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 김수환
달려가다 언뜻언뜻, 불안이 튀어 오르는
그의 신발 자국을 보았던가 아니던가
오늘도 그 뒤꿈치를 아니 본 듯 다시 본다
머언 먼 저쪽으로 누군가가 달려가고
완결된 미완성, 너는 나의 미완성
저 혼자 잘도 떠 가는 깊고 환한 밤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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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일암의 저녁/ 김진숙
납작한 바위 위에
나를 꺼내 놓습니다
어둡고 습한 모서리
온전히 마를 때까지
먼 데서 오시는 어머니
종소리를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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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 문수영
어둠이 짙을수록 별빛 달빛 밝아지고
긴 터널 숨 가쁘게 달려온 꿈의 편린들
삽시간 밀려나는 것들, 눈뜨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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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손영희
눈은 감기는데
중매쟁이 앞에서
달은 기우는데
딸년은 밤마실 가서
비린내 물씬 풍기며
흘레붙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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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있다카이/ 심인자
비 그치자 쌍분 할매
들판으로 납신다
흔들흔들 유모차
덜렁덜렁 농기구
꼬부랑
어깨너머로
콩꼬투리 터진다
이것아 물 실컷 뭇나
지금 입, 꼭 다물 거라
물 뭇다고 아무 때나
입 벌리면 널쪄 죽는다
콩도 팥,
입단속 하그라
봄 올 때까지 알긋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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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백 한계선/ 이숙경
바람과 햇살은 늘, 이만하면 다 누린 것
눈비로 목을 축이니 그만하면 다 적신 것
더는 더 바라지 않아 딱 잘라 선 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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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앞 느티나무/ 이화우
서 있기만 한 나무를, 고스란한 하늘을
빈 곳에서 와서는, 바람은 내 말을 하듯
붉게도 찍힌 무덤을 보듬다 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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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비수/ 임태진
바람처럼 지나가다 가슴을 푹, 찌른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불러 죽겠다는 말
지구촌 어딘가에서
간절하고 간절한 말
때로는 뜬금없이 숨통을 파고든다
무심코 흘려보낸 농담 같은 그 말이
가난한 영혼들 심장에
예리하게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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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력 발전/ 정희경
숫처녀의 봄바람
사내의 가을바람
그날의 치맛바람
무에 든 바람까지
이력에 바람을 넣는다
발전기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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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사전/ 조한일
정원 초과 서재를 정리하는 늦봄 아침
지붕처럼 먼지 쌓인 다세대 책들 사이
빛바랜 국어사전에 손댄 게 언제였나
시집들 틈 박힌 돌 같은 영어사전 낡은 옥편
빠르고 편한 인터넷 사전 수고는 삭제돼도
모르는 단어를 찾던 유목의 낙타는 없다
검색하고 클릭하면 삽시에 번식한다
유의어 동음이의어 예문들의 산란장
종이는 나무의 예문이다 네가 내게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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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함께 가는 길
영언 동인 제10집/ 종이는 나무의 예문/ 도서출판시와실천/ 2024
바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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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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