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53)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남강 수계) ④ 함안 (2)
2020년 11월 06일 (월요일) [독보(獨步)]▶ 백파 출행
* [합천-창녕보]→ 황강 하구→ 적포교 앞(20번 국도→ 우포늪)→ 낙서초교→ 진등산 박진고개(낙동강 조망)→ 1008번 지방도로→박진로→ 박진교(낙동강)→ 창녕 박진전투기념관(남지읍 월하리)→ 다시 박진교→ 영아지길→ 청아지→ 마분산 영아지 고개(팔각정 전망대)→ 신전리(우향)→ [남지읍 용산리 낙동강 대안(對岸)에서 남강 합류]→ 학계리→ [남지체육공원]→ 남지 인도교
*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 서남쪽에서 ‘남강’ 합류(남덕유산, 뱀사골 발원 / 경호강-진양호 경유)
****************************************
함 안(咸安) · 2
남강과 낙동강 그리고 낙남정맥으로 둘러 싸인 지역
천 년 고도 함안(咸安)은 남쪽의 낙남정맥(洛南正脈)과 서쪽의 남강(南江), 북쪽의 낙동강(洛東江)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그래서 함안군을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을 이룬다고 한 것이다. 행정구역으로는 낙남정맥으을 경계로 남동쪽은 마산-창원시이고 서남쪽은 방어산을 경계로 진주시 지수면과 접해 있고 서북쪽은 남강을 경계로 의령군이 있다. 북쪽은, 남지에서 밀양까지 동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경계로 창녕시 남지읍-도천면-갈곡면-부곡면을 마주하고 있다.
함안과 의령, 하나의 남강 문화권
무엇보다 남강(南江)은 함안군과 의령군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면서 북동쪽으로 흐른다. 일찍이 남강 유역은 비옥한 평야와 천혜의 산세를 바탕으로 고대문화가 발흥하고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가야대국을 이룬 지역이다. 그리고 이번 낙동강 대장정을 통하여 남강의 생명력과 찬란한 문화를 온몸으로 체감했다.
특히 지난 11월 3일 황강을 중심으로 한 합천-거창을 탐방하면서, 이어서 의령까지 내려와 의령군 유곡면의 의병장 곽재우 장군 생가와 정곡면의 삼성 이병철 회장 생가를 탐방하고 나서, 남강의 정암나루까지 나아간 바 있다. 거기 정암정에 올라 유장하게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회상에 젖기고 헸다. 의령과 함안을 잇는 정암나루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일으키고 최초로 왜적을 맞아 통쾌하게 물리친 정암나루전투의 현장이었고, 전설적인 남강의 솥바위를 중심으로 인근의 3부자마을에 대하여 기술한 바 있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 LG의 구인회 회장, 효성의 조홍제 회장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분들이다. 거기 남강의 '솥바위' 정기를 받은 남강의 사람들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주인공이 된 것은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남강은 경상남도 중심부에 있는 함안과 의령을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함안군 군북에서 의령군 의령읍을 잇는 정암대교가 두 지역을 잇은 중요한 교통로이다. 다리가 없었던 옛날에는 나룻배가 두 지역을 잇는 교통수단이었다. 낙동강의 애환과 역사를 담고 있는 남강의 처녀뱃사공의 이야기는 만인의 노래가 되어 하나의 살아 있는 역사가 되었다.
장장 200km의 남강은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와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사이의 하구(河口)에서 낙동강에 유입되는, 참으로 유서 깊은 강이다. 창녕-함안보로 인하여 남강과 낙동강은 소리없이 한 몸이 되어 거대한 호수를 이루는 것이다. — 이제 아직도 남은 함안(咸安)의 사람 사는 이야기를 풀어본다.
함안의 유서 깊은 명소
*******************************
함안 무기연당(咸安舞沂蓮塘)
함안군 칠원읍(漆原邑) 무기리(舞沂里)에는 조선의 전통 정원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고풍스러우면녀서도 아름다운 풍광은 절로 감탄을 자아나게 한다. 옛 선인의 지혜와 정취가 그대로 서려 있다. 무기연당(舞沂蓮塘)은 조선시대 후기 주재성(周宰成)의 생가에 있는 연못이다. 주재성은 조선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亂) 때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함께 난을 진압한 인물이다.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은 영조 4년(1728)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하여 무력으로 영조를 폐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 사건이다. 이인좌가 중심이 되어 일어난 반란이었다. 의병을 일으킨 주재성은 관군과 함께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관군들은 돌아가는 길에 그의 덕을 칭송하여 마을 입구에 '창의사적비(倡義事蹟碑)'를 세우고 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만들었다.
연당(蓮塘, 연못)은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장방형(長方形)과 원(圓))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각형 연못 한가운데 돌로 산을 만들고 연못 둘레에 계단이 되도록 이중으로 쌓은 석축은 다른 연못과 달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친근감을 갖게 한다.
이후 주재성(周宰成)은 연못의 이름을 '국담(菊潭)'이라 하고 그것을 호를 삼았으며, 연못가의 서당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유유자적하였다. ‘국담’은 비교적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연못으로, 정원문화(庭園文化) 연구에 좋은 자료이기도 한 이 곳은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208호로 지정되었다.
무기리(舞沂里) 주씨 고가(周氏故家)
고가의 주인은 주재성(周宰成),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성재(聖哉), 호는 국담(菊潭)이다.
개인 주택임에도 향교나 서원의 내삼문에서나 볼 수 있는 웅장한 대문체가 있어 독특하다. … 연유가 있다.
주씨 고가 솟을대문은 ‘충효쌍정려문’이다. ‘충신(忠臣) 정려’는 국담(菊潭) 주재성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내린 것이요, ‘효자(孝子) 정려’는 국담의 큰아들 주도복(周道復)의 효심이 지극하여 내린 정려(旌閭)인다. 1745년 영조가 그의 공을 기려 내린 것이다. 정문(旌門)은 국담의 충성심에 대한 공훈과 아들 주도복의 효행에 대한 포상으로 철종 10년(1859)에 내려진 것으로 ‘충신 정려’와 ‘효자 정려’가 함께 있다 하여 ‘충효 쌍정려문(忠孝雙旌閭門)’이라 한다.
주도복(周道復)은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흐르게 하여 병세가 위독한 어머니에게 마시게 했다, 이로 인해 어머니는 생명을 80여 일을 더 연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도복은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고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효자 주도복의 서재로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재(感恩齋)라 이름 지었다.
1700년대 건립된 국담 주재성(周宰成) 이래의 종택에는 연못의 서북쪽에는 오래된 정침 한 채가 남아 있으나, 많은 부분을 고쳐서 그 가치를 잃고 말았다. 연못가에는 후대에 서실인 감은재(感恩齋), 영빈사(迎賓舍), 중문, 안채, 사당인 부조묘가 있고, 동쪽에는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하환정(何換亭), 풍욕루(風浴樓)가 있고, 최근에 충효사(忠孝祠)를 지었다. 연못 주위에는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어 영귀문(詠歸門)이라 하였다.
「국담 문집 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2호)는 주재성의 후손들이 1848년 현종 때 주재성이 남긴 글을 모아 국담원집 2권과 부록 2권을 목재에 양면 판각하였다. 책판의 크기는 가로 약 21.5㎝, 세로 약 34.1㎝이다. 모두 56매로 이루어져 있다. 책판의 내용은 국담원집의 시서, 논문 등이고 부록에는 창의사적에 관한 문헌, 가문의 의례 지침인 가거요범, 경학, 시전, 서전, 주역을 해설한 경의집록, 중용의 요지를 풀이한 용학강의 등이 판각되어 있다.
여항산 원효암 칠성각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도한 곳
경남의 정중앙에 위치한 함안군은 낙남정맥의 여러 산들이 동남으로 병풍처럼 둘려있고 남강과 낙동강이 군의 경계를 남북으로 유유히 흐르는 남고북저(南高北低)의 특이한 지형을 하고 있는 곳이다. 때문에 해양세력의 침략은 낙남정맥에서, 대륙세력은 서북의 큰 강에서 차단하여 국토방위의 요새가 되었고 옛 가야국의 왕조가 형성되어 있던 곳이라 주민들은 왕도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함안에는 함안사람들이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며 자랑으로 여기는 명산이 있으니 ‘의상대 절’ 원효암을 품고 있는 여항산이다.
원효암은 함안사람들에게 ‘의상대 절’로 통한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667년 신라시대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수행정진하던 도량으로 창건되었다 하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그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절이 창건되었다고 하는 667년은 의상대사가 중국 당나라에 있었던 시절이라 창건시기에 관해서는 이렇다할 근거를 두지 못한다.
다만 현재까지 원효암이라는 절 이름을 유지하고 있고 경내 절벽위에 의상대라는 전각이 존재하는 사실에서 볼 때 원효 의상스님이 창건한 것이 아니라면 그 정신만이라도 기리길 원했던 우리 조상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는 곳임에는 분명할 듯하다.
함안군 군북면 사촌4길 863 내 위치한 원효암(元曉庵) 칠성각(七星閣)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도한 곳이라 전하나 창건연대와 연혁은 알 수 없고, 절의 이름을 원효암이라 하고 의상대(儀湘臺)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원효암은 6 · 25때 소실되고 의상대는 소실되지 않았으나,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사기(寺記)에 의하면 1370년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83년 7월 20일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낙동강 광심정(廣心亭)
용성 송씨(龍城宋氏) 문중에서 젊은 사람들의 수학을 목적으로 건립한 정자
함안군 칠북면(漆北面) 봉촌리 낙동강 ‘창녕·함안보’ 조금 아래쪽 낙동강변에 위치한 광심정(廣心亭)은 조선 선조 2년(1569) 영산군 길곡리에 칩거하고 있던 용성 송씨(龍城宋氏) 문중에서 젊은 사람들이 수학을 목적으로 건립한 정자(亭子)로서, 조선 현종 5년(1664)에 성리학자인 송지일(宋知逸) 선생이 선비들과 더불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자신의 호를 따라서 ‘廣心亭’(광심정)으로 편액(扁額)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 파손되어 여러 번 고쳐 지었다.
광심정 건물은 앞면 · 옆면 2칸 규모이며 팔작지붕이다. 앞쪽은 마루로 꾸몄고, 뒤쪽에는 방을 두었으며, 1995년 5월 2일 문화재자료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
함안의 인물
*********************
안 축(安軸)
고려 말 문신 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曲)」의 저자
함안 사람 안축(安軸, 1282~1348)은 본관이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이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 사록(全州司錄), 사헌규정(司憲糾正), 단양부주부(丹陽府主簿)를 지내고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 성균학정(成均學正)을 거쳐 충혜왕 때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로 파견되었다. 이때 충군애민의 뜻이 담긴 문집 『관동와주(關東瓦注)』를 남겼다. ― 다음은 안축이 강릉도 존무사의 명을 받고 강릉으로 출발하던 즈음에 지은 시(詩)이다. 『관동와주(關東瓦注)』에 실려있다.
讀書求道竟無成 독서구도경무성 책을 읽어 도를 구했지만 끝내 성취 없으니
自愧明時有此行 자괴명시유차행 태평성대에 이 행차 있게 된 일 부끄러워라
但盡迂疎施實學 단진우소시실학 다만 못난 재주 다하여 실학을 베풀어야지
敢將崖異盜虛名 감장애이도허명 어찌 괴이한 행적으로 헛된 명성을 훔치랴
民生塗炭知難救 민생도탄지난구 도탄에 빠진 백성의 삶은 구제하기 어렵고
國病膏肓念可驚 국병고황염가경 고질병이 된 국가의 병은 놀랍기만 하여라
耿耿枕前眠未穩 경경침전면미은 베갯머리에서 걱정하며 잠 못 이루다가
臥聞山雨注深更 와문산우주심경 깊은 밤 쏟아지는 산비 소리를 누워서 듣노라
1332년(충숙왕 복위 1) 판전교(判典校)·지전법사(知典法事) 재직 시 파면 당했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되었으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판서·감찰대부(監察大夫)에 등용되었으며, 1344년(충목왕 즉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내고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量田) 행정에 참여했다. 함안군 가야읍 ‘신암서원’과 영주 순흥의 ’소수서원‘에 배향되고 있다.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 등과 다시 편찬했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경기체가인 「관동별곡(關東別曲)」,「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었고, 문집에 『근재집(謹齋集)』이 있다. 다음은 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曲)」중 ‘제1장’이다.
海千重 山萬壘 關東別境 바다 겹겹 산 첩첩인 관동의 절경에서
碧油幢 紅蓮幕 兵馬營主 푸른 휘장 붉은 장막에 둘러싸인 병마영주가
玉帶傾盖 黑槍紅旗 鳴沙路 옥대 매고 일산 받고, 검은 창 붉은 깃발 앞세우며 모래사장으로
爲 巡察景 幾何如 아, 순찰하는 그 모습 어떠합니까?
朔方民物 慕義趨風 이 지방의 백성들 의를 기리는 풍속을 쫓네.
爲 王化中興 景幾何如 아, 임금의 교화 중흥하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이 「문집책판」은 사위인 정량생이 근재의 『관동와주(關東瓦注)』를 공민왕 14년(1364)에 청주에서 처음 발간하였고 조선 세종 27년(1445)에는 그의 현손인 안숭선이 유고를 모아 보유편을 붙여 다시 발간하였다. 중간본의 출간이후 50여년의 세월이 지나 그 문집을 접하기 어렵게 되자 함안, 의령 등 인근 각지에 사는 후손들이 융희 3년(1909년)에 복간을 발의하여 그 이듬해인 1910년 함안에서 완간되었다.
책판의 크기는 가로 34cm, 세로 20cm이며 1979년 12월 29일 경남유형문화재 제174호로 지정됐다.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 15번지 취우정에 소장돼 왔으나 지금은 함안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고려 말의 충신 이오(李午)
이오(李午) 선생의 호는 모은(茅隱)이고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뛰어난 기개가 있어서 세속에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일찍이 포은(圃隱) 정 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 李穡) 두 선생의 문하에 공부하면서 의리의 학문에 독실하여 당시의 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공양왕 때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하니 포은 선생께서 벼슬하기를 권고했으나 시기가 적합하지 못하다 하여 사양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여러 현인들과 함께 송도 교외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서 절의를 지킬 것을 결의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함안(咸安)의 모곡에 복지(卜地)를 정하여 은거하였다.
이오(李午)의 은거지, 고려동(高麗洞)
이오(李午) 선생은 자신이 끝까지 고려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복거지(卜居地) 주위에 담을 쌓아 이 담 밖은 새 왕조 조선(朝鮮)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유민 즉 고려동(高麗洞)임을 명시하였다.
후에 태종(太宗)이 여러 번 출사(出仕)할 것을 바랐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너 또한 고려(高麗) 왕조의 유민(遺民)이니 어찌 새 왕조에 벼슬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은 후에라도 절대 새 왕조에서 내려주는 관명은 사용하지 말고 또 나의 신주(神主)도 이곳 고려동(高麗洞) 담 안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사후 묘비(墓碑)에는 글 한자 없는 백비(白碑)를 세웠다. …
고려말 충신 이오(李午)에 대한 특별한 기록
이 글을 집필하는 동안, 초계 변씨(草溪卞氏) 문중에서 2021년 5월 14일 아주 최근에 간행한 『청계세고(淸溪世稿)(보고사)』를 받았다. 고향 친구인 태영 인더스트리 변대수(卞大洙) 사장이 특별히 보내온 것이다. 『청계세고』는 친구 변 사장의 중숙(仲叔. 양자로 종손이 됨) 춘강(春崗) 변종헌(卞鍾憲) 공이 정리한 문집(한문본, 1943년)인데, 그 차자인 한학자 만한(晩翰) 변완수(卞完洙)가 번역한 것이다. 『청계세고』는 저자 변종헌이 변씨 조상들의 기문(記文)과 조상들에 대한 다른 문중 명사들이 쓴 시서(詩書), 기문(記文), 지갈(誌碣) 등 명문을 실어놓은 것이다. 그 필자로는 매죽헌 성삼문, 보한재 신숙주, 사가 서거정, 허백당 홍귀달,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우암 송시열, 초사 기우만, 면암 최익현, 나재 채수 등 당대의 최고의 기라성 같은 명사 거유들이다.
거기에 초계 변씨의 시조(始祖) 문열공(文烈公, 門下侍中)의 8세손 평리공(評理公)에 대한 기록이 있다. 「두문동서원 정절공 봉안문(杜門洞書院 靖節公 奉安文)」이다.
선생의 휘(諱)는 ‘빈’이요 초계인(草溪人)이니, 대호군 ‘경(卿)’의 아들로 벼슬은 문하평리(門下評理, 정2품)다. 고려 국운이 장차 끊기려 함에 선생이 판서 성만용, 박사 정몽주, 제학 홍재, 대사성 이색, 전서 김성목, 전서 조열, 진사 이오, 단구 김후 등과 만나,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며 시세를 개탄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은(殷)나라 삼인 중 비간(比干)은 죽고 미(微)는 떠났고,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으니 그대들은 각자 뜻대로 행하시오.” 함에 모두 그러하리라 했다. 홍재(洪載)는 (합천) 삼가로 가고, 김후(金厚)는 상산으로 가고, 조열(趙恱)은 함안으로 가고 선생은 두문동에 숨었다. (하략) …
여기에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함안 조씨 조열과 함께 이오(李午)도 같이 함안으로 내려와서 함안에 은거하니 그것이 바로 현재 후손들과 유적으로 살아 있는 ‘함안의 고려동(高麗洞)’인 것이다. … 그리고 1796년(정조20)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운구서원(雲衢書院)에 이오(李午)와 함께 홍재(洪載), 조열(趙恱)과 함께 봉안되었다. 모두 함께 낙향한 고려 말 충신들이다.
생육신 조려(趙旅)
함안 조씨 조려(趙旅, 1420년(세종2)에서 1489(성종20)년) 공은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자는 주옹(主翁)이고, 호는 어계(漁溪)라 했다. 함안(咸安) 사람으로 태어나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인품이 출중하여 세상에 두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사람마다 훌륭하게 될 그릇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글공부에 남달리 힘쓰고 그 공부의 요령이 대의를 꿰뚫어보는 데 힘쓰고 헛되게 뜻 모르고 암송하는 버릇을 따르지 않았으며, 글을 쓸 때 미사여구를 따서 짓는 모방적인 습성을 배격하였다.
1453년(단종1)에 성균관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가 당시 학계의 유종(儒宗)으로 이름 높은 형조판서 김종직(金宗直)의 시험관 밑에 응시하여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그 불의(不義)에 항거하여, 어느 날 문생(文生)과 작별하고 함안(咸安)에 돌아온 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두문불출하고 말았다. 그의 시문(詩文)에도 김시습의 시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사리를 뜯어 먹으면서 은둔생활을 하겠다’는 의미의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세조(世祖)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그를 강원도 영월의 쳥령포 오지에 안치해 놓고 교통을 두절시켜버렸다. 그리고 1455(단종3)에 왕위 선양(禪讓, 실제로는 ‘奪取’)이 있은 후로는, 조려는 스스로 ‘어계처사(漁溪處士)’라 하고 산수 간에 묻혀 살았다. 그는 백이산(伯夷山)과 약간 떨어져 있는 정암산(鼎岩山) 부근에 거처하면서 독서와 낚시로 여생을 보냈다.
1699년(숙종25)에 단종의 왕위가 복위되자, 조려(趙旅)에게 이조참판을 추증하고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사당을 건립하여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배향되었다. 이 사당을 ‘서산학원(西山學院)’이라 사호(賜號)하였다. 이조 정조 5년(1781)에 이르러 정조는 그의 충절(忠節)에 감격하여 그에게 ‘이조판서’란 벼슬과 정절공(靖節公)이란 시호를 내려 그의 충혼(忠魂)과 의백(義魄)을 위로하였다.
백세청풍(百歲淸風) ― 함안(咸安) 어계고택(漁溪古宅)
어계고택(漁溪古宅)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郡北面) 원북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가옥이다. 조선 세종과 성종 때 활약한 문신이며 단종 폐위 시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은자(漁溪隱者) 조려(趙旅, 1420∼1489)의 생가(生家)로서 지금은 후손들이 재실(齋室)로 사용하고 있다. 1976년 12월 20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었으며, 함안 조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주 건물인 원북재(院北齋)는 단층 목조기와집으로 팔작지붕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나 단순한 형태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일자형 평면에 부엌이 없이 중앙 2칸에 대청을 두고, 양쪽에 툇마루가 있는 방을 1칸씩 두었다.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고 주두(柱頭) 위에 장식이 없는 민도리집이며 3량 구조이다. 개와(蓋瓦)에는 ‘무오9월일(戊午九月日)’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고 주변에는 토담을 둘렀다.
현재는 원북재 외에도 대문채와 사당이 세워져 있는데, 대문채는 3칸으로 가운데에 솟을대문을 두었고 양쪽에는 방을 두었다. 사당은 원북재 뒤에 있으며 툇간이 있는 3칸 일자형 평면구조에 풍판(風板)을 설치한 맞배지붕집이다. 이곳은 조려와 그 부인에게 향례를 올리는 곳으로 유품인 죽장(竹杖)과 하사품인 동(銅) 향로가 보관되어 있다.
서산서원(西山書院)
생육신을 배향하는 서원
서산서원은 숙종 계미년(1703)에 경상도 유학 곽억령(郭億齡)등이, 생육신(生六臣)이신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성담수(成聃壽) 등 여섯 분을 함께 모시는 것은 사육신(死六臣)의 예(禮)에 따라야 마땅함을 국왕께 상소하여 윤허를 받고, 이들을 제향 하기 위하여 창립한 서원이다. 어계 조려의 후손들이 1983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숙종 계사년(1713)에 국가에서는 제물을 내리고 ‘西山書院’(서산서원)의 현판을 내렸으나, 고종(1871) 때 서원쳘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되었다. 그 후 조려 선생의 후손들이 1984년에 사우(祠宇), 강당(講堂), 재료(齋寮), 문(門), 원장(垣墻) 등을 빠짐없이 갖추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산(西山)’이라는 이름은 백이와 숙제의 채미가(採薇歌)의 첫 구절인 ‘저 서산에 오르다(登彼西山)’에서 따온 것이다. … 백이와 숙제는 의롭게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었다.(而伯夷叔齊恥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採薇而食之 遂饑而死)
[백이숙제 이야기 ☞ 사마천 사기열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한 나라를 다스리던 고죽군(孤竹君)이라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고죽군이 나라를 숙제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숙제가 그것이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사양하자 백이 역시도 받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나라를 떠나 문왕(文王)의 명성을 듣고 주(周)나라로 갔으나, 이미 문왕은 죽고 그의 아들인 무왕(武王)이 왕위에 올라 은(殷)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이에 백이와 숙제가 그 정벌의 적절치 못함을 간(諫)했으나 무왕이 듣지 않았다. 그러자 두 사람은 주나라의 녹(祿)을 받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만 뜯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호칭이다. 백이와 숙제는 형 이공(夷公)과 아우 제공(齊公)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그들은 수양산에서 굶주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저 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캤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지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이로부터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뜯어 먹는 백이숙제의 모습은 절개(節槪)를 지키는 인물의 상징이 되었고 서산 서원과 그 맞은편에 있는 채미정에서 흐르는 분위기는 이러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이다.
조려의 채미정(採薇亭), 문풍루(聞風樓)
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사람인 어계(漁溪) 조려(趙旅)가 세조의 왕위찬탈에 격분하여 조정을 등지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낸 정자(亭子)라고 전하며, 채미정 현판 오른편에 백세(百世), 외편에 청풍(淸風)이란 현판이 있다.
이 글씨는 어계 조려 선생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선생의 15대 후손인 조삼규(趙三圭,1 890~1950)가, 채미정 처마밑에 걸려있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를 이 고마암(叩馬巖) 벽에 새기면서 『서산(西山)』이라는 시(詩)를 지어 함께 새겼다 한다.
서산(西山)
漁祖登臨日(어조등림일) 어계선생 이곳에 오를땐
溪山淸復淸(계산청부청) 계산은 푸르고 또 푸르네
後生誰不仰(후생수불앙) 뒷 사람 누군들 우러러 보지 않으리
百世樹風聲(백세수풍성) 영원토록 부는 맑은 바람소리를
― 후손 조삼규 고(後孫 趙三圭 稿) 청암(淸巖)
서산(西山)이라는 명칭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 고죽국의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죽기전에 채미가를 지으면서 그 첫 구절에 "저 서산에 올라 산중의 고사리나 캐지" 에서 절개를 지킨 수양산을 말하는 것으로, 곧 절개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어세겸(魚世謙)
탁월한 문장력과 담력으로 외교에 성공한 문정공
어세겸(魚世謙, 1430~1500), 공의 자는 자익(子益), 호는 서천(西川),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선 전기의 대유(大儒)였던 문효공(文孝公) 어효첨((魚孝瞻))의 장남이다.
1430년 함안군 산인면 내인리에서 태어났으며 1456년 동생 어세공(魚世恭)과 함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459년 이문학관(吏文學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에 문명이 드러나 1467년에 우승지에 이르렀다. 1469년 강순·남이의 역모를 주살한 공으로 공신(功臣)에 책봉되고 함종군(咸從君)에 봉해졌다.
1479년 명나라가 여진족을 토벌하면서 원군을 요청하여 처음 윤필상이 출정하여 승첩을 거두었으나 그 다음에 출병한 어유소는 만포진에서 강물이 얼기를 기다렸으나 군량이 다하여 돌아오고 말았다. 이에 곤란한 지경에 처한 조정에서 공을 명나라에 파견하였으며 요동에 이르러 비범한 지혜로 담판했다. 또 명(明)의 조정에서도 당당하게 우리의 주장을 개진하여 명의 성조가 마장표피(馬裝豹皮)를 하사하는 등 큰 외교적 성과를 거뒀으며 귀국할 때 『오륜서(五倫書)』, 『국자감통지(國子監通志)』 등 귀중한 책을 들여왔다.
이후 호조·형조·공조·병조 4조의 판서와 춘추관사(春秋館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등을 역임했으며 1495년 우의정, 이듬해에 좌의정에 올랐으나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벼슬을 떠났다가 1500년에 돌아가셨다.
공은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학식이 뛰어났으며 형조판서로 있을 때는 출퇴근 시간에 구애되지 않아서 ‘오고당상(午鼓堂上)’이라 불리었으나 일 처리가 능률적이어서 업무가 지체되지 않았다고 한다. 무궁화(無窮花)를 즐겨 시제(詩題)로 사용했으며 700여수의 명구가 현재까지 전한다. 1483년 서거정 등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한글로 번역했으며 1490년에는 임원준과 함께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북전(北殿)」등 악사(樂詞)를 개찬(改撰)했고 1492년 유자광 등과 「진법(陣法)」을 편찬했다.
이인형(李仁亨)
충간(忠諫)으로 일생을 바친 절조
이인형(李仁亨, 1436~1497) 선생은 조선조 오백년 동안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연산조 때 충간(忠諫)으로 일생을 마친 분이다. 호는 매헌(梅軒)이고 본관이 함안(咸安)이다.
이인형은 대사성(大司成) 이미(李美)의 큰아들로 1436년(세종18)에 함안(咸安)에서 태어나 11세 되던 해에 진양군 진성면 월아산 가좌촌으로 이주하고 부친이 지방의 자제교육을 위해 지은 육영제(育英齊)에서 수학하였는데 어릴 적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의로운 일에 앞장서고 인자한 성품을 지녔다. 그는 20세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33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내직으로 교리(校理) 응교(應敎)를 거쳐 대사간, 대사헌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연산군 5년에는 정조사(正朝使)로 중국 명나라에 가서 외교 활동도 하였다.
연산군 원년 12월 3일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는데, 영남의 사림 출신으로서, 당시 진보적 사고를 갖고 보수적인 중앙 기성 벌열세력(閥閱勢力)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 결과 정치적 알력이 생겨 대옥사(大獄事)가 일어났고, 또 연산군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방자하고 황음(荒淫)을 일삼아 문신의 직간(直諫)을 기피하려 하는데도 이인형은 그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충간했다.
그는 연산군의 실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21회에 걸쳐 직간하였다. 공(公)의 관직 생활은 항상 보국제민(輔國濟民)의 충정(衷情)으로 내직에 있어서는 충간(忠諫)을, 외직에 있어서는 해이된 사회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의 고통을 덜게 하는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러나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을 충간으로는 불가함을 직시하고 연산군 9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향년 68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니, 무오사화(戊午士禍)때 죄 없이 죽어가는 선비들을 구하고자 수많은 직간 상소를 올린 주창자라 하여 삭탈관직(削奪官職)에 부관참시(剖棺斬屍)의 극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중종반정(中宗反正)이후 신원복관(伸寃復官)되어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주세붕(周世鵬), 우리나라 서원의 창시자
주세붕은 1495년(연산군1)에서 1554년(명종9)의 사람으로 자(字)는 경유(景游), 호(號)는 신재(愼齋), 남고(南皐), 무릉도인(武陵道人)이고,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용양위 부사과(副司果)로서 이조참판에 증직된 주문보의 아들로 태어났다.
주세붕(周世鵬, 1495~1554년)은 6세에 소학(小學)에 능통했고 10세에 사서(四書)를 모두 읽었으며, 말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총명하였다. 1522년(중종17)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해 겨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었고, 1524년에 정자(正字)가 되었다가 사가(賜暇)를 받아 호당(湖堂, 일명 독서당)에 들어 공부하고 예문관 검열(檢閱)에 피선 되었으며 ,홍문관 정자에 옮겨져 「수성잠(守成箴)」을 지어 올렸고 이내 저작으로 옮겨졌다. 1527년에 박사(博士)로서 부수찬(副修撰)에 올랐다. 풍기군수로 있을 때 조선 최초로 영주 순흥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백운동서원이 후에 소수서원이 되었다
겨울에 큰 우레 소리가 있음에 옛 일을 상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시전(詩傳)의 시월편을 써 올렸는데 그 때에 김안로(金安老)가 모사(謀事)하며 배척하여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에 좌천되기도 했다.
무산사(武山祠)
주세붕 선생의 영정과 유품을 모신 사당
함안군 칠서면(漆西面) 무릉리 544번지 내 위치한 무산사(武山祠)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유학자인 주세붕(周世鵬, 1495~1544) 선생의 영정과 유품을 모신 곳이다. 선생은 중종 38년(1543)에 백운동 서원을 세워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으며, 함안의 무산사는 이를 기리기 위하여 숙종 24년(1698)에 선생의 후손이 세웠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유림들이 다시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불탔다. 현재의 무산서당은 그 후에 세운 것이다. 무산사(武山祠) 내에 있는 무산서당은 앞면 5칸 · 옆면 2칸의 1층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중앙 2칸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 옆에 각각 2칸과 1칸의 방을 꾸며 전형적인 서당의 공간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광풍각(光風閣)’에는 주세붕 선생의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고, 장판각(藏板閣)에는『무릉잡고(武陵雜稿)』, 『수구집(守口集)』, 『귀봉집(龜峰集)』책판 352매가 보관되어 있으며, 1976년 4월 15일 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박진영(朴震英), 우국충절의 용장
박진영(朴震英, 1569~1641)은 자가 실재(實載) 호는 광서(匡西) 본관은 밀양이다. 아버지 박오(朴旿)는 호가 동천(桐川)인에, 뒤에 형조판서에 증직되며 여양서원에 배향되었다. 어머니 재령 이씨는 부제학을 지냈던 이중현의 증손이요 현감을 지냈던 이경성의 딸이다.
박진영은 선조 2년(1569) 11월 19일에 함안군 검암촌에서 출생하여 태어나면서부터 기개와 행동이 범인과 달랐다.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의 학문과 덕행이 두드러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훈을 세우니 그로 인해 군자감 참봉에 임명되었고 뒤에 권율 장군 휘하의 장군으로 있으면서 활약하다가 선조 27년(1594) 부친상을 당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루고 나서 다시 원수부에 나아가 적을 맞아 싸웠다.
왜란이 끝나고 공신을 책봉할 적에 공은 2등공신에 봉해지고 선조 32년(1599)에는 용궁현감에 임명되었다. 선조 34년(1601)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선조 38년(1605) 왕명으로 경원판관(慶源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동안에 선생은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낙강에서 뱃놀이하며 시문을 짓고 학문을 정진했다. 이 모임에는 30여명의 명현이 모여 「기락편방(祈洛編芳)」이라는 사적이 간행되었다.
선조 41년(1608)에 의주통판(義州通判)이 되었다가 광해군 6년(1614) 경흥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9년(1617) 왕이 폐모(廢母)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조정의 압력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폐모반대를 하던 백사 이 항복이 북청의 적소에서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의 눈을 개의치 않고 미포(米布)와 장구(葬具)를 갖추고 가서 장례를 치뤘다.
광해군 11년(1619)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순천군수겸 관우수어사가 되어서는 향교를 중수하여 유생들을 강학하게 하고 상벌을 엄하게 하는 등 사습을 바르게 하는 치적을 쌓았다. 연산군 12년(1620)에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고 다시 순천군수에 유임시켰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이 반정공신책봉에 불만을 품고 영변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공(公)은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진영으로 달려가 우협대장(右脇大將)이 되어 두 아들과 함께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자 두 아들과 함께 일등공신에 책봉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황해도 방어사가 된다. 공은 논공이 못마땅하였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임지에 부임하여 1년을 지내다가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인조 4년(1626) 판서 김시양이 이괄의 난을 진압할 때 선생의 공훈을 왕에게 아뢰니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제수했으나 일시 조정에 나아갔다가 병을 칭하여 향리에 돌아오고 말았다.
인조 14년(1636) 12월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 국토를 유린하고,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公)은 70고령에도 불구하고 관찰사 심연에게 달려가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킬 것을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단신으로 남한산성을 향하여 달려갔다. 다음해 정월 선생이 조령(鳥嶺)을 넘어섰을 때 왕이 적에게 항복했다는 치욕스러운 소식을 듣고서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임금이 오랑캐 놈에게 항복하고 동방수천리가 금수의 지역이 되었으니 무슨 낯으로 천일을 우러러 보랴"고 목 놓아 울부짖고 기절하였다.
이후 공은 근심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인조 19년(1641) 11월 29일에 별세하시니 향년이 73세였다. 사후, 인조 22년(1644)에 자헌대부 호조판서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증직되었고 동 27년(1649)에는 숭정대부 판돈녕부사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배되었다. 영조 35년(1759) 사림(士林)이 도계서원을 세워 향사하였고 정조 22년(1798) 존주록에 등재되었으며 고종 17년(1880) 삼황대보단에 배향되었다.
박제인(朴齊仁), 은덕군자로 칭송받은
박제인(朴齊仁, 1536~1618)은 본관은 경주, 자는 중사(仲思), 호는 황암(篁巖)이며 박앙(朴?)의 5세손으로 1536년 지금의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에서 태어났다.
20세때 형 제현과 함께 남명선생을 찾아가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남명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수우당 최영경, 각재 하항 등과 도의로써 사귀었다. 특히 임란 의병장 대소헌 조종도와 송암 김면과는 사이가 남달랐다. 한편,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곳의 편액을 '정묵(靜黙)'이라 하고 그 옆 바위 위에 대를 심어 호를 황암(篁 9)이라 하였는데, 고요한 곳에서 대나무의 곧은 절개를 본받으며 학문에 정진하고자 한 것이다.
함안 사람 박제인(朴齊仁)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남명 조식의 문하에 들어가 경의(敬義)의 요체를 공부하면서, 수우당 최영경(崔永慶), 각재 하원(河沅), 임란 의병장인 송암 김면(金沔), 대소헌 조종도(趙宗道) 등과 교유하였다. 저작으로 『황암집(篁巖集)』이 있다. 거처하는 집을 정묵재(靜黙齋)라 하고 바위 위에 대나무를 심고 스스로 호를 황암(篁巖)으로 고치고 학문에 정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 이칭, 이정 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함안군수인 류숭인에게 보내기도 했다.
[도림서원(道林書院) 유허비(遺墟碑)] :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에 있던 서원이다. 1672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구(鄭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했다. 그 뒤 이용(李涌)‧황암 박제인(朴齊仁)‧이정(李瀞)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69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경내에는 유허비만 남아 있다.
남명(南冥)의 사상을 철저히 이어받아 행한 학자로 평가받았으며 함안군수로 부임한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학문의 침중함에 감복하여 ‘은덕유조(隱德有操)’라 칭할 정도였다. 또 조식 선생도 형인 송암(松巖) 박제현(朴齊賢)과 황암의 재주에 감탄하여 “함안의 고사(高士)는 난형난제다.”라고 했다.
이칭, 이정 등과 함께 함주지를 편찬해 지역역사에 발자취를 남겼으며, 이괄의 난을 평정해 진무공신으로 인원군에 봉해진 생질 이휴복을 가르치는 등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선조대왕에게 어필(御筆)과 어화(御畵) 1점을 하사받기도 했다. 1618년 돌아가셨다.
도림서원에서 향사하다가 조선 헌종 때 명관리 평천서원으로 이봉(移奉)했다. 선생이 남긴 『황암집(篁巖集)』은 가로 20cm, 세로 31.5cm로 당초 41매였으나 6.25전쟁으로 39매만 남아있으며 평천서원 유허지에 세워진 추모재(追慕齋)에 보관돼 있다.
산돌 손양원(孫良源)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목자
손양원(孫良源) 목사(1902~1950)는 1902년 6월 3일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에서, 아버지 손종일과 어머니 김은수 사이의 삼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휘는 연준, 호는 산돌이다. 1908년부터 부모를 따라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1914년 칠원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3학년 때인 1916년 동경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궁성요배를 하지 않아 퇴학을 당했다.
손양원 목사는 1917년 10월 3일 맹호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도움으로 1919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동학교에 진학해 만두장사를 하면서 고학했으나 1919년 3월 24일 칠원읍 3·1독립운동을 지휘한 아버지가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받자 1920년 4월 학업을 중단했다.
1921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우유와 신문배달을 하면서 야간중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에서 참된 신앙의 의의를 체득했으며 1923년 귀국 후 1924년 함안군 대산면 옥렬리의 정양순 여사와 결혼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밀양 수산, 울산 방어진과 남창, 부산 감만동과 남부민, 양산 원동교회를 개척했으며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1939년까지 부산, 경남일원의 교회를 순회 전도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였다.
1939년 7월 14일 여수 애양원교회에 한국인 2대 목사로 부임해 한센병자와 음식과 잠자리를 함께 하면서 이들을 치료해 주고 기도를 해 신앙의 아버지로 존경받았다. 이때 평생을 이들과 함께 하기로 하고 이름도 양원으로 바꾸었다.
1940년 9월 25일 신사참배 거부로 여수경찰서에 체포돼 옥살이를 하다 1945년 8월 17일 해방으로 석방됐으며 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총살을 당했다. ― 10월 29일 장례식을 치르면서 유명한「아홉 가지 감사」의 말씀을 남겼으며 아들을 죽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고 그를 양아들로 삼아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을 실천해 20세기 사랑의 사도로 칭송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거부하며 집회를 계속했고 주위의 간청에 어쩔 수 없이 피난 배에 올랐으나 한센병자를 돌보겠다며 혼자 배에서 내렸다.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됐으며 9월 28일 여수 근교에서 총살되어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1949년 안용준 목사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선생의 일대기를 출판했으며 후에 『씨앗은 죽어서』라는 이름으로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1966년 선생의 삶이 영화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1993년 선생과 두 아들의 무덤이 있는 애양원 뒤쪽 바닷가에 순교기념관이 준공돼 지금은 연 4만명 넘게 다녀가고 있다. (애양원 ☞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화가 이우환(李禹煥)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화가 이우환(李禹煥, 1936~ )은 1936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222번지, 평광마을 구식골에서 태어나 군북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면소재지인 덕대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경남중학교에 다니면서 그 당시 문인으로 활동했던 황동초(黃東樵) 선생으로부터 시(詩)·서(書)·화(畵)를 배웠으며 서울사대부고교 재학 중일 때 수필가로 이름난 피천득(皮千得) 선생을 통하여 후일 문학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대 미대에 들어가 동양화를 전공하다가 동양화에 회의를 느껴, 입학 3개월 만인 1956년에 서울대 미대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61년 일본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다. 그 후 45년여, 그는 동양사상으로 현대미술의 한계를 뛰어넘은 세계적 화가(畵家)로 우뚝 서게 된다.
이우환은 대한민국의 미술계 거장으로서의 명성을 넘어 세계적인 작가로 널리 알려졌으며 ‘LEE U FAN’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지 않는 그림’의 철학자로 일본과 유럽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우환은 글로벌 시대 화가로 파리 에콜 드 보잘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1973년부터 동경 다마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선', '점', '바람' 등 미니얼하면서도 사색적인 그의 작품은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 등 작고 작가를 제외하고는 국내 경매 시장에서 상종가를 치는 화가이다. 하지만 선생은 자신의 작품이 경매시장에 오르내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진정 그림에 대한 제대로 된 감상과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봐 주기를 바라는 진정한 그림쟁이 화가 이우환, 그는 어디에서건 '화가는 그림으로 생각하는 지식인'임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그의 고향인 평광 숲에는 고향과 수구초심을 그리며 쓴 그의 작품이 반기고 있다.
고향이 하 보고파 양졸 숲 찾아 왔더니
풀국새 우는 소리 깨닫는 바 또 있구나
부끄러워 꿈 쫓아 다시 먼길 떠나노라-
― 1987년 청명절에 우환이 귀성 시를 애비 인섭이 새기다.
이인섭 공은 이우환의 부친으로 1906년생 1992년 작고했다. 2000년 11월 일본에서 초판이 나온 그의 작품인 『여백의 예술』에는 예술은 시(詩)며 비평(批評)이고 그리고 초월적인 것이기에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하는데 첫 번째는 자기의 내면적인 이미지를 현실화하는 길이며, 두 번째는 자기의 내면적인 생각과 외부 현실을 짜 엮는 길이며, 세 번째는 일상의 현실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길이지만 거기에는 암시도 비약도 없기 때문에 자신은 그것을 예술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은 두 번째의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길이다 거기에는 자신이 만드는 부분을 한정하고 만들지 않은 부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서로 침투하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한 다이내믹한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고, 또한 이 관계 작용에 의해 시적이며, 비평적이며 그리고 초월적인 공간이 열리기를 바란다고 하였으며, 그리고 바로 이것을 여백의 예술이라 부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백의 예술』중에서 -
이우환은 함안 아니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다. 한국 '안과 밖' 양쪽에서 예술적 성가를 공인받고 있는 화가나 조각가로 이우환을 꼽는 데 이견을 달리할 사람이 없을 정도다.
*****************************
함안 조씨(咸安趙氏)
함안 조씨는 경상남도 함안에 본관을 둔 성씨로, 시조인 조정(趙鼎)은 중국 당나라 때 절강(浙江) 사람이다. 당나라의 조정(趙鼎)은 신라 말기에 동생 조부(趙釜)·조당(趙鐺)과 함께 귀화한 뒤, 고려가 통일을 이루는 데 공을 세워 개국벽상일등공신(開國壁上一等功臣)에 녹훈되고 대장군(大將軍) 원윤(元尹)을 지냈다. 조정의 아들 조간(趙幹)은 중랑장(中郞將)을 지냈고, 증손 조시우(趙時雨)와 조영준(趙英俊)은 각각 오위도영장(五衛都領將)과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냈으며, 9세손 조천계(趙天啓)는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를 지내는 등 후손들이 고려 왕조에서 대대로 현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0세손 조려(趙旅)가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한 뒤 벼슬을 버리고 함안(咸安)에 내려가 여생을 보내며 절개를 지킴으로써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조려의 현손 가운데 조종도(趙宗道)는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조임도(趙任道)는 전원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다가 인조반정 후에 공조좌랑을 지냈다. 이밖에 영조 때 시·서·화 삼절(三絶)로 명성이 높았던 조영석(趙榮祏), 조선 후기의 화가로 산수·인물화에 뛰어났던 조정규(趙廷奎) 등을 배출하였다.
* 조씨(趙氏)의 연원(淵源) *
전국시대 조(趙)나라 ―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후예
나라 조씨(趙氏)는 원래 중국 고대의 황제 전욱(顓頊)의 후예로서 주(周)나라의 주 목왕 시절(기원전 976년~922년) ‘조보(造父)’가 적의 토벌에 공을 세워 조(趙) 땅(현재의 산시성 린펀시)을 식읍으로 받은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후 서주(西周) 말기 인물인 ‘조숙대’가 주나라 유왕(幽王) 때 조정의 혼란을 피해 진(晉)나라에 의탁, 그 후손인 무령왕 ‘조옹(趙雍)’이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조(趙)나라 유목왕 조천(趙遷)의 후손들은 탁군 조씨(涿郡趙氏)로 불리었고, 그 후손으로는 송(宋)나라를 세운 조광윤(趙匡胤, 초대 황제, 기원전 927년~ 976년)이다.
조씨(趙氏) 본관별 유래를 살펴보면 대부분 의견이 송나라 황제와 같은 성씨 후손에서 건너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기에 먼 친척이라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조(趙)씨는 모두 같은 집안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각자 연도 등 논란은 있지만 조(趙)씨 뿌리는 송나라 황제라는 설이 대부분의 의견이다.
송(宋)나라는 무역장려책과 더불어 고려(高麗)에 친선정책을 써서 고려사신과 고려상인에 대하여는 극진한 우대를 하여 이들이 통과하는 연로(沿路)에는 고려관(高麗館)을 세워 숙식을 제공하였다. 송나라가 금나라, 몽골에 의해 멸망하여 망명 온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런 조씨(趙氏)가 조선시대 세도가의 반열에 오르고, 명문가로 손꼽히게 된 데는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다른 성씨와 달리 조씨는 본관별로 시조와 유래가 다르다. 따라서 다른 성씨처럼 분적된 본관이 없어 동원, 동근을 주장하지 않고 있다. 다만, 조선 현종 때까지 동성이본도 통혼을 금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같은 성씨끼리 결혼하지 않는 풍습이 있다. 본관은 문헌에 대략 200여 본이 전하나, 몇 본이나 현존하는지는 미상이다.
그 가운데 풍양(豊壤)·평양(平壤)·한양(漢陽)·양주(楊州)·임천(林川)·배천(白川)·함안(咸安)·순창(淳昌)·횡성(橫城)·김제(金堤)·직산(稷山) 등 10여 본이 대본(大本)으로, 이들이 전체 조씨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조(趙)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055,567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7위이다.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趙洪濟) 회장 생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마을에는 ‘효성그룹’ 창업주인 만우(晩愚) 조홍제(趙洪濟) 회장의 생가(生家)가 있다. 함안 조씨 조홍제 회장은, 일찍이 함안에서 터를 잡은 조선시대 생육신 어계(漁溪) 조려(趙旅) 선생의 후손이다. 생가는 조 회장의 5대조가 터를 잡았는데, 1906년에 조홍제 회장이 태어나 자란 집이다. 이 집은 풍수지리적으로 이 마을의 주산(主山)인 백이산에서 시작한 용맥이 은룡(隱龍, 숨어 내려오는 용맥)으로 내려와 혈(穴)을 맺었다고 한다.
조 회장의 생가는 실용적인 공간 배치와 담백함이 돋보이는 소박하면서도 품격 있는 한옥(韓屋)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안채, 사랑채, 광채, 별채, 대문채, 화장실 등이 남아 있는데, 특히 별채는 원래 안채 우측에 있었던 것이 화재로 소실된 후 1985년 현재의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다.
2019년 작년 11월 14일, 효성그룹은 경상남도 함안군과 함께 창업주 ‘만우 조홍제 회장의 생가’ 개방식(開放式)을 가졌다. 조 회장 생가는 2017년부터 복원공사를 진행했다. 함안군은 인근 대기업 창업주 생가와 연계하여 지역 관광 문화상품 개발을 위해 만우 생가 주변 환경 정비와 주차장 조성 등 행정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대지 면적만 총 1,225평이지만 담백하고 실용적 건물배치가 특징인 조선 후기 한옥이다. 이날 개방식 행사에는 효성 조현준 회장과 조현상 총괄사장을 비롯해 함안 향우회, 조근제 군수 등 함안군 관계자와 지역주민들이 참석했다.
(왼쪽부터) 안병준 향우회장, 조현식 한국타이어 부회장, 박용순 함안군 의회 의장, 조현준 효성 회장, 조근제 함안군수, 조필제 대종회 명예회장, 조현상 효성 총괄사장
이날 조현준 회장은 “국가와 민족을 밝히는 ‘동방명성(東方明星)’이 되자는 할아버님의 이상을 실천해 효성(曉星)이 세계를 향해 더욱 뻗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덕대리에 위치한 ‘송덕비공원’으로 이동, 기념식수를 하고, ‘조홍제회장송덕비’와 ‘조홍제회장좌상’ 제막식을 가졌다. 만우 조홍제 회장은 창업주는 중앙고보 시절 6.10만세 사건 주모자의 한사람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일찍이 군북금융조합의 3선 조합장으로서 면내 자작농 육성 및 군북산업조합을 인수·운영하면서 일제 징용대상자를 채용하여 징용을 모면토록 많은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는가 하면, 영남장학회를 설립하여 많은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는 등 후진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재경함안군향우회를 결성하는 등 고향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많은 기여를 했다.
이에 재경함안군향우회에서는 1998년 초 정기총회에서 송덕비를 건립키로 의결하고, 2000년대 초부터 효성 측에 의뢰하여 건립 부지를 물색하는 한편, 2005년 9월부터 두 차례에 걸쳐 향우들이 자진 성금모금운동을 전개하여 기금을 확보하고 2017년 5월 현지에 152평의 토지를 매입함으로써, 「만우 조홍제회장송덕비」 건립을 하게 됐다고 한다.
만우(晩愚) 조홍제(趙洪濟)
조홍제 회장은 56세에 효성(曉星)을 창업했다. 모든 것이 늦었다. 처음 신학문에 접한 것이 17세였고, 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것이 19세, 대학을 졸업한 것은 30세가 되어서였다. 사업의 세계에 입문한 것은 40세가 넘어서였고 독자적인 자기 사업을 시작한 것은 56세에 이르러서였다. 그렇게 첫발을 내디딘 사업, 그것이 효성그룹의 출발점이었다. 그의 아호 ‘만우(晩愚)’는 대기만성(大器晩成)한 그의 이력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조홍제 회장은 기업가(企業家)이면서 ‘선비’였다. 그는 뿌리 깊은 ‘선비의 가문(家門)’에서 자라나 어린 시절 유학(儒學)을 공부했다. 그것이 그의 ‘인간(人間)의 바탕’이 되었다. 그는 기업가였으나 그가 이상으로 삼은 것은 ‘선비’였다. 그러므로 그는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이 있을 때 항상 그것이 의로운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기업은 이윤 추구가 목적이기도 하지만 인격 완성의 수단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아마도 기업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역사상 유일한 기업가일 것이다.
조홍제 회장은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는 우리 사회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鬪爭)’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을 돕는 상생(相生)’의 장(場)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인생은 단 한번뿐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 가장 최선의 것을 담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인생은 달랐다. 그 하나를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 수많은 성원들에게 보탬이 되는 일이 곧 그의 최선(最善)이었다.
조홍제 회장은 1926년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에도 참가해 옥고를 치른 바 있다. 그리고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1962년도에 효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오늘의 ‘효성그룹’과 ‘한국타이어그룹’을 탄생시켰다.
조홍제 회장은,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모든 인류 문명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했다며, “문명은 정박(碇泊)하지 않는다”고 갈파했다. 효성은 이렇게 한 선구적 기업가의 기업가정신에 의해 창업, 발전되었고, 한국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구적 기업가정신이 깃들어 있다.
— “몸에 지닌 작은 기술이 천만금의 재산보다 낫다.”
— “기업인이 왜 기업을 하는가, 이윤 추구는 기업의 숙명적인 속성일 뿐이다. 기업을 통해 성취의 희열을 느끼고 이 성취를 통해 ‘인격 완성’을 기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다.”
조홍제 회장은 척박한 환경에서 한국 경제의 기적을 이뤄낸 주역 중의 한 사람이다. 1962년 ‘효성물산’을 시작으로 1966년 ‘동양나이론’을 설립했으며 1971년 민간 기업으로는 국내 최초 부설 연구소인 ‘효성기술원’을 세워 ‘글로벌 No.1 소재 기업’ 효성(曉星)의 토대를 마련했다. ‘효성기술연구소’는 1978년 11월 정부가 나서 기업들에게 연구소 설립을 권장할 때 벤치마킹 대상이 될 만큼 성공적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효성과 한국타이어라는 두 개의 세계적 기업을 일궈낸 만우 회장은 한국기업의 선진화와 수출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금탑산업훈장 등 국가로부터 여러 차례 서훈을 받았다.
남강(南江) ‘솥바위’와 3부자(富者)
경남 함안(咸安)과 의령(宜靈)의 경계를 이루는 남강(南江)에는 솥 모양의 바위가 솟아 있는데, 이 솥바위[鼎岩] 수면 아래 세 개의 발이 가리키는 주변 20리(약 8km) 이내에서 큰 부자(富者)가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었다. 전설대로 솥바위를 중심으로 북쪽 의령군 정곡면에는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李秉喆) 회장, 남쪽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는 LG그룹 창업주 연암 구인회(具仁會) 회장, 동남쪽으로는 효성그룹 창업주 만우 조홍제趙洪濟) 회장 등의 생가(生家)가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남강의 3부자(富者)가 공통적으로 이 솥바위의 기(氣)를 받았다는 것도 경이롭고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처음 창업한 회사가 모두 별 성(星) 자를 쓰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이병철의 삼성(三星), 구인회의 금성(金星), 조홍제의 효성(曉星)이 그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한양대 사회교육과 박정해 교수는 북두칠성에서 그 근거를 풀이하기도 한다. 북두칠성(北斗七星) 중에 가장 빛나는 별 세 개를 삼길성(三吉星)이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길(吉)’자를 감춘 것이 삼성(三星)이요, 금성(金星)과 효성(曉星)은 모두 어둠 속에서 여명(黎明)을 여는 ‘샛별’ 즉 ‘계명성(啓明星)’을 말하는 것이니 창업하는 회사가 세상의 어둠을 헤치고 눈부신 발전을 꿈꾸는 이상이 담겨 있다고나 할까. 남강 솥바위의 전설처럼 3부자(富者)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레전드(Legend, 전설)'가 된 것이 분명하다.
최근 경상남도의 시군 간 연계협력사업으로 ‘기업가 고향 관광테마마을 조성사업’이 선정되면서 진주시와 함안군, 의령군은 솥바위를 중심으로 기업가의 창업과 도전정신을 관광상품화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진주시는 LG, GS 창업주 생가가 모여 있는 지수면에 다양한 관광테마마을과 관광객이 머물 수 있는 한옥스테이를 조성하고, 의령군은 솥바위와 봉황대 등 명소를 둘러보고 지역 대표 음식을 즐기는 코스를 운영할 예정이다. 함안군 역시 만우 생가를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로 남기고, 일반인들에게도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경남도는 이들 가문(家門)들이 누대에 걸쳐 펼쳐 온 나눔과 베풂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할 방침이다.
낙동강 창녕·함안보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와 창녕군 갈곡면을 잇는 창녕·함안보는 함안의 아라가야라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고 낙동강을 품은 큰 고니의 날개를 모티브로 큰 고니의 비상가 녹생성장의 날개를 형상화한 친환경 다기능보로 디자인되었다. 창녕·함안보 통합관리센터 2층에는 함안의 발자취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홍보전시관이 있다. 2020년 11월 3일 필자는 창녕 남지읍에서 남지대교를 건어 함안군 칠서면 칠서수변생태공원에서 바이크를 타고 이곳 함안보를 경유하여 창녕군 갈곡면 노고지기수변생태공원을 거쳐 부곡면 강변 소우정까지 라이딩을 한 적이 있다. 만추의 아름다운 노정이었다.
남강수계의 유서 깊은 고장 탐방을 마치고
지금까지 낙동강의 최대의 지천 중의 하나인 남강(南江)의 500리(200km) 물길을 따라, 남강이 품은 경상우도의 유서 깊은 고을을 탐방했다. 남강(南江)이 발원하는 지리산 심원계곡과 남덕유산의 청정수가 합류하는 함양(咸陽)을 비롯하여, 장엄한 지리산의 정기(精氣)와 청정한 기운이 내리는 산청(山淸) 그리고 남강 수계의 모든 정기와 인물이 모이는 천년 고도 진주(晉州), 그리고 낙남정맥의 고봉들이 품은 남강 하구의 비옥한 땅을 바탕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함안(咸安)에 이르기까지 실로 백두대간의 모든 기운이 남강으로 하여 지상에 내리는 곳, 거기 치열한 인간의 정신이 구축해온 놀라운 역사를 살펴보았다.
산과 물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처처에는 사람들의 숨결이 역동적으로 살아있었다. 무엇보다 나의 가슴은 뜨겁게 하는 것은 지금도 청사에 빛나는 선조들의 의기(義氣)였다. 숙연히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남강의 무궁한 생명성은 대한민국의 경제를 살린 삼성, LG, 효성 등 세계적인 대기업가들을 배출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남강의 그 푸른 물결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역사이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