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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죽고 새 창조물로 삶
천 영 대
성경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갈라디아서 6:11∼16)」
핍박을 면하려함
타락한 육신은 육신의 고통과 고난을 피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악한자들은 이것을 알고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어 상대방을 자신의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고 한다. 또, 사람들은 고통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그것을 피하려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따라 간다. 이것은 일반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세상에서도 그러하다. 주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이 땅에서 생활할 때도 그러했고 그 이후에도 그러했다. 종교적인 유대교인들은 유대교에서 중히 여기는 것들을 고수하는 가운데서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거나, 전파하는 자들에게 많은 핍박을 가했다. 사도행전 4장 15∼21절에서는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고 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고쳐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됨으로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가운데서 베드로와 요한을 가두었다가 풀어 주면서 그들을 경계하며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다. 그렇게 했을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럴 때 그들은 더 이상 어떻게 하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며 놓아주었다. 이렇게 주님과 우리의 대적자요 원수인 마귀는 주님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위협을 가하거나, 핍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 육신적인 인간은 위협과 고통을 두려워하고 싫어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6장 12절에서는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고 했다. 유대교도들은 율법이나, 할례나, 음식이나, 절기를 중요하게 여겼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고 했다. 어떤 무리들은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할례를 중히 여겼다.(물론, 이러한 할례는 외적인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다.
로마서 2장 28, 29절에서는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했다.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이면적 할례, 곧 마음에 하는 할례가 진정한 할례로서 영 안에 있는 것이지 율법 조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갈라디아서 5장 11, 12절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사도는 율법에서 말하는 육체에 행하는 할례를 전파했다면 핍박을 받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사도는 그 할례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 사도는 육체에 행하는 할례는 실제가 아니고 실제의 모형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전파하지 아니했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는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할례의 모형인 손으로 행하는 할례가 아니라 육적 몸을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진정한 할례로 말했다. 빌립보서 3장 2, 3절에서는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했다. 육신에 행하는 할례, 살이나 베어내는 이들을 삼가 하라고 했다. 진정한 할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라고 했다. 사도는 핍박을 무릅쓰고서도 할례의 모형인 손으로 육신에 행하는 할례, 살이나 베어버리는 할례는 전하지 않고 진정한 할례, 육적 몸을 벗어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 마음에 있고 영 안에 있는 할례를 전파했다. 그리함으로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다.
자랑하려고 함
할례는 손으로 육신에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할례가 아니고 진정한 할례의 모형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육신으로 자랑하게 한다. 로마서 10장 2, 3절에서는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온전한 지식을 좇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했다고 했다. 이렇게 율법을 따를 때는 하나님의 의를 세우지 않고 자기의 의를 세우게 된다. 할례는 육신에 행하는 것으로서 육신에 관계된다. 실제로는 육적 몸을 벗는 것, 자신을 끝내는 그리스도의 할례인 데도 육신에 속한 것으로 자랑한다. 갈라디아서 6장 13절에서는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그런데 다른 번역에서는 “……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것입니다(표준 새번역)”라고 했다. 할례를 강조하는 그들 자신도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서 사람들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을 자랑하려고 그렇게 한다고 했다. 타락한 육신은 자기 육신을 자랑하고 높이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그와 원수가 된다(롬8:7,8). 그런데 율법은 우리의 영에 관계된 것이 아니고 육신에 관계된 것이다. 히브리서 7장 16절에서는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율법에 대해 ‘육체에 상관된 계명’이라고 했다. 이렇게 율법은 영에 관계된 것이 아니고, 육체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사람을 살릴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 오히려 율법에 속한 자들은 자신을 자랑하고 높인다. 누가복음 18장 9∼14절에서는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 ”고 했다. 유대교에 속해서 율법을 행하는 자들은 토색, 불의, 간음을 행치 아니한다고 했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했다. 이러한 자는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무시한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지 않고 비록 세리이지만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면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한 사람을 의롭게 여겼다고 했다. 이렇게 율법에 속한 자들은 자신은 대단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은 별 것 아닌 것으로 멸시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러한 자들은 기뻐하지 않고 배격한다. 에베소서 2장 8, 9절에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누구든지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 주님은 타락하여 주님을 대적하는 육신을 자랑하는 것은 배격하고 주님 자신을 높이기 원하신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에서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세상에서 멸시 받고 천대받는 자, 지혜가 있지 않은 자, 문벌이 좋지 않은 자,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 받는 자들을 택하사 그렇지 아니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데 그것은 어떤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자신 외에 어느 누구도 자신을 높이거나, 자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십자가에 못 박힘
사람들은 살아서 자신을 나타내고 높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 자신은 끝내고 주님만 나타내고 증거하기 원하신다.(왜냐하면 우리는 타락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끝내는 것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더 이상 자신이 산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끝났다는 것을 뜻한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다. 사도는 사람들은 자신을 자랑할지라도 사도 자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또한 자신에 대해 그러하다고 했다. 십자가는 그 당시에 중범죄자들에게 내려지는 무서운 형벌로서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했는데도 사도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했다. 고린도전서 2장 1, 2절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다. 사도는 세상적인 탁월한 언변과, 말과 지혜로 주님을 증거하지 아니하고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했다. 사도는 세상적인 것들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관심하고 그를 높이고 전파했다. 즉, 자신을 나타내거나 높이지 않고 오직 주님만 나타내고 높이고 증거하는 것만 관심했다. 사도 자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 또한 사도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끝났기 때문에 자신은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다. 십자가는 참으로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것이었지만, 자신도 세상도 끝낸 그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도 자신도, 세상(특히 종교적인 세상)도 끝나고 새로운 것이 발아되기 때문에, 사람들이나, 세상을 자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했다.
새 창조물
주님은 타락한 세상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끝내시고 새로운 창조를 하셨다. 그 새로운 창조는 옛 창조에 속한 것으로 다시 창조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것으로 새로운 창조를 하신 것이다. 곧, 세상에 있는 것으로 다시 창조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것, 곧 죽으시고 부활하사 생명을 주는 영이 되신 그리스도(고전 15:45)로 창조하신 것이다.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고 했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는 그것을 받든, 받지 않든 아무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새로운 창조물 뿐이라는 것이다. 옛 창조에 속한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창조에 속한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옛 창조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창조물이 아니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창조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입었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새사람, 곧 새로운 창조물을 뜻한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창)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했고,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했다. 옛 창조는 지나 갔고 그리스도 안에 새 창조물이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새로운 삶, 새사람의 삶, 곧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다. 골로새서 3장 9, 10절에서는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했다. 주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고 했다. 우리는 새로운 창조물로서 새로운 삶을 살므로 주님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할례 받는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다 같이 옛 창조에 속한것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고 새로운 창조에 속한 새로운 창조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례나 무할례를 가지고 왈가 왈부 해서는 안 된다. 할례는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7장 18, 19절에서는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고 했다. 전 옛 계명, 곧 율법은 연약하여 무익하므로 폐했다고 했다. 히브리서 8장 12, 13절에서는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들)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고 했다. 옛 언약인 율법은 낡아지고 쇠하여 없어져간다고 했다. 우리는 이러한 옛 것, 곧 율법이나 할례 같은 것에 매여 있어서는 안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창조물로서 새로운 사람의 삶, 곧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야 한다. 우리는 옛 것을 관심하며 따지고, 싸우는 데서 나와 새로운 것, 곧 새사람을 관심하며 살아야 한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평강과 긍휼이 있음
사도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새로운 창조물을 축복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6장 16절에서는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 ‘이 규례를 행하는 자’는 위 내용의 새 창조물의 규례를 행하는 자를 말한다. 그런데 ‘이 규례를 행하는 자’는 다른 자가 아니고 새 창조물의 규례를 행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이 내용에서 규례를 행하는 것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말하는 ‘그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율법을 따라 행하는 것,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들의 생명(골3:4)이 되어 역사하는 그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이며, 이러한 삶을 사는 자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로마서 2장 28, 29절에서는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했다. 빌립보서 3장 3절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했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자가 진정한 할례를 받은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가 진정한 할례를 받은 자라고 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부터 나서 그를 생명으로 하여 사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요한복음 1장 11∼13절에서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해 자기 백성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혈통으로 났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를 믿고 영접하여 그에게로부터 남으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주님으로 말미암은 복이 있다. 평안은 은혜에서 산출이 되는 데 이 평안의 상태에 살므로 긍휼과 은혜를 받게 된다. 시편 125편 5절에서는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했다. 굽은 길로 다니는 자는 범죄하는 자와 함께 다니게 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다. 요한이서 1장 3절에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다. 이러한 것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축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며, 그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도 이러한 축복이 함께 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