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살고있는 경직된 자연사 개념으로 볼 때에 물소라는 동물과 현재 태국,베트남 경작지에서 볼수 있는 짚모자를 쓴 농부의 모습은 북위 32도선 이남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라 생각하고 있다.
홍산에서 발굴된 옥기중에는 물소상의 옥기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적어도 5,500년전의 농경문화를 잘 표현한 유물로서 그 형태와 가공도의 정교밀도를 보아 현대의 조각가들 만큼이나 생생한 제작기술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의문점이 생기지 않는가?
홍산지역은 북위 42~43도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사계절이 뚜렷하고 겨울에는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 한국과 기후차이가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순지대 ,아열대지역에서나 볼수 있는 아시아 물소와 짚모자를 쓴 농부가 소등에 타고가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니 믿을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홍산문화의 주체자들이 6,000년전 그 먼 남방까지 가보았다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것이다.그러나 이런 현대 자연사적인 편견과 사서 내용위주의 고정관념은 마치 1,400년전에 바다였던 요녕성 요택에서 이세민이 고구려군을 추적하다 철수했다는 허무맹랑한 愚를 범하고 있는것이다.
자연과학자들의 대륙의 자연환경 연대별 분석에 따르면 기원전 2,000~3,000 년전 빙하기의 흔적은 이미 사라지고 현재보다 평균기온이 4~5도 높은 시기가 사이사이에 존재했다는 것으로 현재의 하남성 <앙소문화> 유적에서 물소와 하마의 온전한 뼈가 발굴되었다는것은 시사하는바 크다. 하남성은 중위도 지역으로 현대 상식으로는 <물소와 하마>의 식생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역이다.
물소(水牛)
마찬가지 예로서 ,서토에서 발견되는 竹簡의 지역은 하북과 태행산맥을 기점으로 서부와 하남성 남부로 산서성까지 식생하였으나 해안 동부지역에서는 죽간이 그리 많이 출토되지 않는다. 왜일까? 우리의 기존관념으로는 종이가 만들어 지기까지 木簡과 竹簡을 거쳐 한나라 채륜이 만들었다는 종이로 넘어 왔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인것이다.
<녕하성> 서부에서 발견된 최초의 종이 일명 롭 노르紙는 기원전 2세기를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고 식물줄기와 넝마를 섞어서 제조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무엇으로 의사를 기록하고 전달하였는가? 같은 기후 자연환경하에서 만들어진 비단인것이다. 따라서 비단에 글을 쓰는 역사에 이어 이것도 저것도 없는 지역에서는 목간이나 죽간에 글을 쓰고 행정문서로 남겼다고 볼수 있다.
글씨의 역사는 자연물에 석각/그림-> 토기에 새기기->거북등뼈나 소뼈에 새기기-> 누에고치를 두드려서 얇게 편다음 글쓰기 -> 직조된 비단위에 글쓰기-> 종이->목간/죽간->한지의 순서로 발전되어 왔다 볼수 있다. 어찌하여 고려지(韓紙)의 질이 중국의 그것보다 좋은가를 따져 본다면 이해가 되는일 일 것이다.
서지학 역시 중요하지만 자연과학의 결과에 비중을 두지 않으면 서지학적 오류에 빠질수 있는것을 실증해주는 일들이 과학적으로 많이 이룩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비중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필자가 볼때 홍산지역에서 살던 문화인은 분명히 북위42도 근방에서 물소를 보았거나 그보다 남부 인접지역에서 실물을 본후 농경사회의 상징으로 玉器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매우높다.
또한 이 옥은 중공사학자도 밝히고 있듯이 평안북도에서 서불으로 약 80Km떨어진 요녕성 岫巖縣 의 것으로 通化와 紅山과의 삼각지점에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지리 역사적으로 누구의 조상이며 역사로 보아야 하는가 ?
法보다 우선하는것이 慣習 이다.
심제 글.
첫댓글 님께서 역시 날카로운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습도가 낮은 점 등 유물보존 조건이 뛰어난 중국에서 유독 그림유물이 우리나라만 연대상 뒤떨어지는 이유를을 설명해 주는것 입니다. 바로 종이나 비단의 품질이 뒤떨어지는 겄이지요
그리고 홍산시대의 소는 물소가 대부분이고 중심이었음이 유물로 확인 됩니다.
님의 주장이 밝혀지고 인정받는 시기가 가까이옴이 느껴집니다.
적봉 홍산 땅 인근과 노합하 지역이 그 옛날에도 농경하기에 적합하였던 곳으로 보이고,
그 지역 元寶山? 동편에 黑水(鎭)과 白山(鄕) 사이의 지역이 어쩌면 바로 그 유명한 "黑水白山間"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