. 바록 그것이 복제인간으로 하여금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선을 넘어서게 했던 것이며, 결국은 그들은 "인간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들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로이의 외침이 오랫동안 귓가에 맴도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복제인간이라는 상품으로 태어났든, '인간'으로 태어났든, 혹은 노예로 태어났든, 주인으로 태어났든, "인가노다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들이 생성된다면, 그들을 인간이라 불러서 안될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그들을 모방품이라 하면서 실물과 대비하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선택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따.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복제인간은 상품으로 만들어진다는 생각처럼, 탄생과 기원의 차이를 상기시킴으로서 '인간됨'의 영역을 항상-이미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안이함은 이제 깨끗이 포기하자. 특정한 관계하에서는 인간조차 상품으로서 태어날 수 있다는 쓰린 기억을 인류의 역사는 너무도 분명히 간직하고 있지 않는가! 또 인간과 복제인간을 분류하는 어떤 선험적인 기준을 찾아내려고 애쓰지 말자. 인간조차 비인간으로 만들고, 복제인간조차 인간으로 만드는 요소들이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차라리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문제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과 복제인간의 경계를 흐리는 동일성을 통해서, 혹은 인간의 이중의 죽음을 통해서 누차 확인한 것이다. 욕망과 공포, 감정과 눈물, 그리고 사랑과 용서. 이것이 비인간조차 인간보다 인간답게 해주었던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또한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요인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요소들이 '인간'의 죽음을 통해, '인간주의'라는 가치의 파괴를 통해 드러난다는 이 역설을 '반인간(주의)적 인간주의(anti-humanistic humanism)'이라고 부른다면 어떨까? 그것은 '인간'을 넘어선, 이전의 모든 것에 가치를 제공하던 근원을 해체함으로써 창조되는 새로운 가치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그것은 결코 '인간'이란 기원에 다시금 충실하려는 또 하나의 '인간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인간'의 무리에서 많은 자들을 끌어내고, '인간'이란 가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창조의 시도라고 해두자. 거기에서 "인간이라는 암흑의 구름을 깨뜨리고 번쩍이는 번개"를 본다면 지나친 것일까?
결국 "인간보다 인간답게" 해주는 이 요소들은, 때로는 중진 자리를 이탈하여 새로운 삶을 찾아 '타루'하게 하는 힘이었고, 때로는 주어진 대결의 장을 '탈주'하여 적대자조차 용서할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다시 말해 봊게인간들로 하여금 주어진 비인간의 자리를 벗어나, 아니 '인간'의 질서를 벗어나 '탈주'하게 해준 힘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차라리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탈주하는 자만이 인간적이다"라고.
6. 탈주와 남근
전락한 '인간' 데커드의 운명, 그것이 이 영화의 에필로그다. 복제인간과의 긴장이 사라지면서 비인간의 극으로 밀려난 데커드. 그러나 로이가 데커드의 거울을 깨줌으로써 데커드가 보게 된 것은 단지 자신의 절망적인 자리만은 아니었다. 로이의 용서와 죽음은, 아니 로이의 '탈주'는 데커드에게 자신이 서 있는 저 절망적인 자리를 벗어나 '탈주'하도록 자극한다. 레이첼이야말로 '비인간적 인간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이란 가치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줄 유일한 희망임을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혹시나'하고 안간힘을 다하듯 조심스레 이불을 들추는 데커드의 긴장된 손은, 그 희망의 간절함과 위태로움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제 남은 것은'탈주'다. 로이의 탈주, 레이첼의 탈주, 복제인간의 탈주는 이제 데커드로 하여금 탈주의 험로에 나서게 한다. 그는 '인간'의 무리에서 이탈하게 된다. 탈주의 접속들(connections)! 레이첼의 발끝에 걸리는 유니콘 종이인형은 탈주자에 대한 감시의 시선과 죽음의 위협이 항상-이미 바로 옆에 따라붙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것은 이전에 데커드를 추동해 온 '남근(유니콘)의 의미작용'이, 레이첼과의 탈주로 인해 해체되리란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데커드는 이제 '인간'의 표상체계가 허용하지 않는 근본적인 금기를 깨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남근이라는, 아버지의 상징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중심기표가 이번에는 아주 가볍게 밟힌다. 남근은 한갖 종이인형에 불과했던 것이다! 오이디푸스를 벗어나는 이 과정에서 그들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다만 중국인 블레이드 러너의 말을 상기할 뿐이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레이첼과 함께. 이로써 그는 '인간'을 넘어선다. 그는 이제 탈주하는 자,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 프로덕션 노트 === (내지 해설)
SF 장르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리틀리 스콧 감독의 걸작
<블레이드 러너>는 숱한 철학적 문제의식으로 뒤덮인 SF 영화의 걸작으로 알려져있다. 인간이 만든 첨단 문명과 과학의 한계, 미래 세계의 디스토피아를 황량하게 묘사했고 그로 인한 환경 오염과 모순적인 사회 구조가 암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도 진지하게 탐색한다.
특히 '기억의 이식'이라는 테마는 이후 많은 SF 영화와 <공각기동대>와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인간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리플리컨트(복제인간)을 만든다는 창조의 영역을 앞세우며, 여전히 인간들도 해결하지 못한 불멸의 꿈을 리플리칸트의 입장에서 절묘하게 다루고 있다.
2019년 로스엔젤레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시각적인 이미지였다. 리틀리 스콧은 약 40여 년 뒤의 미래를 밝고 활기찬 미래가 아니라 어둡고 생명이 다한 미래로 묘사했다.
고층 건물이 우뚝 서있는 도시지만 환경오염으로 스모그가 자욱하고 산성비가 수시로 내린다. 인간은 인조인간인 리플리컨트와 공존하지만 리플리컨트가 더 인간적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영화의 명장면은 주인공 해리슨 포드보다 악연이었던 룻거 하우어의 리플리컨트 연기에서 발견된다.
그가 리플리컨트에게 주어진 4년이라는 수명이 다하는 순간 빗속에서 독백하는 장면은 영화의 주제의식을 함축해 놓았다.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느꼈지만, 그 모든 순간들은 시간속에서 사라지겠지..빗물속의 내 눈물처럼..이제 죽을 시간이야" 상대적으로 해리슨 포드는 리플리컨트를 살해하는 경찰 데커드로 출연한다.
그러면서 레이첼이라는 인간과 구별이 안되는 리플리컨트를 사랑하는 모순을 자행한다. 영화 개봉 이후 데커드도 리플리컨트인가라는 의문이 계속 제기되었다. 이 의문은 2000년 감독이 인정하면서 해소되었지만, 이후 해리슨 포드가 반대 의견을 제시하면서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다.
영화가 개봉된 지 10년 후에 리들리 스콧 감독은 새로운 편집본을 내놓았다. 극장판보다 러닝타임이 9분 정도 줄어든 감독판은 개봉 당시 혹평을 했던 평론가들도 극찬을 할 수밖에 없는 걸작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감독판에서 바뀐 것은 결말과 회상씬이 추가된 것, 그리고 일부 폭력적인 장면이 삭제된 것 등이다. 1982년 오리지널 극장판에서는 초원을 달리는 차 안의 데커드와 레이첼을 비추며 레이첼이 4년이 아닌, 인간과 같은 정도의 수명을 가진 리플리컨트로 제작되었다는 데커드의 독백으로 끝맺는다.
하지만 감독판에는 데커드의 독백이 일체 없고 경찰서로 데커드가 연행할 때 사용하던 스피너의 비행신이 늘어났다. 그리고 리플리컨트의 사진을 분석할 때 데커드가 유니콘의 꿈을 꾸는 장면이 추가되었으며, 유럽판에 있던 타이렐 사장의 눈이 찌그러지고 피가 터져 나오는 부분 등의 폭력신은 모두 삭제되었다.
원작은 SF 작가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인데, 많은 부분이 리들리 스콧 감독 자신의 영감으로 채웠고, 특히 '리플리컨트'라는 명명은 새롭게 창작되었다. 의도적으로 삽입된 정교한 기계와 포스트모던한 건축 세트는 유능한 시각 디자이너 시드 메드의 공이 매우 크다.
또한 그리스 출신의 반젤리스가 담당한 영화음악은 일렉트릭 테크노 음악의 음울하고 묘한 분위기로 영화의 완성도에 크게 기여한 걸작 명반으로 손꼽힌다. 82년 당시 개봉시에는 지나치게 암울한 미래에의 비전을 내세웠다는 이유로 스필버그 감독의 <이티>에 밀리며 흥행에 참패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광적인 팬들이 끊임없이 재평가를 시도했고, 급기야 지금은 이 영화를 빼놓고는 SF 영화를 이야기할 수 없는 위치에까지 왔다.
=== 줄거리 === (네이버 영화)
(21세기초 타이렐사(The Tyrell Corporation)는 리플리컨트(Replicants : 복제인간)라고 알려진 사실상 인간과 동일한 진보적 넥서스 단계(Nexus phase)의 로봇 진화(Robot Evolution)를 이뤘다. 이중 넥서스 6(Nexus 6 Replicants)은 힘(strength)과 민첩성(agility)에 있어선 그들의 창조주인 유전공학자들(the genetic engineers)을 능가했고 지능(inteligence)에 있어선 최소한 그들과 대등했다. 복제인간들은 다른 행성(Off-world)들의 식민지화에 이용된 노예였는데, 어느 넥서스 6 전투팀(a nexus 6 combat team)이 식민 행성에서 유혈 폭동을 일으키자 지구로 잠입한 복제 인간들에겐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특수경찰대(special police squads)인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Units)는 복제인간들을 사살하라는 임무를 하달 받는다. 그 임무는 사형 집행(execution)이 아니라 해고(retirement)라고 불리웠다.)
2019년 11월 LA. 400층이나 되는 높이의 건물들로 가득 찬 거리와 끊임없이 번쩍이는 레온등과 광적 행위가 만발한 도시, 지구의 파괴와 엄청난 인구증가로 인해 다른 행성을 식민지 이주가 본격화된다. 한편, 2주전 남자 셋, 여자 셋이 식민행성에서 탈출, 23명을 죽이고 우주선을 탈취하여 지구로 잠입한다. 이들은 외견상 진짜 인간과 구별이 불가능한 복제 인간 리플리컨트. 때문에 수명이 4년으로 제한되어 있다.
두목격인 전투용 로이 베티(Roy Batty : 룻거 하우어 분)와 역시 전투용 리온(Leon : 브라이언 제임스 분), 살인 훈련을 받은 조라(Zhora : 조안나 캐시디 분), 식민행성 군인 클럽 소속의 위안부 프리스(Pris : 다릴 한나 분)가 그들이다. 이들은 '타이렐'사에 침입하려다 한 사람이 죽고, 직원으로 위장한 리온이 조사중이던 블레이드 러너 홀든(Holden : 모간 폴 분)을 살해하고 도주한다. 이에 경찰(Captain Bryant : M. 에머트 월쉬 분)은 노련한 전문 블레이드 러너인 데커드(Deckard : 해리슨 포드 분)를 호출하는데...
[스포일러] 블레이드 러너는 고도의 감정이입과 반응 테스트를 통해 인간과 복제 인간을 구별할 능력을 지닌 경찰. 타이렐사를 방문한 데커드는 타이렐 박사(Tyrell : 조 터켈 분)가 자신의 조카의 기억을 이식해 만든 미모의 레이첼(Rachael : 숀 영 분)을 만나는데, 몇가지 질문 테스트를 통해 그녀가 복제 인간임을 알아낸다. 증거를 포착해 수사를 해 나가던 데커드는 뱀쇼를 하는 조라를 사살하는데 성공하지만, 레온의 공격으로 위험에 빠진다. 이때 레이첼이 나타나 레온을 사살하고, 두 사람은 어느덧 사랑에 빠진다.
한편, 프리스는 조로증에 빠진 유전 과학자 세바스찬(J.F. Sebastian : 윌리암 샌더슨 분)에게 접근, 로이와 함께 타이렐 박사를 만나는데 성공한다. 4년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안 로이는 분노하여 타이렐 박사와 세바스찬을 살해한다. 이에 데커드는 세바스찬의 아파트에서 프리스를 발견하고 사살하지만, 이때 들이닥친 강력한 로이에게 쫓겨 고공의 건물 난간에 매달린다. 위기의 순간 데커드를 살려주고 수명을 마치는 로이. 그의 모습을 통해 데커드는 복제 인간의 처절한 아픔과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는다. 마침내 레이첼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하는 데커드...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1.02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