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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은빛 시간☆]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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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시간]
진수용 시집 / 조선문학시인선 332 / 조선문학사(2013.05.150)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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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시간
진수용
어둠을 갉아 먹고
포식한 눈雪이
사박사박 내리는 시간
그리움 앓는 가로등 밑을
귀 쭈뼛 세운 채
당신 향한 마음으로 밟아본다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는
그리움 하나 뽀드득
보고픔 하나 뽀드득
뽀드득 뽀드득 들리나요?
세상이 하얗게 늙어갑니다
인생은 봄날
진수용
올망졸망
모여 앉은 진달래꽃 잔치
과객의 나그네가 눈요기로
시장기 달래며 지나간다
망울망울 젖 몽우리
하나하나
꽃망울 터뜨려 피워내며
향기 뿜고 살아가면 되는 걸
끝 간 곳 모르는 삶의 언덕길
헉헉거리며 숨가빠할 게
뭐 있을까
시간의 흐름에
생을 맡기고 물욕을 버리면
비워버린 자리마다 행복한
세상으로 가득할 것을
사랑의 거리
진수용
기로수가 옷을 입으면
잎 잎마다 얼굴이 되어
맞이하고 보낸다
동행은
그리움
그리움 앞세우고
사랑의 거리를 걷는다
어깨 나란히 걸었던
내 가슴을 밟고 가버린
가버렸으나
떠나보내지 못한 얼굴 하나
가슴에 묻은 채
눈물 섞인 웃음으로
사랑의 거리를 걸어본다
작은 소망
진수용
삶의 해거름 길
어스레한 그림자가
한발 한발씩 터울지면
그제서야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해뜰참 오기를 기다린다
가슴안의
새겨둔 작은 소망하나
거듭제곱 불 지필 수 있다면
날 세운 세월의 칼날이
쉼 없이 시간을 잘라내더라도
생의 꿈은 놓지 않으리라
아내의 세월
진수용
어찌 안다하겠습니까
모래바람 같은 세월에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당신의 반세기
힘든 삶을 엮느라
굵어진 손마디는 사랑입니다
당신의 손마디가
세월의 아픈 흔적 허물지 못하고
시린 세월에 잘려나갈 때
고통의 눈물을 삼키고 삼키던 마음은
행복지기 곡간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변해가고
서리머리에 주름 깊어지는데
안타까운 마음은
몸조리해야할 당신이
살림난 가족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어머니의 아랫목
진수용
고드름 끝에
맺히는 물방울은
힘겨운 마음을 녹이는 눈물이다
세상사에 묻혀버린 고향
박제된 마음 매만져 보며
그리움의 실타래를 풀어본다
유년시절 놀다가 집에 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발 묻어 다독거려 주시던 자리였다
따뜻했던 그 느낌이 있는 아랫목
그리운 마음
당신께 꼭 내주고 싶은 자리다
색깔을 잃은 자리
진수용
꽃이 필 때는
아늑하고 포근한 정이
넘치는 듯 했는데
단풍드는 가을날
찬바람머리 새어들어
가슴이 시려오는구나
낙엽처럼 쌓인 그리움은
내 마음을
감추고 감춰도 드러나네
복권
진수용
괜스레 잠을 설치면
오리 새끼
어미 꼬리 물고
졸졸 따르듯
웬 놈의 생각이 그리 많은지
술 취한 태백은
술잔에 달 띄우고 이야기 했다는데
나도 달하고 이야기 하련다
살며시 비집고 움트는 멍울의 설렘을
달아
내 속마음을 안다면
영험 한 번 베풀 수 있잖겠니
어제 또 한 장 구입했다
안 될 줄 뻔히 알면서도 괜스레
두렵다
진수용
글을 써본다
그렇다고
대단한 들도 아닌 다만
감춰둔 기억을 끄집어 낼 뿐이다
글을 쓰고픈 마음뿐인데
기억의 내면 저쪽에서
하나씩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지나간다
두렵다
내 속내가
누군가에게 들키고 있다는 게
자신을 온통 드러내보여야 한다는 게
두렵다
술래
진수용
시샘 많은 노을이
서녘 하늘에 마구 칠한
장미 한 다발
풍경으로 걸려 있다
내겐 그리움의
추억과 향수를
말없이 안고 가는 구름 같다
추억과 그리움을 풀어 칠한
구름자락 저쪽으로
술래가 되어 숨어버린
얼굴 하나
뒤 따르며 쫓는
발목엔
노을이 묻어 있다
들꽃
진수용
개울소리 귀동냥하며
외로움 달래는
들곷
벌 나비가
찾아오는 날이면
웃음 외로움 피워냈다
지나던 나그네
들꽃 마주하고
즉자卽自 대자對自 읽고 간다
봄이 있는 길∙1
진수용
춘곤증春困症 피는 한낮
마음속에 고여 있는 바람이
봄 햇살 한입 물고
남실바람 따라 춤을 춘다
허리를 휘감는 봄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그 바람 붙잡고
애교 떠는 꽃봉오리의 속기俗氣
산수유가 꽃을 피우려
쑥덕쑥덕 하더니
노란 속살 톡톡 터뜨려
뛰는 내 가슴에 끼얹고 간다
마음 속에 걸린 봄
구재기
십오야를 지난
나날이 이지러지는 명월처럼
흐르는 세월 앞세우고 동행하며
병처를 어찌 생각지 않으리
발덧이 생겼나
구두 뒤창이 닳아졌나 기우뚱
삶의 기울기가 보인다
새벽 종소리의 파장에 밀려
명월明月은 수목
여명黎明은 파장에 실려 빛을 세우니
실바람은 꿈을 싣고 봄을 부른다
봄비 내리는 날
구재기
촉촉한 봄비가
창문에 매달린 채
내가 보고 싶으냐고 묻는다
너를 생각한 하루는
종일 비에 젖는데
너는 아느냐
창밖에
잊지도 버리지도 못한 추억이
온통 네 생각뿐이었다
새순이 비에 잦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네게 젖어드는데
왜 네가 미워진다
가을 길을 걷는다
구재기
붉어진 단풍에
흐르는 추억 하나 매달려
가을이 울먹인다
불붙은 숲속
깊이를 알 수 없는
가슴에 불꽃 하나
알림표 향수 두어 방울
낙엽위에 놓으니
나이테란걸 뒤늦게 알았다
마음이 허물어질까 봐
돌아가지 못하고
눈물 한 줌 깔린 길을 걷는다
떨고 있는 가로수
구재기
겨드랑 밑 술병에
소망을 시주해 넣고
술 취해 술 잠자는 부처님
천기天氣와 맞서다가
성장한 자식들 다 빼앗기고
노숙자가 된 가로수
잠 깨어 보살 되면
병드는 것보다
삶이 괴로워질 테니까
그대로 극락세계 여행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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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머리에
한 해도 중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하늘이 푸르고 수림의 빛깔도 생기가 넘쳐 아름답습니다.
너무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서 힘들게 살아온 세월에 얼룩졌던 마음을 달래고자 푸념삼아 쓴 글들이라 눈에 거슬리는 문구도 있을 것이고 화려한 미사여구보다는 부드럽지 못한 표현이 많을 것입니다.
중년을 훨씬 넘긴 나이에 시학을 배워 유일한 벗이 되어 즐겁기에 하늘은 푸르고 내 마음도 푸르게 싹을 틔워 아름답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함께 해주신 박진환 교수님을 만나 시의 맛과 멋을 알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시를 읽고 배우며 보람찬 삶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 같습니다.
부끄럽지만 그 흔적들을 모아 여기 두 번째 시집『은빛 시간』을 내어 놓습니다
2013년 初夏에
진수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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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용 詩集 [은빛 시간]
[ 시집 평설 ] -
표현의 간결미와 의미의 확장미
박진환(시인. 문학평론가)
1. 前提
90여 편의 시를 3부에 나누어 싣고 있는 진수용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은빛 시간』은 간결한 표현 속에 의미의 확장을 배가시켜주는 설득력이 있어 잔잔한 감동을 체험하게 해주고 있다.
수록시가 예외 없이 16행을 넘지 않는 한 페이지의 분량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를 단형시로만 규정해버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시적 장치를 갖추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 하나는 시적 외형을 통해 본 단형성이 시인의 호흡을 매우 짧은 것으로 보아줄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는 외형상 그렇다는 것으로서 그 이면에는 시인의 언어 경영이 최소의 언어를 투자하여 최대의 감동을 마진으로 챙기고자 하는 매우 계산된 절제와 축약의 언어경영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전자적 경우 외형의 단조로움이 보여주는 간결미는 호흡이 짧은 단시로 보아줄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계산된 언어경영의 비법이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후자적 경우인 최소의 언어투자를 통한 최대의 감동을 마진으로 챙기고자 하는 언어경영은 계산된 시적 언술로 보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술은 언어를 다루는 기술로서 일종의 언어경영쯤이 된다. 詩를 言+寺의 합자라는 등식으로 풀이하는 고전적 해석에서도 시를 언어를 다루는 기술로 보고 있다. 言을 談이 아닌 똑똑하고 음조가 고른 말로 보는 것이나, 寺를 持의 원자로 보고 손을 움직여 제작한다는 풀이는 곧 시를 언어를 다루는 기술로 보는 것이 된다.
현대적 해석도 예외는 아니다. 시는 몸을 언어의 세계에 두고, 언어를 소재로 하여 창조된다는 하이데거의 시론이나, 일상의 정서생활과 시의 소재사이엔 차이가 없다. 이러한 생활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기교를 사용하게끔 되어 있다는 리처즈의 피력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소재로 하여 창조되는 시, 언어적 표현기교를 사용하여 탄생시키는 시는 그 표현은 각기 달라도 다같이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언어경영이라는 언술에 귀결될 수 있다. 언술은 시의 경우 운문이라는 숙명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외형이 중시되고 중시된 외형의 틀에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극도의 절제와 함축을 수단화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곧 언어경영으로서의 언술이다.
진수용 시인은 바로 여기에서 시를 출발시키고 있고 그 때문에 시적 단형성은 짧은 호흡이 아니라 극도로 절제된 언어경영이라는 언술을 시법으로 했다는 견해의 타당성을 성립시키게 된다.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은 한편의 시를 16행 내외의 한 페이지 분량으로 형상화하여 성격별로 분류, 3부에 나누어 싣고 있다. 제1부「은빛 시간」의 시편들은 주로 화자의 인생에서 터득했거나 체험했던 것들을 형상으로 재구성 해주고 있고, 제2부의 시편들은 일상적 삶과 삶의 주변에서 발상된 것들을, 그리고 제3부에서는 자연이나 계절을 통해 마주했덙 것들을 형상으로 재구성 해주고 있는데 이러한 시역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단일화된 것이 바로 군더더기가 끼이지 않는 단순· 간결· 축약적 언어경영의 함축 내지는 절제미라 할 수 있다.
이를 시를 제시 구체화 했을 때 진수용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은빛 시간』의 시세계와 함께 시인의 언어경영이 획득해낸 표현의 간결미와 의미의 확장이라는 상반의 시적 설득력을 체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2. 실버시대의 자화상
제1부에 수록된 시편들은 ‘인생’, ‘마음’,‘세월’들의 시어가 주어로 전진 배치되고 있다. 한마디로 집약하면 실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화자의 여러 모습들을 컷과 컷으로 재단해다 재구성한 자화상쯤이 될 듯싶다. 그것은 실버시대를 살아가는 화자의 여러 모습들을 시로써 형상ㅎ솨 해주고 있다는 뜻인데 시를 제시, 구체화 했을 때 이해를 도울 것으로 본다.
가) 장년의 계절로 접어드니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하며
흐르는 물처럼 살아간다
온갖 번뇌와 고통이
마음을 진흙탕 속으로
밀어 넣을 때도 있다
인생길 얼마쯤 와 있는지
마음이 청춘이라서
잔고는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른다
빛바래가는 얼굴이지만
여유롭고 넉넉한 감정은
젊은이보다 더 붉은 화초다
나) 책보따리
어깨에 가로 걸러 메고
검정고무신 신고
학교 다니던 까까중머리시절
땡볕 내리 쬐는 날이면
쑥을 돌에 문질러
귀 틀어막고 물놀이 하다
갈색 입술이 되었던
하동시절
송사리 잡아 고무신에 넣고
집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의 무서운 눈초리와
마당에 버려졌던 송사리가 생각나는
그리운 시절
다) 햇살을 지팡이로 짚고
살아가는 동안 잡히지 않는
짧은 인생의 박자를 생각한다
세월의 매듭이
본능처럼 살아나는 염려의 싹으로
허전한 가슴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잊어졌던
꿈의 나락들이 산을 넘고 있다
열병처럼 찾아오는 꿈
꿈은 뜨거움에 익어버리고
탕진항 내 시간들만 튀어 오른다
예시 가)는「실버시대」, 나)는「그리운 시절」, 다)는「황혼의 열병」의 각각 전문이다. 제1부를 은빛 시간으로 제시한 ‘하얗게 늙어가는 세상’과 연계맥락을 잇대이고 있는 시편들이다.
예시 가)의「실버시대」는 장년으로 접어든 화자 자신의 연대기쯤이 될 듯싶다. 그것은 시행 ‘흐르는 물처럼 살아간다’는 세월에 순응하며 살아감을 보여준 것이나, ‘인생길 얼마나 와 있는지’ 스스로를 세월 앞에 세워 되짚어보는 것이나, ‘빛바래가는 얼굴이지만’, ‘젊은이보다 더 붉은 화초’라고 삶의 의욕을 불태우는 것들로 실버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여러 단면들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시 나)는 세월 앞에 스스로를 세워 놓고 가버린 세월을 그리워하는 유년회상을 형상화 하고 있다. ‘까까중머리’, ‘하동시절’, ‘그리운 시절’이란 유년의 회상 공간으로 돌아간 화자의 옛 그리는 그리움은 화자가 은빛 시간 앞에 서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 곧 은발의 실버시대를 살아감을 유년과 대칭개념으로 제시해주고 있다는 뜻이다.
예시 다)는 세월의 이쪽인 유년에서 세월의 저쪽의 인생황혼을 내다보며 환기시키는 노을녘의 인생엘레지적 심회를 형상으로 재구성 해주고 있다. ‘햇살을 지팡이 짚고’ 나 ‘짧은 인생의 박자’, ‘허전한 가슴’, ‘꿈의 나락들’, ‘탕진한 내 시간들’의 시행들이 환기시키는 애상들은 이를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현실 공간으로서의「실버시대」와 유년 공간으로서의 「그리운 시절」, 그리고 인생황혼쯤에 스스로를 세운 「황혼의 열병」은 다같이 화자의 모습들을 담아내는 자화상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예외 없이 시편마다 절제된 간결한 언어구사와는 다리 잔잔한 감동의 확신을 체험하게 해주고 있어 설득력에 값하고 있다.
3. 시적 일상의 주변의 나들이
제2부의 시편들은 일상적 삶과 삶을 통해 만나는 삶 속의 일상에서 체험한 것들을 형상으로 재구성 해주고 있는데, 그 때문에 진솔한 삶이 배어 있어 설득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역시 시를 제시했을 때 이해를 도울 것으로 본다.
가) 평소 나이 먹는 것에는
초연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 했는데
허리에 큰 고장이 생기고 나선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죠, 허리는 염색이 안 됩니다”
“더 나빠지기 전에 수술을 받으세요”
순간 지나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비치는 그대로 비쳐지는 게 좋았는데
세풍의 조소함 때문인가
자식들 잘되기를 빌며
애태운 게 엊그제 같은데
거꾸로 애비 걱정하게 할 처지에 놓이고 보니
내 육신의 병이 원망스러웠다
하얀 세월아
염색이 본심을 어지러뜨릴지라도
시린 가슴 움켜쥘 사람 때문에
나는 너를 속여 보려 한다
나) 파를 다듬으면
독특한 냄새에 눈물이 난다고
다듬어 달라는 내자의 청이다
흰 파뿌리를 싹둑 잘라 보니
변한 세월의 문이 열리고
우윳빛 속살이 눈 안에 들어온다
다듬어진 하얀 파는
알갱이 같은 껍질이 겹겹으로 되어있다
내 마음도 알맹이와 껍질이 있을까
마음의 껍질을
얼마나 벗으면 내가 드러날까
다듬어진 파를 뒤척여보며
내 마음의 껍질을 벗겨본다
다) 좌판坐板 앞마다
노란 치아가 고른
웃음들이 하루의 꽃을 피운다
푼돈처럼 사는 세상에
풀어 놓는 낯선 이야기
사람들 틈에서 훈훈한 정 느끼게 한다
값이 쌀수록
큰 웃음 꽃피우는 사람들의
파릇파릇 바구니가 넘치고
무겁던 좌판坐板에서
힘겨움을 떨이한 할머니
자릿세 비싸다며 굽은 등을 세운다
예시 가)는「염색」, 나)는「대파」, 다)는「재래시장」의 각각 전문이다. 예외 없이 자신의 삶, 가족적 삶, 공동체적 삶과 같은 일상 주변의 인접성의 것들에서 체험되는 생의 편린들을 컷으로 재단해다 재구성 해주고 있는 시편들인데 수록시가 발상의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예시 가)는 화자의 일상적 삶의 한 단면을 통해 소환에 대한 원망과 속아 살아온 세월에 대한 소박한 심회를 담아내는 일종의 내면 풍경을 그려주고 있다. ‘허리에 큰 고장’이 생긴 ‘육신의 병’과 ‘하얀 세월’로 은유되는 삶의 허무 내지 무상 의식, 그리고 이를 새로운 채색인 염색으로 극복해보고자 하나 역시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는 자각을 통한 일상적 삶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예시 나)는 내자의 청으로 대파를 다듬으며 겹겹으로 둘러쳤던 허상으로서의 ‘껍질’을 벗겨보며 스스로의 참을 찾고 싶어하는 깨달음을 일깨워내는 진솔한 삶과, 삶을 통해 자아를 발견해내고자 하는 자각적 삶을 체험하게 해주고 있다.
예시 다)는 나와 가정에서 시적 공간이 재래시장이라는 장소로 광역화된다. 그러면서 개인적 삶이 민초적 삶으로 이동된다. 시행 ‘좌판’, ‘푼돈처럼 사는 세상’, ‘파릇파릇한 바구니’, ‘자릿세 비싸다며’ 등 재래시장에서 떠올림직한 시어들이 시적 공간인 재래시장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화자의 삶의 현장이 개인적 삶에서 가정적 삶, 가정적 삶에서 시장이라는 공동체적 삶의 공간으로 확대됨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제2부는 예외 없이 이런 경로로 쓰여진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제3부는 또다른 발상에서 씌어진 시들이라 할 수 있는데 크게는 자연시편, 작게는 계절시편이나 계절적 소재를 통해 형상으로 이끌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4. 자연 혹은 계절의 변주
제3부의 시편들은 예외 없이 자연이 대상화되거나 계절, 또는 계절사물이 시로 형상화되고 있다. 그 때문에 시가 환기시키는 자연감정, 자연친화력 등이 설득력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시를 제시해 본다.
가) 춘곤증春困症 피는 한낮
마음속에 고여 있는 바람이
봄 햇살 한입 물고
남실바람 따라 춤을 춘다
허리를 휘감는 봄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그 바람 붙잡고
애교 떠는 꽃봉오리의 속기俗氣
산수유가 꽃을 피우려
쑥덕쑥덕 하더니
노란 속살 톡톡 터뜨려
뛰는 내 가슴에 끼얹고 간다
나) 봄꽃 피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 사이
삼복더위가 기승을 떨고 있다
수목樹木은 마치 승리한
군인처럼 위풍당당하고
뜨거운 햇볕에
사방四方이 다갈다갈 볶아진다
시린 물에 발 담그니
늘어진 고무줄 같던 정신이
바짝 오그라진다
순한 계절은 짧고
혹독한 계절은 길다는데
꽃향기가 온 동네를 물들이듯
추억은 추억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쌓고 또 쌓아둔다
다) 철길 따라
간이역 울타리에
기대어 서서
이별 연습이라도 하는 걸까
손을 흔드는가 하면
허리를 흔들고
그런가하면 몸째로
흔들대는 코스모스
꽃 봉에 앉아
고추잠자리가 가을을 읽듯
간이역 과객過客되어
코스모스로 가을 이별을 배운다
예시 가)는「봄이 있는 길·1」, 나)는「피서」, 다)는「코스모스」의 전문이다. 말하자면 봄· 여름· 가을에서 한 편씩을 골라본 셈인데 의외에도 겨울시편이 없다. 그에 반해 봄시편이 3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아마도 생동하는 충만감의 발로가 아닐까싶다. 어떻든 예시들을 통해 진수용 시인의 자연교감이랄까, 계절감정을 읽어 보기로 한다.
예시 가)는 봄의 서경적 진술이다. ‘춘곤증 피는 한낮’ ‘봄 햇살 한입 물고’, ‘봄바람’, ‘꽃봉오리’, ‘산수유’ 등의 시어들은 봄의 대명사들이자 주어들이다. 그만큼 봄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들이란 뜻이다. 봄의 대명사이자 주어의 동원은 화자의 계절감정이나 자연교감을 잘 말해 준 것들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예시 나)는 시제 ‘피서’가 한여름을 말해주고 있지만 동원된 시어 ‘삼복더위’, ‘뜨거운 햇볕’, ‘시린 물’을 통해서도 여름의 땡볕 더위를 실감하게 한다. 역시 계절감정이랄까, 계절에서 체험된 것들을 컷으로 재단해다 재구성했다 할까. 아무튼 여름을 실감나게 형상화 해주고 있다.
예시 다)는 가을을 노래한 시다. 코스모스가 가을의 메인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가을은 코스모스의 계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코스모스는 가을의 대명사이자 가을을 대표하는 표상 사물이다. ‘철길’, ‘연변’, ‘간이역’, ‘이별연습’, ‘몸째로 흔들어대는’, ‘고추잠자리’ 등이 환기시키는 가을의 전서적 치환이 코스모스를 통해 구체화하고 있다.
이에 비해 겨울시편은 찾기 힘들 정도로 씌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 점 숙제로 남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떻든 예시들은 계절 사물을 통해 계절과 함께 자연친화력이랄까. 자연감정을 읽게 해주고 있는데 이쯤에서 결론은 제시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5. 결어
지금까지의 조명을 집약하면 진수용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은빛 시간』은 그 평가치가 제시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동시에 이는 이번 시집이 거둔 성과로 지적될 수 있을 듯싶은데 그 하나는 표현의 간결미에 주어질 듯싶고 다른 하나는 간결한 절제된 시어가 역으로 시적 의미나 감동을 확산시키는 기 폭제 구실을 해주고 있다는 점으로 그 평가치가 성립될 것으로 본다.
전자적 간결미는 운문이라는 시적 표현의 묘를 백분 살린 것이 되고, 후자적 의미나 감동의 확산은 절제와 함축이 발산하는 시적 효용으로서의 설득력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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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언어를 소재로 하여 창조되는 시, 언어적 표현기교를 사용하여 탄생시키는 시는 그 표현은 각기 달라도 다같이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언어경영이라는 언술에 귀결될 수 있다. 언술은 시의 경우 운문이라는 숙명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외형이 중시되고 중시된 외형의 틀에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극도의 절제와 함축을 수단화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곧 언어경영으로서의 언술이다. 진수용 시인은 바로 여기에서 시를 출발시킨 것 같다.
― 박진환 박사의 평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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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용 시인∥
∙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통구리 출생
∙ 국무총리 표창장 수상
∙『조선문학』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 조선시문학회, 동작문인협회 회원
∙ 시집 :『잠 자는 아내 곁에서』『은빛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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