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이곳 仁良里(인량리)는 영해에서 서쪽으로 십리 되는 곳에 사면이 산으로 쌓여있고 남쪽에 내가 가로 놓여 있는 山紫水明(산자수명)한 큰 동리로 영남의 名地(명지)로 이름이 높다. 마을의 역사는 先史(선사)시대부터 오늘에 까지 이어지고 있다.
옛날 지명은 仍良火(인량화)라 하다가 뒷산 형국이 학이 나래를 펼친 것과 같다하여 飛盖洞(비개동), 나래골, 翼洞(익동)이라 하였으며 光海(광해) 2년(1610)에 인량으로 개칭되었다. 일설, 나라 골(國洞)이라 불려오는데 이는 나래 골에서 나온 말인것 같다.
寧海府誌(영해부지)에 의하면 인량리는 八姓宗室(팔성종실)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옛부터 풍속이 순후하고 예의와 겸양이 있고 효행과 학문이 높은 선비가 많아 벼슬이 끊어지지 않으니 府內(부내)에서 으뜸가는 동리라 하였다.
고려시대 이래 8대 성씨, 12종가가 거주하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전통 있는 창수면 인량리 '나라골'을 동해안 농촌 전통테마마을로 집중 육성하고 있다. 보리 주산지였던 이 마을을 '나라골 보리말'이란 테마마을로 육성하고 있는 영덕군은 주민들과 함께 문을 닫은 인량초등학교를 사들여 원룸형 가족실 8개, 회의장, 단체식당 등의 시설을 갖춘 콘도형 최신시설로 리모델링한 후 체험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인량리 전통마을 입구에 서 있는 鄭湛 旌閭碑(정담 정려비)로 부터 시작하여 마을 안 종택들을 가까운 순서대로 사진과 안내판의 글을 적어 올려봅니다. 천천히 둘러보셔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380호
鄭湛(정담)은 조선 明宗(명종) 3년(1548)에 평해군 기성면 사동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野城(야성)이고 자는 彦潔(언결)이다. 다섯살과 열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각각 잃고 누이의 남편인 黃應澄(황응징)에게서 자라며 공부하였다. 24세에 嶺南東道兵馬使(영남동도병마사)의 裨將(비장)이 되고, 그 후 1583년 오랑캐를 소탕할 때 돌격장으로 큰 공을 세웠다. 1583년 35세 때 武科(무과)에 합격하여 會寧, 慶源判官(회령, 경원판관), 五衛都憁府 都事(오위도총부 도사)등을 지내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金堤郡守(김제군수)로 熊峙(웅치)에서 격정을 치루며 육탄전 도중 45세로 전사하였다. 肅宗(숙종) 16년(1690)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 나무비를 세우고 세번 더 세운 다음, 正祖(정조) 5년(1782) 마을 앞에 돌 비로 다시 세웠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 84호
이 건물은 조선 肅宗(숙종) 때 문신이자, 退溪(퇴계) 李滉(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거두인 성리학자 葛庵(갈암) 李玄逸(이현일, 1627~1704)의 종택이다. 원래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 있던 것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1992년 갈암 태실이 있던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4칸 반의 팔작 기와집으로, 오른쪽 측면으로 사람방과 사랑대청마루가 돌출해 있다. 사랑채 역시 팔작 기와집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안방과 사랑방, 사랑마루 그리고 책방은 대각선의 동일 평면상에 배치하였고, 안채와의 시선을 차단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원래는 건물이 갈암의 8대손 李壽岳(이수악)과 9대손 李晦發(이회발)이 항일투쟁의 거점으로 활용했던 곳으로, 역사성이 있는 종택이라 할 수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358호
이 건물은 조선 肅宗(숙종) 때 淸白吏(청백리)로 명성이 높았던 江坡(강파) 權尙任(권상임, 1622~1700)이 건립한 살림집이다. 건축당시는 'ㅁ'자형집이었으나 전면의 사랑채 부분은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어, 정침 전면 좌측에 사랑채를 다시 지어 건축당시의 정침과 함께 지금은 전체적으로 'ㄷ'자형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八作瓦家(팔작와가) 홑처마 'ㄱ'자형으로 구성된 정침 안채와 그 前面(전면) 左側(좌측)에 소실 후 재건한 박공와가 홑처마의 사랑채로 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우측으로부터 방, 마루, 마루, 방의 순서로 평면이 구성되어 있다. 사랑방 전면의 우측벽면을 따라 토담을 7자 남짓 설치하여 사랑채 來訪客(내방객)으로 하여금 안채시선을 차단시켜 주고 한편으로는 가옥의 내, 외부 공간을 분리시켜 주고 있음에 주목할 만 하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307호
이 건물은 조선 선조 때 載寧李氏(재령이씨) 영해 入鄕祖(입향조) 이애의 손자인 의령 현감 李涵(이함)의 차남 愚溪 李時亨(우계 이시형)의 살림집으로 건립된 후 현재까지 400년 가까이 愚溪派宗家(우계파종가)로 보존되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이함이 후세의 교육을 위해 조선 선조 37년(1604)에 충효당 종택을 완공하여 이애가 처음 건립한 옛날 집을 없애고 선조 40년(1607)에 우계의 살림집으로 건립하여 현재에 이른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ㅁ'자형 나무로 지은 木造瓦家(목조와가, 기와집)으로, 막돌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사각으로 된 기웅을 세운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진 조선중기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이다. 건립당시에는 대문채 및 행랑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중요민속자료 제 168호
이 건물은 재령이씨 입향조인 이애가 조선 성종 때 건립한 가옥이다. 일각대문을 바라보고 충효당이라 편액된 사랑채와 정침 뒤에 있는 대나무 숲에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나, 내실 왼쪽 사랑방이 안채보다 1칸 벗어나 있어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충효당이라 편액된 사랑채는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다. 정자와 같은 구성을 보이며, 후학의 교육장으로 사용되었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이 존재하는 조선시대 양반가로서 안채는 다소 변형이 있었으나, 가구수법이 조선 시대 주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충효당은 이황의 성리학을 계승 발전시켜 영남 성리학을 중흥시킨 갈암 이현일 선생의 출생지이다. 안채 좌측편에 위치한 사랑채는(충효당) 정자와 같은 구성으로 후학의 교육장 으로 사용되었고, 충효당 우측뒷면에는 一자형의 사당이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274호
이 건물은 조선 英祖(영조) 때 전북 長水縣監(장수현감)으로 재직한 知足堂(지족당) 權萬斗(권만두, 1674~1753)가 1727년 나무로 지은 木造瓦家(목조와가, 기와집)으로, 인량리 마을 뒷편의 산자락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건물의 뒤로 忠孝堂(충효당)이 있고, 오른쪽으로 晩槐軒(만괴헌)이 자리잡고 있다. 'ㅁ'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양날개집형상을 하고 있으나, 사랑채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마치 독립된 것처럼 보인다. 건물에 보관되어 있던 서책과 각종 유품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왜경과 빨치산에 의해 소각되고 현재는'長水公文集(장수공문집)'과 건물만 남아 있다. 건물배치를 볼 때 지역적 시대적 특징을 잘 알 수 있으며, 당시 생활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어 조선시대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정면 7칸, 측변 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ㅁ자형 모조와가 건물이다. 조선 영조때 장수현감으로 재직한 지족당 권만두(1674-1753)공이 지은 살림집으로 인량리 마을 뒤편의 산자락에 위치한다. 지금은 수리중이라 지족당 앞 노거수만 사진으로 담아올려보았다.
조선 단종(재위 1452∼1455)의 외숙부인 권자신이 세조(재위 1455∼1468)에게 화를 당하고 그 아들 오봉권책이 창수땅 갈천리로 유배되어 여생을 보냈다. 오봉 권책의 종가집이다.
오봉종택은 벽산정 등 빼어난 건축물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는 등 500년 세월의 연륜이 배어난 기품있는 공간이다. 17대손 권성기씨(태왕그룹회장)가 중수해 문화공간으로 가꿔놓았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209호
이 건물은 조선후기에 건축되었으며 원래 정침 9칸, 외당 3칸, 사당 1칸 규모였으나 현종 9년(1843)에 申在洙(신재수, 1798~1855)가 와가 17칸, 초가 5칸 규모로 개조하였다 한다. 그 후 그의 손자 申義泳(신의영, 1842~1905)이 현재의 규모로 확장, 개축하였다. 晩槐軒(만괴헌)이란 당호는 영해향교 태화루를 개수하고 병자~정측년(1816~1817)의 흉년에 많은 시혜를 한 공으로 조정에서 嘉義副尉(가의부위)를 특사받은 신재수의 號(호)이다. 조선후기의 가옥 변천상을 살필 수 있는 주거 건물로서 안방 뒷부분의 도장방과 상방 전면의 툇간 등의 구성은 이 지방 ㅁ자형 주택의 전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사랑채 부분의 독립성이 돋보이는 배치 구도를 지니고 있다. 정면 7칸, 측면 7칸의 정침과 정면 2칸, 측면 1칸의 사당으로 된 'ㅁ'자형 목조와가 건물로 만괴헌이란 당호는 영해향교 태화루(태화루)를 개수하고 1816년에 많은 시혜를 한 공으로 조정에서 가의부위를 특양한 신재수 공의 호를 따서 당호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61호
이 건물은 통정대부 병조참의를 지낸 용암 김익중의 저택으로, 조선 영조 4년(1728)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6칸의 'ㅁ'형으로 남행해 있고, 중문의 왼쪽으로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시선차단을 위한 담장이 있으며, 좌우로 귓방과 도장을 두었다. 특히 귓방 앞으로 외부로 통할 수 있게 만든 퇴칸이 있는데, 이 지방에서 특색적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또한 안방 위쪽으로 고방을 두고, 고방 왼쪽으로 대청을 향해 곳간이 1칸 돌출되어 있는데, 'ㅁ'주택에서 곳간이 돌출되는 경우는 봉와, 울진 등지에서는 종종 보여지나, 이 지역에서는 흔치 않은 경우이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평면형태가 민가 유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창수면 인량리에 있는 고가로 조선시대 병조참의를 지낸 김익중의 종택으로 1728년에 지어진 정남향의 ㅁ자형 건물로 안방과 대청마루, 사랑칸등이 소박하게 지어진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이며, 건축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458호
이 건물은 조선중기의 문신인 賀淵公派(하연공파) 李仲樑(이중량, 1504~1582)의 종택이다. 이중량은 聾巖(농암) 李賢輔(이현보, 1467~1555)의 넷째 아들로 중종 23년(1528)에 進士試(진사시)에 합격 하였고 중중 29년(1534) 式年試(식년시)에서 丙科(병과)로 급제하여 내외의 여러 관직을 거쳐 선조 3년(1570)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5칸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문칸 좌측 사랑채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사랑 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삼벽당은 조선 중기에 건립한 것으로 전하여 오고 있으며, 주요구조부의 치목수법이 정교하여, 특히 대청 배면에 설치된 판문의 중간설주의 흔적은 옛 치목수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삼벽당은 나래골의 용암종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1호) 바로 뒤쪽의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 좌향은 정남에서 서쪽으로 15° 가량을 틀어서 자리 잡았다.
▲ 애국지사 함양박공 의연.의열.의훈 사적비 © 박태선기자 | |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33--6
이사적비는 영덕이 낳은 한집 삼형제가 20대 전 후의 나이에 이역만리 만주로 망명하여 가족의 안위나 자신의 목숨마저 돌보지 않고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세분 선열들의 청사에 길이 남을 항일 투쟁 정신을 기림으로써 그 분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후세 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2000년 건립한 현충시설물로 주요 공적은 다음과 같다.
* 박의연(1880. 9.20 ~ 1943. 6.1) 1950년 신돌석장군 의병진에 참가하여 의병운동 전개, 만주 하서구 남흥학교를 설립하여 동포들을 계몽하였으며 1919년 일경에 피검되어 사형장으로 가는 도중 탈출, 상해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1943년 순직.
* 박의열(1889. 1.21 ~ 1930. 11.17) 1913년 만주로 망명하여 부민당을 조직하고 검찰감으로 활동하였으며, 빈강현에서 동원학교 교장으로 군관 양성 및 민족 교육에 헌신하던 중 일인 밀정에 피살. 1930년 순국. * 박의훈(1895. 10.22 ~ 1983. 6.19) 1913년 만주 신흥부관학교 졸업 후 독립군결사대와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는 등 독립운동전개, 광복 후 민족정기 선양 고양에 전력, 1990년 삼형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삶의 향기가 가득한 문화예술전문분야의 선두주자“문화저널21” [저작권자ⓒ문화저널21 & www.mhj21.com.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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