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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1997년도 미술 평단은 그 내용에 있어서나 외양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했다고 진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필진의 대거 등장, 수많은 학술 발표회, 쏟아져 나온 미술 저서 등 내용면에서나 외양면에서 다양하고도 풍부한 전개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몇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볼까 한다.
Ⅱ. 신진 필진의 대거 등장
신문, 미술 전문지, 학술지, 기타 언론 매체를 통해 미술에 관한, 특히 비평적 행위로 간주할 수 있는 글을 발표하고 있는 필자의 수가 약 100명을 상회하고 있음이 1997년도의 통계다. 물론 이 숫자는 1997년 한 해만의 갑작스런 현상은 아니고 최근 약 5, 6년간 꾸준히 증가 일로에 있었던 수적 증가의 결과라 할 수 있다. 80년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적 증가이다. 고작 10명 내외가 이쪽 저쪽에 겹치기 글을 써야 했던 것이 80년대 이전까지의 상황인 점을 감안한 다면, 이는 엄청난 변모의 내역을 반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새로운 필진의 확충은 필자의 다양한 계층의 포괄을 뜻한다. 지금까지 주로 미술 평론 분야 에 종사해왔던 이들은 직업적인 미술 평론가들이었다. 그러나 최근 5∼6년간 미술 평론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을 분류해 보면, 미술 평론가, 미술사가, 미학자, 큐레이터, 미술 전문 기자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진 미술 평론가의 등장이 현저한 만큼 미술사 전공, 미학 전공자들의 적극적인 글쓰기도 두드러진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편이다. 여기에다 미술관, 화랑의 전문 스태프인 큐레이터와 미술지의 전문 기자들까지 가담하고 있는 실태여서 다양한 필진도 필진이려니와 다양한 필진에 따르는 다양한 시각과 논점의 차이도 또한 두드러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의 풍요로움에 못지 않게 무질서한 신진들의 등장에 의해 가치의 혼란을 일 으키는 일면도 없지 않은, 부정적인 측면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다. 개인전 팸플릿에 서문 한 편 쓰는 것으로 자칭, 타칭, 미술 평론가로 표기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어엿하게 공기로 자인하는 미술 전문지에서까지 미술 평론가로 남발하고 있어 평론가의 자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터이다. 그들이 남발하는 어설픈 논리나 수사학은 미술 평론을 풍요롭게 만들기보다 평론의 수준을 끌어내리는 해악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 전문지가 비평의 정화 또는 비평의 틀잡기란 차원에서 이에 대한 타개책을 강구해 나가야 하리라 본다.
급격한 신진 세대의 등장은 세대 교체의 바람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새로운 필진의 태반이 30대임을 감안하면 기성 세대라 할 수 있는 40대 이상이 신진들에게 그 주무대를 넘겨주는 형국이 되는 셈이다. 신진들의 활동이 활발한 만큼 기성 세대의 비평 활동이 위축된 것이 1997년도의 두드러진 현상임을 감안한다면, 세대 교체의 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있는 증좌임 이 분명하다. 원로·중진급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경성, 유준상, 이구열, 박래경, 김인환, 김복영, 원동석 등의 활동이 뜸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견층으로 볼 수 있는 송미숙, 신항섭, 윤우학, 서성록, 유재길, 김영재, 강태희 등의 활동도 예년에 비해 다소 저조한 편이다. 대신 근래에 등단한 조광석, 김영호, 김진엽, 심상용, 이필, 백지숙, 노성두 김성호, 정헌이 등의 활동이 두드러 진 편이다.
이외 신진급으로 꼽을 수 있는 필자들로는 고충환, 조선령, 김원방, 장미진, 김병수, 오혜주, 오세권, 임창섭, 임재광, 김혜경, 김영민, 최광진, 이경모, 채홍기, 김경서, 박정구, 박일호, 장동광, 이섭, 윤익영, 정준모, 김정희, 김성희, 김학량, 최은주, 김은진 등이 있다.
글의 내용은 전람회 리뷰가 가장 많고 다음이 작가론이 차지하고 있다. 단순한 리뷰 형식 도 있지만 리뷰를 겸한 작가론이 많은 편이다.
단순한 전시 내용을 언급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작가의 예술 세계를 보다 깊이 천착해 들 어가려는 시도가 자연 전람회평에서 출발하면서 종내는 한 편의 작가론에 이르게 하고 있다.
작가론의 편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다. 본격적인 논의의 장이 펼쳐지고 있는 기미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작가론 가운데는 국내 작가 외에 해외 작가를 대상으로 한 것도 수 편에 달하고 있다. 대체로 해외 작가론은 해외의 현장에서 송고해 오든가 아니면 국내전이 이루어질 경우 작가와 직접적인 취재를 통해 기술되기도 한다.
미술 비평의 요체는 역시 시사성이다. 현대미술의 동향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비평의 주요한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대 미술에 관한 일반론과 최근에 있었던 국제전에 대한 르 포 형식이 비평의 많은 분포를 이루고 있다. 특히 1997년은 베니스, 리용 비엔날레를 위시해서 카셀 도큐멘타, 윈스터조각 프로젝트 등 일련의 국제전이 잇달아 열렸다. 여기에다 광주비엔날레까지 첨가한다면 이처럼 국제전이 한 시기에 집중되었던 때도 찾아보기 어렵다. 국제전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우리도 국제전(광주비엔날레)을 갖고 있다는 데서 더욱 고조되어진 것이 아닌가 본다. 비교의 차원에서 비판이 그만큼 왕성해질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외 논의로는 미술 시장에 관한 사항, 지방 미술의 현실과 모방에 대한 시비의 공방이 특기된다.
리뷰를 겸한 작가론의 경우, 그 대상이 대부분 젊은 세대 작가들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특 기할 일이다. 그 많은 젊은 세대의 왕성한 활동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홍희의 「이 불의 그로데스크 바디」(『공간』2), 오진경의 「선을 중심으로 본 엄정순의 작품 세계」(『공간』1), 윤난지의 「정광호의 비조각전 조각」(『공간』3), 정헌이의 「최선명의 알리바이」(『공간』7), 박래경의 「제역란의 회화 세계」(『공간』7), 최태만의 「임영선-죽음 그 이면에 있는 것들」(『공간』8), 김성호의 「이종빈-말하는 조각에서 사유하는 조각으로」(『미술세계』11), 오혜주의「김준권-이 시대의 나무이야기」(『가나아트』10), 박우찬의 「김선두-역원근법으로 그려낸 한국적 풍경」 (『가나아트』7·8), 조광석의 「이재권-시지프스의 계단」(『가나아트』9), 심상용의 「임영선-심리적 리얼리즘의 가능성」(『월간미술』4) 등이 젊은 세대 작가를 대상으로 한 작가론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해외에서 송고해 오는 경우 또는 국내에서 해외 미술에 관계된 글을 발표한 이들로는 공영희, 박신의, 백지숙, 이용우, 윤진섭, 이화익, 김종근, 고동연, 김유연, 김성원, 조성형, 박영미, 진중권 등이다.
Ⅲ. 국제전과 그 문제점
국제전에 관한 논의는 해외 국제전의 르포와 국내의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비판이 중심을 이 룬다. 유재길의 「1997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와 카셀 도큐멘타, 베니스 비엔날레, 리용 비엔날레가 의미하는 것」(『미술평단』가을), 이용우의 「광주비엔날레-국제주의적 미망, 정체성의 자가당착(『가나아트』10). 김영호의 「국제 비엔날레와 오늘의 미술 문화」(『월간미술』12) 등 외에 경원대 조형연구소 주최의 '97 국제미술 이벤트, 그 검증과 전망'이 국제전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대체로 카셀 도큐멘타가 지나치게 서구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베니스가 오랜 역사를 지니는 만큼 신선한 내용이 없었다는 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광주비엔날레는 1회전에 비해 내용이나 전시의 기술적인 면에서 뛰어남이 지적되고 있는 반면 광주다운 특색이 없다는 비판이 대세를 이루었다. 어느 국제전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는 짜임새를 지니고 있으나 다른 국제전과의 차별성이란 정책에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아시아권에서 유일한 비엔날레로서 정체성을 지니지 못했다는 점들이 비판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유재길은 뮌스터, 카셀, 베니스, 리용 순서로 인상기를 기술해주고 있다. 뮌스터의 경우 대단 히 감명깊은 인상을 받은 반면, 카셀은 부정적이다. 도시 환경과 조각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뮌스터가 보여준 이상적 프로젝트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적고 있다. 그 한 대목을 여기 인용해 본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특성은 환경과 조각과의 조화를 최대한으로 살리는 것이다. 숲이나 잔디밭, 호수 그리고 역과 공공 건물 내부와 광장, 길거리 등에 조각이 설치되어 새로운 공간 예술로 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우리 나라에서 1%법의 존폐 여부를 논하는 이 시점에서 해결책이 뮌스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뮌스터에 비해 카셀은 기획자의 지나친 주관적 의도가 전시로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요인을 지적해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기존의 국제전에서 벗어난 전시 주제와 경향, 무명의 작가들을 이끌어내어 새로운 미학과 미적 개념을 찾고자 하였으나 필자는 미술은 이론이 아니고 미술이라는 것과 전시는 어디까지나 전시라는 생각을 가진 필자의 결론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던 전시였다."
특히 이번 카셀 도큐멘타가 유럽 중심이었다는 것, 예컨대 동양계란 겨우 몇 퍼센트에다 한 국 작가가 한 사람도 참여되지 않았다는 것을 들어 유럽 중심의 문화 예술을 모색하는 것이 지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한 미술전이 아니란 점이 지적되고 있다. 베니스나 리용도 별다른 특징이 없었던 국제전으로 언급되고 있다.
광주비엔날레를 대상으로 한 이용우의 「국제주의의 미망, 정체성의 자가당착」은 먼저 주제 설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시작된다. 전체의 주제가 '지구의 여백'인데 다시 소주제
'속도, 공간, 혼성, 권력, 생성'으로 나누어 주제의 이중 구조화에서 일어나는 연출의 한계와 해석의 다양성이 결과적으로 혼란만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지적된 바 있는 후발대 비엔날레로서의 성격화를 기하지 못하고 서구 비엔날레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아류의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점이 광주의 가장 큰 실패라는 것이다. 그 주요 대목을 옮겨본다.
"광주 비엔날레에 필요한 문화적 책략은 서구 일변도의 커미셔너 선정이나 보이즈, 이브클 라인, 루이스 부르조아, 빌 비올라 등 서구 거장들의 잔치를 만드는 일보다 후발대로서의 보다 신선한 것의 창조에 있다. 이러한 차별성의 실현은 기본적으로 국제 질서나 국제적인 미술 이벤트에 대한 철저한 정보 수집과 분석,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의지에 있다. 서구의 공허한 글로벌리즘의 미망에 시달리는 일은, 그것이 비록 화려한 분위기와 열망을 가져다준다 해도 문화 창조의 진정한 지표가 될 수 없다.
또 우리 것이나 전통, 역사를 실현시키는 방법도 장황한 해설과 아전인수격의 구호 설정을 필요로 하는 행위는 자칫 자가당착에 빠지거나 장기적인 문화 생산의 통로를 고려할 때 호흡이 짧아진다"
Ⅳ. 학술 발표회
신진 비평가들의 대거 등장과 활동에 못지않게 1997년 비평 분야에서 두드러진 부면은 각 종 세미나, 심포지엄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았음이다. 세미나나 심포지엄이 많았다는 것은 그 만큼 논의가 풍부했다는 것의 반증이다. 또한 세미나나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주도자로서의 서클이 그만큼 증대했다는 일면도 떠올릴 수 있다. 이 서클들 가운데는 특히 미술사 관계가 단연 많은 분포를 드러내고 있다. 최근에 들어와 미술사 방면의 신진 배출이 그만큼 증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며 지금까지 미답의 영역으로 치부되었던 미술사의 토대잡기란 측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심포지엄의 과다 현상에 대한 우려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특정 대학의 학생들만 동원된 심포지엄, 전문가나 일반이 전연 외면해 버리는 형식적인 학술 발표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1997년 주요 학술 발표회를 든다면 현대미술사연구회 춘계 및 추계 학술 발표회, 한국미술 사교육연구회 전국 학술 대회, 서양미술사학회 춘계 및 추계 학술 발표회, 한국미술사학회 월례 발표회, 한국근대미술사학회 춘계 및 추계 학술 발표회, 현대미술학회 창립 기념 학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춘계 학술 발표회, 한국문화 교류연구회 심포지엄, 미술사학연구회 정기 학술 대회 등이다.
여기서 다루어졌던 주요 주제들을 간추려보면 '현대 미술사와 페미니즘' '국내 젊은 작가 들에게서 보여진 수용의 문제' '미술 작품의 의미와 비평' '현대 건축과 조형적 환경의 문제' '동서양 문화 교섭 미술사' '한국 현대 미술 문화 형성의 구조와 문제점' '한국 추상 미술의 태동과 앵포르멜 미술' '이중섭 예술의 재조명' 등이다. 각 단체가 지니고 있는 성격별로 다루어진 주제 역시 성격화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상의 단체들은 미술 비평 단체들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미술사와 미학 관계의 단체들이 오 히려 대종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미술사만 하더라도 서양, 한국, 근대 등 상당히 세분화되었으며 출신 학교별로도 단체가 성립되고 있는 예도 만날 수 있다. 일반 단체가 아닌 대학 부설 기관의 심포지엄으로 경원대조형 연구소 주최 '97 국제 미술 이벤트, 그 검증과 전망'이 특기할 만하다. 하나의 주제로 내건 심포지엄으로는 현대미술사연구회의 '현대 미술사와 페미니즘' '현대 건축과 조형적 환경의 문제', 근대미술사학회의 '이중섭 예술의 재조명' 등을 들 수 있다. 이외 태반의 학술 발표회가 주제 발표자에 따른 다양한 내용들이 다루어졌다.
V. 외국 작품 차용에 대한 논쟁
1997년에 가장 뜨거웠던 논의 가운데 하나는 현대미술학회 추계 학술 발표회에서 제기된 김 정희의 「국내 젊은 작가들에게서 보여진 수용의 문제」일 것이다. 이 내용은 다시 『가나아트』 12월호에 게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으로서 안규철의 「내 작품의 외국 작품 차용 시비에 관한 나의 입장」이 역시 같은 지면에 실렸다.
김정희는 80년대 이후 자유로운 해외 유학과 다양한 매체를 통한 국제 미술의 정보 유입이 국내 미술의 다양화나 활성화 같은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온 반면, 해외 미술을 차용이란 미 명하에 의해 다른 작가의 고유 아이디어의 산물인 작품을 변형, 자신의 작품으로 내놓고 있 는 부정적 측면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몇 개의 범주로 나누어 살피고 있는데 "첫번째로는 오브제적인 미술 안에서 드러난 개념상, 형태상의 유사성, 두번째로는 압도적으로 연성 재료가 사용된 회화, 조각, 공예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아이디어상 외관상의 유사성을" 작품을 통해 비교해 놓고 있다. 그가 예로 든 전시는 '해외 주재 한국 청년 작가 작품전'으로, 특히 이 전시에 참여하고 있는 독일 유학파가 서로 차이는 있지만 작품상, 아이디어상 멀리는 뒤상, 가깝게는 요셉 보이스나 그의 직간접 제자들과 연결되어 만들어진 오브제 작품들이라는 공통적인 특징을 지닌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안규철의 작품 가운데는 직접적으로 독일 작가의 작업을 연상시키는 것과. 독일 작가의 소재를 약간 바꾼 것이 자주 눈에 띈다는 것이다.
그가 언급한 대목을 인용하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보이스의 특이한 소 재들은 안규철에게서 약간 변경된 '사물'로 만들어져 부활된다. 전자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오래되고 낡은 사물들을 사용하는데, 후자는 사물을 '우상'처럼 정교하고 고급스럽게 만든다. [‥‥] 한편 안규철의 특이해 보이는 '사물'들은 보이스 외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전자의 「무성생식 중의 남녀」의 석고 화분 속에 파인 손 모양은 '속이 빈 신체'를 제작하여 있음과 없음의 관계를 탐구하는 팀울릭스와 「땅 표면의 아래쪽」의 파인 발 모양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과 울릭스의 「의자와 그것의 그림자-존재로부터 나오는 듯」에 표현된, 포지티브한 공간과 네거티브한 공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는 안규철의 '집짓기'에서도 발견된다. 후자의 「그림자의 집」은 제목과 외양상 전자의 나무에 락카칠을 하여 만든 의자와 그것의 그림자와 유사하다."
안규철 이외 김정희는 몇 사람의 한국 젊은 작가의 작품과 그것의 아이디어 차용을 외국의 작가의 작품과 비교함으로써 제시해 놓고 있다. 그의 결론적인 이야기는 "각 미술가의 지각의 다원성을 통해서 미술의 다양성이 획득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작가가 다른 작가들의 아이디어와 방식을 의식적 차용할 때 그것이 전략이 아닐 경우, 그리고 타인의 고유한 아이디어를 약간 수정하여 응용하는 식으로 작품을 할 때는 관객을 배반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면서 이 논문에서 언급된 작가들을 폄하하거나 평가 절하시키려는 의도는 없으며 "우리 나라의 창작 풍토와 비평 풍토가 더욱 투명하고 더욱 활발해지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같은 지면에 반론을 편 안규철은 김정희가 "투명한 창작과 비평 풍토"를 내걸고 있으면서 도 사실은 음습한 밀실에서 추진된 뒷조사의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먼저 지적한다. 그 이 유로, 작가의 제작 의도를 사전에 물은 바도 없으며 작품 사진 역시 아무런 동의 요청도 없이 사용되었다는 것, 당사자인 자신도 초대하지 않은 가운데서 발표가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러면서 작품의 컨텍스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한 표피만으로 차용을 주장하고 있는 것 자체가 적반하장이지 않는냐고 되묻고 있다. "나의 작품들이 어떤 맥락과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살펴보는 최소한의 노력이 없이 외형의 단순 비교에만 의존해 외국 작가가 연도상으로 먼저 제작한 사례가 있으면 무조건 내가 그것을 차용했다고 단정짓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외국 작가 작품의 분별없는 차용을 문제삼는 발표자의 글이 한국 작가들의 작품은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끊임없이 외국 작가와 이론가들의 주장과 논리를 차용하면서 저들은 이렇다는데 왜 우리들은 그렇지 못한가를 따지고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발표문이 일관되게 드러내고 있는 근본적인 자기 모순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어서 그는 자기 작품에 대한 김정희의 지적을 하나하나 들어가면서 반격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으로 작가의 진실성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차용이라고 고발한 측이 작가의 내면 세계, 그 진실성을 이해하려고 했다면 이 같은 문제 제기는 일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차용에 대한 이상의 비평 쪽과 작가 쪽의 공방은 먼저 학술 발표회 형식으로 발표되었고 이어 미술 잡지에 게재되었으며 같은 지면에 작가 쪽의 반박문이 실리는 것으로 일단 종결되었다.
창작과 모방, 오리지널리티와 차용의 문제는 오늘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방과 차용의 문제가 어느 측면에서 심각한 현상임에 틀림없으나 또 다른 면에서 그것의 지적은 대단히 신중한 검증 작업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번에 일어난 차용의 문제도 오늘날 범람하고 있는 모방과 차용에 대한 메스임에 늘림없으나 또 한편 그것의 정확도의 문제에 있어선 여러 가지 이의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상황도 간과할 수 없게 하고 있다.
Ⅵ. 미술 저서 발간의 활성
1997년도 비평 분야에서 두드러졌던 또 하나의 사항은 미술 저서의 출간 붐이라고나 할 정 도로 많은 저서가 쏟아져 나왔다는 점이다. 물론 미술 서적의 출간은 최근에 들어오면서 상 승하는 추세를 보여준 것이기는 하나 한 해 동안 이만큼 많은 저서가 출간된 적은 일찍이 없었던 일로 기록된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윤진섭의 『미술관에는 문턱이 없다』(재익사), 조은정의 『한국 조각미의 발견』(대원사), 최태만의 『어둠 속에 빛나는 청춘-안창홍의 그림 세계』(눈빛사), 박선규의 『현대 미술도 예술인가』(신원사), 이주헌의 『내 마음속의 그림』(학고재), 최열의 『근대 수묵채색화 감상법』(대원사), 이영두의 『미술관 경영 어떻게 할 것인가』 (삶과꿈), 강선학의 『반항과 욕망의 거처』(재원사), 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분화사), 오광수 외 공저 『한국 추상 미술 40년』(재원사), 조용진의 『서양화 읽는 법』(사계절), 김영주의 『한국미술사』(나남출판사), 안규철의 『그림 없는 미술관』(열화당) 장화진의 『판화 감상법』(대원사), 오광수의 『20인의 한국 현대 미술가』(시공사), 한정희의 『옛 그림 감상법』(대원사), 윤범모의 『근대 유화 감상법』(대원사), 김형국 의 『장욱진』(열화당),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 (세종서적), 김광우의 『폴록과 그 친구들』(미술 문화사), 임두빈의 『민화란 무엇인가』(서문당), 이규일의 『한국 미술의 명암-화단야사 2』(시공사) 등 번역물을 빼고 창작물만 22권에 달한다.
내용별로 분류한다면 입문서, 감상서, 작가론, 미술사, 현대 미술, 기타가 된다.
특정한 주제에 의해 쓰여진 것 외에 비평가들의 글 모음집인 비평집도 최근에 와서 활발히 출간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윤진섭의 『미술관에는 문턱이 없다.』, 강선학의 『반항과 욕망의 거처』, 오광수의 『20인의 한국 현대 미술가』가 비평집의 성향을 띄고 있다. 작가론으로는 일종의 평전 형식을 띤 김형국의 『장욱진』이 돋보이며, 젊은 작가를 대상으로 한 작가론이란 점에서 최태만의 『어둠속에서 빛나는 청춘-안창홍의 그림 세계』도 주목되는 저서다. 임두빈의 『민화란 무엇인가』는 민화 연구에 덧보탤 수 있는 내용으로, 이규일의 『한국 미술의 명암』은 화단 야사의 2번째권으로 미술계의 뒷이야기들이 흥미롭게 기술되고 있다.
추상 미술 운동 40년을 총정리하는 기획서로 『한국 추상 미술 40년』은 '77년에 출간된 『한국 추상 미술 20년』에 이은, '57년에서 '97년까지의 40년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추상 미술 운동이 현대 미술 운동이었던 사정과 내역을 여러 부면에 걸쳐 조명하고 검증하고 있다. 오광수, 서성록, 유재길, 윤진섭, 이일, 강선학, 윤난지, 조광석, 김달진 등이 필자로 참여하고있다.
Ⅶ. 한 미술 평론가의 죽음
현대 대표적인 평론가의 한 사람인 이일이 1월 27일 별세하였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미 술계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한국 현대 미술 운동의 동반자로서, 가장 직접적인 목격자요 체험자로서 그가 차지하고 있었던 위치가 컸기 때문이다.
32년 평남 태생인 그는 서울 문리대 불문과 출신으로 파리로 유학해서는 미술 비평으로 전 향하였다. 해외 통신원, 특파원 등으로 활약하면서 파리청년작가 비엔날레 등의 현지 대표로서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65년 귀국하면서 홍익대 교수로 한국 현대 미술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아방가르드협회의 회원으로 많은 실험적 미술 전시를 기획하며 추진하기도 하였다. 미술평론가협회 회장으로 각종 국제전 커미셔너 (상파울로, 파리, 베니스)로 활약하기도 한 그는 많은 역서와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다.
주요 역서로는 『추상 예술의 모험』, 『새로운 예술의 탄생』, 『세계회화의 역사』, 『서양 미술사』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현대 미술의 궤적』, 『한국 미술, 그 오늘의 얼굴』, 『현대 미술의 시각』, 『현대 미술에서의 환원과 확산』, 『서양 미술의 계보』 그리고 유고집으로 『이일 미술 비평 일지』 등을 남겼다.
■필자 : 오 광 수(미술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