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最古의 도시 비블로스
나폴레옹 3세는 군대를 그 땅에 보내면서 당시 저명한 고대 근동언어학자이자 성서학자이며 환속한 사제출신인 조세프 르낭(J.E.Renan)을 딸려 보냈다. 로제타석을 가져와 고대 이집트 연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숙부를 의식한 조치였음이 분명하다.
당시 37세의 한 참 나이였던 르낭은 발굴의욕이 넘쳐 프랑스 군대를 동원해 발굴을 시작했다. 오늘날의 고고학 입장에서 볼 때는 그야말로 대경실색할 일이었지만 당시의 고고학이란 그야말로 땅 속에 파묻힌 ‘보물찾기’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기술이야 시대적 한계로 ‘무식’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역을 고르는 르낭의 눈만은 정확했다. 시돈 뿐 아니라 비블로스 Byblos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길게 할 수 밖에 없어 여기서는 줄이지만, 그는 이곳에서 많은 유물을 찾게 되는데 가장 귀중한 존재는 비블로스의 여인(Lady of Byblos)이라고 불리우게 되는 발라트 게발(Baalat Gebal) 여신상이었다. 비블로스의 수호신인 여신상을 찾은 르낭은 이것을 이집트의 여신이라고 생각했지만 훗날 페니키아의 여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이 여신상은 레바논이 아닌 르낭의 모국인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이 신상과 상관없이 르낭은 레바논 일대를 발굴하면서 5,000점이 넘는 페니키아 문자 기록을 찾아내 이를 1864년에 <Mission en Phénicie>라는 책으로 엮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페니키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당대의 베스트셀러이자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는 <예수의 생애>의 저자이기도 한 르낭은 페니키아 문명의 최초 발굴자로서도 그 이름이 영원히 빛나고 있다.
이렇게 제대로 불이 붙은 페니키아 연구와 발굴은 반세기 이상 프랑스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는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승국이 된 프랑스는 레바논과 시리아를 아예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아 통치하였다. 이 땅의 주인이 되자마자 그들은 ‘대박’을 터뜨렸다.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19년, 고대 이집트 전문가이자 고고학자인 피에르 몽테 Pierre Montet 가 레바논 땅에 도착했다. 그는 인부들을 많이 고용하여 3년 이상 이제는 ‘쥬바이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진 비블로스 주변을 열심히 파헤쳤다. 물론 과장이겠지만 농토 외의 모든 땅을 팠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 결과 그는 이집트의 신성문자가 새겨진 많은 유물을 찾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비불루스와 이집트가 많은 교역을 했다는 증거는 충분할 정도로 입수했지만 ‘화끈한’ 그 무엇이 필요했다.
1923년 봄, 어느 날 아침 흥분한 아랍인 인부가 그를 깨웠고, 항구 남쪽의 절벽 쪽으로 데려갔다. 그 곳에는 밤 새 내린 비로 땅이 꺼져있었다. 그 깊이는 12미터가 넘었고 안에는 동굴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고, 그 속에는 묘실이 있었다. 고고학자로서 최고의 순간을 맞은 몬테는 황홀경에 빠져 묘실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거대한 석관들이 있었고, 바닥에는 부장품들이 흩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