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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만년 걸려 만난 사인데 그깟 19살 차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KBS 1TV 일일극 '바람 불어 좋은 날' 중)
"어느 책에서 봤는데, 윤회에 윤회를 거듭해서 제자리에 오는데 2500만년이 걸린대요. 2500만년 걸려 만난 사인데 그깟 19살 차이가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일일드라마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KBS 1TV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장민국(이현진)이 이강희(김미숙)에게 던진 말입니다. 유치하고 촌스럽지만, 장민국보다 19살이나 많은 이강희는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감동에 젖죠.
고교 시절 사제 관계였던 이강희와 장민국은 이제 누가 봐도 애틋한 연인입니다. 성인이 된 장민국이 다시 만난 옛 선생님 이강희는, 남편을 잃고 작은 유치원을 경영하는 외롭고 초라한 여성이었죠. 강하고 꼬장꼬장했던 '선생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대신 감싸주고 싶은 가녀린 여성성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온전히 새로운 환경 위에, 사랑은 싹터버렸습니다.
과거 안방극장에선 엄청난 빈부차를 사랑의 중대한 장애물로 다뤘습니다. 재벌집 아들과 비천한 여자가 주변의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사랑에 골인하는 줄거리는 사골국물처럼 우려먹던 단골 레퍼토리였죠. 아무리 해도 극복할 수 없는 물적(物的) 격차는, '부자가 되고 싶은' 시청자들의 콤플렉스를 건드리고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면서 대체로 '기본 이상'의 시청률을 해줬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장애물이 빈부가 아닌 나이로 옮겨가는 모습입니다. 9살, 10살은 우습고 스무살 이상의 나이 차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 시청자들은 '엄마' 같은 연상 여자와 젊은 남자의 사랑은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입니다. 유독 이강희-장민국 커플에게만 혹독한 비난의 댓글이 집중되죠. "애들하고 보기 역겹다" "젊은 남자가 늙은 여자를 좋아하는 건 불가능하다"…. MBC 일일드라마 '황금물고기'의 50대 이혼남 문정호(박상원)가 23살 연하인 한지민(조윤희)과 사랑에 빠질 때도, 이런 비난은 없었습니다. 나이 차가 더 큰데 말이죠.
1997년 나스타샤 킨스키와 웨슬리 스나입스가 출연한 영화 '원 나잇 스탠드'가 최초의 '흑인 남자-백인 여자 정사신'을 연출했을 때 미국에서 이와 비슷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백인 남자-흑인 여자'의 사랑을 그린 '보디가드'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지 5년이 흐른 후였는데도 말입니다. '권력과 권력'의 조합인 '백인 남자'와 '열등함과 열등함'의 조합인 '흑인 여자' 커플은 용인해도, 그 반대는 용납할 수 없다는 미국의 문화적 편견이 워낙 견고한 탓입니다. 그 부조화에 대한 거부감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연상 남자-연하 여자'는 괜찮아도 '연상 여자-연하 남자'는 욕먹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나이 많은 것=우월한 것'이란 우리나라 특유의 장유유서의 문화가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는 '여성'과는 화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이강희는 유독 연약하고 챙겨줘야 할 일이 많습니다. 나이듦의 우월함을 여성성으로 중화시켜보려는 시도지만, 이 역시 우리의 편견을 비추고 있어 뒷맛이 개운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