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호
[202301]슬기로운 ‘전례상징’
대림과 성탄, 재의 수요일의 상징
윤종식 디모테오 신부 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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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계묘년(癸卯年) 토끼띠의 해가 찾아왔습니다. 새해에는 ‘새로움’이라는 설레임과 기대감, 그리고 약간의 긴장이 깃듭니다. 지난해에는 ‘응답하라 전례’를 통해서 전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도우려 했고, 새해에는 ‘슬기로운 전례상징’이라는 주제로 전례에서 사용되는 상징들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메시지, 곧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데 기여하려고 합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곧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로마 8,28) 알고 있습니다. 특히 전례에서 사용되는 상징은 주님으로부터 기인하거나 역사적, 문화적 산물을 교회가 받아들인 것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인간을 성화로 이끄는 지름길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전례 상징에 대한 이해는 인간적인 감각을 불태우고 초월적인 존재를 알아보게 하는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불인 성령(루카 12,49-50 참조)을 받아들이고, 성서와 전례에 대한 지적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이번에는 우주적 시간인 일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펼치신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기념하는 전례 주년에서 사용되는 몇몇 상징들, 특히 대림과 성탄, 그리고 재의 수요일의 상징을 통해 교회가 전하려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알아보겠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환
대림환은 월계수나 전나무 또는 비슷한 나뭇잎으로 엮어 만든 화환이며, 보통 자색에서 흰색으로 전환되는 네 개의 초로 장식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회개와 속죄, 단식과 기도로 준비하다가 세상의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을 드러내는 대림 4주간의 과정을 잘 드러냅니다. 대림환의 준비는 대림환의 초를 켜놓고 매일 기도를 봉헌해야 의미가 살아납니다.
기다림의 영성을 깊이 있게 성찰하게 하는 대림 시기는 두 가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들에게 처음 오셨음을 기념하는 예수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기념을 통하여 시간이 끝날 때 두 번째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때입니다(‘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 규범’ 39항 참조).
주님의 구원사업을 드러내는 성탄 트리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세 2,8-9) 뱀의 유혹에 빠진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죄를 지어 죽음과 삶의 고통이라는 벌을 받습니다.
이러한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예수님은 십자 나무에 자신의 생명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어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였습니다. 곧 십자 나무는 생명 나무였던 것입니다. 성탄 트리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면서도 동시에 생명을 주는 십자 나무를 드러내고, 빨간 방울은 선악과, 하얀 방울은 지금도 우리가 영하는 성체를 의미합니다.
성탄 트리의 꼭대기를 장식하는 큰 별은 ‘세상의 빛’(요한 8,12)으로 오신 예수님은 ‘별’(마태 2,2)을 통하여 동방 박사들을 인도하셨음을 말합니다. 이제는 그 ‘별’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께로 인도하여 당신을 닮아 ‘세상의 빛’이 되어달라고 요구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신”(필리 2,7) 하느님의 아들을 드러내는 구유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 이외에 가장 처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린 목자들에게 천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 곧 주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는데, 그분은 아기의 잠자리가 아닌 동물의 먹이를 놓는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였습니다. 이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사람들에게 먹히는 존재가 되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상징이 아닐까 합니다.
현재와 같은 구유 경배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강생의 신비에 대한 사목적이고 교육적인 차원에서 1223년 이탈리아 중부 작은 마을 그레치오에서 행한 구유 경배에서 유래했습니다. 한동안 교부들의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이사 1,3)에 대한 해석 때문에 구유에 소와 나귀는 꼭 있어야 한다는 통념이 있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루카 복음 강해’에서 “소는 정결한 동물이고 나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 주님의 구유를 알지 못했지만, 부정한 이방인들은 알았습니다”라고 해석하였고, 아우구스티노 역시 그의 설교집에서 “유다인들에게서 나온 소와 이방인들에게서 나온 나귀가 모두 같은 구유에 나와 말씀의 먹이를 발견했습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가축들의 먹이를 놓는 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은 사람을 위해 낮은 곳에 임하신 겸손과 모든 것을 내어주는 봉사를 드러내고, 말씀과 성체를 통해 우리를 양육하시는 당신의 한없는 사랑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재를 얹어주며 사제가 말하는 예식문으로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에서 유래했습니다. 재는 불에 타고 남는 가루 모양의 물질로, 불이 그 임무를 완수한 후에 남은 것입니다. 따라서 재는 하찮고 무가치한 것, 허무를 나타냅니다.
이 같은 무(無)에 대한 생각은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신의 은총이 없을 때 겪는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죽음에 얽힌 생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의 은총이 없다는 것은 곧 하느님이 보내주신 불인 성령이 꺼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재와 같이 무(無)임을 그리스도인 모두가 깨닫고 “사순 시기에 정성껏 재계를 지켜 죄를 용서받고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하시는 성자의 모습을 닮게” 되기를 교회는 재를 축복하면서 기도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1요한 1,1)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하느님이 펼치시는 구원의 신비로 한 걸음씩 들어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