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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 1,14-20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그 유명한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어부 4명을 선택하는 장면이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4명의 어부는 두 형제입니다.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이렇게 두 쌍의 형제 어부를 선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12명 가운데서 4명이 여부라고 하면 상당히 비율이 높지요.
제가 참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많이 선택했을까?
혹시 여러분들 기억나십니까?
대개 제자들을 선택할 때 스승들은 못나고, 없고,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절망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학문적인 업적을 이어 나갈 사람이기에 일단 어느 스승이든지 똑똑한 제자를 분명히 원할 겁니다.
아무튼 이 어부들은 위대한 학자들도 아니었고요. 세력을 가진 자도 아니었고, 또 부유한 자도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인 배경을 가진 자는 더더욱 아닌 단순 노동자였던 어부들을 왜 선택하셨을까?
기억나십니까?
첫 번째 어부들을 선택한 이유는 어부들에게는 자기 것이 없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물속에 있는 고기들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낡은 그물, 그리고 건장한 몸뚱아리뿐이었죠.
그래서 어부들에게 ‘나 따라오너라’ 하면 망설일 것이 없었던 겁니다.
오늘 복음 20절에는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라고 나옵니다.
‘집에 가서 얘기하고 오겠다’던가 ‘재산 정리하고 따라가겠다’가 아니라 ‘곧바로’.
농부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했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소작하는 농부들이야 없었겠지만 농부들은 자기 재산이 있었습니다.
자기 논이나 밭이 있던 사람들에게 따라오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는 글쎄요.
따라가기는 따라가는데 ‘좀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정리하고 따라갈게요.’
아무튼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곧바로 따라가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주님을 따라가기는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주님이 가자는 대로 가기는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어부들을 부른 첫 번째 이유는 어부들은 가진 것이 없기에,
다시 말하면 ‘무소유의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별로 소유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부들을 부른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성’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공동체성’이죠.
어부라는 직업은 협업해야만 그물을 칠 수 있고 고기를 잡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지금도 배를 타고 나가면 배에 그물을 끌어 올리는 기계가 설치돼 있다고 해도,
그물을 풀고 그물을 끌어 올릴 때 고기를 배 안으로 옮기고 정리하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굉장히 힘든 노동이기 때문에 요즘은 다 외국 노동자들이 배에 있다고 그러죠.
예수님 시대 때에야 더더욱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고기를 잡았을 겁니다.
그물을 내리고 또 끌어 올릴 때도 한 사람의 힘으로는 무거운 고기가 든 그물을 끌어 올리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겠죠.
그런데 이때 중요한 원칙은 뭡니까?
힘이 세다고 막 끌어 올리면 한쪽이 기웁니다.
힘이 센 사람은 힘을 낮출 줄 알아야 하고, 또 힘이 아주 약한 사람도 적어도 평균치 정도의 힘은 보여줘야 했을 겁니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 안에서는 ‘나’라고 하는 것을 죽여야만 ‘우리’ 공동체가 산다고 하는 것을
어부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어부였지만, 고기를 잡으려면 잘난척할 수도 없고 힘센 것 자랑할 필요도 없고
공동체의 공동 선익이 되는 것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낮출 줄도 알아야 하고 또 협력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터득한 사람들이 어부였다는 겁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통계적으로 한평생 혼자 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에고이스트들이 많다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내가 빠져도 이 작업이 안 되고, 또 저 사람이 빠져도 작업이 안 되는 경우는
공동체적인 정신이 저절로 함양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하는 직업을 한평생 한 사람들은 눈높이를 낮출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높이면서 공동 선과 이익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어부들은 다른 직업보다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부를 부른 두 번째 이유입니다.
세 번째로 어부를 부른 이유는 ‘종말론성’입니다.
어부는 항상 위험에 처해 있기에 하느님 체험을 많이 합니다.
성경에 보면 갈릴래아호수에 막 폭풍이 불고 배가 뒤집힙니다.
바람이 불 때 폭풍이 올 때 배를 띄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갈릴래아호수는 잔잔하다가도 서쪽에 있는 계곡을 통해 서풍이 한번 훑고 지나가면
배가 뒤집히고 산 같은 파도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물론 일기 예보를 통해서 정보를 듣겠죠, 파도의 높이가 얼마고 바람이 어느 쪽에서 몇 미터로 움직이는 지요.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기상 예보가 없었기 때문에 잔잔한 바다에 배를 띄웠다가도 봉변을 당하기도 하고
또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그럽니다.
바다가 한 번 출렁거리기 시작하면 -바다라고 하는 건 호수죠. 그런데 워낙 넓어서 바다라고 부릅니다.-
배가 가랑잎처럼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가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하느님 살려달라고 그러겠죠.
이번만 살려주면 착한 사람 되겠다. 하느님 더 열심히 믿겠다.
두 다리를 육지에 밟을 수만 있게 해달라는 그 기도.
죽을 것 같은 그 상황에서 작은 배가 육지에 닿았을 때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을 하면서 땅을 밟았을 겁니다.
다른 직업에 비하여 어부라고 하는 직업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지금도 바다에서 실종되는 얘기들이 많이 들리죠.
수만 톤짜리 배도 토네이도나 해일 같은 것에 휘말리면 전복됩니다.
아무튼 위험을 가까이하는 직업일수록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군인들도 정말 훈련이 고된 군인들, 특전사라든지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들은, 군종 신부를 했을 때 보면
참 신앙심들이 대단합니다.
늘 죽음을 가까이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쉽게 압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저세상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 세상이 얼마나 한순간에 내 인생에서 사라질 수 있는지 얘기할 때,
다른 직업보다도 어부들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겁니다.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이해되시죠?
이렇게 예수님이 그 잘난 사람 다 내버려 두고, 비린내 나고 투박하게 이를 데 없는 어부들을 많이 뽑은 이유
첫 번째는 무소유 때문에, 두 번째는 공동체성 때문에, 세 번째는 종말론성 때문에 그렇다.
이 세 가지가 사실은 열두 제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도 해당이 되죠.
그래서 우리들이 하느님의 자식이 되고자 할 때 첫 번째 뭐라 그랬습니까?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려고 애를 써야 한다는 말이죠.
이 세상을 살면서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늘 하는 얘기지만 우리들은 잘 경영해야 하는 경영권만 있지 소유권은 하느님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소유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존재론적인 운명입니다.
두 번째로는 뭡니까? 공동체성이죠.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개인 구원이 아니라 우리 가족, 우리 공동체 모두의 구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금률, 마태복음 7장 12절을 지켜야 하겠죠.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세 번째로는 종말론성이라고 그랬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 인생의 위험과 고통은 단순히 악이 아니라 하느님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얘기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제자를 만드신 이유가 나옵니다.
그리고 신자로 살아갈 때 첫 번째 의무가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몇 가지 방법을 제가 조금 알려드리고 싶은데, 첫 번째는 어부는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어부는 미끼에 고기가 걸릴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합니다.
더군다나 사람 낚는 어부는 더 큰 인내를 가져야 할 겁니다.
성급한 결과를 거두려 해선 안 된다는 얘기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느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려고 몇 번 말해보니 시큰둥하다고 ‘저 사람은 전교할 수가 없어’
이렇게 판단 내리지 말라는 얘기죠.
그 사람 이름을 십자가 밑에 써서 붙여놓고 될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인내를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부들은 인내심이 없으면 절대 고기를 못 잡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낚시질하시는 분들 계시죠?
저도 옛날에는 아주 낚시광이었는데 지금은 안 합니다.
몇 시간 동안 한 마리도 잡질 못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기다립니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한 마리도 못 잡고 올 때도 있지만, 그래도 어부들은 희망을 갖고 기다립니다.
성급하게 낚시를 거두질 않습니다.
두 번째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는 어부는 ‘불굴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부는 어떤 경우에도 어떤 말을 들어도 전교하다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다시 시도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상대방이 거부했다고 그 사람 포기해선 안 됩니다.
모욕당했다고 해서 자존심 상했다고 해서 그 영혼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될 때까지 다시 시도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을 불굴의 정신이라 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한 세 번째 방법은 ‘분별’입니다.
어부는 고기를 잡아야 할 시기를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현명한 어부는 고기를 잡을 가망이 없을 때와 있을 때를 잘 압니다.
그물을 던질 때와 던지지 않을 때를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환영할 때가 있고 진리에 반감이 있을 때가 있죠.
또 전교할 때도 말해야 할 때가 있고, 침묵을 지켜야 할 때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네 번째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는 ‘고객에게 맞는 미끼’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미끼가 뭔지 아시죠? 고기에 따라 좋아하는 미끼가 다릅니다.
지렁이 좋아하는 고기가 있고, 떡밥 좋아하는 고기가 있고요.
또 성질 급한 놈은 가짜 미끼도 덥석 뭅니다.
바울 사도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여러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언제나 같은 방법으로 전교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고요.
토론을 통해서 이해시켜야 할 때도 있고. 방문하면서 적극성을 보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서적을 선물해야 할 때가 있고, 힘들고 어려울 때는 그 사람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유튜브 소개해 줄 수도 있고요. 아무튼 고객에게 맞는 미끼를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현명한 어부는 ‘자신을 숨길 줄 알아야’ 합니다.
전교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에게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김웅열 신부의 강론을 듣고 사람들이 모입니다.
모이는 것까지는 사제에게 준 그 카리스마의 도움을 받는 거죠.
그러나 김웅열 신부가 끝까지 예수님 앞을 가로막고 그 앞에 모여든 신자들에게 교주 행세를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거죠.
사제의 강론을 통하여 교우들이 모이면, 사제는 자리를 비키고 그분들을 예수님과 만나게 해줘야 합니다.
현명한 어부는 자신을 숨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고 난 다음, 끝까지 그 사람을 내가 이끌었다고 하는 자만감이라든지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내 말을 듣는 것이 더 현명하다든지 이래서는 안 되지요.
뒤에서 기도해야 하고, 그리고 ‘주님이 나 같은 보잘것없는 종을 통하여 당신의 아들딸로 부르셨으니
이젠 주님께서 알아서 쓰십시오’ 하면서 뒤에서 도와주고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그모습으로 숨어야 한다는 겁니다.
안드레아 사도 축일 날, 그전에도 했던 얘기지만 왜 어부를 부르셨는지에 대한 세 가지 이유와
또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는 5가지를 유의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강의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2024년 연중 제3주일 (1/21)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첫 번째는 무소유 때문에, 두 번째는 공동체성 때문에, 세 번째는 종말론성 때문에 그렇다.
아멘! 감사합니다 ~❤️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