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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덕(安孝德) : 고려문과 급제, 1212년 서해부 서기(西海府書記)
박인석(朴仁碩, 1143~1212)의 묘지명(墓誌銘)을 통해 그의 외손자 안효덕(安孝德)이 과거에 급제하여 서해부 서기(西海府書記, 현재 황해도)로 부임했다는 기록을 통해, 고려문과에 급제했고, 1212년 경 서해부 서기(西海府書記)에 부임해서 관직에 있었던 안효덕(安孝德)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고, 고려문과 방목을 확인해 보니 고종(高宗)때 시년 미상으로 급제한 사람으로 안효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또한 박인석(朴仁碩)은 광주 연창군(廣州 延昌郡) 사람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1212년 당시 현재 죽산(竹山)의 별호인 연창군(延昌郡)은 광주(廣州)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어머니도 안성군대부인 이씨(安城郡大夫人 李氏)라고 하는 것 등등으로 보아, 가까운 지역 내 혼인을 했다고 가정하면, 안효덕은 광주안씨 또는 죽산안씨 일 것도 같지만, 그의 본관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1212년 경 고려문과에 급제하고 서해부 서기(西海府書記)의 관직에 있던 본관 미상의 안효덕(安孝德)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인석(朴仁碩, 1143~1212)의 묘지명(墓誌銘)을 찬한 시기나 사람은 알수 없지만, 1212년 졸년 무렵에 작성된 것인듯하다.
박인석(朴仁碩, 1143~1212)
고려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죽산. 자 수산(壽山). 호 회곡(檜谷). 8세 때 세자(世子)의 학우가 될 만큼 기사(騎射)에 뛰어나고 독서를 즐겼다. 음보로 팔관보판관(八關寶判官) 겸 우군녹사(右軍錄事)에 이어,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를 지냈다. 명종 초 벼슬을 버리고 북원(北原, 원주)에 은거하자, 모함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죽주(竹州) 유배로 그쳤다. 그 뒤 세상과 등지고 있다가, 1197년(명종 27)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등용되었다. 신종이 즉위한 뒤 통사사인(通事舍人) 감찰어사(監察御史)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내고, 경주에서 초적(草賊)의 반란이 일어나자 초토판관(招討判官)으로 대장군 김척후(金陟侯)를 따라 전공을 세웠다. 그 뒤 어사잡단(御史雜端)이 되어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대부소경(大府少卿)에 삼사부사를 겸하였다. 호부상서에 이르러 고령으로 사임하였다.
박서(朴犀, 생몰년 미상) : 음성박씨, 고성박씨(철성박씨)의 시조라고 하며, 일부 후손들은 죽산박씨라고 한다고 함. 고려의 무신·재상. 본관은 죽주(竹州: 지금의 竹山).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인석(仁碩)의 아들이다. 1231년(고종 18)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는데, 그해 9월 몽고의 장수 살리타이(撒禮塔)가 철주(鐵州: 지금의 鐵山)를 거쳐 구주(龜州: 지금의 龜城)에 이르자, 삭주(朔州)의 분도장군(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 정주(靜州: 지금의 義州 부근)의 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 정주·삭주·위주(渭州: 지금의 渭原)·태주(泰州: 지금의 泰川)의 수령(守令)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구주에 모여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 몽고병이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하자 기습작전을 써서 적을 물리쳤으며, 적이 인질을 성내로 보내어 항복을 권하기도 하고 정기(精騎)로써 성을 강습하기도 하였다. 또, 누거(樓車)와 목상(木床)을 만들어 거기에 병사를 태워 성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물리쳤고, 대포차로써 성을 맹렬히 공격하자 포차(砲車)를 쏘아 돌을 날려 적을 물리쳤다. 또한, 사람의 기름으로써 섶을 적셔 두텁게 쌓아놓고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자 물에 갠 진흙을 던져 불을 끄는 등 임기응변으로 분전함으로써 1개월 동안 온갖 수단을 다하여 공격하던 적으로 하여금 “이 성은 적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하니 하늘이 도우는 바요 인력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포위를 풀고 물러나게 하였다. 그해 12월 다시 몽고병이 구주성을 공격하자 포차를 쏘아 돌을 날려 적을 물리쳤다. 몽고 장수 살리타이가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는 것을 거절하자 또다시 몽고군이 운제(雲梯)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므로 대우포(大于浦: 大刀大兵)로써 맞아 쳐서 모두 깨뜨려 부수었다. 이때 몽고의 한 늙은 장수로 하여금 “내가 어려서부터 종군하여 천하의 성지(城池)를 공전(攻戰)하는 것을 두루 보았으나, 일찍이 이렇게 공격을 당하고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보지를 못하였으니, 성중(城中)의 제장(諸將)은 후일에 반드시 모두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라고 감탄하게 하였다. 1232년 1월 후군지병마사(後軍知兵馬事) 최임수(崔林壽), 감찰어사(監察御史) 민희(閔曦)가 구주성에 이르러 “나라는 이미 회안공(淮安公)을 보내어 몽고병과 강화를 하였고, 우리 3군(軍)도 모두 몽고에 항복을 하였으니 너의 주(州)도 싸움을 그치고 항복하라.”라고 하므로 서너 차례 거절한 뒤 국법을 어길 수 없어 항복하였다. 그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죽주에 있다가 다시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출처: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363 卒大中大夫戶部尙書朴公墓誌幷銘
明宗在位歲久倦于勤大臣輔政將擢用賢能以補大平之化時相國昌原公薦公於朝曰雞林朴寅輔實名家子軒軒有將相器曩遭橫禍在延昌郡爲老蕽久矣昔范睢出箐中卒爲秦相季布髡鉗作酒家保終爲漢名將夫士之處世也備嘗艱險益勵其志操然後達則可以成不世之功若用其賢莫先於此者卽以聞于上召還京師皆以謂家世積善所致公今諱仁碩字壽山廣州延昌郡人三韓功臣大保三重大匡奇悟九世孫曾祖朝議大夫戶部尙書永侯祖樞密院副使殿中監忠質公挺蕤考知門下省事刑部尙書育和妣安城郡大夫人李氏卽司宰少卿稹之女公甫八歲補春坊學友及長美風姿善騎射嗜讀書史常以雄豪自處推門蔭加掌醴令同正調成州倅時人見其年甚少不更民事謂必有傷錦之譏及下車剖決精敏有老成之風政績居第一由是除八關寶判官兼右軍錄事方主上之初在宥也北朝遣宣問使欲察是非公以內侍充先排使往逆之行至西都遲疑不欲詣京師公倍道詣闕承密旨還諭之迺首途使還稱旨除都校署令辛卯冬有周榭之災擧朝蒼黃計無所出公收歷代日錄及黃白等物置山呼亭不言其功人莫有知之者轉試司宰注簿上知其忠將不次用之而國步多艱衣冠殆盡遂抛弃官爵遠竄于南荒聞北原民俗頗淳古宜於人迺往卜居與前御史權不華窮山水之遊忽爲飛語所中幾陷不測朝有惜公者得移延昌郡安置公曰古語有之貧賤不能辱身非人且男兒死則已苟不死安能若螾蛭然不能自力坐使妻孥受寒餓耶於是懇田疇理園圃採樵于山鋤禾于畝至飼牛秣馬必以身先之使衣食粗給然後讀古人書時時爲文怡悅情性仕宦之心都息澹如也閱二十四年果爲賢相所薦引起爲東萊縣令是明昌七年丙辰也公以匹馬到縣卽貨其馬以支舘宇修葺之費民服其淸皆歌來暮及還會神宗卽祚除春坊通事舍人歷監察御史授刑部員外郞賜緋銀魚壬戌東都兇竪聚羣不逞之人以干天誅上命大將金陟侯征之而公以招討判官佐中軍其帥寬和專以姑息爲務有軍士掠取居人蓄産者公曰易稱師出以律否臧凶今提師千里以討頑凶當秋毫不犯使居者皆安堵然後賊可滅也才至於境軍士犯禁而不能討何以示威請以軍法從事由是羣心頗慴伏莫敢枝梧遂得大捷拜公殿中侍御遷殿中丞賜金紫服未幾有詔班師公以尙晋州道按察副使率留兵三百人還屯暮梁驛討平餘盜而賊首金順脫身遁山谷間至是果獲獻俘闕下優詔獎諭爰召公之子犀入侍內庭公以御史雜端還朝時有纖人欲詣侍從淸班公力請罷之俄以賀正使入北朝還授大府少卿兼三司副使時昌原公昆弟相次納政與年高者八人爲耆老會公年未七十亦預其末命作後序以傳之北朝賀節日使來聘以公充接伴使越丁卯夏以戶部侍郞留守南京二載徵拜大府卿加中散大夫兼三司使出爲西京齋祭使使還忽謂所親曰知止與知足有異知足者知之於旣足之後若知止則不必待足而能自止之謂也昔予方困厄時溘然與樵童牧竪並胔而朽則墓木已拱矣安得返京師有軒冕之榮如是哉幸而不死復覩天日之餘光■馳矢石獲立功名終不忝祖先遺業所得多矣苟戀眷不退以待縣車之歲非所謂知止也卽日飛章告老上嘉之授大中大夫戶部尙書令致仕壽至六十有九以今上卽位二載大金崇慶元年四月壬午以病卒私第五月戊申葬于五龍山南麓鐘川之陽公娶樞密院使吏部尙書翰林學士承旨金闡之女生男七人女三人餘皆先公夭季曰犀有父風今爲內侍奉先庫判官有外孫二人男曰安孝德登第赴西海府書記女適及第金軾公病嘗囑子犀曰觀世人之追賁皆以飮食豊羡爲孝與遊宴無異甚非吾志沒汝宜罄心誠供養佛僧而已毋與愚俗同以是皆遵其命云銘曰 仕不階於科第赫矣文章名不登於將帥掃盡强梁窮而不易其節凜凜秋霜達則思濟斯物熙熙春陽位登八座不可謂之卑壽幾七旬不可謂之殤終始罔缺子孫其昌銘玆樂石万世留芳
[출전:『高麗墓誌銘集成』(2001)] 판독자 : 김용선
돌아가신 대중대부 호부상서(大中大夫 戶部尙書) 박공(朴公) 묘지 및 명
명종(明宗)이 재위한 지 오래되어 부지런히 다스리는데 게으르게 되자, 대신들이 정사를 보필하면서 어질고 능력 있는 이를 발탁하여 태평스러운 세상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 이 때 상국(相國) 창원공(昌原公, 崔讜)이 공을 조정에 천거하면서 말하기를, “계림(雞林)의 박인보(朴寅輔)는 실로 명문 자손으로 뛰어나게 장상(將相)의 기량을 갖추고 있으나, 뜻밖의 화를 입어 연창군(延昌郡)에 살면서 늙은 농부가 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옛날 범저(范雎)는 정중(箐中)을 나와 마침내 진(秦)의 재상이 되었고, 계포(季布)는 머리털을 깎이고 목에 칼을 차는 형벌을 당하면서도 술을 팔아 집안을 지켜서 끝내는 한(漢)의 이름난 장수가 되었습니다. 대저 선비가 처세(處世)하기 위하여는 일찍이 어려운 때를 대비하여 더욱 그 지조를 힘써 지키고, 그러한 뒤에 현달하게 되면 곧 불후의 공(功)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어진 이를 등용하고자 한다면 이런 사람을 우선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곧 임금에 알려져서 서울로 소환하였으니, 모두들 집안이 대대로 선행을 쌓은 보답으로 이렇게 되게 하였다고 말하였다.
공의 지금 이름은 인석(仁碩)이고, 자는 수산(壽山)이며, 광주 연창군(廣州 延昌郡) 사람이다. 삼한공신 대보 삼중대광(三韓功臣 大保 三重大匡) 기오(奇悟)의 9세손으로, 증조는 조의대부 호부상서(朝議大夫 戶部尙書) 영후(永侯)이고, 조부는 추밀원부사 전중감 충질공(樞密院副使 殿中監 忠質公) 정유(挺蕤)이며, 아버지는 지문하성사 형부상서(知門下省事 刑部尙書) 육화(育和)이다. 어머니 안성군대부인 이씨(安城郡大夫人 李氏)는 곧 사재소경(司宰少卿) 진(稹)의 딸이다.
공은 나이 여덟 살에 춘방학우(春坊學友)가 되었다. 자라나자 풍채가 근사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으며, 경서와 사서 읽는 것을 즐기면서 항상 씩씩한 호걸로 자처하였다. 문음(門蔭)으로 장례령동정(掌醴令同正)에 오르고, 성주(成州)의 수령에 임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린 것을 보고 백성들의 형편이 바뀌지 않을 것이므로 반드시 비방하는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막상 부임하자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기를 빈틈없고 분명하게 하니 노숙한 풍모가 있다고 하였다. 치적의 평가가 1등이었으므로 팔관보판관 겸 우군녹사(八關寶判官 兼 右軍錄事)에 임명되었다.
바야흐로 임금<明宗>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북조(北朝, 金)에서 선문사(宣問使)를 보내어 곡절을 살피고자 하였다. 공을 내시(內侍)로서 선배사(先排使)로 삼아 가서 맞이하도록 하였는데, 사절의 행차가 서도(西都, 西京)에 이르렀으나 지체하면서 의심하고 서울로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공이 급하게 대궐로 가서 밀지를 받들고 돌아와 그들을 달래니, 이에 길을 떠나게 되었다. 사신의 임무를 마치자, 일을 잘 처리하였다고 하여 도교서령(都校署令)에 임명하였다.
신묘년(명종 1, 1171) 겨울에 궁궐이 불타는 재난이 일어났으나, 온 조정이 당황하여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공이 역대 임금의 일록(日錄)과 황금(黃金)과 백은(白銀) 등의 물품을 거두어 산호정(山呼亭)에 두었는데, 그 공(功)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 일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시사재주부(試司宰注簿)로 옮겼다. 임금이 그가 충성됨을 알고 장차 서열에 매이지 않고 기용하고자 하였으나, 나라가 매우 어지럽게 되고 관리[衣冠]들이 거의 죽임을 당하게 되자 마침내 관작을 버리고 멀리 남쪽 변방으로 달아나 숨으려고 하였다. 북원(北原)의 풍속이 자못 순박하여 사람이 살기에 마땅하다는 소문을 듣고, 이에 가서 터를 잡고 살았다. 전 어사(前 御史) 권불화(權不華)와 함께 산수(山水)를 구석구석 유람하였는데, 갑자지 떠도는 소문에 연루되어 거의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으나, 조정에서 공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이 있어 연창군(延昌郡)으로 귀양지를 옮겨 살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옛말에 ‘가난하고 천하게 사는 것은 몸을 욕되게 하거나 사람을 그르치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고, 또 ‘남아가 죽으면 그만이지 구차하게 죽지 않고 어찌 지렁이나 거머리처럼 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능히 스스로 힘쓰지 않고 앉아만 있으면서 처자식들이 추위와 굶주림을 겪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이에 논밭을 개간하고 채마밭을 가꾸며, 산에서 땔감을 마련하고 이랑에서 호미로 김을 매며, 소와 말을 먹이는 일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자신이 먼저 하였다. 의식(衣食)이 다소 넉넉해진 다음에 옛 사람 의 책을 읽고 때때로 글을 지으면서 정신을 즐겁게 하니, 벼슬길에 나가려는 마음도 모두 사라지고 욕심도 없어졌다.
24년이 지나 끝내 어진 재상의 천거를 받아 동래현령(東萊縣令)에 기용되었으니, 바로 명창(明昌) 7년 병진년(명종 26, 1196)이다. 공이 필마로 현에 도착한 뒤 바로 그 말을 팔아 관우(館宇)를 수리하는 비용으로 쓰게 하자, 백성들이 그의 청렴함에 감복하여 모두 너무 늦게 부임하였다는 노래를 불렀다.
돌아오게 되자 마침 신종(神宗)이 즉위하여 춘방통사사인(春坊通事舍人)에 임명하였다.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임명되고 비은어(緋銀魚)를 하사받았다. 임술년(신종 5, 1202)에 동도(東都, 慶州)의 흉악한 무리들이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꾀하였다. 사람들이 하늘을 범한 것이므로 죽여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대장(大將) 김척후(金陟侯)에게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공은 초토판관(招討判官)으로써 중군(中軍)을 도왔는데, 대장은 오로지 임시방편으로 너그럽게 화합하는 데에만 힘을 썼다. 군사 중에 주민의 재산을 약탈하여 빼앗은 자가 있으니, 공이 말하였다. “『주역(周易)』에는 ‘군사를 내게 되면 군률(軍律)로써 선과 악을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군사를 천 리나 거느리고 와서 흉포한 적을 토벌해야 하는데, 마땅히 털끝만큼도 범하는 일이 없이 주민들이 모두 마음을 놓도록 한 뒤에야 적을 가히 없앨 수 있습니다. 이제 겨우 (적과의) 경계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이 법을 범하는데도 능히 징벌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위엄을 보이겠습니까.”라고 하고, 군법으로 처리하기를 요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뭇 사람들이 마음으로 자못 두려워하여 감히 어기지 아니하니, 마침내 큰 승리를 얻게 되었다. 공을 전중시어(殿中侍御)로 임명하였다가 전중승(殿中丞)으로 옮겼으며, 금자복(金紫服)을 하사하였다. 곧 조서를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게 하였는데, 공이 상진주도 안찰부사(尙晉州道 按察副使)로써 병사 300명을 거느리고 모량역(暮梁驛)에 둔(屯)을 치고 남은 도적을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적의 괴수 김순(金順)이 몸을 피하여 산골짜기에 숨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마침내 사로잡게 되었다. 임금이 특별한 조서를 내려 표창하고, 이에 공의 아들 서(犀)를 불러들여 내정(內庭)에서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공이 어사잡단(御史雜端)으로 조정에 돌아왔는데 당시 소인배가 시종하는 청반(淸班)직에 나아가려고 하자, 공이 힘써 요청하여 파하게 하였다. 조금 뒤 하정사(賀正使)로 북조(北朝)에 들어갔으며, 돌아오자 대부소경 겸 삼사부사(大府少卿 兼 三司副使)에 제수되었다.
그 때 창원공(昌原公)의 형제들이 서로 차례대로 정치에서 물러나서 나이가 많은 이들 여덟 명과 더불어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었다. 공은 나이가 70이 되지 못하였으나 또한 그 말석에 참여하여 후서(後序)를 지어 그 일을 전하도록 명을 받았다. 북조의 하절일사(賀節日使)가 오자, 공을 접반사(接伴使)로 삼았다. 정묘년(희종 3, 1207) 여름에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써 남경유수(南京留守)가 되었으며, 2년 뒤 불려와 대부경(大府卿)이 되었다. 중산대부(中散大夫)에 오르고 삼사사(三司使)를 겸하였으며, 서경재제사(西京齋祭使)가 되어 나갔다 돌아왔다.
갑자기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지지(知止)와 지족(知足)은 다른 것입니다. 지족(知足)이라는 것은 이미 만족한 뒤에야 알게 된 것이고, 지지(知止)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족함을 기다리지 않고도 능히 스스로 그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내가 바야흐로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문득 나무하는 아이들이나 소 치는 아이들과 함께 썩어 지냈다면 무덤의 나무는 이미 한아름이나 되게 자랐을 것입니다. 어찌 서울로 되돌아 와 관직의 영예를 누리는 것이 이와 같을 수 있었겠습니까. 다행히 죽지 않고 다시 태양의 남은 빛을 보게 되어 화살과 돌맹이 사이에서 말을 달리며 공명을 세우게 되었고, 끝내 조상의 유업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얻은 것이 많은데, 구차스럽게 미련을 가지고 물러나지 않으면서 은퇴할 나이가 될 때만을 기다린다면, 이른바 지지(知止)가 아닙니다.”라고 하고, 그 날로 글[章]을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대중대부 호부상서(大中大夫 戶部尙書)로 임명하고 은퇴하도록 하였다.
나이 69세에 이르러, 지금의 임금<康宗>이 즉위한 지 2년이 되는 금(大金) 숭경(崇慶) 원년(강종 1, 1212) 4월 임오일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시니, 5월 무신일에 오룡산(五龍山) 남쪽 기슭 종천(鐘川)의 양지바른 곳에 장례지냈다.
공은 추밀원사 이부상서 한림학사승지(樞密院使 吏部尙書 翰林學士丞旨) 김천(金闡)의 딸과 결혼하여 7남 3녀를 낳았다. 나머지는 모두 공보다 먼저 작고하였고, 막내 서(犀)는 아버지의 풍모를 지녔는데 지금 내시 봉선고판관(內侍 奉先庫判官)이 되었다. 외손 두 명이 있으니, 손자 안효덕(安孝德)은 과거에 급제하여 서해부서기(西海府書記)로 부임하였고, 손녀는 급제한 김식(金軾)에게 시집갔다.
공이 병이 들자 일찍이 아들 서에게 부탁하기를, “세상 사람들의 장례[追賁]를 보니, 모두 음식을 가득 차리는 것을 효라고 한다. 잔치를 벌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니, 내 뜻과는 매우 다르다. 내가 죽거든 너는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불승(佛僧)들을 공양할 뿐, 어리석은 속인들과 똑같이 하지 말아라.”라고 하니 이에 모두 그 명을 따랐다. 명(銘)하여 이른다.
과거에 오르지 않고 벼슬하였지만 문장은 빛나고 이름은 장수가 되지 않았지만 힘센 도적을 쓸어 없애도다. 가난하여도 그 절개를 바꾸지 않으니 늠름하기가 가을 서릿발과 같았고 현달하여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려고 생각하니 봄볕처럼 따스하게 비추도다. 지위가 팔좌(八座)에 올랐으니 낮았다고 할 수는 없고 나이도 칠순에 가까웠으니 일찍 돌아가셨다고 할 수는 없도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그러짐이 없고 자손들이 창성하니 이 좋은 돌에 명(銘)을 새겨 만세(萬歲)에 그 향기를 남기리라.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해석자 ; 김용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