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구대간 2구간(성삼재-여원재) 산행기 속편
正會員 김창성
2005년 4월 22일
21시 영등포역 도착
21:52분 전라선을 탈 예정인데 아직도 한 시간쯤 남아 좀 이른 감이 있었다. 나용주 선생님 외 3명은 영등포역 주변을 다니면서 간단한 간식을 준비하였다. 역사 위에 올라가 한산님을 만나 일행 5명 모두 개찰 후 플랫포옴으로 들어갔다. 기차 안에는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좌석은 이미 매진 된 상태였다.
21:52 영등포역 출발
기차는 정시에 출발하였다. 일기는 매우 상큼하다. 수원을 넘어서기를 기다려 출발 전 사둔 소주병을 꺼냈다. 등산복 차림을 하고 차에 타자마자 소줏잔을 기울이는 것은 아무래도 산마니의 체면을 구기는 일일 것 같아서였다. 둘러보니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시각이 자정을 넘어서니 좀 피곤한 기색이 돈다. 잠깐 눈을 붙인 사이 기차는 남원역에 도착하였다. 남원역에서 예의 등산복 차림이 많이 내렸다.
2005년 4월 23일
02:17 구례구역 도착
남도 자락이라서 그런지 새벽인데도 별로 춥지 않았다. 구례구역은 산밑 나즈막한 역사인데 어슴프레 보이는 모습이 아담하니 매우 정겹다. 심심한 햇살에 맨드라미 벼슬 졸고 있는 그런 시골역을 연상하면 된다. 역전에는 불을 켠 가게가 두어 곳, 여관 한 곳이 보였고 음식을 파는 상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구례구역은 이름이 유별나다. 이름이 생긴 유래를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다음과 같다.
구례구역
전라남도 순천시 황전면 석변리 (0664)782-7788 순천시 황전면 북부에 위치한 구례구역은 구례읍과 5km의 거리인 섬진강변에 있으며 역명 또한 구례군의 입구에 위치하여 구례구(求禮口)역이라고 한다.
구례구 역의 지명은 조선판 '님비, 핌피' 현상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열차가 서는 큰 역이 있는 곳은 모두 큰 도시 인걸로 보아
큰 도시마다 역을 정한걸로 보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고 할 수 있지요.
열차가 지나가게 되면서 도시가 생겨난 경우도 있다는 거지요.
가령 구한말에는 어느 모로 보다 전북의 부안이 그 옆의 김제보다도
열차가 놓여야 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시끄럽게 하는 열차를
공부하는 선비가 있는 부안에 설치할 수 없다는 부안 양반님네들의
반대에 밀려 상놈마을(?) 김제에 열차 역이 생기게 되었죠.
구례구 역 역시 그런 님비의 와중에서 생겨난 거죠.
순천이 승주에 속해있던 그 시절에
승주가 보통 양반 고을이었습니까?
당연히 승주 양반님네들이 승주 복판으로
열차 지나는 것을 막다보니 구례쪽으로 돌아가게 되었죠.
그래서 열차 역명을 구례역으로 지었죠.
그러나 이번엔 핌피 현상이 발동해서
왜 행정구역상 승주에 속해있는데 구례역이냐? 따지게 된거죠.
그래서 후에 입구 라는 뜻으로 '구'를 넣음으로써
우리나라에선 유일하게(?)
군 이면서도 '구'를 갖게된 사연이 생기게 된거죠...
- 이상 인터넷에서 옮긴 글
늙수그레 한 기사님이 모는 구례 택시를 탔다. 구례구역이 구례읍내와는 좀 거리가 있어서이다. 구례구역에서는 등산객 두 팀을 포함하여 스무 여남은 명이 내렸는데 등산팀만 기세 좋게 먼저 택시로 빠져나가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은 굳이 택시를 잡으려고 하지않는 품새가 아마도 마중나오는 가족을 기다리는 가 보다.
일행이 다섯 명이었는데 한 대의 택시로 이동하였다. 구례읍내에 가서 야식을 먹고 공영터미날로 이동하여 성삼재를 향하는 4시 20분 첫버스를 탈 계획이다. 그러나 차안에서 계획은 수정되었다. 구례에서 식사를 하고 택시로 곧바로 이동하는 편이 더 여러모로 이익이라는 기사님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참고로 택시비는 구례까지는 5천원, 구례에서 성삼재까지는 2만5천원으로 모두 3만원이었다. 이곳에서는 순천택시보다는 구례택시를 타는 편이 유리할 것 이라는 생각을 들었다. 목적지에 이를수록 자꾸만 순천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구례구역에서 구례읍까지는 그저 택시로 그저 10분 안쪽의 거리에 있었다.
기사님이 소개한 식당은 우리를 세 번 놀라게 하였다. 문앞 현수막에 해장국 3천원, 기타 등등 4천원이라고 쓰여 있었으니 얼마나 저렴한 가격인가. 두 번째는 양이 많다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가장 충격을 준 사항으로 음식의 맛이 별로였다는 것이다. 이런 식당은 음식의 맛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직 빨리만 나오면 되는 우리 회원 권오님과 충분한 양이 확보되어야 하는 우리 직원 장우석님 이외에는 다시 찾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식당문을 나설 때 오히려 정겨웠던 것은 모두가 한번씩 눈길을 주며 웃었던 헌 벽에 걸린 달력장의 농익은 처자의 나신보다는 그 식당에서 들은 진한 남도의 사투리 때문이었으리라.
밥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식당을 출발하였다. 이미 기사님이 문밖에서 대기를 하셨기 때문이었다. 구례읍을 벗어나기 전 이 고을이 자랑한다는 산수유주를 한 병 샀다. 11도 정도의 약한 술이었으며 별 특이한 맛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참여 회원님들의 술에 대한 총평이다.
세시 반 무렵 출발한 택시는 거칠 것 없이 지리산 성삼재를 향하여 내달렸다. 오른편에 거대한 지리산을 끼고 구례읍을 둘러친 낮은 산들이 보였다. 이 벌판을 예 사람들은 전쟁 뜰이라고 부른단다. 우리가 오늘 가게 될 운봉을 경계로 마주한 백제와 신라가 이 벌판에서 자주 전쟁을 벌여 붙여진 이름이다. 최근에는 여순반란사건, 지리산의 빨치산 사건 등으로 피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기사님은 산기슭을 가리키며 덧붙인다.
“저기 불빛이 보이는 저 마을들 좀 보십시오. 호적에 빨간 줄이 안 그어진 집이 없습니다. 6.25때 빨치산들이 내려와 집안의 곡식을 그 집의 장년으로 하여금 지게 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지요.”
얼레지 내 보기에는 한적한 산촌에 불과한 이 곳이 그토록 역사의 모진 모두 풍상을 겪었다고 하니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03:40 성삼재 도착
구례에서 불과 20분만에 성삼재에 도착하였다. 음력 14일쯤 되는 듯한 달이 환하게 비춰준다. 이렇게 환한 달을 보기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노고단 매표소에 이르니 매표원인 듯 한사람이 무어라고 한마디 내뱉고 들어간다.
곧장 백두대간의 2구간인 성삼재에서 여원재에 이르는 장도에 올랐다. 말은 없지만 비장함이 감돈다. 고지에 올라서인지 바람이 맵찼다. 옷매무새를 다시 여미고 우리들은 산죽(시누대)사이를 뚫고 계속 걸었다. 휘영청한 달빛이 비추어 주었지만 앞뒤에서 전등을 켜고 돌뿌리와 나무등걸을 살폈다. 오른쪽으로 희미하게 노고단과 이어진 반야봉이 눈에 들고 왼편으로 가로등빛으로 드러난 남원시의 골격이 유난하다.
지리산은 아직도 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있었다. 가지만 있는 관목림과 시누대, 억새가 전부였다. 올 때에는 철쭉꽃을 기대하기도 하였지만 한 보름은 더 기다려야 할 듯 하다. 그래도 갓밝이를 기다려 새벽기운을 함초롬히 머금은 지리산 얼레지가 반긴다. 아직은 꽃대가 자라지 않아 만개한 꽃은 볼 수 없지만 서릿발을 서걱이며 묵묵히 오르는 우리 회원들의 피로를 풀어준다.
두 시간 쯤 오르니 천왕봉쪽에서 해가 솟았다. 날씨가 좋아 빼어난 일출이었다. 눈앞에 오늘 전 코스 중 가장 높은 봉우리인 만복대가 손에 잡힐 듯하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1433m의 고리봉의 억새는 참으로 장관이었다. 또한 아래로 군락을 이룬 시누대숲도 볼만하였다.
성삼재를 출발한지 두 시간 반만에 만복대에 도착하였다. 배낭을 풀고 간단한 음식을 먹었다. 만복대는 지리산의 능선과 주봉이 다 보이는 곳이다. 눈앞에 있는 노고단과 아직도 얼음 폭포가 보이는 반야봉, 그뒤로 숨어 고개만 내민 토끼봉, 우리가 작년에 가보았던 세석평전, 천왕봉이 연달아 눈에 들어왔다. 그뿐이랴 오른쪽을 보니 방금 일어난 듯한 남원 시가지가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비비고 있었고, 운봉쪽은 벌써 모내기를 하려는 듯 논에 물을 가득채워 더욱 생명의 약동이 와 닿는다. 반딧불이 같이 띄엄띄엄 빛을 내던 반야봉 아래의 달궁마을의 집들도 어슴프레하게 보였다. 산정에 나무는 없고 대신 억새로 채워진 만복대는 참으로 사위를 조망할 수 있는 빼어난 곳이었다.
1시간 여를 더 내려와 정령치에 이르렀다. 정령치는 성삼재와 이어진 고개이다. 구절양장이라더니 구불구불한 고갯길이 동과 서를 가른다. 정령치 휴게소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아니 전 등산 구간 동안 단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일행의 얼굴을 보니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다시 힘을 내 고리봉을 향했다. 불과 40분 정도 걸은 것 같은데 상당히 강도가 있는 산행길이다. 고리봉에서는 길을 조심해야 한다. 오던 대로 곧장 가게 되면 백두대간 제2구간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데 잘 이해가 안되면 운봉쪽의 큰 도로쪽으로 하산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내려오면 된다. 이윽고 우리는 이 근처에서 화사한 진달래꽃을 볼 수 있었다.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여서 무릎이 시끈거렸다. 이렇게 한시간 반을 걸어 우리는 비로소 고기 삼거리에 이를 수 있었다. 꽃이 없던 산과는 달리 만개한 벚꽃잎에 부서져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햇빛으로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다. 정녕 남도의 봄이렸다.
10:00 고기 삼거리 도착
드디어 고기삼거리에 도착을 하였다. 운봉읍에 속한 이곳은 고원 속의 평지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인가도 차량도 매우 드믄 곳이었다. 출발한지 꼭 6시간 여 만이며 약 12km 정도의 산길을 걸어 온 셈이다.
큰 도로에 나와 왼쪽으로 한 300m 정도를 가니 식당이 우리를 반긴다. 손님이 없어 묵은 반찬이 나올까봐 좀 꺼림직했지만 산채백반을 부탁하고 발을 씻었다. 그러나 이는 쓸데없는 걱정이었음을 밥상을 보고 금방 알게 되었다. 이 집의 산채백반은 그 정갈함과 맛에서 한동안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씁쓸한 향이 배어 있는 머위 나물, 자꾸만 손이 가는 파 무침, 취나물, 김치, 옛맛을 그대로 살린 도토리묵, 그리고 쌀알이 떠 있는 동동주는 그간의 노고를 위로 받기에 충분하였다. 혹 시장하여 그런가 하고 회원님들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모두 칭찬 일색이다. 가격도 5천원으로 별부담이 없다.
11:00 산채백반이 맛있는 식당 출발
식당에서 꼭 한시간을 머무른 후 식당을 출발하였다. 식당에서 발도 씻고 방안에 좀 누워 잠시나마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사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약간의 갈등을 겪었다. 너무 피곤하였기때문에 나머지 산행을 생략하고 서울로 돌아가면 어떨까하는 마음이 일렁였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부터 여원재까지는 그저 평범한 동네 뒷산 정도에 불과해 보이는 산줄기이지만 그래도 약 4시간정도 걸리는 코스로 한 잠도 안자고 달려온 그간의 산행에 덧대기는 너무 힘들어서였다. 그러나 계획대로 강행하기로 하여 다시 신발끈을 조이고 길을 나섰다. 약 1km 앞에 있는 낮은 야산이 우리의 산행 2단계 코스이다.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발걸음은 납덩이를 두른 듯 무겁기 짝이 없다.
우리들은 오늘의 2단계 산행의 입문격인 노치마을을 향하여 걸었다. 마을까지의 길은 2차선의 아스팔트 길이었는데 정령치를 오가는 대형 트럭만 왕왕 오갈 뿐 한적하다. 가는 길에 쇠똥이 범벅된 거름을 논에 연신 붓는 젊은 부부가 보인다. 냄새가 어찌나 고약한지 사뭇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나 정말 빨리 가려면 내가 논에 내려가 저 예쁘장한 부인네를 한 번 보듬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어 회심의 미소가 들었다. 옛날 만공선사가 먼길을 걸어 수덕사를 가는 데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대는 동료를 닥달하기 위하여 길옆의 밭에서 일하는 젊은 아낙을 다짜고짜 껴안고 쓰다듬었다고 하지않았던가. 이를 본 남편은 쌍심지를 돋우고 쇠스랑을 치들고 저팔계의 형상으로 쫓아왔다고 하니 맞아죽지 않으려고 두 스님이 필사적으로 뛰는 꼴이 눈에 선하다. 순식간에 수덕사 대웅전에 부처님의 발아래까지 당도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사 모든 것(현상)은 마음으로부터 연유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불손한 상상의 바탕에는 필부필부(匹夫匹婦)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농부의 삶에 대한 시기심이 자리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노치마을의 입구에서 만난 젊은 부부들이 자못 부럽다.
이정표 구실을 하는 운천초등학교는 울창한 소나무숲에 가려 있었다. 학교를 오른쪽으로 두고 왼쪽으로 돌면서 노치마을로 들어섰는데 민들레가 가장 먼저 길가에서 우리를 반긴다. 노치마을의 민들레는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왜냐하면 바로 한국민들레였기 때문이다. 꽃잎이 우윳빛인 우리 민들레는 내가 어릴 적에는 집근처에 흐드러졌으나 종적을 감춘지 오래이다. 바로 공해에 약하기 때문인데 운봉고을에 우리 민들레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이 운봉땅이 아직은 청정지역임을 웅변해주는 일일게다. 서양민들레는 노란색이며 꽃받침(총포)이 뒤로 재껴졌다는 것이 특징인데, 그보다는 공해에 강하며 꽃을 피우는 기간이 길고 씨앗의 수가 훨씬 많다는 점에 있어 우리 민들레와는 판이하다. 또한 서양 민들레는 꽃들사이에서는 미혼모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으로 통하는 데 이는 급할 때에는 수분없이도 씨앗을 여물게 하는 재주를 가졌기 때문이며, 달밤에 홑치마만 두르고 들판을 횡행하는 메밀꽃과 함께 윤리 도덕과는 거리가 있는 꽃이다. 나는 풀 끝에 자동차의 검뎅이 묻어나는 서울 서부간선도로주변 가에서도 끄떡없이 노랑꽃을 피워 번식하는 민들레를 보면 아름답기보다는 간담이 서늘한 느낌을 받곤한다. 이 꽃을 보노라면 기찻길역 오막살이 노래가 생각난다. 그 시끄러운 속에서도 끄떡없이 아기들을 계속 낳아대는 강쇠 남정이 연상이 된다. 그저 새끼를 잘 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서양민들레에 비하여 우리 민들레는 기품이 넘친다. 지금은 산 속으로 밀려났다는 우리 민들레가 노치 마을을 접어드는 길가에 끝이 없이 이어져 감격스러웠으며, 이렇게 많은 토종을 본 것은 수십 년 만에 처음이다.
문득 옛 고향의 산하가 그리웠다. 그러나 그리움은 이내 해갈되었으니 바로 노치마을이 내가 살았던 옛고향의 정서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어서였다. 뒤에 수정봉을 위시한 백두대간으로 둘러친 이 마을은 한 스무 가구 가량 되어 보이는데, 마을 앞에는 널따란 논밭이 있고 마을의 곳곳에 꽃이 복사꽃이 한창이다. 가보지 않은 사람은 뒤에 산이 있으니 오히려 백두대간이 위압적인 자세로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이 구간은 산줄기가 그저 동네 어염집 돌담처럼 낮아 정겨움이 더하다. 마을에 이르자 금방 써레질을 한 무논 속에 무언가가 고물거리고 새들의 청아한 노래가 우리를 반기는 이 마을의 넉넉함에서 나는 우리 민들레보다 더 뭉클한 무엇을 느꼈다. 바로 우리가 언젠가 회귀하고 싶은 곳, 우리를 키워낸 母國에 다다른 느낌이다.
노치마을은 노치샘으로부터 시작된다. 노치샘은 마을 한가운데에 솟아난 노천 샘인데 어릴 적 바로 공동우물이 있는 동네에서 자란 나는 이런 우물가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다. 옛날에는 틀림없이 아침마다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이 샘에 모여 세수를 하였을 것이다. 당시는 식구들이 많아 물지게로는 식수를 충당하기에도 버거워 간단하게 씻는 일은 샘에 와서 즉시 해결하였다. 그뿐인가 아이들이 빠져나가면 아낙들이 모여 빨래도 하고 남편 흉도 보았을 것이요, 닭도 잡고 채소도 씻으며 수다를 떨며 고단한 일상을 잊으려 했을 것이다.
산행기와는 관계가 좀 먼 이야기지만 내가 어릴 적 내가 자란 마을의 샘과 얽힌 이야기를 두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하늘만 보이는 근 50호 정도 사는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지금과 달리 애들이 많아 동네 사람들을 한데 모으면 족히 사백 명에 이르는 당시에는 흔한 동네 출신이다.
첫 번째 소개 할 이야기는 샘 근처에 사는 내 친구의 투구바가지에 얽힌 일화이다. 그 친구 아버님과 나의 아버님과는 동갑나기였는데 두 분다 한국전쟁 때 징발되어 인민군의 전쟁 물자깨나 져 나른 전력이 있으시다. 휴전 후 나란히 한 날에 다시 국군에 징집되어 입대를 하셨는데 전쟁직후 상황이라 군인의 수효를 많이 유지하기 위함에서인지 제대라는 것이 없어 군대생활을 사병으로 만 5년도 더 하셨다고 한다. 드디어 똑같이 제대를 하셨는데 친구 아버님께서는 기념으로 군용 투구를 한 개를 가지고 나오셨던 것이 사단의 시작이다. 이 물건 하나가 내 친구로 하여금 담박에 모든 마을 애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만들 줄이야. 이 친구는 샘에 올 때 세숫대야 대신 아예 투구를 쓰고 나타나 이를 뒤집어 놓곤 거드름을 피우며 세수를 하곤 하였는데, 우리 모두는 이렇게 세수를 한 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투구로 낯을 씻는 주인공으로 점지되기 위해 바친 고구마가 몇 개이며 상수리가 몇 웅큼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는데 항차 투구를 써본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우리 아버님은 원주 군단본부인가 하는 건물에서 검지 한 마디가 다 닳도록 무전만 5년을 치셨다는데 그 흔한 군용 스픈 한 개도 챙기시지 못하셨으니 아버님에 대한 나의 원망을 또 얼마나 컸었던가.
두 번째 이야기는 선거 벽보와 얽힌 이야기 한 도막이다. 그때에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바로 우물가인지라 우물 옆의 벽에 선거 때마다 벽보를 붙이곤 했다. 때는 바햐흐로 이제는 고인이 된 박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대권을 놓고 한판 붙던 시절이었다. 당시 단골인 카이져 수염의 민모씨 등을 위시하여 우물가 흙벽에 벽보가 쭈욱 붙었었는데 서슬이 퍼런 시절이라 벽봇자리는 그저 바라만 볼 뿐 누구도 감히 손을 댈 수 없는 금단 구역이었었다. 그러나 며칠되지 않아 마을이 발칵 뒤집어 졌으니 바로 벽보 훼손 사건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신문지를 돌돌 말아 권련을 만들어 다른 사람도 아닌 박대통령의 입을 찢고 그 뒤 흙벽을 후벼 담배를 물렸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담배를 비스듬히 꼬나문 형상이 꼭 서부활극에 나오는 영화배우 크린트이스트 우드를 쏙 뺐으니 순경 나리들이 어찌 가만히 계실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충성경쟁이 벌어졌던 모양인지 멀리 읍내에서 파견된 순사까지 가세하여 밤낮으로 동내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 몇 번인고. 숨을 죽이며 진행된 끝에 범인을 찾았으니 그는 다름 아닌 투구바가지 친구의 두 살 위 사촌 형이었다. 이후 그의 가족들이 어떤 경을 쳤을 지 당시를 살아온 사람들이면 웬만큼 상상이 갈 것이다.
노치샘은 바로 그런 곳이다. 명주 실타래 몇 꾸리가 풀려도 모자랄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노치샘을 지나면서 나는 분명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사기밥사발이 주를 이루었던 그 시절, 그릇들이 부딪는 달그닥거림 소리를 들었다.
노치샘을 조금 오르면 인가가 끝나는 지점의 산기슭에 노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람드리 소나무 네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보아도 기백 년은 족히 되었을 듯하여 주변의 젊은 소나무와는 사뭇 대비가 되었다. 동양화에 등장하는 노송을 보면 작가의 상상치고는 과장이 심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이곳의 노송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가지들이 뒤틀리고 아래로 쏟아진 모양새를 보면 용트림의 역동 같기도 하고, 아직도 해탈하지 못한 이무기의 처절한 몸부림 같기도 하여 심사가 복잡해진다. 앞으로 가실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이 노송의 아래쪽에서 숨을 멈추고 찬찬히 바라보기 바란다. 소나무아래에 비석이 있어 살펴보니 ‘典祭山堂’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곳은 바로 이 마을에서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 던 곳이다 .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집도 있었을 터, 그리고 무녀도, 당집 뒷켠 볏짚으로 이은 추녀 아래의 으슥한 곳에서는 동네 총각 처녀의 로맨스도 …….
12:00 여원재를 향하여 본격적인 산행 시작
노치마을을 벗어나 산에 올랐다. 아래에서는 그저 낮은 산줄기인줄 알았는데 얼마나 가파른지 일행을 한동안 말을 잃었다. 명색이 백두대간인데 우리를 그대로 보낼 리 없다. 등산로 주변에는 돌탑이 수없이 많은 데 필경 이 동네 사람들이 쌓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객들은 숨차 그렇게 많은 곳에 많은 돌탑을 쌓도록 여유롭지 못한 산행길이다. 또 이 구간에는 끊임없이 축성을 한 흔적이 보이는데 어느 시대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삼국시대의 성일성싶다.
고기삼거리에서 여원재까지의 산행은 결코 만만한 코스가 아니었다. 전반부 12km의 산행에 비하면 그저 동산을 오르는 정도로 얕보았는데, 우리 일행은 여기서 탈진하고 말았다. 연유를 알고 수정봉에서 바라본 만복대와 고리봉(아득한 능선을 따라 예까지 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웬지 눈물이 날 것 같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 산마니 회원들에게만 특별이 알려 드린다. 정답은 고속철이나 비행기와 같은 교통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랑하는 님과의 동행이다. 혹 계획이 있으시다면 고기삼거리부터 여원재까지의 구간은 반드시 사랑하는 님과 함께 가시기를 강력히 권유드린다. 반대로 산행의 목적이 인고를 통한 마음의 수행에 있다면 소와 닭 사이가 된 부부들에게 이 코스를 권하는 바이다.
여원재가 가까워지면 바위산이 보이고 그 위에 희고 작은 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그 산을 우로 돌아 빠져 나오니 바로 여원재이다. 모두들 발걸음이 가볍다.
15:00 여원재 도착
고기삼거리에서 만 4시간동안 걸어왔으며 총20km의 산행에 종지부를 찍는 가슴 벅찬 순간이기도 하다. 여원재는 평범한 고개같지만 고원의 분지인 운봉과 남원을 잇는 고개로 해발로 치면 상당히 높은 고개임에 틀림없다. 2차선 도로로서 아스팔트로 잘 포장 되어 있으며 운봉의 명물을 상징하는 듯 장승 벅수가 서 있다.
모름지기 고개가 있다는 것은 지킬 것이 많음과 그리운 사람과의 이별의 눈물을 의미할 게다. 그런 까닭에 고개가 흥부전의 무대가 된 점, 나제의 접경이었다는 점, 여말 왜구의 두목 아지발도를 활로 제거한 이성계의 싸움터였다는 점, 여원재라는 지명이 이 고개에서 매일 밤 홍등을 내걸었던 여인과 관련한 야화에서 연유했다는 점에서 결코 예사롭지 않다.
10분 남짓 기다리니 시내버스가 온다. 차에 타 의자에 앉자마자 고개가 뚝 떨어진다. 궁벽한 산촌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깬 운봉이 동편제의 본고장이라는 데 멀어져 가는 아쉬움을 곰씹을 새도 없이 수마(睡魔)가 엄습한다. 나중에 호리병에 술을 가득 채우고 한 번 찾아오리라는 다짐을 하며 잠에 빠졌다.
15:40 남원고속버스 터미널 출발
20분만에 남원 고속버스터미날에 도착, 예매 시각을 당겨 표를 교환하여 승차, 출발하였다.
19:00 강남고속버스 터미널 도착
뒷풀이 할 곳을 찾다가 하필 남원추어탕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런 경우를 필연이라고 하느니. 그러고 보면 세상사란 결코 우연이란 없을 법하다. 소주 한 잔을 단숨에 털어 넣는다. 어제부터 시작된 우리의 무박산행 일정이 한 보름은 된 듯 아득하기만 하다.
나는 이번 산행을 하며 백두대간 종주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하였다. 백두대간의 종주란 표현은 우리에게 좀 과하거나 오만한 처사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고리봉의 급경사를 구르다시피하여 내려와 고기삼거리에 다다랐을 즈음 울울창창한 소나무와 잣나무숲사이를 빠져나올 때의 일이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셨던지 우리 회원님 중 한 분이 말씀하시기를 도대체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오신다.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모범답안을 말씀드렸다. 바로 ‘백두대간 등줄기’라고.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어디냐고 묻는다니 일견 답답할 것같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생각해볼 대목이라 여겨진다. 사실 백두대간은 거대한 자연의 품의 일부이다. 자연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본래 메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없고 그렇다고 단절도 없는 무한한 존재인데, 우리의 구미에 맞게 재단하여 특정한 구간을 잘라 의미를 부여한 다는 것은 덧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꼭 백두대간이라고 이름붙여 꼬리뼈부터 시작해 등줄기를 빠짐없이 후리며 올라가 반드시 상투를 틀어쥐겠다는 심사로 종주에 임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종주라는 낱말에는 다분히 그런 냄새가 나기 때문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른바 백두대간을 발목이 시도록 밟고 난 연후에도 아직 백두대간을 느끼지 못하는 그 회원님의 자세에 경의를 표한다. 도(道)를 도(道)라고 명명(命名)하면 이미 도(道)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며 무엇에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 이상의 의미를 띄어 넘지 못하고 종국에는 이름의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는 유명한 글귀(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가 있다. 산행을 하며 시종 백두대간 종주만을 의식하면(백두대간 산행이라고 명명하면서) 앙상하고 건조한 목적과 차디찬 이성만 남을 뿐 이는 이미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산행 본연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우리들은 그저 우리의 카페의 여는 페이지에 존경하는 회장 산지기님이 올리신 글처럼 산이 좋아 산을 찾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은 산을 오르는 데 전념할 뿐 백두대간을 얼마만큼 밟았는지 헤아리는 일은 역으로 백두대간님에게 맡겨두는 것이 어떠할지. 따라서 이번 산행에 동참하지 못한 모든 회원님들께서는 첫단추를 채우지 못했다는 애석함이 혹여 계시다면 빨리 떨쳐 버리실 일이다.
소주 한잔을 또 털어 넣는다.
아, 이승에 몸을 받아
이 삽상한 봄밤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잔을 드는
목숨의 향기로움이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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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나 멋진 산행기를 주신 창성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에게 알리기 위해 이렇게 퍼 옮겼습니다.
저도 같이 지리산을 굽이굽이 숨가쁘게 오르내린것 같구요... 소주한잔도 같이 기울인것것같은 기분이네요...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