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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다. 미술 작품을 감상한 사람들 가운데 순간적으로 가슴이 뛰거나 정신적 일체감, 격렬한 흥분을 느
끼는 등 각종 분열증세를 느끼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그만큼 어떤 미술 작품들은 잊히지 않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요즘처럼 미술경매시장이 활성화된 시대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가격 때문에 분열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미술 작품을 보고 그 뒤에 숨은 경제원리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미술관에 간 경제학자》라는 책을 펴낸 동덕여
대 최병서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미술사를 움직인 것은 보이지 않는 경제의 힘이었다”고 주장하는 그의 설명을 따라 명화 뒤에
숨은 경제원리를 찾아나서 보았다.
복잡계 경제이론과 닮은 액션페인팅
한 화가가 수직으로 서 있던 캔버스를 수평으로 누였다. 이 단순한 행동이 현대미술사의 한 획을 긋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화가는
붓을 들어 채색을 하는 대신 캔버스 위에 물감을 흩뿌렸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이 액션페인팅이라는 새로운 기법
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화가들은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을 캔버스로 옮긴다. 이 과정에선 자신의 의도대로 잘 표현됐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하
지만 액션페인팅 기법은 애초에 머릿속에 아무런 상을 그리지 않고 시작한다. 다시 말해 작가의 의도가 거의 개입되지 않는다. 그
림은 불확실성, 무작위성, 우연성 등 예측할 수 없는 확률들에 의해 완성된다. 어떤 예술적 가치가 나올지 작가 자신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액션페인팅의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나비효과로 대표되는 카오스 경제이론, 혹은 복잡계 경제이론과도 닮았다. 실물위기로 전이되고 있는 미국발 금융
위기는 아직 그 원인조차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현재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 시스템이 너무나 복잡한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호황을 유지하던 세계경제가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인지 최초 원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지금
의 위기가 언제까지, 또한 얼마나 더 큰 피해를 입히며 진행될지에 대해서 역시 이름난 석학들도 의견을 조율하지 못하고 있는 실
정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액션페인팅 기법이 후기자본주의의 거대시장인 미국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결국 액션페인팅 기법을 활용하는 추상표현주의 화풍은 그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캔버스에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
다. 미술 작품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 팝아트가 미국에서 번성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팝아트는 본래 영국에서 시작됐지만 미국에서 꽃이 폈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도 미
국 팝아트 작품이다. 팝아트의 스타는 역시 앤디 워홀인데 그는 작품 생산이 공장 생산과 같다고 천명하면서 미국의 대량생산 경
제체제를 그대로 미술로 옮겨왔다.
그런데 이미 르네상스 시대에 워홀보다 한발 앞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 화가가 있었다. 그 주인공인 루카스 크라나흐는 생산자
중심이 아닌 수요자 중심에서 생각한 화가였다. 종교적 신념의 이유로 어느 한 종파의 종교화만 그리는 것이 보통이었던 당시에
크라나흐는 종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수요에 대비했다. 주문이 아무리 많이 들어와도 크라나흐는 걱정이 없었다. 자신의 제자들과
일을 나누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크라나흐라 해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해진 20세기 수요량을 감당할 수는 없었
을 것이다. 20세기 미술 환경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제자를 많이 두는 대신 수많
은 복사본을 두는 방법을 택한 것이 바로 앤디 워홀이다.
회화 장르 중 유일하게 판화는 원전 외의 또 다른 판본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워홀처럼 판화 작품의 대량생산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겠다는 생각을 한 화가는 없었다. 앤디 워홀의 이 같은 작업은 화가를 순수 독점생산자의 지위에서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경제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앤디 워홀 이전의 미술 작품은 공급에 있어 제한적인, 유일한 상품이었다는 점에서 규격화
된 상품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워홀은 미술 작품의 대량생산을 통해 그 간극을 매우 좁혀 미술 작품의 대중화에 기여한 것은 물론
개인적 부도 축적할 수 있었다.
추상화는 경제모델 수립 과정과 흡사
추상화는 때로 감상자를 당혹케 한다. 점·선·면만으로 이루어진 그림들이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추상화가 완성되는 과정을 알 수만 있어도 그러한 당혹감을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추상화가 몬드리안은 친절하게도 추상화 과정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 몬드리안의 작품을 통해 처음
에는 나무라는 구체적 대상이 어떻게 몇 개의 선으로 단순화되는지 알 수 있다.
추상화 과정은 가장 본질적인 것만을 남기고 비본질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은 바로 경제학자들이 경
제모델을 수립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여러 동인들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을 남겨야만 소비자의 행동원리를
찾을 수 있는 경제모델이 완성된다. 요즘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의 미학에 매료되는 것은 미술 감상자들만이 아닌 셈이다.
쇠라로 대표되는 후기인상주의 점묘파의 화법은 완전경쟁시장 자체를 보여주기도 한다. 점묘파의 화법은 말 그대로 작은 점을 촘
촘히 찍어 완성한다. 멀리서 보면 여러 색들이 조화를 이룬 한 폭의 그림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서로 독립된 점들밖에 보이지 않는
다.
완전경쟁시장도 그렇다. 시장 안에서 독립된 개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익이 극대화되도록 행동하지만 개인이 시장 전체에 영향
을 줄 수는 없다. 마치 개미투자자들이 증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래도 증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균
형 상태를 유지하게 마련이다. 완전경쟁시장도 이처럼 멀리서 보면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독립된 개인
들의 개별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이재훈 기자 (huny@ermed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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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