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편린
공항 문이 활짝 열렸다. 한동안 빗장이 걸려 있었다. 두려운 감염병 때문이다. 수많은 이들이 해방된 기분으로 삼삼오오 몰려든다. 공항은 인산인해다. 조그만 백팩 하나 메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섰다. 육로는 비가 촉촉이 내렸는데 하늘에 오르니 딴 세상이다. 하얀 솜털 구름 사이로 비행기가 헤집고 나간다. 손녀는 예쁜 하늘을 연신 사진에 담는다. 개구쟁이 손자는 스쳐 가는 구름을 잡으려 안달이다. 구름 속을 날던 비행기가 낯선 섬에 내려놓았다.
섬은 하루해를 삼키고 있다. 붉게 물들어가는 서녘 하늘에 해가 지자, 칠흑처럼 어둠이 깔린다. 기내에 앉아 있던 이들이 내리려고 웅성거린다. 마치 공수부대 낙하병처럼 선반에 있던 배낭이나 가방을 꺼내어 들고 통로에 대기 중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뒤꽁무니를 슬슬 따라갔다. 그들은 수화물 컨베이어벨트 주변으로 몰린다. 크고 작은 짐가방을 찾기 위해서다. 짐이 빠지고 수화물 컨베이어벨트가 멈춘다. 어떤 이가 당황스러운 표정이다. 짐을 찾지 못한 모양이다. 문득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누구나 여행하며 기억의 편린은 하나쯤 있다. 한때 외국을 밥 먹듯 들락거렸다. 국제교류단체를 방문하거나 무역전시회를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가방을 소매치기당하거나 항공사의 부주의로 짐을 찾지 못한 적이 있다. 남미로 무역전시회를 가던 길이었다. 직항이 없어서 파리를 경유했다. 바로 이어지는 항공편이 없어서 댓 시간 공항 바닥에 앉아 있다가 비행기에 올랐다. 영화를 몇 편 보아도 대서양 상공이다. 허리가 아프고 오금이 저려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기내에서 돌아다니며 온갖 궁상을 떨다가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떨어졌다.
찰찰 이 불찰인지 모르겠다. 수화물을 옮길 때 조심하라고 붉은색 끈으로 가방을 동여매 놓았다. 남반구라 두 계절 입을 옷을 챙겼다. 이뿐 아니다. 무역전시회를 도와준 이에게 인사할 선물로 철화분청 사기와 백제금동대향로를 몇 점 가져갔다. 기내 문이 열리자 일찍 수화물을 찾을 심산으로 서둘렀다. 전광판에서 안내하는 수화물 찾는 곳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수화물 컨베이어벨트 주변에 모여든 이가 빼곡하다. 자기 수화물을 찾느라 아우성친다. 돌아가던 벨트 위에 짐가방이 대부분 사라졌다. 모든 짐이 빠지고 수화물 컨베이어벨트가 멈추더니 바로 다음 비행기 수화물 안내 문자가 뜬다.
몹시 당혹스러웠다. 여러 번 환승을 해보았지만, 처음 겪는 일이다. 홍콩에서 갈아타고 나이로비를 가거나, 시애틀에서 북미 도시로 다녀보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황급히 공항 수화물 안내 창구에 가서 물었더니 한마디 툭 던진다. ‘나 지스트’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재간이 없었다. 한참 실랑이하다가 짐을 찾지 못하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무역전시회 일정 때문이다. 호텔 전시장에 도착하니 현지 구매자들이 백여 명 모였다. 사전에 코트라를 통하여 무역전시회 정보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시작했다. 우리 기업 대표와 현지 구매자들 간 면담을 주선하고 한숨 돌렸다. 때마침 현지 대사가 격려차 찾아왔다. 국립외교원에서 알게 된 이다. 낯선 이국땅에서 지인을 만나니 가족 상봉한 것처럼 반갑고 기뻤다.
그는 점심시간이 되자, 인근에 있는 재키 클럽으로 가자고 한다. 유럽풍의 고급스러운 식당이다. 낯부끄러운 일이나 공항에서 겪었던 일을 그에게 이실직고했다.
“여행길은 인생길 같아요. 짐은 가벼울수록 좋아요.”
그는 웨이터에게 와인을 주문하며 웃는다. 가방에 바리바리 넣어 다니는 이는 초보 여행자라며 나무란다. 짐 때문에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집에 가보면 가방이 먼저 도착해 있을 거라며 안심시킨다. 창가에서 항구가 내려다보인다. 멀리 탱고 춤의 고향인 보카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가 세계 여행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점심 내내 들려주었다. 그와 헤어지며 쇠가죽으로 만든 자그마한 백팩을 건네받았다. 그곳에 세면도구와 서류를 넣어 메고 칠레 산티아고와 브라질 상파울루 무역전시회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니 그의 말처럼 가방 두 개가 도착하여 나란히 있다. 가방을 열어보니 귀중한 물건은 깨지고, 찌그러지고 만신창이 되어 버렸다.
그 대사의 말을 곱씹어 본다. ‘여행길은 인생길이다.’ 귀중한 가방이 여행길에 짐이 되고 큰 재물이 인생길에 짐일 될 수 있다. 일전에 지인의 말이 기억난다. 십억 원 가진 이는 열 가지 걱정하고 백억원 가진 이는 백 가지 걱정한다며 넋두리했다. 그는 수백억 원대 상가 빌딩을 가진 친구다. 역설인지 모르나 월급쟁이인 나를 부러워했다. 사실 그의 아들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취직하지 않고 빈들빈들 대며 놀고 있다. 그의 상가건물은 관리인이 있으나 머리가 아프다. 세입자가 들며 날며 법정 다툼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칫 짐에 눌리면 짐의 노예가 될 것 같다. 무거운 짐을 끌어 않고 애면글면할 일인가.
섬으로 함께 놀러 온 이들이 보인다. 가는 곳마다 그들과 마주한다. 그들은 짐을 풀었다 쌌다 하느라 바쁘다. 저녁노을만 있는 줄 알았다. 모처럼 아침노을이 다가온다. 노을 사이로 맑은 햇살이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우리가족은 물 한 모금 백팩에 넣어 메고 구름처럼 바람 따라 길을 나선다.
첫댓글 올려주신 유병덕 수필 <기억의 편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