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로 그리고 홀로/ 최우창
“걸음마 걸음마 걸음마”
“섬마섬마 섬마섬마 섬마섬마”
“꼬대꼬대 꼬대꼬대 꼬꼬대”
“고노고노 고노고노 고노고노”
“따로따로 따로따로 따 따로”
넘어질세라 자빠질세라
어른들의 기도 같은 간절에 아기는
홀린 듯 두발로 직립했다
서로 서로의 응원과 감탄사에
아기는 기어이 홀로 우뚝 섰다
서로가 홀로를 이루었다
숲속의 갖가지 나무들처럼
서로 어우렁더우렁 살지만
살아내야 하는 건 속리산 정이품송이다
살아내야 하는 건 독도다
가는 것 또한 같을세라
홀로홀로 서로서로 산다
서로서로 홀로홀로 간다
나도 강아지도 떡갈나무도
모두 다
잎새처럼 살다가 단풍처럼 간다.
2. 구월이네요/ 최우창
구월이네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요
새털구름이 바다를 순례하고 있네요
구월이네요
고개를 돌려 사방을 봐요
꽃무릇이 태양을 불사르고 있네요
구월이네요
고개를 숙여 대지를 봐요
시든 풀잎에서 풀 맛이 나네요
구월이네요
고개를 기울여 우주를 들어봐요
밤 귀뚜리가 귀뚤귀뚤 걸어오네요
구월이네요.
3. 괜찮아요 / 최우창
눈만 뜨면 아내에게 대뜸 묻는다
몸은 괜찮아? “예”
아내가 박꽃처럼 웃으며 되묻는다
몸은 괜찮아요? “응응”
그러면 괜찮은 거다
서로서로 두루두루 낯빛을 살피면서
간간이 묻는다
괜찮아? 괜찮아요?
몸이 괜찮아야 마음도 괜찮다
마음이 괜찮아야 몸도 괜찮다
당신이 괜찮아야 나도 괜찮다
나만 괜찮은 건 괜찮은 게 아니다
모두가 그렇다
세상 모든 게 그렇다.
4. SNS / 최우창
입은 궁금하다
아니, 입이 출출하다
손가락이 말을 하니
입은 말을 잃고
입을 닫았다
손가락은 할 말이 넘쳐
분주하다
양손 엄지는 경주마처럼
엎치락뒤치락 말을 탄다
검지도 말에 가담하여
추격에 나선다
중지는 콩콩콩 뛰놀며 말을 캔다
입은 가고 손가락이 왔다
손가락 세상이라,
너나없이
입은 궁금하다
입은 배가 고프다.
5. 낙엽 편지 / 최우창
가을을 돌돌 말아 쥔 단풍잎을
고이고이 눌러 펴고
수를 놓듯, 가슴에
울울총총 글을 박는다
멋쩍어, 평생을 울대 속에서만
맴맴 대든 그 말을
생각만 해도 취기처럼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르는 그 말을
다짐하듯 꾹꾹 눌러 씁니다
“당신을 향한 내 색은 언제나 단풍입니다.”
6.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최우창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냥 네가 되어 보는 거야
사과를 좋아하면 사과가 되어 보고
밤을 사랑하면 밤이 되어 보는 거야
내가 애쓴다고 네가 될 순 없지만
네가 선 주흘산 능선에 나도 올라보는 거야
네가 신은 굽 높은 구두를 나도 신어 보는 거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사과에 밤을 동여 묶지 않고
밤에 사과를 얽어매지 않아
그냥저냥 무심한 듯
사과는 사과로 밤은 밤으로만
멀찍이 서서 바라보고 또 보는 거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사과나무에 밤을 걸려고 매달리지 않고
밤나무에 사과를 영글려고 까치발 세우지도 않아
설익은 생짜라도
사과나무에 사과가 밤나무에 밤이
가만가만 구슬땀처럼 맺혀가는 것을
건너에서 말끄러미 바라보는 거야
사과로 밤으로 야물게
바라다보는 거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7. 집사님과 형수씨/ 최우창
돌아가시기 전
교회에 다녔던 엄마는
간병하던 아내를 보고
"집사님 사랑해요" 하셨다
인사성이 밝았던 아버지는
간병하던 아내를 보고
"형수씨 수고하십니다." 하셨다
병상의 엄마와 아버지는
맏며느리가 집사와 형수로 보였던 것이다
집사든 형수든
아내에게
"사랑한다, 수고한다."고
두 분은
그렇게 인사를
유언처럼 남기고 가셨다
늘 하시던 대로
8. 주름 /최우창
주름을 잡고 살려다가
주름을 잡히고 말았네
폼나게 주름을 잡고 살려다가
생은 휴지처럼 구겨지고 말았네
잡힌 구김 좍좍 펴려고
온갖 인두질 하지만
얼굴도 몸도 마음도
한번 접힌 구김살은
주름치마처럼 쉬이 펴지질 않네
주름을 잡고 살려다가
주름에 잡혀
주름투성이가 되어버린 생(生)
늦겨울 얼음판은
금이 나야 금이 풀리지만
생의 주름 잡힌 금은
산골짜기 다랑논처럼
해가 갈수록 산 위로 올라가네
톺아보니
나만, 홀로이, 웃음기 빠진 곳엔
생은 거북등처럼 주름 잡히고 금이 가고
혼자 혼자서만 살다 가네.
9. 엄마와 아부지/ 최우창
아부지,
엄마가 오래 사셔야 아부지도 오래 사세요
아부진 내 말을 엿장수에게 파셨다
땅이 겨울잠에서 기지개 켜기 바쁘게
아부진, 엄마를 재촉하여
고추 심고 마늘도 심고
고구마 심고 참깨도 심고
기타 가지가지, 가지도 심으셨다
엄만, 결국 참깨 순을 댕강댕강 치다가
큰 탈이 나서
참기름 휘휘 뿌리고 싹싹 비빈
비빔밥 한 그릇도 못 드시고 가셨다
아부진, 말없이 습관처럼
엄마와 마지막으로 심은
고추를 따서 땡볕에 말리고
마늘도 엮어 주렁주렁 달고
고구마도 캐서 마대에 큼직큼직 담고
참깨도 탁탁 털어 거두시곤,
이듬해 2월 초
서둘러 엄마를 따라가셨다
아부진, 엄마가 없어서 농사짓기가
싫으셨나 보다
아부지의 휜 등처럼 굳어버린 농사 습관도
엄마를 이기진 못했다
아부지, 엄마가 오래 사셔야
아부지도 오래 사세요
엄마도 아부지도 안 계신 처마 끝엔
제비도 빈집이다.
10. 점촌 장날/ 최우창
6월 28일 점촌 장날,
발화(發火) 직전의 돋보기 같은 뙤약볕을
정수리에 한가득이 이고
꼬부랑 할매 두 분이 장에 오셨네
뭘 사러 오셨는지
두 분 다 한 손엔 지팡이를
다른 손에 검은 봉지를 들고
한길을 건너는 데 차들도 장날이네
꼬불어진 허리 위로
자라목처럼 머리를 추켜들고
불안히 좌우를 살피던
좀 덜 꼬부라진 할매가
좀 더 꼬부라진 할매를
부축하며 겨우겨우 한길을 건너셨다
그리고 두 분은 약속을 한듯이
동시에 가쁜 숨을 들이쉬며
꼬부라진 허리를 엉거주춤 바루셨다
덜 꼬부라진 할매와 더 꼬부라진 할매는
어떤 사이실까? 며느리와 시어머닐까?
딸과 엄마일까? 동서일까?
동네 형님과 동생일까?
쨍쨍한 햇볕처럼 분명한 것은
먹고 살고, 먹여 살리려 허둥지둥 대다
시나브로 꼬부라졌을 것.
열 손가락 되는 새끼들에게
허기진 빈젖 물리고 물리다 보니
더 더 더 꼬부라졌을 것.
6월 28일 점촌 장날,
덜 꼬부라진 할매와 더 꼬부라진 할매가
장바닥에 '쌍기역(ㄲ)'을 쓰면서
정겨이 장을 보신다.
11. 작은 하나/최우창
시인이 되고자 말고
가시덤불 속 하얀 찔레꽃을 살그니 보라
스승이 되고자 말고
교실 속 학생들의 표정을 살그니 보라
도사가 되고자 말고
개울 속 버들치들의 유영을 살그니 보라
효자가 되고자 말고
어버이 얼굴 속 고랑을 살그니 보라
정치가가 되고자 말고
뭇사람 속 입꼬리를 살그니 보라
철학자가 되고자 말고
시장 속 장꾼들의 목청을 살그니 보라
신자가 되고자 말고
동네 속 이웃들의 옷깃을 살그니 보라
거목이 되고자 말고
나무 속 나이테의 결들을 살그니 보라
명의가 되고자 말고
가슴 속 티눈 같은 멍울을 살그니 보라
살그니 보라
살그니 보라
그곳에 푸른 태평양이 있다
그곳에 보석 같은 은하가 있다.
12. 노부부(老夫婦)/최우창
상주 화북 청화산 휴게소
아내가 먼저 차에서 내려
휴게소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문은 여러 개
아내가 갑자기 숨었다
남편이 두리번두리번 아내를 찾는다
이 문으로 들어갔다 이내 나왔다
아내를 찾질 못한 듯하다
두 눈이 놀란 토끼처럼 쫑긋 하다
서둘러 저 문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나왔다
별안간 숨바꼭질 놀이가 되었다
술래가 된 남편은 두리번두리번
아내는 머리카락도 보이질 않는다
얼굴이 석고상이다
다른 문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다시 나왔다
한여름 강아지처럼 숨을 헐떡인다
아직도 찾지 못한 것 같다
먹장구름 가득 낀 표정
술래가 들락거리길 여러 번
숨은 이가 기다리다 못해 벌컥 나왔다
엎어질 듯 쫓아가 아내를 끌어안고
아기처럼 잉잉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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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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