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6.金. 맑다 흐림
남도순례南道巡禮, 밥이야, 간식이야?
피자가 주식主食인가 간식間食인가 하는 문제는 그저 피자 종류에서 한하지 않고 햄버거, 핫도그, 샌드위치, 찐빵, 만두, 고구마 맛탕, 빈대떡, 파전, 떡볶이, 순대까지 두루두루 걸려있는 다소간 신경이 쓰이는 문제이다. 그러는 가운데 라면과 짜장면과 수제비와 잔치국수는 어느 틈엔가 주식의 반열에 슬그머니 올라서버렸다. 그렇다면 떡은?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고증考證이 필요하다. 조선 후기 이 땅에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 그들이 내건 슬로건 중의 하나가 ‘사람은 떡만으로는 살 수 없다’ 였다고 한다. 이 문장은 마태복음 4장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며 ‘사람이 떡만으로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니라 하였나니라.’에서 인용한 말인데, Man does not live on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중 bread를 빵으로 번역하지 않고 한국 사람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떡으로 번역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을 들었던 한국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그럼 사람이 떡만 먹고 어떻게 살아, 밥을 먹어야지!” 이 말로 기준을 삼아본다면 떡은 주식이 아니라 애호식 내지는 간식이었다는 증거가 된다. 피자가 주식인지 간식인지는 남도사찰순례단南道寺刹巡禮團의 다섯 번째 식사인 일요일 저녁을 정하는데도 꽤 중대한 논의거리가 되었다. 봉명암을 나와 차량들이 주차된 주택가 길 가장자리에서 둥글게 선 채로 짧고 굵은 대화가 오고갔다. 먹을거리는 임실치즈피자로, 목적지는 도로사정을 감안하여 남원으로 정해지자 각자 해당차로 신속하게 올라가 좌석에 앉아 안전띠를 메고 차에 시동을 걸어 출발하였다.
오후5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늘 사랑과 존경을 보내는 도반님들과 남도성지순례를 원만하게 잘 마쳤으니 이제 저녁식사를 함께 모여서 한 후에 각자의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상행上行 길이지만 아직 남도의 국도라서 그러한지 도로는 전혀 막히지 않았고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남원의 한 피자가게에 도착을 했다. 그곳에 도착해서 알게 된 일이지만 임실치즈피자라는 상호를 가진 피자집체인점 계열사들이 우후죽순격雨後竹筍格으로 난립해있는 모양이었다. 그중 1960년대부터 임실치즈를 개발한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님으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은 임실농협에서 주관하는 임실치즈피지가 종가를 자칭하는 모양인데 다른 곳에서도 나름대로 명분을 갖고 서로 원조자격과 피자 맛을 겨루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1970년대 후반 ‘빨간 피터의 고백’ 이라는 모노드라마 형식의 연극으로 잘 알려진 작고한 연극인 추송웅 씨가 예전에 어느 잡지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피자에 관한 이야기가 잠깐 언급되었던 기억이 있다. ’70년대 초경 추송웅 씨가 명동 부근에서 어떤 가게를 운영하다가 임대료의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가게를 비우게 되자 마침 그 가게로 들어오게 된 새로운 업종이 피자가게였던 모양이었다. ‘내가 폐업을 하고 밀려나온 가게로 피잔지 뭔지 이상하게 생긴 서양음식을 파는 가게가 들어온다고 하는데 마음이 착잡했었다.’ 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아마 그때만 해도 한국에 들어온 피자집 1세대들이 고개를 여기저기로 기웃거리던 시기였을 테니 피자라는 음식이 당연히 생소했을 것이다. 나도 언제 처음으로 피자를 먹어보았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88올림픽이 지난 뒤로 피자라는 음식이 세간에 알려지고 나서 ’90년대 중반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을 한다. 우리 동네에도 ‘90년대 중반에 피자헛 가게가 하나있었으니까.
피자가 나왔다. 역시 피자는 주방에서 바로 만들어져 나왔을 적에 한 조각씩 떼어내면 김이 폴폴 나면서 치즈가 실처럼 축축 늘어지는 순간이 가장 맛이 있어 보였다. 한 판이 정확하게 8쪽으로 나누어지니 우리 탁자에 앉은 일행들 한 사람이 한 쪽씩 들고 먹으면 딱 맞았다. 두 판째도 같은 방식으로 먹어버렸다. 먹을 욕심 많은 선심행보살님이 한 판을 더 시켜먹자고 했다. 나도 속으로는 은근히 박수를 쳤다. 혹시 보살님이 나를 위해서 대신 총대를 메어준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보살님 얼굴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주중에 집에서는 식사관리를 비교적 철저하게 잘하다가도 밖에만 나오면 그만 엄정한 자세가 흐트러져버리는 것은 나나 아내나 똑같다. 그 사이에 주문한 스파게티가 나와 돌아가면서 한 입씩 먹었다. 세 번째 피자가 나왔을 때는 더 드시는 분이 많지 않아 내가 여러 쪽을 더 먹었다. 이럴 때면 피자 간식론間食論이 맞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물과 탕에 익숙한 입맛이라 그러한지 피자 조각에 콜라를 꽤 많이 먹고 마셔도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 별로 없어서 역시 밥하고는 뭔가 다르기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밥은 꼭 일정한 자리에 앉아서 먹어야하는 기본예법이 있는 식사지만 피자는 앉아서 먹든 서거나 돌아다니면서 먹든 그리 불편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은 간편하고 활동적인 식사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나라 음식에도 피자와 유사한 음식이 있기는 있다. 입맛 도는 녹두빈대떡도 있고 군침 넘어가는 둥근 파전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빈대떡이나 파전도 서거나 돌아다니면서 손에 들고 먹는 음식은 아니다. 반드시 젓가락을 사용해가며 앉아서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발달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원의 어느 피자집에서 다섯 번째 식사까지 모두 끝났다.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는 도중에 천안 논산고속도로의 이인휴게소에서 한 번 더 만나 차를 한 잔씩 하고 헤어지자고 했으니 한 번쯤은 얼굴들을 더 보게 되겠지만 이로써 일박이일一泊二日 동안의 남도사찰순례南道寺刹巡禮는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매 순간순간이 즐겁고 행복하고 환희심 가득한 남도순례였습니다. 다생의 어떤 선연善緣으로 훌륭한 스님과 진실한 도반님들을 이생에 만나게 되어 이렇게 눈 밝음과 바른 정견正見 속에 충만한 부처님의 가피력을 느끼고 명산대찰들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마음껏 기도祈禱와 발원發願을 하게 되었는지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가는 곳마다 환대를 해주셨던 현지의 스님들, 화엄사 대산스님, 용화사 관오스님, 쌍계사 육조 혜능스님, 연곡사 원묵스님, 사성암 원효스님, 봉명암 혜월스님, 그리고 일정을 함께 해주시며 맑은 품성과 깊은 정진력을 보여주신 선일스님과 우리 일행들을 참되게 이끌어주시고 찰라찰라 마다 혜안으로 마음을 함께 모두어 주신 우리 주지스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선심행보살님, 길상화보살님, 묘광명보살님, 무진행보살님, 평택보살님, 백화보살님, 팔모보살님, 유갑용거사님, 진흙속의 연꽃님, 수월거사님, 태평거사님, 진월거사님, 태진이, 그리고 이번 일정에는 불가피하게 동참하지 못했지만 마음은 항상 함께 하신 묘길수보살님, 자비심보살님, 대전보살님, 여래자보살님, 공양주보살님, 법련화보살님, 봉선사 공양주보살님, 정덕거사님, 김병진거사님과 보살님, 정보성거사님, 절에 남아 도량을 지키면서 정진하신 길상스님께 깊은 존경과 사랑을 보냅니다. 저에게는 부처님 나라 인도성지순례를 한 달여 간 다녀온 것에 버금갈만한 뜻깊은 일박이일一泊二日이었습니다. 까빠뚜나!
(- 남도순례南道巡禮, 밥이야, 간식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