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교회력에 따라 성령강림주일 성령님의 음성을 듣거든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완고한 마음 즉 강팍한 마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아직도 내가 살아있으면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후에 나타난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님 따라 행하는 사람으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이어령 박사의 '아들이여, 이 산하를'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수염을 길게 가꾸고 다니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는데 동네에 사는 아이 하나가 할아버지 수염을 볼 때마다 궁금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는 할아버지를 만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밤에 주무실 때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이불 밖에 내 놓고 주무세요?' 할아버지가 이 질문을 받고 금방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말하기를 '얘야, 미안하다. 나도 미처 생각을 못해 본 일인데 오늘밤에 자보고 대답해주마' 할아버지는 그 날 밤 수염하고 씨름을 했습니다.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자니까 답답하고 수염을 내놓고 자니까 이상하고 그래서 밤새도록 수염을 가지고 씨름을 한 것이지요
여러분, 오래도록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그 수염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내가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목을 다시 함께 읽습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삶” 제목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성령님을 춤추게하고 감동을 드리며 성령님을 따라 행하며 살아 갈 수 있을까?
5-6절.....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영이란 단어가 11번 나옵니다. 그런데 두절 속에도 3번이나 나오지요 영이란 성령 영과 같은 뜻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님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그리고 영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단어가 나오고 있는데 “육” 입니다. 육은 보이는 것입니다. 영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영과 육 어느 쪽이 먼저입니까? 영입니까? 육입니까? 우리는 어느 한 쪽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육신의 생각을 해서 사망에 이를 수 있고 영의 생각을 하여 생명과 평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우선적으로 선택해야할 것은 영입니다. 왜요!! 창조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에 있더라 영이 먼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는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님 따라 사는 것이 내 영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영 즉 성령은 히:르아흐 숨 바람이란 어휘의 뜻이 있습니다. 영이란 그렇습니다. 바람과 같이 눈으로 확인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 여기 계시네요 성령님! 방에 계시네요 그렇게 누가 말하면 성도여러분!! 성령님 정말 보입니까? 성령님 우리 집에 주인이십니다. 하면 주인이신 성령님이 보이십니까? 그러나 나뭇잎이 흔들리면 바람이 분다 라는 것을 앎니다. 북서풍인지 남서풍인지 알아요
성령님이 그렇습니다. 바람처럼 보이지 않지만 이 사람이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사는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추적해 하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후 자신을 자세히 보세요 죄 책 받은 일을 했다든지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든지 말 한마디가 좀 빗나갔다든지 하면 어떠습니까? 마음속에 있는 양심이 먼저 탄식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내 마음이 성령의 전인데 목사님을 통해 들었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담배를 피고 들어 마시는 순간 토하고 또 피울려고하면 통하여 결국은 성령님께서 담배를 끓게 하여 주신 한 신앙인의 간증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기 전에는 이런 양심도 다 팔아 먹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는 달라요? 보이지는 않지만 성령님께서 양심을 통하여 탄식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승권아! 잘못했구나 고백하게 합니다. 회개하게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어떠습니까? 마음에 평안이 밀려옵니다. 답답했던 마음이 열립니다. 성령하나님께서 나를 만져주시고 절제하게 하시고 탄식하심을 체험하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좇는 사람은 육신의 일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니 육의 생각은 곧 6절 말씀처럼 사망으로 결론을 짓게됩니다.
사울이란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실 때 처음에 사용 하실 때 그의 성품은 참으로 온유했습니다. 사무엘선지자로 통해 “너는 선견자이니라 하니까” 그가 얼마나 겸손했는지 자기는 베냐민지파로 너무나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어찌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순간은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하여 하나님께서 보너스로 예언하는 능력까지도 주셨습니다.
사울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육의 사람으로 완전히 바꿔진 것은 언제였는가 하면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된 후 그의 마음은 서서히 육신이 지배하기를 시작했습니다.
한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지 2년째 블레셋과의 전투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블레셋군사들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침공해 오는데 이스라엘도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테세를 갖추는데 문제는 사울의 명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싸움을 하느냐 않하느냐 선지자 사무엘이 와서 번제를 드려야만이 가능했습니다.
즉 예배입니다.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수 있죠 그런데 사무엘이 7일 지나도 안오니까 사울이 설익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생각입니까? 지금 사태가 다급한데 예배는 드려야하겠고 적군은 쳐들어오고 선지가 사무엘은 안오니까 내가 예배드려도 되겠지!....이것은 누구생각입니까? 사울 자기생각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왕 됨을 포기하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된 동기가 된 것입니다. 이레 후 사무엘이 와서 사울의 보고를 듣고 말합니다.
(삼상13:13-14)......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왕의 폐위의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육신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이 사울의 마음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성령님 생각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갈5:16-17......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성령님 따라 행하고자 하는데 우리 삶가운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갈5:17절 말씀처럼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즉 영적인 샅바 싸움이 벌어집니다. 육은 성령을 거스립니다. 반대로 성령님은 육을 거스립니다.
그래서 매일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치열하게 영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싸웠습니다.
문제는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이런 영적샅바싸움을 하고 있는 것 조차도 그냥 모르고 살아 있다는 슬픈 사실입니다.
이것은 지금 내가 성령님을 따라 행하고자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영적싸움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고 영적으로 무장해제를 하고 있다면 지금 우리는 영적 낙오자입니다. 축구선수 11명 외에 출전하지 못하고 멍! 하니 지켜보고 있는 대기명단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교회 초창기 부흥사였던 이용도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만주 용정에 신학교 동기이자 형 같았던 이호빈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에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답니다. 설교하기 전 준비 찬송을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용도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지 않는 겁니다. 그저 강단 중앙 의자에 쪼그려 앉아 기도만 합니다. 시간이 자꾸 지나 강사 목사님을 쳐다보았지만, 요지부동입니다. 그때 쪽지가 하나 올라왔어요 “형님,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네요.” 그래서 그날 저녁 그렇게 찬양만 하다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고 그 다음 날 집회 때부터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주향성도여러분!! 성령님을 따라 행하기를 원하십니까? 육신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박으십시오 육체의 소욕을 하나하나씩 못 박으십시오
그리고 성령님 생각대로 행하도록 저희들을 강권하여 붙잡아 이끌어 주옵소서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강력한 성령님 따라 행하고자 하는 결단이 주향성도 여러분에게 있어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