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유덕사의 석불이 청와대에 있는 까닭은?
총독부시절 강제로 옮겨진 '청와대 불상'
이젠
박물관에 옮겨 문화재로 대접해야
▲ 청와대의 석조여래좌상.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이며,
근년에 보호각이 새로이 만들어졌다.
1912년 11월 8일,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환갑의
나이로 30여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이날 경주 토함산에 올랐다. 목적지는 석굴암이었다. 하지만 무너져 내리는 석굴암을 단지 구경하려는 생각으로
변변한 길조차 없던 가파른 산길을 거침없이 올라섰던 것은 아니었다.
석굴암을 통째로 경성(현 서울)으로 옮겨오려던 계획이 실행
가능한 것인지를 몸소 확인하기 위한 것이 실제 목적이었다. 그 역시 별도리가 없음을 알았음인지 하릴없이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는 네 글자를
바위에 큼직하게 새겨놓고 내려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이듬해 봄부터 개시된 석굴암 해체.수리공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콘크리트 범벅이 되어 결국 아니건드림만 못하게 되어 버린 석굴암의 해체복원은 데라우치가 직접 석굴암을 탐방했던 사건의 결과물이었다. 그의 경주
순시로 만신창이가 되거나 그후 행로가 뒤죽박죽 되어버린 것은 비단 석굴암 뿐만이 아니었고 아주 별난 운명의 불상(佛像)이 하나 더 있었다.
그 당시 데라우치의 경주방문 일정은 2박 3일. 그해 11월 7일 대구를 출발하여 경주로 들어와 경주 일대의 고적유물을 두루
살펴보고 이틀을 머문 뒤 포항 쪽으로 빠져나가 영일만에 대기하던 광제호(光濟號)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로 직항하는 행로였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2년 11월 10일자에는 "총독은 출영하기 위하여 도열한 일군의 학생생도와 이를 인솔한
교원에게 정녕 근황을 물어본 뒤 군청으로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중요한 일본사람 조선사람을 접견하고 훈시를 하고 나서 재판소, 경주지청, 경찰서,
농산물진열장 등을 순시하시고 7일은 군 청사에서 숙박하였다"고 그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딱히 어디였는지 그 장소를 알 수는
없지만 순시 도중 데라우치의 눈길을 사로잡은 석불상이 하나 있었다. 이미 원래의 자리를 떠나 경주읍내의 모처로 옮겨진 상태였던 그 불상은 원래
유덕사(有德寺)라는 절터에 남아있던 것이었다. 그것을 우연찮게 데라우치가 유심히 살펴보더라는 것이다. 그것도 두 번 세 번 거듭하여 말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당장 벌어진 일은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데라우치가 떠난 다음이었다.
당시 경주금융조합의 이사였다는 '고히라
료조(小平亮三)'라는 작자가 총독이 내심 그 석불에 마음을 두고 있다고 지레짐작하고 데라우치가 일본에 출장을 떠난 동안 재빨리 그것을 경성에
있는 총독관저에다 옮겨놓았던 모양이었다. 시체말로 알아서 긴 것이라고나 할까.
당시 총독관저는 남산의 왜성대(倭城臺), 즉 우리에게
남산의 안기부 자리(중구 예장동)로 더 익숙한 곳이 바로 거기이다. 그리고 나중에 북악산 아래에 새로이 총독관저가 지어진 것이 1939년이니
무려 27년을 그곳에서 무심히 세월을 보낸다. 이 건물의 완공과 더불어 경주의 불상 역시 따라 움직인 것은 당연한 일.
서울로 옮겨온 직후 <조선고적도보> 제5책(1917)에 그
모습이 잠깐 드러내기는 했으나, 그때 경주에서 올라온 이 석불의 존재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한 탓인지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에는 이 석불을 새로이 발견한 것인 양 호들갑을 떠는 기사 하나가 실렸다. 그 제목이 이러하다.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 즐풍욕우 참아가며 총독관저 대수하에, 오래 전 자취를 감추었던 경주의 보물, 박물관에서 수연만장"이라고 말이다
▲ <매일신보> 1934년 3월 29일자.
총독 관저의 미남석불은 이때 발견 아닌 발견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당시의 발견 아닌 발견에도 불구하고 이 석불은 박물관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그 연유는 무엇이었던가? "그리하여 박물관에서는 수연만장 어떻게 박물관으로 가져왔으면 하고 있으나 그러나 이미 총독관저의
물건이 되어 있는 이상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형편이므로 총독의 허가를 얻어 박물관에 진열하여 보려고 희망하고 있는 중이라더라." 말하자면
총독의 권세에 눌려 말도 꺼내지 못한 꼴이었던 셈이다.
몇 년 후 오가와 게이기치라는 총독부 박물관 기사가 총독관저에 있던 그
석불의 대좌가 경주박물관에 들어있다는 보고를 받고 경주를 탐방했을 적에 유덕사 석불의 이건(移建) 경위를 재조사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때에도
여전히 박물관으로 옮겨지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권력자의 권세를 누가 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해방이
되고 총독관저가 경무대가 되고 다시 청와대가 되고 정권의 변화가 거듭되는 동안에도 한번 발목이 잡힌 불상은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존재가 별로 세상에 드러나지도 않았다. 그저 1974년 1월 15일자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는 것이 자그마한 변화라면 변화.
그것도 특별한 이름도 없이 지정명칭이 그냥 '석조여래좌상'이란다. 하지만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다시 세월이 흘러 미남석불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 1994년의 일이었다. 그 시절
구포역 열차전복이다 아시아나항공기 추락이다 서해페리호 침몰이다 성수대교 붕괴다 충주호유람선 화재다 하여 온갖 대형참사사건들이 잇달아 터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지자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오면서 경내의 불상을 치워버린 것이 원인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던 것이다.
그러자 청와대는 고심 끝에 그해 10월 27일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불상이 제자리에 있음을 공개하는 웃지 못할 일을 벌이기도
했다. 1989년에는 대통령 관저가 신축되면서 그 자리에서 100m쯤 올라간 현재의 위치로 이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이름마저
어설픈 '석조여래좌상'. 이 석불이 최고권력자의 집으로 들어온 지도 90년이 넘어선다. 그리고 이제 그 주인이 바뀌는 때가 되었다. 그런데 그
석불이 여기에 더 머물러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굳이 종교적 편향의 시각이 아니더라도 해방된 지 반세기를 훨씬 넘긴
지금까지 식민지시대의 유산을 그대로 끌어안고 갈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진작에 털어 버렸어야 할 일제의 잔재가
아니었을까?
일제시대에 벌어진 숱한 문화재 파괴행위를 탓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돼버린 오늘 경주석불을 온전하게 제자리로 돌려놓기도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그러니까 설령 옮기더라도 박물관으로 옮기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일 수밖에 없다. 일차적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그렇지
않다면 제 고향에 가까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기는 것도 합당한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청와대의 미남부처는 이제 박물관으로 옮겨져야
한다. 이번에는 꼭 옮겨져야 한다. 최고권력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90여년 전 석굴암을 짓이겨놓은 테라우치 총독의 업보를 벗어던지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유덕사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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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나무 아래 좌정했으나 비바람에 시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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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남부처' 발견했다는 매일신보 1934년 3월
29일자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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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여래상(釋迦如來像)의 미남석불(美男石佛), 즐풍욕우(櫛風浴雨) 참아가며 총독관저(總督官邸)
대수하(大樹下에), 오래 전 자취를 감추었던 경주의 보물, 박물관(博物館)에서 수연만장(垂涎萬丈)"
석가여래상으로
경주 남산에 있던 미남석불(美男石佛)이 지금으로부터 여러 해 전에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었다. 그 얼마 후에야 미남석불이 어디로 도피한 줄을
안 총독부박물관(總督府博物館)에서는 그 동안 그의 간 곳을 찾아오다가 작27일에야 왜성대(倭城臺)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비목(榧木) 촉탁이 급히 달려가보니 경관힐소(警官詰所) 뒤 언덕 큰나무아래에 천연스럽게 좌정은 하고 있으나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미남석불은 시가(時價)로 따진다면 적어도 오만 원 이상은 할 것이나 지금 세상에 있어 돈 아니라 금을 가지고라도
도저히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 좌신(座身)의 높이가 3척 6촌 슬폭(膝幅)이 2척 9촌이오 또 연좌대(蓮座臺)에는 천녀(天女)를 아로새긴
엄청난 것으로 신라의 유물로서 석불과 함께 다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참고자료이다.
이에 대하여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어떻게 되어서
그 미남석불이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제1회 재등(齋藤) 총독시대에 어떤 우연한 일로 관저로 올라온 듯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물관 홀에 진열되어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와 경주의 같은 골짜기에 안치되어 있던 것인데 지금 풍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하고 말한다.
그리하여 박물관에서는 수연만장(垂涎萬丈) 어떻게 박물관으로 가져왔으면 하고 있으나 그러나
이미 총독관저의 물건이 되어 있는 이상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형편이므로 총독의 허가를 얻어 박물관에 진열하여 보려고 희망하고 있는 중이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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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불상 크게
훼손
청와대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이 전시가 힘들 정도로 훼손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석불은 1994년 김영삼 대통령 당시 ‘불상을 이전해 각종
사건사고가 일어난다’는 소문으로 청와대가 불교계에 직접 불상을 확인시킨 ‘청와대 불상 소동’의 주인공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최근 “서울시 문화재위원들이 석불을 실사한 결과 오른쪽 어깨부위가 균열되고
불상 군데군데에 미세하게 금이 간 것으로 조사됐다”며 “조만간 보존처리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훼손의 정확한 원인은 확인되지
않지만 자연풍화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며 “문화재위원들이 지난달 말 심의를 통해 보존처리 결론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오는 9월 불교중앙박물관 개관 특별전에 대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그러나 전시회에 나갈 경우 훼손이 심화될 수 있다는 문화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조계종 총무원 관계자도 “서울시로부터 ‘석조여래좌상의 보존처리가 필요해 전시회 대여가 힘들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이 석불이
전시회에 나올 경우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라 기대가 컸는데 아쉽다”고 밝혔다.
학계에서 ‘미남 불(佛)’로 불리는
석조여래좌상은 높이 1m10㎝로 풍만하고 근엄한 얼굴, 당당한 체구 등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양식이며 통일신라시대(8~9세기)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 유덕사 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석불은 일제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가 1927년 총독부 관저를 신축하면서 지금의 청와대 뒷산으로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불은 대통령 관저 바로 뒷산에 있어 경호상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그동안 불교계 일부 인사들에게만 공개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