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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3․1운동과 기독교계 대표
유준기 (총신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 머리말
3․1운동은 개항이후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항일구국운동과 사상이 전 국민적 차원으로 확장되어 한국의 근대적 민족주의를 한 차원 높게 승화시킨 일대 사건이었으며, 일제시대 전기간에 걸쳐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민족적 저항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3․1운동은 여전히 중요한 연구주제의 하나가 되고 있으며, 운동의 발발 배경이나 전개과정 및 참여계층의 특징과 성격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각 종교계이 활동 및 3․1운동에 대한 각 국의 반응과 국제적인 영향 등에 대해서도 상당한 수준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들을 종ㅇ합해 보면 3․1운동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기독교계의 3․1운동은 다른 종교세력에 비해 강력하게 추진되었으며,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 역시 기독교세력에 대해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3․1운동 초기에 운동의 초기화와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던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영향력과 일정하게 상관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것ㅇ느 1910년대 이래로 조선총독부가 기독교 세력에 대해 취해 왔던 종교정책이 기독교계와 갈등 관계를 표출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3․1운동을 통해 증폭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본고에서는 3․1운동을 전후하여 나타나는 기독교세력과 조선총독부와의 갈등관계의 전개 양상에 살펴보는 한편, 3․1운동에 있어서의 민족대표의 활동이나 인적 구성상의 사회적 특성과 조선총독부의 기독교계 3․1운동에 대한 대응 등의 일면을 정리해 봄으로서 궁극적으로 3․1운동에 있어서의 기독교계와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대체로 이러한 연구는 3․1운동의 전개과정을 기독교계의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보다 폭넓게, 그리고 긍정적으로 이해하는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겠다.
2. 총독부의 기독교 정책과 갈등관계의 형성
일제는 3․1운동을 통해서 기독교세력이 가장 강력한 항일집단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잇다. 그런데이러한 상황은 조선총독부의 기독교계에 대한 정책이 종교적 혹은 민족운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무단통치(武斷統治)’로 일관하고 있었던 당시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세력과 조선총독부는 교육정책에 있어서 마찰을 빚고 있었다. 총독부는 “한․일 합방” 직후인 1911년에 제 1차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勅令제229호)을 발표하였으며, 연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사립학교규칙(총독부령 114호)을 공표하였는데, 이러한 법령은 지금까지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한 탄압과 기독교와 연결된 서구세력을 배제하고 한국을 완전히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일제의 정책적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을사조약’ 직후 통감부가 기독교에 대해 외국인 선교사에 대해서는 총독부와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한다고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정책적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장로교에서는 1901년부터 「국가문답」․「국가성쇠문답」등을 통하여 국가관을 제시하고 있었으며, 교인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위인을 소개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성탄일과 교회의 기념일에는 십자가와 태극기를 좌우에 게양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미 대한제국기부터 시행되고 있었던 기독교계의 이러한 애국적 활동이나 집회는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를 내부적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또한, 1915년 3월에 「개정사립학교규칙」(총독부령 제24호) 공포한 일제는 기독교 학교에 대해 교수과목에서 성서를 제외할 것과 5년 내에 교사들에게 일본어 학습을 의무하였는데 총독부의 이러한 정책은 조선선교연합회(Federal Council of Missions)의 강력한 반발 속에서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었던 기독교계와 총독부의 관계를 장기적으로 악화시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1910년에 일반 종교학교를 모두 합하여 2250개요에 이르던 사립학교가 1911년의 「조선교육령」과 「사립학교규칙」이 공포된 후에는 1467개교로 대폭 감소하고 있었으며, 「개정사립학교규칙」이 발표된 1915년에는 1,082개교로, 1918년에는 755개교로 계속 감소하고 있었다.
이밖에 1915년 8월에는 이른바 「포교규칙」(총독부령 제83호)을 공포하였는데 이 법령이 공포되자 경찰은 포교규칙을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교회를 수시로 출입하였으며, 교회의 설립과 변경에 있어서도 총독의 허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요컨대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동화정책(同化政策)을 근간으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육성을 목표로 했던 일제의 식민지교육 정책에 있어서 기독교계 학교의 근대적 교육은 가장 강력한 걸림돌이 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가혹한 법률적 적용을 통해 기독교계 학교를 탄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기독교세력과 일제와의 갈등관계는 ‘안악사건(安岳事件)’이나 ‘105인 사건’과 같은 정치적 사건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安岳事件’은 1910년 12월 안중근의 사촌인 안명근(安明根)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자 일제는 이 사건을 데라우찌(사내정의寺內正毅) 총독에 대한 ‘암살사건’으로 날조하여 김구(金九), 최명식(崔明植), 이승길(李承吉),도인권(都寅權)을 비롯하여 160명의 교계인사와 지식층을 검거하여 황해도지역에서도 기독교계의 기반을 약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일제는 평안도지역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이 지역에서의 ‘신민회의 근절’과 '기독교와 선교사에 대한 탄압’ ․ ‘애국지사 및 청년의 사기 제압’ 등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데라우찌가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낙성식에 참석하고자 선천역(宣川驛)에 잠시 하차했을 때 선교사 맥퀸(G,S McCune, 윤산온)이 데라우찌와 악수하는 것을 신호로 총독을 살해하려 했다는 구실을 붙여서 교계의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함으로서 본격적인 탄압에 착수하였다. 일제의 발표에 따르면 1911년 10월 12일부터 그 해 겨울까지 체포된 관련인은 157명이었으며, 그 중에 전덕기 목사를 비롯하여 김근형(金根瀅) ․ 정희순(鄭希淳) ․ 한필호(韓弼鎬)는 고문으로 사망하였으며, 최광옥(崔光玉)은 병사하였고, 1912년 6월 28일 123면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 중 기독교인의 숫자는 105인이었으며, 장로교인 97명 가운데 67명이 정주(定州)와 선천(宣川)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 관련자 가운데 이승훈(李承薰) ․ 양전백(梁甸伯) ․ 이명용(李明龍)운 이후 3․1운동에서 장로교계의 민족대표로 활약하게 되는 인물이며, 길진향(吉鎭亨)은 길선우(吉宣宙)목사의 아들이기도 하다. 이밖에 이 사건에는 선교사 맥퀸과 마포삼열(馬布三悅)이 연루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정황은 일제와 선교사들이 단지 교육이나 선교 차원의 활동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독립문제와 관련된 민족운동적 차원에서도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음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18년 2월에 야기된 ‘조선국민회사건(朝鮮國民會事件)’의 경우도 총독부와 기독교세력과의 갈등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조선국민회는 1917년 3월 23일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의 장일환(張日煥), 배민수(裵敏洙),백세민(白世彬) ․ 오(여)형섭(吳(呂)炳燮)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항일조직이었는데, 이 조직은 1914년 9월 미주로 건너간 장인환이 미국에서 박용만에게 국내에서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총독정치의 실상과 이에 대한 민정(民情)을 통보해 줄 것과, 서로 협력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로 약속하면서 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국민회에서는 회원들로부터 자금을 모집하여 권총을 구입하고자 했으며, 조직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암호를 정하기도 하였는데 암호 중에는 ‘돈각(豚脚)→피스톨’이라는 용어가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배민수를 중국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교육을 받게 하였으며,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였던 「국민보(國民報)」를 배포하여 일반 대중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보면 조선국민회의 활동은 단순한 계몽적 성격의 학생조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항일무장투쟁을 염두에 둔 보다 적극적인 기독교 청년들의 항일조직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조선국민회는 1918년 2월 일제 경찰에게 노출되어 25명의 회원이 검거됨으로써 더 이상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소위 ‘한일합방’ 이후 1910년대에 들어 국내의 기독교세력은 교육정책과 민족운동적 차원에서 일제와 지속적으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3․1운동 직전까지 계속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탄압의 주요 대상으로는 선교사와 청년학생층은 물론, 기독교계의 지도급인사들이 다수 포함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기독교계와 조선총독부와 이러한 갈등관계의 증폭은 기독교세력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일정한 조건이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항일전선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기폭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계 인사들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3 ․ 1운동 참여
1) 3․1운동 참여과정과 역할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3 ․ 1운동 참여는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역에서의 활동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1919년 2월 6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團)의 당원의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온 선우혁(鮮于爀)집사(執事)는 이 지역의 기독교지도자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준비하도록 종용하였다. 우선 선우혁은 과거 105인 사건의 동지이며 선천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양전백을 찾아가 대대적인 독립운동의 준비를 건의하여 동의를 얻었으며, 고향인 정주에서는 105인 사건의 동지이며, 선배인 이승훈을 만나 현재 상해에서 진행되고 있는 독립운동의 상황을 전달하였다. 이후 선우혁은 이승훈의 도움으로 길선주와 변인서를 만날 수 있었는데 105인 사건의 동지였던 변인서와 선우혁은 105인 사건의 동지였으므로 평양에 있는 동지들과 거사에 필요한 중요인물들을 한자리에 불서모을수 있었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서문밖 교회 목사 김두선, 산정현교회 목사 강규찬, 도인권, 김성택등이 모였다. 이들은 모두 선우혁의 제의에 찬동하는 한편, 자신이 중심이 되어 평양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선우혁은 상해로 돌아갔으며, 관서지역의 민족대표들은 숭실학교 등 평양시내 기독교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총동원하여 가능한 모든 학생들을 가담시키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평양에서 만세시위가 이루어진다면 비록 유기적인 연락은 없었지만 선천, 의주, 정주, 재령, 강계 등지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날 것을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서울에서의 활동은 박희도(朴熙道)와 이갑성(李甲成)을 중심으로 한 학생조직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박희도는 이 문제를 정춘수(鄭春洙) ․ 중석기(董錫璣) 목사 등과 논의했던 것으로 보이며, Y.M.C.A청년부 회원을 중심으로 학생조직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한위건(韓偉健)과 연희전문학교 학생인 김원벽(金元璧)과 함께 기독교 학생청년단(學生靑年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구체화시켜나갔는데 이들은 이후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康基德)을 비롯하여 윤자영(尹滋英) ․ 김현기(金炯璣) ․ 주종의(朱鍾宜) ․ 이공후(李公厚) ․ 주익(朱翼) ․ 윤화정(尹和鼎) ․ 윤화라(尹和羅) 등 서울지역 여러 학교의 학생들을 포섭하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1918년 12월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모의(謀議)를 주도하고 있었던 이갑성도 학생들을 규합하고 있었는데 이 조직에도 김원벽 ․ 강기덕 ․ 윤자영 ․ 한위건 ․ 김형기 이외에 김문진(金文珍) ․ 배동혁(裵東奭) ․ 김성국(金成國)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대체로 박희도 계열과 유사한 인물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이갑성은 이상재(李商在) ․ 윤치호(尹致昊) ․ 함태영(咸台永) ․ 손정도(孫貞道) 등 기독교계의 유력 인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문제를 논의한 결과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고 손정도목사의 경우는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이에 학생 조직을 중심으로 2월 20일에 기독교 계열과 학생조직을 중심으로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박희도와 이갑서을 중심으로 한 학생측의 계획은 그 뒤 기독교와 천도교의 제휴가 이루어지고 학생조직의 독자적인 행동보다는 거족적인 단일행동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자 중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기독교 민족대표의 3 ․ 1운동 참여과정은 천도교계와의 제휴를 논의해 가는 과정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1919년 1월 28일경 최린(崔麟)으로부터 기독교계가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는 보고를 들은 손병희는 기독교계 내에서 신망이 두터운 이승훈과 연락을 취하여 양측의 제휴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천도교로부터 양 교단의 제휴를 위한 구체적인 요청을 받은 이승훈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이갑성 ․ 김병조(金秉祚) ․ 이명룡(李明龍) ․ 양전백 ․ 유여대 ․ 길선주 ․ 손정도 등과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였으며, 서울로 상경하여 2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차례에 걸친 논의를 거친 후 천도교와의 제휴를 최종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제1차 회의는 2월 20일 협성학교(協成學校) 사무실에 개최되었는데 이승훈 ․ 박희도 ․ 정춘수 ․ 오화영 ․ 신홍식 ․ 오기선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과 일제에게 독립을 요구할 것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또한 독립을 청원(請願)하느냐 선언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오화영 목사의 제안대로 기독교측의 주요인물이 연서(連書)한 독립청원서를 일본정부에 보내기로 하였으며, 동지들의 규합을 위해 오화영은 개성과 춘천지구에서, 정춘수는 원산지구에서 나머지 사람들은 서울에서 동지들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천도교와의 합작문제에 대해서는 반대의 의견이 있었다. 박희도는 양측의 제휴가 교리상(敎理上) 부합되지 않으며, 양교단(兩敎間)에 아무런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행동통일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정춘수는 천도교측이 위험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제2차 회의는 2월 21일 이갑성의 집에서 개최되었는데 함태영 ․ 이승훈 ․ 안세환(安世桓) ․ 김세환(金世煥) ․ 김필수(金弼秀) ․ 오상근(吳祥根) 등 장로교측의 인사와 박희도 ․ 오화영 ․ 신홍식 ․ 오기선 등 감리교측의 인사가 모였다. 청원서의 초안(草案)을 작성하는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독립운동의 형태가 종파를 초월한 거족적인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함태영 ․ 안세환 등의 의견이 주효하여 천도교와의 제휴에 관한 논의에 상당한 진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이 회의에서는 국제정세와 강화회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하여 현순(玄楯)을 상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지방의 동지 규합을 위해 이갑성 ․ 김세환 ․ 신홍식 ․ 이승훈을 지방순회위원으로 추가로 임명함으로써 기독교측 활동영역의 확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3차 회의는 2월 22일에 개최되었는데 이승훈과 함태영이 천도교측과의 교섭 내용 전말을 보고하였으며, 양 교단의 제휴에 대한 가부를 결정되었던 회의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그리고 이상 3차의 회의를 통해 논의된 양측의 제휴는 2월 24일 최종적으로 손병희에게 전달외었으면, 이후 이승훈,함태영과 만난 최린은 3.1운동의 진생절차와 양측의 역할을 분장하였다. 선언서와 청원서의 작성과 인쇄에 관한일을 천도교측에서 전담하였으며, 미국 대통령및 강화회의 참전국 대표들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는 일은 기독교측에서, 일본정부와 직접 담판하는 일과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3월 1일에 학생과 시민을 동원하는 일을 기독교측에서 맡기로 하였다,
그리고 2월 27일에는 이필주의 집에서 이필주,이인환,박희도,오화영,최성모,함태영,김창준,신석우,박동완 등이 모여 함태영이 최린으로부터 가져온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 초안을 회람하였다. 여기서 참석자들은 선언서의 취지에 찬동하고 기독교의 민족대표로 최종적으로 서명.날인하였다.
따라서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보면 3.1운동을 전후하여 나타나고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동향은 이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3.1운동이 전개될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확산시켜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독교계 민족대표들은 운동의 통일을 위한 천도교의 제안을 민족적 차원에서 흡수함으로써 3.1운동이 거족적인 항일운동이 되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런데 천도교와 제휴가 논의되는 과정에서도 기독교측에서 보여주었던 지방조직의 강화를 위한 노력은 이후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2) 인적구성(人的構成)구성과 그 특성
민족대표 33인은 인적 구성으로 볼때 천도교측 15인, 기독교측 16인, 불교측2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기독교인들의 구성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은 3.1운동에서의 기독교계의 사회적 영향력이 그만큼 강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민족대표의 선정과정에 있어서 보면 천도교는 교단 내의 수직적인 조직체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기독교의 경우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교단적 구분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비교적 수평적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활동지역에 있어서도 장로교의 경우는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감리교는 지역적으로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할수 있다고 하겠다. 또한, 3차에 걸쳐 선정된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경우, 제2차에서 추가된 감리교의 목사는 모두 북감리회 소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개인적 경력을 중심으로 인적구성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면 <표1>과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이러한 내용들을 기독교계 민족대표 각자의 개별행동과 함께 분석적으로 이해해 보면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사회적 활동의 한 특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길선주]는 평안남도 안주출신으로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제1회 졸업생으로서 목사안수를 받았는데 그는 이미 독립협회(獨立協會) 평양지부의 사업부장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1912년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다.숭실학교와 숭덕학교(崇德學校)의 설립에도 관여하였으며, 3.1운동 초기의 조직화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평양지역 기독교세력의 지도적 인물로 3.1운동의 촉발에 일정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양전백]은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길선주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 교육운동에 힘을 기울여 신성중학교와 보성여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투옥되엇고, 1916년에는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이 되었다. 1919년 2월 12일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선천에 왔던 이승훈을 자기 집에서 만난 후 3.1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민족대표가 되었다.
[유여대]는 1900년 의주에서 양실학교(養實學敎)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전개하였으며,1909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었다. 목사가 된 이후에는 목회활동 이회에 야학을 개설하여 여전히 교육운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한 다른 민족대표자들과 달리 정명채(鄭命采)·김두칠(金斗七)등과 20여명과 함께 의주에서 별도의 만세운동을 추진하여 3월 1일에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교구에서 신자들과 양실학교(養實學敎)학생 등 700~800명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인적 구성
이 름 |
나이 |
교회와의 관계 |
학 력 |
거주지 |
3.1운동이전중요활동 |
이승훈 |
52 |
장로교 장로 |
평양신학교 |
평북 정주군 |
강명의숙.오산학교 설립 안악사건.105인사건 으로투옥 |
이명룡 |
48 |
장로교 장로 |
평북 정주군 |
||
유여대 |
42 |
장로교 목사 |
평양신학 |
평북 의주군 |
|
김병조 |
42 |
장로교 목사 |
평양신학 |
평북 선천군 |
|
양전백 |
51 |
장로교 목사 |
평양신학교 |
평북 선천군 |
|
길선주 |
52 |
장로교 목사 |
평양신학교 |
평양 관후리 |
|
이필주 |
52 |
북감리교 목사 |
협성신학 |
경성 저동 |
|
박희도 |
31 |
YMCA간사 |
평양숭실,협성신학졸업 연희전문 중퇴 |
경성 주창동 |
|
오화영 |
41 |
남감리교전도사 |
감리교신학전문학교 |
경성 수창동 |
광성소학교 부교장 |
김창준 |
31 |
북감리교 목사 |
평양숭실.동경 청산학원 수료 |
경성 인사동 |
|
박동완 |
35 |
기독신보사서기 |
한성외국어학교,배재학당 |
경성 노하동 |
|
정춘수 |
45 |
남감리교 목사 |
경성신학교,협성신학교 |
원산 남촌동 |
|
신석구 |
46 |
남감리교 목사 |
협성신학 |
경성 수표정 |
|
최성모 |
47 |
북감리교 목사 |
협성신학교 |
황해도해주군 |
|
신홍식 |
49 |
북감리교 목사 |
협성신학교 |
평양 대찰리 |
|
이갑성 |
34 |
세브란스 의전 부속병원사무원 |
세브란스 의학전문 |
경성 남대문 |
[이승훈]은 평안북도 정주출신 사업가로서 1907년 7월 평양에서 개최된 안창호의 [교육진흥론]강연을 듣고 민족운동에 투신하게 되었으며,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아 강명의숙(講明義塾)과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1911년 2월 안악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해 가을 다시 105인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형을 받았다. 1915년 출옥하였으며,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수업을 받던중 3.1운동에 참가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와 천도교 교단의 제휴 및 3.1운동을 위한 동지의 규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인물이다.
[김병조]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2월 선천으로 가던 길에 이승훈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3.1운동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3월 1일 당일에는 선천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위를 주동하였다. 이후 상해로 탈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22년에는 임정 산하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1928년에는 만주지역 목릉에서 신일소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명룡]은 1902년 정주군 상업회의(商業會義)회장으로 있으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루었다.1913년 2월에 흥덕교회에서 장로로 추대되었으며, 1919년 2월 12일 양전백의 집에서 이승훈,유여대,김병조등을 만나 3.1운동의 취지를 듣고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보면 장로교 교단측에서 민족대표로 선출된 인물은 이명룡을 제외하면, 길선주,양전백,유여대,이승훙,김병조가 모두 평양신학교 출신이다. 따라서 이들은 주로 평안도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장로료 교단의 교세가 평양신학교와 숭실학교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던 사회적 여건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들은 김병조를 제외하고 모두 ‘105인 사건’을 통하여 통지적으로 결합한 형태에서 민족대표로 선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장로교 교단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무단적 탄압이 기독교인들에게 적극적인 항일투쟁에 나서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뿐만아니라 장로교 교단측의 민족대표들은 3.1운동을 이전, 주로 교육활동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길선주는 숭실학교의 설립에 관여하였으며, 유여대는 양실학교를, 이승훈은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양전백은 신성중학교,보성여학교를, 김병조는 3.1운동 이후 임정 산하의 인성학교 교사와 만주지역 목릉에서의 신일소학교 설립등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장로교 교단측의 민족대표들이 교육문제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높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한편 감리교측 민족대표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들의 활동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신홍식]은 34세 되던 해에 기독교에 입교한 뒤 1913년에 협성신학교를 마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공주와 평양에서 목회활동을 하였으며, 1919년 2월 이승훈에게 3.1운동 계획을 듣고 참여하였다. [박희도] 1904년 기독교인이 된 뒤 평양숭실학교와,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한 뒤 중앙유치원교 영신학교설립하고 교감이 되었다. 1918년 6월 감리교 창의문 밖 교회 전도사가 되었으며, 9월에 YMCA의 간사가 되었다. 송계백을 통해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에 대해 알게 된후 학생 중심의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김창준] 평양의 숭실중학과 전문학교를 졸업한뒤 일본으로 유학하였으며, 북감리교의 전도사로서 평양을 중심으로 목회활동을 하였다. 그는 1919년 2월 28일 함태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 900매를 받아 이중 600매를 이갑성에게 주고 나머지는 이계창에게 주어 평북 선천으로 운반하였다.
[이필주] 구한국군대 장교로 근무하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상동교회에서 전덕기목사를 중심으로 한 상동천년회에 가입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YMCA의 초대 체육교사와 상동공옥소학교 체육교사로 재직하면서 청소년들의 민족의식 배양과 미신타파,신분차별 배격 등 신생활운동에도 진력하였다. 이상재.최병헌.신홍식,박동완,현 순,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이들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여 감리교측 대표로 서명하였다.
[오하영] 1906년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서울의 감리교신학전문학교를 졸업하다. 1914년 목사로 취임하였고, 광성소학교 부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3.1운동에서 개성지역의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박동완] 한성외국어학교와 배재학당에서 수학한 후 감리교의 전도사 및 기독신보사 서기로 활동하였다. 박희도,이갑성,함태영,오화영 등과 연결되어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신석구] 충북 청원 출신으로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된 후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다. 1919년 2월 27일 오화영으로부터 3.1운동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듣고 이필주목사의 집에서 오화영,이승훈,박희도,이갑성,최성모,이필주,함태영,김창준,박동완 등 10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밖에 정춘수,최성모 역시 감리교의 목사로 활동하던 중에 3.1운동에 참석하였고, 이갑성은 청년,학생들의 3.1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보면 감리교계의 민족대표의 경우는 박희도와 오화영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으로 교육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이며, 3.1운동 이전에 독립운동과 관련된 행적으로는 장로교계의 만족대표들에 비해 보다 분명한 행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체로 기독교계 민족대표들의 경우는 다른 교단의 민족대표들에 비해 신학교를 중심으로 다양하고 체계적인 근대교육을 받은 인물들이었으며, 그들의 이런한 경험과 지식은 3.1운동의 전개과장에서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4.기독교계 3.1운동에 대한 총독부의 대응
3.1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활방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기독교계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응은 운동의 전개양상이 진정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결과 3.1운동과 관련되어 체포된 종교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3,373명으로 2,283명의 천도교인과, 220명의 불교인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숫자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총독부는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선 일제는 3.1운동의 조속한 진정을 위해 선교사들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총독부에서는 1919년 3월 9일 내무국장 우좌미승부(宇佐美勝夫)의 초청형식으로 선교사들과 3월 24일까지의 3차례의 회담에서 일제는 선교사들이 3.1운동의 진압에 있어서 일정한 역할을 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일제의 의도와는 달리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엄정중립’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확인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일제의 폭정(暴政)을 비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선교사들은 3.1운동 과정 중에 있었던 세브란스 병원에 대한 수색(1919.3.17)과 두 명의 호주 여선교사에 대한 감금 구타 사건 및 3.1운동에 우호적이었던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그리어손과 로스[A.R. Ross]에 대한 구속사건등 일련의 불법적인 사태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총독부가 선교사들을 설득하기 위한 희동이 오히려 총독부와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총독부의 입장에서 보면 3.1운동 기간 중 선교사들관의 관계는 기본적으로는 불편한 상황이었지만, 3.1운동에 대한 효과적인 진압을 위해 선교사들의 협조가 필요했던 상황이었으며, 이는 총독부에서 선교사들의 행동에 대해 일정하게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일제를 위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것을 요구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편 선교사들에 대한 총독부의 기대가 무산되자 일제는 3월말 이후 선교사들에 대해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는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보도태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매일신보]에서는 1919년 4월 15일부터 4월 20까지 연재된 ‘조선의 기독교’라는 기고문 형식의 기사를 통해 조선 기독교의 사회 현상과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분석하면서 이번 폭동으로 인하여 10년 간의 ‘진보와 개량이 절반 이상 파괴된 것은 실로 ’유감만만(遺憾萬萬)‘이며, 제일 책임자는 폭동에 참가한 조선인 이지만, 간접 책임자라 하여도 미국인 선교사의 언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뿐만아니라 일제는 4월 12일에 이르러서는 일본조합교회 조선전도본부 평의원들을 조선호텔로 불러 건전한 사상을 확입하고 청년 학생들이 본분을 지켜 학사에 전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대시국특별운동(對時局特別運動)’을 전개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런데 조합교회의 이런한 움직임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민중들 사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이를 막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가 반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총독부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선교사들이 3.1운동에서 배후 역할을 한 혐의는 없다고 선언하면서도 양측의 긴장 관계는 지속되고 있었으며, 선교사들과 총독부와의 이러한 관계는 총독부의 선교사들에 대한 탄압과 구속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평양지방 법원 검사국에서는 모리(,Mowry)의 마포삼열의 집을 급습하여 평양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숭실대학생 김태술외 10명의 학생들을 체포하였으며, 등사판과 각종 문서를 증거물로 압수하고 모의리를 범인은닉죄로 체포하였는데 4월4일에 발생한 이 사건 이후 배위량,기리스,맥마트 등 선교사 7명의 집이 함께 수색 당하였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하자 ‘재평양기자단(在平壤記者團)’에서는 미국선교사들이 사건에 개입되었다는 것은 통한할 일이며,미국 선교사들은 기자회견을 통하여 오해를 영해하고 배거할것을 요청하는 통첩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일제는 3.1운동이 발발하자 파리강화회의에서 열강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했다는 것은 전혀 무한유설(無恨流說)이요 소부족취(素不足取)이며, 비위(非違)를 엄위하는 자는 일보라도 가차없이 엄중히 처분할 것임을 밝히는 총독의 유고를 발표하였으며, 4월에 15일에는 시위관련자를 처벌하기 위해 제령7호를 제정하는 등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시위가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강력한 의지를 나타냈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일제는 3.1운동이 발발하고 기독교세력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에 대한 대응책의 일환으로 선교사와 기독교도들을 분리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위를 주도했던 기독교 청년이나 후원세력으로 인식되는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계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켜 갔던 것이다. 그런데 총독부가 이와 같이 기독교 세력에 대해 지속적인 탄압공세를 가하고 있었던 것은 3·1운동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의 저항이 강하였다는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맺음말
지금까지 본고에서는 3.1독립운동에서 기독교계 민족대표자들의 역할과 위상,인적구성상의 특성,조선총독부의 기독교계의 대응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그 중요한 사항을 정리해 봄으로서 3.1운동에서 차지하는 기독교계 대표의 역사적 위상에 대해 접근해 보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의 항일 민족운동은 1910년대를 통하여 일관되게 추진되었으며 민족대표로 활약했던 16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항일 독립운동과 교육운동, 사회개혁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과 지도자로서 덕목을 갖추고 있었다.
둘째, 민족대표의 선정과정에 있어서 보면 천도교는 교단 내의 수직적인 조직체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기독교의 경우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교단적 구분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비교적 수평적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활동지역에 있어서도 장로교의 경우는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감리교는 지역적으로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학 수 있다고 하겠다.
셋째, 3.1운동을 전후하여 나타나고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동향은 이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3.1운동이 전개될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확산시켜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독교계 민족대표들은 운동의 통일을 위한 천도교의 제안을 민족적 차원에서 수용하는 한편,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학생측의 활동계획을 내부적으로 흡수함으로써 3.1운동이 거족적인 항일운동이 되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런데 천도교와 제휴가 논의되는 과정에서도 기독교측에서 보여주었던 지방조직의 강화를 위한 노력은 이후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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