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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33)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3구간 (왜관→대구) ② [삼가헌→ 육신사]
2020년 10월 30일 (금요일) [독보 33km]▶ 백파
[1] * [왜관]→ 호국의 다리→ 왜관나루터 비(碑)→ 제2왜관교→ 동정천→ 직선의 제방 길→ 금산교→ 직선의 제방 길→ (낙산초/ 칠곡왜관2산업단지)→ 직선의 제방 길→ [하빈 지하차도]→ [삼가헌]→ [낙빈서원]→ (고개 너머)→ 충효당→ 도곡재→ [육신사]→ [태고정]→ 다시 [하빈고개] 낙동강
오늘의 종주 (2) ; 삼가헌→ [육신사]
하빈고개, 67번 국도 아래의 지하차도→ [삼가헌(三可軒)]
☆… 오늘 나는, 6·25 당시 처절한 낙동강 전선이었던 길을 걸고 있다. 청정한 날씨만큼이나 고요한 낙동강 물길을 걸으며, 육신사 탐방을 생각하며 600년 전의 역사의 강(江)을 거슬러 올라간다. … 박일산(朴一珊)의, 그 전설 같은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박팽년(朴彭年) 후손의 세거지인 묘곡마을[묘동]을 찾아간다. 그 마을에 있는 육신사(六臣祠)를 비롯하여 그 주변의 유적지를 탐방하고, 박팽년 후손 일가의 고택(古宅) 등을 둘러보고자 한다.
오전 11시 30분,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왜관읍 금산리 제방, 거대한 호수처럼 펼쳐진 낙동강, 좌안의 대구 달성과 건너편 성주를 잇는 ‘성주대교’가 아른아른 멀리 시야에 들어오는 곳, 물이 그득한 강안의 습지와 강 건너편 지역의 풍경이 그림처럼 보인다. 이 제방이 끝나는 곳에 67번 국도의 ‘하빈(河濱)고개’가 있다. 나는 바이크로드의 강변 길에서 이 67국도 아래의 지하차도를 지나 도로를 따라갔다. 이제 행정구역상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이다. 내가 찾아가는 육신사(六臣祠)가 있는 하빈면 묘곡(竗谷) 마을은, 사육신의 후손이 뿌리 내린 순천 박씨 세거지이다.
굴다리를 지나 도로를 따라 얼마 가지 않아서, 왼쪽으로 들어가는 마을길, ‘삼가헌’.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얕으막한 산이 감싸고 있는 고택의 마을이 보인다. 삼가헌 마을은 약 10여 호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다. 오늘 만추(晩秋)의 시골 마을은 적막했다. 고택의 주변을 둘러보아도 문은 굳게 잠겨 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얕은 담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아도 인기척이 전혀 없다. 그래서 고택 옆, 산기슭에 올라가 한참 동안 삼가헌 집안을 내려다 보고서 내려왔다. 그런데 마을 여기저기서 사나운 개가 마구 짖는다. 낯선 외지인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무척 엄정했다.
삼가헌(三可軒) 담 밖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 있는데, 그 옆의 현대식 소슬대문에서 나이 지긋한 한 분이 나오셨다. 개가 요란하게 짖어대어 나와 본 것이라고 했다. 인사를 드리고 낙동강 종주와 유서 깊은 육신사를 비롯한 묘동의 유적지 탐방의 의도를 말씀드렸다. 삼가헌과 담장 하나를 두고 이웃해 있는 고택의 주인이었다. 삼가헌에 대해 물었더니, 아주 친절하게 응대해 주셨다. 선생의 함자는 박종규(朴鍾圭), 바로 취금헌 박팽년 선생 후손이라고 하면서, 지금 삼가헌 주인은 주손(冑孫)이고 자신은 지손(支孫)이라고 했다. 삼가헌은 요즘 코로나로 인해 외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며 오늘 주인도 마침 출타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나에게는 협문을 통해 안을 둘러보게 했다.
선생을 통해 삼가헌에 대한 말씀을 듣고 낙빈서원의 위치를 물었더니, 앞장서서 안내를 해 주셨다. 선생의 집을 끼고 조금 올라간 산 아래 서원이 있었다. 가는 길목에 송아지만한 사나운 개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큰 소리 짖어댄다. 고리를 매고 있지만, 오금이 저렸다. 선생과 동행하지 않았으면 서원에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선생을 보고 사납게 짖는 소리가 좀 잦아들었다. 선생의 안내로 서원을 둘러보았다. 서원은 단출한 일자형 기와집 한 채였다. 일반적인 서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선생이 그 연유를 설명해 주었다. …
서원에서 마을로 내려왔는데, 선생은 나를 집안으로 들여 따끈한 차까지 대접해 주었다. 백팽년 선생의 혈손이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신 것이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다시 전화를 드리고 싶다고 했더니 전화번호(010-8265-1274)까지 일러주셨다. 그리고 육신사가 있는 묘동의 본마을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주었다. 마을 앞의 큰 길로 가면 멀리 돌아가는 길, 이곳의 뒷산의 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육신사가 있는 묘골이라고 했다.
달성 삼가헌(三可軒)
달성(達城) ‘삼가헌(三可軒)’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고택이다. 삼가헌 마을은, 박팽년 후손들이 정착한 묘골마을에서 고개 너머, 낙동강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竗洞)은 사육신 중 하나인 충정공 박팽년(朴彭年, 1417∼1456) 후손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順天朴氏) 집성촌이다. ‘삼가헌(三可軒)’은 박씨 종가가 있는 집성촌과는 낮은 산을 경계로 하여 떨어져 있다. 삼가헌(三可軒)은 박팽년의 11대손인 박성수(朴聖洙, 1735~1810)가 1769년(영조 45년)에 이곳에 초가(草家)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라 ‘삼가헌三可軒)’이라 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 뒤 그의 아들 박광석(朴光錫, 1764~1845)이 1783년 이웃 묘골에서 현재 위치로 분가한 다음 1826년 초가를 헐고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다. 그 후(後)에 별당 ‘하엽정’을 지었다.
안채는 전면 6칸 전퇴집으로 3평주 삼량집으로 2009년 4월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이 잘 남아있는 대표적인 고택이다.
‘하엽정(荷葉亭)’은 삼가헌의 별당으로, 더없이 아름답고 고즈넉한 곳이다. 하엽정은 원래 이곳에 있던 ‘파산서당(巴山書堂)’을 개축한 것으로 원래 4칸 규모의 1자형 건물이었는데, 건물 한 쪽 앞에 누마루를 한 칸을 늘여 붙였다. 별당인 하엽정(荷葉亭)은 ‘연꽃을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이다. 여름철이면 연못에는 고운 연꽃이 가득하게 피어난다. 연못은 1826년 본채를 지을 때 필요한 흙을 파낸 자리를 손질하여 만들었다. 박광석의 손자 박규현이 1874년에 연못으로 꾸며 연(蓮)을 심었다. 원래 건물에 ‘巴山書堂’(파산서당) 현판이 있고, 앞으로 내다지은 누마루 앞에 ‘荷葉亭’(하엽정) 현판을 붙였다. 그 앞에 장방형(사각형)의 못을 조성하고 그 가운데는 동그란 섬을 만들었다. 섬까지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삼가헌(三加軒)’이라는 이름은 「중용(中庸)」제9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 위를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할 수가 없다.(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고 한 데에서 취했다. 이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지(知)이고, ‘작록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인(仁)이며. ‘칼날을 밟을 수 있는 것’은 용(勇)에 해당한다. 이는 선비가 갖출 수 있는 세 가지 덕목인데, 중용은 실천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삼가헌 주인 박성수는 이를 아호와 당호로 삼았다. 그 어렵다는 중용의 실천을 위해 선비로서 지(知)·인(仁)·용(勇) 이 세 가지를 덕(德)을 먼저 갖추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것으로 보인다.
삼가헌은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 영남내륙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넓은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별당, 그 외 여러 부속채로 구성된 배치형식은 사대부 가옥의 공간구성과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이 고택의 종전 문화재 명칭은 묘동 박엽씨 가옥(竗洞朴熀氏家屋)이었으나, 사육신 박팽년의 12대손인 박광석이 이웃한 묘골에서 현재의 위치로 분가해 오면서 가옥을 건축하고 부친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하였음을 감안하여 2007년 1월 29일 ‘달성 삼가헌(三可軒)’으로 변경하였다. 1979년 12월 31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낙빈서원(洛濱書院)
낙빈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삼가헌 마을 뒷산 아래에 위치해 있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 앞에 해설판이 있다. … ‘이 서원은 본래 후손들이 충정공 박팽년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하빈사(河濱祠)’를 세우고 향사를 지낸 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공의 현손(玄孫)인 박계창이 사육신 여섯 분이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다섯 분의 신위를 더 설치하여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 1679년(숙종 5)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등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의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1년(숙종 17년)에는 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별묘와 강당을 건립하여 ‘낙빈서원’을 창건하였는데, 3년 후인 1694년(숙종 20년) 유생들의 소청으로 ‘洛濱’(낙빈)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후 1866년(고종 3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문중에서 원래 터보다 위쪽인, 현 위치에 강당만 중건하였는데, 그 후로도 사당을 세우지 못해 서원이라기보다는 문중의 재사(齋舍)와 유사한 모습이 되었다. 1974에는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묘골의 구 종가 뒷산에 육신사(六臣祠)가 건립되면서, 사육신의 위패를 그 곳으로 옮겨 봉안하고 매년 춘추절에 향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단출한 건물로만 남은 것이다. 서원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토기와집으로 1982에 복원한 것이다.
서당에서 출발한 교육기능 중심의 서원과는 달리 문중(門中)에서 조상을 모시던 사당에서 출발한 조선후기 서원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낙빈서원이 있는 이곳은 박팽년의 11대손인 박성수가 영조 45년 삼가헌을 지으면서 터를 잡고 사는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사육신을 모신 서원은 전국에 여러 곳 있었는데 단종의 능이 있는 영월 창절사가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다.
묘골마을과 육신사
☆… 삼가헌 박종규 선생이 가리켜 준 대로 마을 뒷산의 고개를 넘어 묘골로 갔다. 고갯마루 근처에는 몇 기의 순천 박씨 조상들의 묘와 묘비가 있었다. 가을 햇살이 내리는 따스한 묘지를 찾아 올라가 보았다. 소나무가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는 산록에 정갈하게 조성된 묘원, 아래쪽에 있는 묘소는 박팽년의 유일한 혈손으로 살아남아 묘골마을의 입향조가 된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 내외분의 묘소이고, 그 위쪽에는 박일산의 아버지 박순의 묘소이다. 박순은 박팽년의 둘째 아들이며 박일산의 아버지이다.
묘소 참배를 마치고 고개를 넘어갔다. 고갯마루를 넘어가니 아담한 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竗谷]이라고 불리는 이 마을은 사육신의 한 분이신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순천 박씨(順天朴氏) 충정공파(忠正公派) 집성촌이다.
이 마을 가운데로 곧게 올라가면 맨 끝의 높직한 외삼문(外三門)이 나온다. 사육신(死六臣)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육신사(六臣祠)의 정문이다.
마을의 입구에 정원이 넓고 규모가 큰, 세련된 한옥이 있다. ‘충효당(忠孝堂)“이다. 육신사로 올라가는 길은 마을 한 가운데를 곧게 나 있다. 잘 포장된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목의 좌우엔 우아하고 격조 높은 고택들이 즐비하였다. 마을 초입 충효당을 지나, 조금 올라간 갈림길에 ‘박두을 여사 생가’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박두을 여사는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의 부인인데, 바로 박팽년 선생의 후손이다. 그리고 육신사로 올라가는 길목의 우측에 순천 박씨 고택인 도곡재(陶谷齋)가 있다.
충효당(忠孝堂)
충효당(忠孝堂)은 1644년(인조 22년) 충정공 박팽년의 7대손인 금산군수 박숭고가 별당(別堂)으로 건립한 것으로 그 후 ‘충효당’으로 개칭하여 후손들에게 충과 효를 가르고, 예와 악, 궁도와 마술 등을 실습시키며 부녀자들에게는 법도를 가르쳤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었으나 1995년 박우순이 이곳으로 옮겨 좌측에 누마루를 부설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 단출한 ㄱ자 집이지만 정갈하고 규모가 컸다. 잘 가꾸어진 잔디정원에 몇 그루 소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도곡재(陶谷齋)
도곡재(陶谷齋)는, 1778년(정조 2) 박팽년 선생 후손인 대사성 서정공 박문현이 제택(第宅)(살림집과 정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으로 건립한 건하였던 것을, 1800년대 중엽 도곡공(陶谷公) 박종우의 재실(齋室)(조상의 묘를 관리하기위해 지은 집)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陶谷齋’(도곡재)라 이름하였다. 도곡 박종우는 인조 때의 문신으로 퇴계학의 맥을 이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을 사사하였고, 사림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문장, 절의, 덕행을 모두 겸비하여 동한(東韓)의 1인자라 칭송받았으며 ‘달성 10현“의 한사람이다.(「대구읍지」) 병자호란 때 전사(戰死)하였다.
도곡재(陶谷公)는 조선시대 영남지방 양반가옥의 실례를 잘 보여주며,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 3개 권역으로 입곽 안에 잘 보존되어 있다. 좌측으로 낸 대문채를 들어서면 남향하여 사랑채에 해당하는 도곡재가 자리하고, 사랑채 우측에 연한 중문채에 들어서면 ㄱ형의 안채와 우측의 고방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인 도곡재는 원래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였으나 후대에 재실(齋室)로 사용하면서 왼쪽의 툇칸 1칸을 달아내고 대청을 넓혀 누처럼 꾸몄다. 각 방의 후면에는 개흘개가 설치되어 있으며, 네모기둥을 세우고 납도리를 돌린 팔작집으로 소박한 구조의 건물이다. 대구시 유형문화재 32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곡재(陶谷齋) 대문이 열려 있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지금의 당주 박종혁(朴鍾赫) 선생을 만났다. 도곡공의 후손인 선생은 평생 교직에 있다가 정년퇴임하고, 아주 이곳에 들어와 도곡재를 관리하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중년의 여성 한 분이 함께 있었는데, 육신사 문화해설사인 백현주 님이었다. 가만히 보니 명찰을 달고 있고 건네는 말씀이 산뜻하고 친절했다. 두 분과 함께 도곡재 곳곳을 자세히 살피며 자상한 설명을 들었다. 공동우물이 있는 좁은 골목 안에 있는 안채로 들어가니 선생의 부인께서 부드럽게 말린 곳감을 내어 와서 셋이서 담소를 나누며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우연히 도곡재에서 만난 문화해설사 백현주 님의 안내로 육신사 탐방에 들어갔다.
육신사(六臣祠)
* [외삼문(外三門)과 홍살문(紅箭門)]▶
‘외삼문’은 육신사(六臣祠)로 들어가는 솟을삼문(三門)이며, 외삼문의 왼편에는 송덕사(頌德辭) 비가 서 있고, 문을 들어서면 육신사(六臣祠)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외삼문 안에는 선비사상을 보여주는 장방형의 연지(蓮池)가 있고, 계단을 오르면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은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데, 특히 충효 등 절의가 뛰어난 사람의 행실을 널리 알리고 본받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 붉은 문으로, 경의(敬意)를 표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 [숭절당(崇節堂)]▶
홍살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숭절당(崇節堂)’이 있다. 숭절당 앞의 좌우에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고, 숭절당(崇節堂)은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한 일(一)자 형의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건물이며, 숭절당(崇節堂)는 제사를 위한 재실(齋室) 건물로 제사를 위한 제구들을 보관하는 전사청과, 제사준비를 위한 사람들이 머무는 용도로 지어졌다.
사육신(死六臣)의 사적비(事蹟碑)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숭정사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는, 사육신(死六臣)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비(六角碑)가 세워져 있다. 높다란 육각비(六角碑) 각 면에는 각각 사육신의 생애와 사적(事蹟)을 간략하게 새겨 놓았다. 비(碑)의 기단은 6 마리의 거북이 밑에서 받치고 있다. 1979년 ‘육선생 사적비 건립위원회’에서 세웠다. 사적비(事蹟碑) 뒤쪽 축대 아래에는 사육신의 충절에 대한 송찬(頌讚)의 비 세 기가 나란히 서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송찬은 ‘六先生之忠節 撐柱萬古綱常’, 최규하 전 대통령의 송찬은 ‘精忠大節 萬古無雙’,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송찬은 박팽년 공의 시조, ‘님 향한 一片丹心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를 인용하여 새겨 놓았다. 모두 사육신의 절의를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박준규 의장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의 18대손이다. 지금 육신사는 박준규 의장의 고택이 있던 자리이다.
아, 사육신(死六臣)
☐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 1417년(태종 17)~1456년(세조 2)
박팽년(朴彭年)의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 충정(忠正),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한석당 박중림의 아들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집현전(集賢殿) 학사로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145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臣)’이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김질(金礩)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도 끝내 거절하고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아버지 박중림, 동생 대년(大年), 아들 3형제도 모두 사형 당하였다. 한번은 옥중에서 고문을 당할 때 세조가 사육신들에게 술을 따르며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러준 「하여가」를 읊어 시험하였다. 성삼문은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로 답하였고, 박팽년과 이개는 모두 스스로 단가(短歌)를 지어서 답하였다. 박팽년의 충절을 느낄 수 있는 유명한 두 작품이 있다.
가마귀 눈비 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금이 아름다운 물에서 난다고 해서 물마다 금이 나는 것은 아니며,
옥이 곤강(崑崗)에서 나온다고 해서 산마다 옥이 나는 것이 아니며,
아무리 여자가 사랑하는 지아비를 따른다고 하지만 임마다 좇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분별없이 여러 임금을 섬길 수는 없다는 것이 박팽년의 생각이었다. 결국 굴복하지 않
는 사육신의 충절을 본 세조 또한 이들을 가리켜 “당대의 난신(亂臣)이요, 후세의 충신이다”고 말했다. ☜ ‘나는 단종의 신하이다’ (인물한국사, 정성희)
그 뒤 과천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洪州)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고, 숙종 때 복권되고 영조 때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글씨에 『취금헌천자문(醉琴軒千字文』이 있다. 묘(墓)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성삼문(成三問)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 근보(謹甫)·눌옹(訥翁). 호 매죽헌(梅竹軒)이다. 시호 충문(忠文)이다. 1418년(태종 18년) 무관 성승(成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시 그의 모친이 꿈에서 '낳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 받았다고 해서 이름은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 143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였다. 경연 시강관(侍講官), 사간원 우사간, 집현전 부제학, 예조 참의, 동부승지, 우/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2년에는 박팽년(朴彭年)·신숙주·하위지·이석정(李石亭) 등과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한글의 창제를 위해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신숙주·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 등과 함께 요동(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음운 연구를 겸하여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455년 세조가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1456(세조 2)년 단종복위를 계획하였다가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金礩)의 고변으로여 성삼문 등 가담자 전원이 처벌되었다. 세조의 친국(親鞫)을 받고 다른 주모자들(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과 함께 작형(灼刑)을 당하였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형(車裂刑, 凌遲處死)을 받았다. 이어 아버지 ‘성승’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에 처해졌고,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 세 동생과, 맹첨(孟詹)·맹년(孟年)·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
정몽주가 절개를 지키는 마음을 담은 단심가를 지었다면, 성삼문은 죽기 전 절의가(絶義歌)를 남겼다.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 성삼문, <청구영언>
둥 둥 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 하나 없으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재워줄꼬.
1691(숙종 17)년에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愍節)이라는 사액을 내려 노량진에 민절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게 했다. 그 밖에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 녹운서원(綠雲書院),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의 물계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6신과 함께 제향 되고 있으며,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집에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 [두산백과] 성삼문 [成三問]
☐ 백옥헌(白玉軒) 이개(李塏) 1417년(태종 17)~1456년(세조 2)
이개(李塏)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청보(淸甫)·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추원사 이종선(李種善)이다. 아버지는 이계주(李季疇)이다.
어릴 적부터 글을 잘 지어 할아버지 목은(牧隱)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1436년(세종 18) 친시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 1441년에 집현전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明皇)의 사적을 적은 『명황계감(明皇誡鑑)』의 편찬과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부수찬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언문(諺文, 국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해 세종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 1447년 중시 문과에 을과 1등으로 급제하고, 이 해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6년(세조 2) 2월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해 6월 성균관 사예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된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어,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 이 때 이개(李塏)는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했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 날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우정(禹鼎)*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하지만
홍모(鴻毛)*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
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
현릉(顯陵: 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구나!
* 우정(禹鼎)은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해 만든 아홉 개의 솥[국보]
* 홍모(鴻毛)는 기러기의 털, 즉 아주 가벼운 물건의 비유
☐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1412년(태종 12)~1456년(세조 2)
하위지(河緯地)는 본관은 진주(晉州)이거, 자는 천장(天章)·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적촌(赤村)이다. 선산 출신이다. 하윤(河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하지백(河之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하담(河澹)이며,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綱地)와 함께 학문에 믇혀 정진하였다.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무함(誣陷)을 당해 전라감옥에 갇혀 병이 깊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을 간호하였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된 뒤 이듬 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품성이 강직해 대사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鄭而漢)과 정창손(鄭昌孫)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1454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직되어. 그 해『세종실록』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에서 시강관(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이듬 해 예조참의로 전임되었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던져버리고 선산에 퇴거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그를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에 올랐으며, 곧 이어 세자 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게 되었다. 세조가 즉위 후 그에게 교서를 내리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그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다.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1456년(세조 2) 사예(司藝)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단종복위거사가 탄로나 국문(鞫問)을 받게 되었다. 국문을 받으면서도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라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刑)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하호(河琥)와 하박(河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
아직 어린 나이인 작은아들 하박도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해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 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賤婢)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義)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육신전 六臣傳」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는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 낭간(琅玕) 유성원(柳誠源) ; (생년미상~1456년(세조 2))
유성원(柳誠源)은 본관이 문화(文化)이고. 자는 태초(太初), 호는 낭간(琅玕). 유수(柳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호(柳滸)이다. 아버지는 사인 유사근(柳士根)이며, 어머니는 윤임(尹臨)의 딸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집현전저작랑으로, 당시의 의학총서(醫學叢書)인 『의방유취』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4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했다. 1452년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해 『고려사』를 개찬할 때 여러 사람이 과별로 분담해 찬술하자,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열전을 담당하였다. 이 해 3월에는 춘추관 기주관으로서 『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53년 이 해 10월 수양대군이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 대신을 살해하고, 스스로 영의정부사·이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를 겸해 정권을 잡은 뒤, 백관들을 시켜 자기의 공을 옛날 주나라 주공(周公)에 비견해 임금에게 포상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집현전에 명해 정난녹훈(靖難錄勳)의 교서(敎書)를 기초(起草)하도록 하자 집현전의 학사들이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나 집현전교리였던 유성원만이 혼자 남아 있다가 협박을 당해 기초를 하고는 집에 돌아와서 통곡했다. 11월 장령이 되어,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책정이 공정하지 못함을 들어 개정을 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1456년(세조 2) 성균관사예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성삼문(成三問)·박팽년 등 사육신이 주동이 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는데, 유성원도 이 모의에 참여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성삼문·박팽년 등이 차례로 잡혀 가서 모진 고문을 당할 때, 유성원은 성균관에 있다가 여러 유생들에게서 이 일의 내용을 듣고 관대도 벗지 않고서 패도(佩刀)를 뽑아 자기의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당시 학문에 뛰어나 절의파(節義派) 학자로 알려졌고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에 능하였다. 재상급(宰相級)의 2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끼니를 거를 정도로 한빈하고 청렴하였다.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의 절의를 공인하여 관작을 추복시켰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 벽량(碧梁) 유응부(兪應孚) ; (생년미상~1456년(세조 2))
유응부(兪應孚)는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이며, 포천 출신이다. 키가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했으며, 씩씩하고 용감해 활을 잘 쏘아 세종과 문종이 소중히 여겼다.
일찍이 무과에 올라 1448년(세종 30)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1449년 경원도호부사·경원절제사, 1452년(단종 즉위년) 의주목사를 거쳐 1453년 평안좌도 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를 거쳐, 이 해 윤 6월에 세조가 즉위한 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유응부와 성승(成勝, 성삼문의 아버지) 등을 별운검(別雲劒, 2품 이상의 武官이 칼을 차고서 임금 옆에서 호위하던 임시 벼슬)으로 선정해, 그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왕이 운검(雲劒)을 세우지 말도록 명령했고, 세자도 질병 때문에 왕을 따라 연회장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하려고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굳이 말리기를 “지금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공(公)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가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런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羽翼, 보좌하는 신하)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서 호령한다면, 천재일시(千載一時)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하면서 굳이 말려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 때 동모자(同謀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이 일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서 급히 달려가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알리고 함께 반역을 고발해,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는 세조의 국문에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足下: 대등한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세조를 가리켜 부른 말)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김질을 가리킴)에게 고발당했으니 응부는 다시 무슨 일을 하겠소. 족하(세조를 낮추어 부르는 말)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 하니 세조가 노해 꾸짖었다.
“너는 상왕(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핑계하고서 사직(社稷)을 도모하려고 한 짓이지.” 하고 즉시 무사를 시켜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서 정상(情狀)을 신문했으나 자복(自服)하지 않았으며,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초청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가 더욱 성이 나서 달군 쇠를 가져와서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효성이 지극해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생활은 지극히 청렴해 벼슬이 재상급(宰相級)의 2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었고 고기반찬 없는 밥을 먹었다. 또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니 처자가 이를 원망했는데, 유응부가 죽던 날 아내가 울면서 말하기를 “살아서도 남에게 의지함이 없었는데 죽을 때는 큰 화를 입었구나.”고 하였다.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에 「육신전(六臣傳)」을 지으면서, 단종복위의 거사 주모역은 성삼문·박팽년이고, 행동책은 유응부로서, 이 세 사람이 한 일을 삼주역(三主役)으로 부각시켰다. ‘사육신(死六臣)’이라는 명칭은 남효온의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그대로 확정되어,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공인해 성삼문·박팽년·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 등 6인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그 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적에도 사육신으로 재차 확정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대구의 낙빈서원(洛濱書院), 의성의 충렬사(忠烈祠), 강령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 유응부(兪應孚) (한국학중앙연구원)
* [숭정사(崇正祀) 내삼문(內三門)]▶
계단을 올라가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인 성인문(成仁門)을지나야 한다. 삼문은 경의를 갖추어야 할 장소에 설치한 3칸으로 된 문인데, 일반인들이 들어갈 때에는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서 나올 때는 왼쪽으로 나와야 한다. 가운데 문은 임금이나 제주가 출입하는 문이다. 우측 담장을 따라 사당의 옆면에 있는 협문으로는 들어갈 수가 있다. 제사를 올릴 때 제수를 들여오거나 사당 관리인들이 출입한다.
* [사육신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숭정사(崇正祠)]▶
사당에는 조선 세조 때 단종복위를 꾀하려다 숨진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 여섯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숭정사(崇正祠)는 평소 일반 관광객에게는 문을 열지 않는다. 꼭 사당에 들어가 참배를 하고자 하는 경우에만 문을 연다고 했다.
안내자 백현주 님은 나의 뜻을 흔쾌히 받아들여 특별히 문을 열어주었다. 칸막이를 한, 각 제단 위의 위패는 자주색 보로 가려져 있었다. 위패의 뒤쪽에는 정갈한 병풍이 둘러져 있었다. 모자를 벗고 경건한 마음으로 위패 앞에 섰다. 여섯 분의 충절을 기리며 묵도하고 정중하게 재배를 올렸다. 목숨을 다한 이 분들의 절의는 더없이 숭고하다. 왕조시대의 충절로서 뿐만 아니라 바로 조선시대 ‘선비 정신의 표상’이 된다는 면에서 경모해야 한다. 참다운 사람의 도리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은 그 고절한 정신은 존숭되어야 한다.
숭정사(崇正祀) 현판을 육신사(六臣祠)로 하지 않은 것은, 처음 위패를 봉안할 때 사육신과 더불어 박팽년의 부친인 박중림(朴仲林, ?~1456년) 공의 위패도 함께 봉안했기 때문이었다. 1974년 육신사 우측 언덕에 따로 충의사(忠義祠)를 짓고 문민공 박중림 공의 위패를 모셨다. 숭정사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장중하고 엄숙(嚴肅)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충의사(忠義祠)
숭정사 참배를 마치고, 충의사를 찾았다. 충의사는 숭정사 우측 언덕 위에 있다. 충의사(忠義祠)는 박팽년의 부친인 한석당(閑碩堂) 박중림(朴仲林, ?~1456)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1974년 건립하였다. 거기 충의사 앞뜰에는 박중림(朴仲林) 공의 사적비가 있다.
한석당閑碩堂) 박중림(朴仲林) 공은 1423년(세종 5)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427년 문과중시에 급제해 집현전 수찬이 되었고, 그 뒤 시강원 보덕, 사간, 승지,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452년(단종 즉위)에 공조참판이 되었으며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대사헌, 예문관대제학, 공조판서, 집현전 제학 등을 거쳐 1453년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1455년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세조의 회유를 물리치고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 아들 박팽년과 집현전 제자들이 일으킨 단종복위거사에 가담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했다.
이때 박팽년은 물론이고 인년, 기년, 대년 등의 아들들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1739년(영조 15) 신원이 되어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84년(정조 8) 좌찬성이 추증 되었고 영월 장릉(단종의 능) 충신단, 공주 동학사 숙모전(肅慕殿)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육신사(六臣祠)의 유래
앞에서 낙빈서원의 유래에서 언급하였듯이, 여기 묘골에서 500m 가량 떨어진 하빈면(河賓面) 묘리(妙理) 삼가헌(三可軒) 마을 근처에, 자손들이 뜻을 모아 ‘절의묘(節義廟)’를 세우는 데서 비롯하였다. 그 절의묘에 박팽년과 그의 아버지 중림(仲林)의 신위를 모시고 제(祭)를 지냈다 그런데 박팽년의 현손(玄孫) 계창(繼昌)이 고조부 박팽년의 제삿날에 꿈을 꾸었더니, 꿈속에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死六臣)이 사당 밖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고, 직계 후손 없이 멸문지화(滅門之禍) 당한 것을 안타까이 여겨, ‘하빈사(河濱祠)’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며 낙빈서원을 함께 세웠는데, 이를 들은 숙종이 1694년 ‘洛濱書院’(낙빈서원) 사액(賜額)을 내려 주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폐쇄된 것을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충효위인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묘골에 육신사(六臣祠)를 짓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박팽년의 후손(後孫)이 살아남게 된 사연
묘골[竗谷]마을의 박팽년 후손과 육신사(六臣祠)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육신 중에서, 후손으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팽년의 손자 박비(朴婢)로부터 비롯되었다. 단종복위 거사의 실패로 박팽년의 아버지 중림(仲林)과 그의 4형제는 물론 그의 아들 3형제인 헌(憲), 순(珣), 분(奮)과 육신(六臣)의 손자들까지, 삼대가 모두 처형되어 멸족(滅族)의 참화를 당하고 아녀자들은 공신의 노비(奴婢)가 되거나 관비(官婢)가 되어야만 했다.
그 무렵 박팽년의 둘째 아들 순(珣)의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도 관비(官婢)가 되어 고향인 경상도 닭밭골(지금의 이곳 묘곡마을)로 내려와 살았는데, 집의 몸종과 함께 임신 중이었으며 그 후 이씨 부인은 아들을 낳고 몸종은 딸을 낳았는데, 당시 세조는 역적의 후손된 남자아이는 누구나 죽이라 하여 외할아버지가 이를 감추기 위해서 아이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고, 비밀리에 여종이 낳은 딸과 바꾸어 길러서 기적적으로, 사육신 중 오직 박팽년의 혈손(血孫)만이 남아 대(代)를 잇게 되었다.
박비(朴婢)가 17세 되던 해에 이곳에 부임해온 이모부인 경상도 관찰사 이극구(李戟均)의 권유에 따라 자수하여, 성종(成宗)으로부터 사(赦)함을 받았다. 박비(朴婢)는 종의 이름이어서 나쁘다 하여 박일산(朴一珊)이란 이름까지 하사(下賜) 받아 고향에 내려오게 되었다. 박팽년의 유복손 박일산(朴一珊)은 후손이 없던 외가(外家)의 재산을 물려받아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 99간의 종택(宗宅)을 짓고 정착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이곳 묘골은 순천 박씨(順天朴氏) 박팽년 후손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묘골에는 구한말까지 300여 호가 살았고 광복까지만 해도 100여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30 여호만이 남았다.
계유정란(癸酉靖難)후 237년이 지난 숙종17년(1691년)에, 나라에서 사육신의 신원(伸寃)을 풀어주어 옛 관직을 복위시켜 사육신(死六臣)의 넋을 위로 하고, 그 무렵부터 사육신(死六臣)을 ‘만고충절(萬古忠節)의 표본’으로 기리게 되었으며, 묘곡마을에는 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박팽년(朴彭年)의 손자 박비(朴婢), 즉 박일산이 살아남아, 육신사(六臣祠)에서 사육신(死六臣)의 충절을 기리게 되었다.
백팽년의 손자 박일산(朴一珊)이 살아남은 것은 정말 천운(天運)이었다.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다. 노비 분배기에 의하면 박팽년의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는 ‘옥덕’이라는 이름으로 구치관에게 노비로 주어졌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에 나오는데, 이 기록은 한참 후대의 일로,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하위지의 경우 장성한 자식은 다 죽고 미성년자였던 조카 하분, 하포, 하원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고 대신 변방으로 유배가게 되었다. 성삼문의 경우를 보면 아들들은 물론 조카들과 종손들까지 모두 처형당해 직계가 단절되었다.
태고정(太古亭) ; 보물 제554호
숭정사(崇正祠) 아래 우측에 있는 태고정(太古亭)은 1479년 (성종 10)에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朴一珊)이 종택을 세울 때 그에 딸린 정자로 건립되었다. 원래는 종가 안에 붙어 있는 별당(別堂)이었으나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로 온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들이 있다.
정자 정면에는 ‘太古亭’(태고정)과 ‘一是樓’(일시루) 두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일시루(一是樓)는 ‘모든 것은 본시 하나로 통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一是樓’(일시루) 현판에 비해당(匪懈堂)라고 적혀 있다. 비해당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안평대군(1418(태종 18)~1453(단종 1))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이 집이 처음 지어진 해(1479)보다 훨씬 전인 1453년 계유정난 때 사사되었다. 안평대군은 송설체에 능한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이다. 해설사 백현주 님이 전하는 말로는 안평대군이 쓴 글씨를 집자(集子)하여 만든 현판이라고 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선비는 죽지 않았다!
☆… 경건한 마음으로, 육신사(六臣祠)를 둘러보고, 안쪽에 ‘節義廟’(절의묘) 현판이 걸린 외삼문을 나섰다. 오늘 조용히 육신사를 찾아 절의(絶義)를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버린 사육신을 추모하며 가슴이 뜨거웠다. 경내를 탐방하는 동안 지근(至近) 거리에서 정성을 다해 안내하고 해설을 해주신 백현주 님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외삼문 앞에서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묘골 마을로 내려왔다. 청명한 날씨, 오후의 가을 햇살이 따뜻하고 화사했다.
이 밝고 맑은 가을날! 마음은 이런저런 무거운 질문으로 가득했다. …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권력인가? 인생은 욕망인가? 의리인가? 명분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참다운 사람의 길 … 단도직입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늘이 내린 목숨, 존엄하게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다. 조용히 고개 숙여 육신(六臣) 제위를 우러러 뵈옵고, 조선의 ‘선비’, ‘선비 정신’을 생각했다.
선비 정신, 그 의리(義理)와 청렴(淸廉)의 삶
우리나라 선비들이 가장 가치 있게 여겼던 것은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이념’이었다. 이 의리의 일관성은 세력에 따라 변화하는 기회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선비의 지조(志操)와 절개(節槪)는 선비로서의 징표와 같은 것이다. 선비의 원류는 공자가 말씀하신 군자(君子)이다. ‘군자는 의리(義理)에 살고 소인은 이익(利益)에 산다’(子曰 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고 했다. —『논어』(이인편 16장)
그밖에도 여러 가지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주목받는 것은 학행일치(學行一致)의 방향성이다. 선비들은 배운 것을 실천(實踐)에 옮길 때 비로소 그 배움이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천 단계에서 가장 중요시 되던 것이 대의명분(大義名分)이었다.
그래서 선비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바탕으로 한 의리(義理)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불의(不義)를 용납하지 않는다. 아니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결연히 맞선다. 사육신(死六臣)이 바로 그 전범(典範)을 보여준 분들이다.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심지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해도 물러서지 않았다. 육신이 죽어도 그 정신은 시퍼렇게 살아 있지 않은가.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는 장렬함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하고 목숨을 다한 이순신 장군,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르고도 무고하게 죽음을 당한 김덕령 장군, 병자호란의 치욕을 견디지 못해 죽음의 길을 택한 장현광, 구한말 을사늑약에 보고 자결한 민영환, 경술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절명시를 쓰고 자결한 황현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다. 조선왕조 500년을 지켜온 것은 바로 이 엄정(嚴正)하고 꿋꿋한 ‘선비 정신’이었다.
선비(士)는 먼저 ‘자신을 수양’[修己]하고, 벼슬(大夫)에 나아가서는 ‘남을 잘 다스리는’[治人],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근본으로 삼는다. 사대부(士大夫)가 된 선비는 덕(德)으로 사람을 다스리고, 나라를 위하여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자세로 임한다.
참다운 선비는 청빈(淸貧)한 삶을 추구한다. 벼슬에 나아가도 탐욕하지 않는다. 청백리(淸白吏)는 사대부의 이상적인 역할 모델이었다. 청백리는 국가적인 포상의 대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존경의 대상이었다.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세도를 부리며, 자신만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탐관오리(貪官汚吏)는 선비가 아니다. 스스로 양반입네 하고 떵떵거려도 추악한 소인배일 뿐이다.
지금까지 기록을 종합해 보면, 조선왕조의 청백리(淸白吏)는 217명이었다. 태조(太祖)조에는 길재 등 5인, 태종(太宗)조에는 경의, 김약항 등 8인, 세종(世宗)조에는 황희, 맹사성, 유관, 황효원, 박팽년 등 15인, 세조(世祖)조에는 기건 등 7인, 성종(成宗)조에는 성현, 이현보 등 20인, 중종(中宗)조에는 오세한, 손중돈, 이언적, 김종직, 정창손 등 34인, 명종(明宗)조에는 주세붕, 박수량, 홍섬, 이황, 오상, 등 45인, 선조(宣祖)조에는 이원익, 이항복, 류성룡, 김장생, 오억령 등25인, 인조(仁祖)조에는 김상헌, 이시백, 이안눌 등 13인, 숙종(肅宗)조에는 강백년, 최경창 등 22인, 경종(景宗)조에는 류상운, 강석범, 이하원 등 6인, 영조(英祖)조에는 허정 등 9인, 정조(正祖)조에는 이의필, 이단석 2인, 순조(純祖)조에는 남이형, 한익상 등 4인이다.
장관급인 판서가 30여 명으로 가장 많고, 그중에서도 인사담당인 이조판서가 가장 많았다. 그 외에 영의정이 13명, 좌의정이 7명, 우의정이 3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시대로 평가받고 있는 세종(世宗) 시대는 대표적인 청백리 인물로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유관(柳寬)을 들 수 있다. 이 세 사람은 세종의 태평성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의리와 청빈이 나라를 다스리면 백성은 행복하다!
조선시대 지식인인 ‘선비’는 단순한 지식종사자가 아니라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실천을 통해 국가사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로 청빈(淸貧), 청백리(淸白吏), 청직(淸職), 청류(淸流) 등의 단어에서 보듯 깨끗함에 큰 가치를 두었으며, 선비정신을 ‘맑음의 정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정옥자 전 서울대 교수(국사학)는 “선비정신이야말로 한국이 자랑할 대표적인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선비정신에 대한 재조명이 요청된다”고 말했다.
권력, 그 야비한 욕망(慾望)과 ..... 의리(義理)
인생(人生)이란 자신이 선택하여 살아가는 길이다. 권력자는 권력이라는 욕망(慾望)으로 자신의 길을 세우고, 선비는 추상(秋霜) 같은 의리(義理)로 자신의 근본을 삼는다. 사육신(死六臣)의 경우, 욕망(慾望)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육신은 죽어갔지만 그 정신이 죽은 것은 아니다. 권력의 불에 달군 시뻘건 인두에 살이 타들어가고, 사지가 찢기고 뼈가 부서지고 피와 살이 흩어지는 처참한 형벌을 받아 죽어가면서도 선비는 자신의 의리(義理)를 놓지 않았다. 욕망[권력]이 산 사람의 살을 찢어 죽일 수는 있어도 선비의 의리는 죽이지 못했다. 그래서 선비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다. 유한(有限)한 인생, 사람은 어차피 죽어야 할 목숨이다.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회한의 고통(苦痛)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역천(逆天)의 욕망은 목숨이 살아있서도 죽음과 같은 삶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사육신(死六臣)은 의리(義理)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다. 단순히 왕조시대의 도식적인 충절(忠節),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행위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참다운 도리(道理)로 인생을 살아가는 ‘선비 정신’이라는 인식구조의 발로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고 철학적인 응답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소금이 아니듯이 선비가 ‘선비 정신’을 잃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얼마나 당당하고 엄정한가? 소름이 끼치도록 고절한 정신이다.
그러나 양심과 도리에 벗어난 권력, 그 이기적인 욕망의 뒤끝은 … 추악하고 허망하다. 인류의 모든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의리(義理)는 차치하고 자신의 양심(良心)마저 팽개치고 스스로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문재인 정권의 정치모리배들이 거짓과 탐욕으로 난장을 벌이고 있다. 후안무치(厚顔無恥)가 기고만장(氣高萬丈)이다. 무도(無道)하기 짝이 없는 시대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권력]가 오늘도 파국의 낭떠러지를 향해, 무자비하게 달리고 있다. 나그네의 마음이 뜨겁고 무겁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