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타이는 인류 최초의 유목민족, 페르시아도 굴복. 기원전 7~6세기쯤 나타남 흑해 북안·이집트·시리아 휩쓸며 황금강국 건설… 왕족·유목·농경 스키타이 부족으로 구성돼
▲ 스키타이 고분에서 출토된 황금빗 상부의 전투장면 장식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구약시대에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예레미아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있었다.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서 살았던 그는 그들 민족 이스라엘이 아주 깊은 종교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는 것을 신의 계시를 통해 거듭 경고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쓴 ‘예레미아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보라! 한 겨레가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의 드센 물결 같은 자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 같이 다섯 줄을 서고, 딸 시온 너를 치려 하느니라!”(6장 22~23절) 여기서 그가 마치 환상을 본 듯 적고 있는 활과 창을 잡고 말을 타고 줄을 지어 엄습하는 전사들은 아시리아인도 바빌론인도 아니었다. 바로 인류 역사상 처음 유목민족이라 불리는 스키타이였다. 스키타이인들은 인도·이란 계통의 민족이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따르면 겨레 이름도 ‘스쿠타(skuta-)’라는 고대 이란어에서 나왔으며, 이는 오늘날 영어에서 ‘shooter’와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스키타이는 ‘궁사’를 뜻하는 셈이다. 아마 큰 무리를 이루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던 그들의 모습에 센 인상을 받은 다른 겨레들이 붙여준 이름일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데, 고교 세계사 교과서에 우리 문화의 원류 가운데 하나로 ‘스키타이’ 또은 ‘스키토-시베리아’ 문화라는 것이 소개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민족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사람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였다. 그는 ‘역사’라는 책에서 스키타이의 뿌리에 대해 몇 가지 설화를 전하면서 그가 보기에 가장 믿을 만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본디 아락세스강(오늘날 볼가강) 동쪽에 살던 겨레인데, 마사게태라는 겨레가 쳐들어오자 서쪽으로 쫓기면서 강을 건너서 흑해 북안(北岸·북쪽 해안)의 원주민 킴메르인들을 치기 시작했다. 킴메르인들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달아나자 스키타이는 그 뒤를 쫓았는데, 그만 길을 잘못 들어서 근동(近東)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예레미아는 바로 그때 내려온 스키타이를 본 것이다. 이 스키타이에 관한 첫 글도 당시 근동의 센 나라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 있다. 즉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무리가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핫돈(기원전 680~669년)과 싸워 졌다는 글이 그것이다. 학자들 거의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이른다는 데 생각을 같이 한다. 당시 근동은 아시리아, 메디아, 우라르투 등 여러 세력들이 서로 맞서 정치적으로 아주 어지러웠다. 갑자기 무대에 나타난 스키타이는 이들 나라와 때로는 손잡고 때로는 맞서면서 중요한 변수가 되기 시작했다. 이슈파카이의 아들인 파르타투아는 옛날 적이었던 에사르핫돈과 혼인동맹을 맺는데, 후일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메디아에게 포위 공격당할 때 그의 아들이 스키타이의 왕이 되어 원군을 이끌고 와서 메디아를 물리쳤다는 글도 있다. 그 뒤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으로 내려갔는데, 겁을 먹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선물을 갖고 올라와 스키타이 임금 마디에스에게 바치고 화평을 맺었다.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여러 곳을 호령하면서 여러 겨레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의 임금 퀴악사레스가 그들을 연회에 불러 술에 잔뜩 취하게 한 뒤 몰살시켜 버림으로써 그들의 패권은 끝나고 말았다고 한다.
▲ 스키타이 시대의 중앙유라시아
근동을 떠난 스키타이인들은 다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 헤로도투스는 이들이 북방으로 귀환한 뒤에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에 대해서 글을 남기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이 근동을 원정하는 동안 부인들이 남은 노예들과 관계를 맺어 낳은 자식들이 귀환한 옛 주인에게 딸리기를 거부했다. 두 쪽 사이에 불꽃 티는 싸움이 벌어졌는데 처음엔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을 누를 수 없었다. 그런데 노예들을 상대할 때는 칼이나 활이 아니라 채찍을 써야 한다는 누군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채찍을 휘둘렀더니 겁을 먹고 다시 엎드렸다고 한다. 이 설화는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안 즉 돈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초원지역을 점령하고 나라를 세울 때 군사적 정복과 함께 그곳 주민과의 겨레 섞임도 함께 일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다. 흑해 북쪽 해안을 근거로 세워진 스키타이 나라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었다. 우선 ‘임금무리 스키타이’라는 무리인데 가장 높은 지배층이고, 그 다음에는 여느 유목민으로 꾸려진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정복당한 ‘농경 스키타이’가 있었다. 이러한 얼개는 스키타이 나라가 꼭 한 결레가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다른 온갖 작은 겨레들이 묶겨졌음을 말해준다. 흑해 북안으로 돌아온 스키타이는 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의 공격을 잘 막아낸 뒤 전성기를 노래하게 된다. 다리우스 큰임금이 8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키타이를 잡으려고 풀벌을 헤맸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절망에 빠진 그는 스키타이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비겁하게 내빼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는 쫓겨다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본디 그렇다.”는 조롱 섞인 답신뿐이었다. 식량이 바닥난 페르시아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스키타이는 풀벌에는 물이 귀하므로 그들이 물이 있는 곳을 따라 물러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맹추격을 했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초원의 지리에 어두워 물도 없는 엉뚱한 길로 가는 바람에 전멸 위기에서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 파지리크 고분에서 발견된 미라의 피부에 새겨진 동물양식의 문신.
밖의 위협을 이겨내고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추진된 그리스와의 교역은 스키타이 나라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오기에 넉넉했다. 스키타이의 발전과 번영은 그들이 남긴 무덤에서 나온 유물이 잘 말해주고 있다. 흔히 ‘쿠르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무덤들은 흙과 돌로 쌓여진 작은 언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큰 것은 높이가 20m에 이르며 그 속에 나무널을 넣었다. 이들 스키타이 무덤은 특히 쿠반 반도(켈레르메스, 코스트롬스카야)와 크리미야 반도(쿨 오바, 체르톰리크, 솔로하)에 모여 있어, 그곳이 스키타이 나라의 한가운데임을 말해준다. 유물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매우 많아서 스키타이 귀족들의 재화와 부의 모습을 추측케 할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특유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인다. 학자들은 흔히 스키타이 문화의 3대 요소로 마구, 무기, 동물양식을 드는데, 이 가운데 특히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동물양식이다. 이같은 스키타이 동물양식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학설이 맞서 왔다. 하나는 남러시아 자생설이고, 또 하나는 서아시아 기원설이며,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이 있다. 스키타이의 유물들을 보면 남러시아나 서아시아의 영향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 전반 남시베리아의 투바공화국의 아르잔이라는 곳에서 직경 120m에 이르는 큰 고분이 찾겼고, 거기서 나온 유물들은 끝내 중앙아시아 기원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탄소 연대측정 결과 지금까지 나온 어떤 동물양식의 유물들보다 때가 이른 기원전 9세기 중후반으로 판명된 이 무덤에서 뒷날의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중요한 요소를 밝게 갖고 있는 유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스키타이 나라의 중심지는 흑해 북안이었다. 그러나 동물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고대 유목문화는 유라시아 풀벌에 드넓게 퍼져 있었고, 이는 고고학적인 발굴에서 확인된다. 1940년대 후반 알타이 고산지대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나온 유물들은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주검이 담긴 나무널을 놓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적석목곽분의 짜임을 지녔다. 적석총의 특징을 지닌 신라시대 무덤들과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학자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파지리크 고분은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었지만, 묘실 안팎으로 스며든 이슬과 빗물이 얼어 무덤이 오롯이 하나의 냉장고가 되어버려, 그 속에 있던 주검과 많은 부장품들이 전혀 부식되지 않은 채로 나왔다. 미라로 만들어 실로 꿰맨 흔적이 보이는 주검의 살갗에는 동물양식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손가락 끝으로 눌러보면 살갗이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순장된 말들과 거기에 씌웠던 말가면이 나왔고, 목제품·펠트·직물 등에도 스키타이 특유의 양식들이 보였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헤로도투스가 묘사한 바와 같이 제사의식을 행할 때 대마초를 피우는 데에 쓰인 도구들이 그대로 나와, 그의 글이 얼마나 정확하고 믿을 만한 지 보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짠 카펫,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거울 등도 나와 폭넓은 교역의 존재도 짐작케 한다. 그 뒤 1969~1970년에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라는 도시에서 멀지않은 이식 쿨 호수 부근에서 기원전 5~4세기에 드는 많은 모덤들이 찾겼고 여기서 소위 ‘금사람’으로 알려진 유해가 나왔다.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은 키 165㎝로 추정되는 젊은이가 입고 있던 금옷 때문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4개의 화살이 꽂혀 있는 장식을 한 모자이다. 옛 페르시아 자료에는 ‘사카 티그라하우다(Saka Tigrahauda)'라는 겨레가 나오는데, ‘티그라’는 화살을, ‘하우다’는 모자를 뜻하며, ‘사카’는 ‘스키타이’와 말뿌리가 같은 이름이다. 따라서 그것은 ‘화살 같은 모자를 쓴 사카족’을 뜻한다고 할 수 있으니, ‘금사람’은 바로 이 겨레의 한 귀족청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특징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더 동쪽의 몽골리아 풀벌으로까지 퍼졌다. 1924년 울란바토르 북방 80㎞에 있는 노인 울라의 무덤은 동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인들의 것으로, 여기서 나온 많은 부장품 가운데 그리핀이 순록을 공격하는 모양이 수놓인 카펫이 나왔다. 중국에서 들여온 직물이나 칠기 등이 많이 있고 그 중에는 전한 건평5년(기원전 2년)의 명문(銘文)을 갖고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흉노가 한나라의 조공을 받아 많은 물품들을 들여왔기 때문일 것이다.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은 고비사막 남쪽의 내몽골 지역에서도 많이 보인다. 흔히 ‘오르도스 청동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풀벌 청동기 제품들 중에는 맹수가 풀짐승을 덮치는 장면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첫 유목민 스키타이가 나타났을 때부터 중앙 유라시아는 대륙의 주변부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적 특징을 나타내었다. 그것은 흑해 북안에서부터 내몽골 풀벌에 이르기까지 중앙 유라시아 전역을 뚫고 나타난 현상이다. 그것은 결코 막힌 문명이 아니었다. 크리미아 반도에서, 알타이 산중에서, 또 몽골고원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이미 3000년 전부터 중앙 유라시아의 주민들이 주변의 그리스, 페르시아, 중국 등과 밀접한 접촉과 교류를 해왔음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지역은 유라시아 문명권의 공통된 접점으로서 주변 지역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을 마셨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요소들을 수용하고 바꾼 뒤 다시 주변지역으로 내보냄으로써, 수동적 전달자가 아니라 적극적 참가자로서 유라시아 역사를 움직여갔던 것이다. 동물양식(animal style)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후 2~3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초원지역에 드넓게 나타난 예술적 표현양식이다. 스키타이인들의 무덤에서 나온 수많은 유물에서 전형적인 형식이 보이기 때문에 ‘스키타이 동물양식’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나무·쇠·청동·금·은 등 갖가지 소재를 썼고, 사슴·양·말·표범·매·그리핀과 같은 동물들의 모양을 양식화(stylize)하여 나타냈다. 특히 금으로 만들어진 항아리·머리핀·목걸이·버클·장식판 등은 매우 정교하고 넉넉한 예술적 표현을 담고 있다. 늘 옮기는 유목민이니까 작고 가벼운 물건들을 갖고 다녔고 따라서 장식물의 작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동물의 몸이 둥글게 말려 있는 모습, 무릎을 완전히 꺾어서 구부린 상태, 맹수의 공격에 버티면서 목이 180도 젖혀진 모습 등이 묘사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또한 맹수가 공격하는 모습이 표현된 장식품을 옷과 무기에 붙인 것은 그러한 장면이 지니는 상징적 주술성과 공격성이 그것을 붙인 용사에게 옮겨지기를 바라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 황금의 유목문화 | 스키타이 |
출처: 이파랑 원문보기 글쓴이: 이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