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밖까지 나와 반갑게 맞아준 그는 약간 수척해 보였다. "감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물 보는 게 얼마만이냐고 하자 "뭐, 5개월밖에 안 됐는데요"라며 웃으면서 자리로 안내했다.
한게임바둑이 이세돌 9단을 만났다. 28일 오후 '이세돌 도장'에서였다. 복직원을 제출한 후 첫 공식 인터뷰 자리다. 전날 내린 눈으로 길은 온통 빙판과 질퍽거림으로 뒤범벅이었고, 도장으로 가는 10여분의 거리는 칼바람이 손과 볼을 에는 동동걸음의 연속이었지만 밉지 않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앞자리에 앉은 이세돌 9단은 가끔 농담도 건네며 평온한 모습이었다. 복귀를 앞두고 있는 민감한 시기라서 그런지 대답은 때로는 진중하게, 때로는 조심스러워한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눈에 띌 만큼 예전보다 부드러워졌다는 사실이다. 비보도용까지 이야기는 1시간 30분 넘게 이어졌다.
○●… 더 늦어지면 더 많은 것 잃을 것 같았다
얼굴이 조금 수척해 보입니다. 건강은 괜찮은 거죠? (실내의 냉랭한 기온 탓인지 바들바들 떨기도 했다)
요 며칠 감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것말고는 전체적으로 괜찮습니다.
복직계는 제출한 상태이고, 1월 8일 한국기원 이사회의 심사와 승인 절차만 남겨 놓았습니다. 팬들은 복귀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데요, 예정했던 휴직기간보다 1년이 앞당겨졌습니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인가요?
휴직서엔 1년 6개월로 적었지만 한 달 후에 돌아올 수도 3년이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기간은 중요치 않습니다. 쉬다 보니 부담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휴식이 길어질수록 마이너스가 된다는 걱정이 든 거죠. 한두 달이면 모르겠지만 6개월도 사실 부담스러운 시간입니다. 물론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이유도 많습니다만….
복직 시기에 대해선 염두에 두고 있었던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쉬는 동안의 마음은 어땠나요, 홀가분하던가요?
처음 한 달 동안은 어지러웠습니다. 마음의 정리가 안 됐습니다. 그 단계를 지나고 나니까 조금씩 편해졌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됐고 나름대로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장외'에서 바라본 바둑계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였나요? 몸이 쉰다고 신경까지 끊은 것은 아닐 것 같은데.
복직 신청서를 제출한 뒤엔 관심도가 높아졌지만 그 전엔 그렇게 주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복직 시기를 놓고 팬들 사이에서 왈가왈부하는 것도 같습니다. 비씨카드배 개막 시기와 맞물리기도 하고요.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 모르나 비씨카드배의 출전 여부는 그렇게까지 중요치 않습니다. (옆자리에 동석하고 있던 매니저격인 킹스필드 차만태 회장은 "해가 바뀌는 시기이니 새출발하는 데 적기라고 봤다"고 보충 답변해 주었다)
종전엔 복직 신청을 하면 바로 복귀하게 됐었는데 이번 휴직을 계기로 일명 '이세돌법'이란 게 만들어졌습니다. 한국기원 이사회의 심사와 승인을 받게 되어 있는 점에 대해선 알고 있었나요? 혹시 불만 같은 것은?
물론 알고 있었지요. 솔직히 불만도 없습니다.
복직 후의 첫 대회를 둘러싸고 이야기가 무성합니다. 1월에 시작하는 비씨카드배 출전이 가능할까요?
일정 관계상 현 상황에선 어렵습니다. 한국기원 이사회가 1월 8일로 예정되어 있고, 통합예선은 10일부터 들어갑니다. 대진추첨 등이 있어 그 전에 참가신청을 해야 하는데 시간상 불가능한 거죠.
국가시드라든지 주최측의 와일드카드도 있잖습니까?
그것은 제가 뭐라고 할 계제가 못 됩니다. 더욱이 복직한 상태도 아니고. 누구도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 돌아오면 옛날 일이 되는 것
휴직 때도 그랬듯이 복직 결정에 대해서도 후회 같은 것은 없겠지요?
물론입니다. 전혀 없습니다.
민감한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중국리그 문제라든지 기보저작권 사인 문제 같은 일들은 원만히 해결됐는지요?
새출발하는 셈이니까 깨끗하게 정리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중국리그는 스케줄 편의를 봐준다면 그것은 오히려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2007년과 2008년도의 중국리그 출전에 따른 납입금 건도 원만히 해결할 것입니다. 다만 기보저작권에 대해선 요지는 들어봐야겠지요. 원칙적으로는 사인한다는 생각입니다.
당시 기사총회의 결정에 대해 마음의 상처도 입지 않았습니까?
상처까지야…. 약간 좋지 않았다는 정도였지요. 돌아오면 전부 옛날 일이 되는 거죠. 깊게 새겨두지 않습니다.
당시 격했던 감정이 다 누그러진 겁니까?
지나간 일이죠. 시간이 지나고 나니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앞으로 잘 해야죠.
○●… 구리 9단과의 10번기 기대 크다
다시 구리 9단과의 '치수고치기 10번기'가 화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차만태 회장) 그것은 이미 중국측에서 여러 번 나왔던 이야기인데 바둑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광저우아시안게임의 조직위원회에서 홍보 전략으로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현재 큰 틀은 정해졌고 세부사항에 대해 협의 중입니다. 그쪽에선 모든 대국을 중국에서 치르길 원하는데 한국에서도 두 판쯤은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치수고치기는 쌍방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심할 경우 6대2의 스코어도 나올 수 있겠지요. 사람이므로 누구든지 질 수도 있습니다. 하하, 그렇다고 제가 진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목숨을 걸고 두는 자세는 좋지만 그 결과에 상처를 입어 바둑을 못 두는 일이 벌어져서는 곤란하겠죠. 그런 생각이 들 거라면 아예 대국하면 안 되겠죠.
도중에 치수가 고쳐지더라도 10국을 다 두는 건가요, 상금은 또 어떻게 되는지요?
5대1로 벌어진다면 수건을 던져도 이상할 게 없겠죠. 6대4 정도로 끝난다면 차후 설욕할 기회를 갖는 일도 가능하겠죠. (차만태 회장) 상금 관계는 협의 중에 있습니다. 우승자와 준우승자로 나누는 것과 승자와 패자에게 매판 지급하는 방식 등이 논의되고 있지요.
휴직 발단이 한국바둑리그를 둘러싼 잡음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올해 한국바둑리그의 출전 여부가 무척 궁금합니다.
지금 이야기할 단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구단(슈퍼인터바둑 프로바둑단) 문제도 있고.
한국랭킹 10위까지는 상위 5개 기전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한다는 규정도 생겼습니다.
그런 것까지 규정으로 정해 놓은 것은 문제가 없지 않지만 악법도 법이니까요. 기전 여건이 선수에게 손짓을 보낸다면 제 발로 나가지 않을까요?
●○… 목표는 아시안게임, 급선무는 감각 회복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세계타이틀만 4관왕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 사이 국내타이틀도 없는 무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타이틀 반납도 있었고. 가장 먼저 찾아오고 싶은 타이틀은 무엇입니까?
반납한 타이틀은 하나(국수)밖에 안 되는데요(웃음). 찾아오고 싶은 타이틀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바둑 내용이 중요하겠지요. 내용이 좋으면 다 됩니다. 감각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휴직 동안 감각을 많이 잃었나 봅니다. 평생 바둑 외길을 걸어왔으니 얼마나 갑갑하고 손이 근질거렸겠습니까?
대국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만족할 만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중국리그는 두었지 않습니까?
열심히 두긴 했는데 감각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 인터넷에서 1급으로 두었다
인터넷 대국 같은 것은 하지 않았습니까?
제 같은 경우 바둑판(모니터)이 세워져 있는 것이 어색해서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여태까지 전혀 안 둔 것은 아니고요,1급으로 일반 유저와 몇 판 두어 본 적도 있지요.
천하의 이세돌 9단이 1급으로 두다니요? '사기 바둑' 아닙니까?
1급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 궁금했거든요. 상대가 안 던지는 바람에 혼났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1급한테 항복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하. 동료들과 서로 연락을 취해 약속한 다음 대국한 경우도 있습니다.
기자는 대충 알고 있긴 합니다만 요즘 모 사이트에서 거론되고 있는 '외톨이'란 아이디는 본인이 아닌 거죠?
저는 절대 아니지요. 누군지는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계시원의 실수로 인한 초읽기를 둘러싼 잡음이 일어나기도 했는데요. 그것에 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룰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겠지요. 기사를 통해 접했는데 애매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무승부가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계시원의 잘못이라지만 계시원이 대국에 크게 관여하는 부분은 없거든요. 대국자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도 있고요.
아시안게임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출전할 의향은 갖고 있을 테지요?
당연히 나가야죠. 아시안게임의 금메달은 가문의 자랑입니다. 지난해 마인드스포츠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지만 제가 나가고 싶다고 해서 나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선발전을 치른다면 참가할 겁니까?
물론이죠. 선발전을 치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대표상비군 운영이 초읽기에 들어가는 등 남자대표도 단체 훈련을 할지 모릅니다. 훈련장을 벗어나면 당장 적으로 싸워야 하는 상대들인데 어떻습니까?
중국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좋고 나쁨을 떠나 중국처럼 될지는 의문스럽습니다. 효과가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쉽지 않습니다. 할 수 있다고 해도 실효성에도 의문이 들고요.
●○… 앞으로 그런 일 없도록 노력하겠다
중국의 기세가 매섭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한국과 중국의 힘관계를 어떻게 봅니까?
5대5로 동등하다고 봅니다. 최근 중국의 상승세가 대단해 보였던 것은 구리 9단의 기사가 워낙 좋아 그렇게 비쳤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행보가 중요합니다.
중국기사 중 까다로운 상대를 꼽는다면?
씨에허 7단이 부담스럽긴 하죠. 구리 9단은 항상 대단하고.
요즘은 콩지에 9단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내년 초 이창호 9단과의 승부(LG배 결승전)가 중요하겠지요.
개인적으로 속기와 장고, 어느 쪽이 편합니까?
빨리 끝나는 속기가 두기는 편하긴 한데 승부로 갈 때는 긴바둑이 편합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짧으면 부담스럽지요.
자신만의 징크스 같은 것은 없는지요? 머리카락은 장발이 됐다 아주 짧아졌다 하는데.
징크스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는 신경을 쓰지 않거든요. 머리카락은 기분에 따라 바뀔 뿐입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인 거죠.
애연가이기도 합니다. 대국 중에 생각날 때면 어떻게 합니까?
피워야죠. (대화 도중 양해를 얻고 딱 한 대를 피웠다)
요즘엔 금연 빌딩도 많습니다. 그럴 경우 애로점이 적지 않을 텐데요.
정 피우고 싶을 땐 1층까지 내려갑니다. 한 번은 중환배가 아주 높은 빌딩에서 열렸었는데요, 흡연구역이 따로 있었지만 마침 휴일이라서 문이 잠겨져 있더라고요. 말도 안 통하고 그렇다고 화장실에 숨어서 피울 수는 없고, 참을 수밖에 없었죠.
새출발하는 마음이라 했는데 신년 계획 같은 것을 세워둔 게 있나요?
내용적으로 좋은 바둑을 두는 거죠. 참, 아시안게임을 목표로 삼는다고 하면 되겠군요. 국가를 위해 도움되고 싶습니다. 구리 9단과의 10번기에도 최선을 다할 것이고요.
복직을 기다렸던 팬들이 많습니다. 한 말씀 해주시죠.
좋지 않은 일로 휴직하게 되어 죄송스러웠습니다. 이젠 옛날 일이 됐고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이 좋은 모습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많이 응원해 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동안 '이세돌 사태'는 마치 핑퐁 게임을 벌이듯 공이 이쪽 저쪽으로 왔다갔다했다. 이제 복직을 둘러싼 공은 다시 한국기원측의 승인 문제로 넘어갔는데 거부할 명분과 이유는 없어 보인다. 사실 이세돌 9단을 만나러 가는 동안 그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을까 무척 궁금스러웠다. 그러면서 단 하나만은 분명히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달라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취재 일정상 '소주 한 잔'의 유혹을 사양하고 돌아선 발길에 그것이 혼자만의 쓸데없는 걱정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첫댓글 보고싶었습니다...ㅋㅋ 제 말대로 6개월만 쉬어 주시는군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