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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언(醒言)이란 사람을 깨우치는 말이란 뜻인데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인물평 및 일화,사론(史論),필기(筆記),한문단편 등 다양한 성언들이 수록되어 있다. 아래는 《청성잡기》 3-5권중 3권의 내용이다.
곰이 호랑이에게 먹히는 이유
곰은 힘이 호랑이보다 갑절이나 세지만 호랑이와 마주치면 잡아먹히고 마니,호랑이는 재빠르고 곰은 둔하기 때문이다. 곰이 호랑이를 만나 싸울 때에는 몸을 날려 나무를 꺾는데 썩은 가지를 꺾듯이 쉽게 한다. 눈을 감고 으르렁대며 그 나무를 한 번 휘둘러서 호랑이가 맞지 않으면 그것은 다시 쓰지 않고, 다시 몸을 날려 나무를 꺾는다. 그것에 맞기만 하면 틀림없이 곤죽이 되겠으나 호랑이는 교묘하게 피해 이리저리 뛰며 곰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끝내 곰은 지쳐 쓰러져서 호랑이의 먹이가 되고 만다. 곰이 죽는 것은 바로 그 힘 때문이다.
귀천역설(貴賤逆說)
백정은 반드시 고기 먹을 상이 있고, 의원은 반드시 사람을 죽일 운명을 타고난다.
축원과 저주의 이치
부자에게 아들이 많기를 축원하고, 귀한 사람에게 권세가 막강하기를 축원하고, 명망 있는 사람에게 벼슬이 높기를 축원하고, 복 많은 사람에게 장수하기를 축원하는 것은 모두 저주하는 것이요, 축원하는 것이 아니다.
부유하면서 아들이 많으면 자식을 다 혼인시키기 전에 재산이 이미 줄어들고, 형제가 많으면 밖에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어서 술 마시고 노름에 싸움질이나 하여 집안도 뒤따라 망하고 만다. 귀하면서 권세가 막강하면 10년이 못 되어 하늘의 재앙과 사람들의 해침이 함께 닥치고, 명망이 있으면서 벼슬이 높으면 처음에는 의심이 이르고 중간에는 비방이 모이고 끝내는 온갖 모욕이 모여서 명망이 마침내 다 없어지고 만다. 복이 많으면서 장수하면 처자식이 먼저 죽고 심지어는 손자까지 장사 지내게 되어 복이 변해 재앙이 되고 마니, 이는 모두 불변(不變)의 이치이다.
동요(童謠)에 오른 권신(權臣)들
권신으로서 동요에 오르내린 자들은 패망하지 않은 경우가 별로 없다. 김자점(金自點)이 권세를 부릴 때 동요에 “자점이 점점(點點)이다.” 하였는데, 김자점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였고, 허적(許積)이 권력을 잡았을 때 동요에 “허적은 산적(散炙)이다.” 하였는데, 허적이 멸망하였고, 김일경(金一鏡)이 성할 때 동요에 “일경은 파경이다.” 하였는데, 김일경의 삼족이 멸망하였다.
그리고 근세에 정후겸(鄭厚謙)에게는 행상도(行喪圖)가 있었고, 홍국영(洪國榮)에게는 완경구(翫景謳)가 있었는데, 이들 역시 모두 오래지 않아 패망하고 말았다.
태평한 도둑
도둑에게도 태평한 기상이 있다. 한 도둑이 부잣집에 들어가니, 돈과 재물이 가득 쌓여 있고 항아리의 술이 한창 익어 그 향기가 코끝에 진동하였다. 도둑은 술꾼이었으므로 항상 좋은 술을 실컷 마셔 보고 싶었지만 가난하여 그럴 수가 없었는데, 마침 술항아리를 보고는 뛸 듯이 기뻐 항아리 채로 들고 마셔 댔다. 잔뜩 취하자 술항아리를 짊어지고 돌아가겠다는 생각에 여러 번 들어 보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밖으로 나와 외쳐 댔다. “누가 이 술항아리를 지고 우리 집까지 가겠느냐? 옜다, 이 돈 20전을 품삯으로 주겠다.” 이 소리를 듣고 부잣집 사람들이 깜짝 놀라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자, 취한 도둑은 그제야 자신이 도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황급히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 숨으니, 부잣집의 종들이 도둑을 나오게 하려고 작대기를 휘둘렀다. 도둑은 마루 밑에서 돌아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들, 작대기를 함부로 휘젓지 마라. 내 눈 다칠까 무섭다.” 부잣집 주인은 웃고서 도둑을 놓아주었다.
와우각상(蝸牛角上)의 싸움
삼한(三韓)시대에는 산마다 성을 쌓고 각 성마다 군장(君長)을 세워서 서로 공격하였는데 크게 군대를 일으킨 경우가 겨우 20명이었으니, 와우각상의 싸움으로 한 번 웃을 거리도 되지 못한다.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서 선환국(單桓國)과 호호국(狐胡國) 같은 소국(小國)들은 정예병이 45명에 불과한데도 보국후(輔國侯)와 좌우도위(左右都尉) 등의 관속을 두었다. 만약 그들로 하여금 전쟁하게 한다면 일부는 나라를 지키고 일부는 출동해야 하기 때문에 마땅히 반으로 나누어야 하니, 그렇다면 또한 20여 명에 불과하였을 뿐이다. 그런 반면 춘추 시대의 진(晉)나라와 초(楚)나라, 초한(楚漢) 시대의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싸움이 참으로 대단하였다고 하지만 그 실상은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천상(天上)에서 어떤이가 이것을 보았다면 참으로 한 번 비웃었을 것이다.
목숨도 구한 말 한마디
숙종(肅宗) 때에 부산첨사(釜山僉使)로 부임한 자가 있었는데, 왜관(倭館)에 머물던 왜인(倭人)에게 무시를 당하고 심지어 칼을 뽑아 찌르려고 하자 도망쳐 죽음을 면하였다. 체포되어 서울에 이른 그는 답변하기를, “다섯 걸음 안에서는 무력을 사용할 곳이 없고, 한 자 되는 칼 아래에서 몸을 해칠 의리가 없습니다.”하였다. 유언명(兪彦明)의 계모가 불효로 고발하자 유언명은 진술하기를,
“변명하고 살기보다는 말하지 않고 죽는 것이 낫습니다.” 하고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죽음만은 면하였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무관(武官) 서씨(徐氏)가 진주영장(晉州營將)으로 있을 적에 누이가 시댁의 죄에 연좌되어 관비(官婢)가 되었는데 진주를 지날 때 병들어 걸을 수가 없었다. 서씨는 누이를 머물게 하여 병이 낫기를 기다렸고, 이 일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체포되자 이렇게 진술하였다. “저는 차라리 성명(聖明)의 조정에서 죄를 받을지언정 형제의 은혜를 끊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숙종은 그의 대답을 훌륭하게 여겨 죄를 용서하고 복직하도록 하였다. 말을 잘하는 것이 이처럼 화를 늦출 수 있다.
음식 사치가 부르는 앙화(殃禍)
음식 사치를 극도로 부리는 자는 패망을 자초하지 않는 경우가 드무니, 평민은 굶어서 죽고 귀족은 몰락하여 멸망한다. 허의(許宜)란 자는 부잣집에서 자라면서 입맛을 극도로 사치스럽게 하여 천하의 산해진미도 그의 입에 싫증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병이 나자 먹을 만한 것이 없어 드디어 굶어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김자점(金自點)은 패망하려 할 적에 온갖 부드러운 음식들이 모두 단단하다 하여 갓 부화한 병아리를 먹었고 정후겸(鄭厚謙) 역시 이렇게 하였는데, 모두 얼마 안 있어 처형되었다.
천성도 가리는 이욕(利欲)
어린아이가 울 적에 ‘호랑이 온다’고 겁을 주면 울음을 그치고, 병아리가 부화하자마자 사람이 ‘솔개가 떴다’고 겁을 주면 엎드리니, 어린아이가 어떻게 호랑이를 알겠으며 병아리가 어떻게 솔개를 알겠는가. 다만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좋아하는 성품을 하늘에서 받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재화(災禍)와 패망(敗亡)이 사람을 해침이 어찌 다만 호랑이와 솔개가 해치는 것만 하겠는가. 병아리는 두려움을 알지만 사람은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어릴 때는 두려움을 알지만 자라서는 두려움을 알지 못하니,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요, 이욕(利欲)이 그것을 가렸기 때문이다.
득세(得勢)에 따라 바뀌는 노비 문제
사내종 노(奴)와 계집종 비(婢)가 그 어미의 신분을 따르는 것은 고려 정종(靖宗)때 시작되었으나, 양산(良産)까지 모두 추쇄(推刷)하여 노비로 만든 것은 어느 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현종 기유년(1669)에는 종량법(從良法)을 시행하였고, 숙종 을묘년(1675)에는 환천법(還賤法)을 실시하였으며, 신유년(1681)에 또 종량법을 시행하였다가 기사년(1689)에 다시 환천법을 시행하였는데, 이미 속량한 사람은 거론하지 않았다.
대체로 서인(西人)은 종량법을 주장하고, 남인(南人)은 환천법을 주장하여 또한 편파적인 의론을 이루었다. 환국(換局)때마다 그들이 주장하는 법을 시행하였으나 갑술경화(甲戌更化) 때에는 그대로 환천법을 따랐다. 영조 경술년(1730)에 또 종량법을 명하여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다.
신사년(1761, 영조 37)에 판서 김효대(金孝大)가 강원도 관찰사로 있다가 돌아와 승지가 되어 역노(驛奴)들이 얼마 안 남아 있음을 극력 진언하고 다시 양산을 추쇄할 것을 청하자, 정승 홍봉한(洪鳳漢)도 이를 찬성하였다. 임금이 이미 윤허하여 시행 조목을 내렸는데, 판서 이익보(李益輔)가 홍 정승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들의 주장을 버리고 저들의 주장을 따랐다고 책망하니, 홍 정승이 비로소 자기 잘못을 깨닫고 형조(刑曹)에 내려진 조례들을 반포하지 못하게 하였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공사(公私)의 천민은 어미의 신분을 따른다는 법만을 기재하였으니, 지금은 양산을 단연코 추쇄할 수 없다.
사족(士族)의 기상
조유진(趙維鎭)은 재상 조재호(趙載浩)의 조카이다. 조재호의 화(禍)에 연루되자 조재호의 무죄를 항변하다가 가혹한 형벌로 온몸에 상처를 입고 죽었다. 옥사(獄事)가 다소 느슨해지자 온 세상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아무나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의 어머니 김씨는 김광계(金光啓)의 손위 누이이다. 김씨는 며느리를 부르더니,
“집안의 화가 이 지경에 이르러 장부(丈夫)가 죽었는데, 부녀자는 한 명도 죽는 이가 없다면 사족(士族)의 수치가 아니겠느냐. 너는 어린 자식이 있고 집안 제사가 중요하니 죽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죽겠다.” 하고는 마침내 굶어 죽었다. 아, 우리나라가 사족의 기상을 배양함이 깊음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잘난 자는 못난 자가 있어서 빛난다
백이(伯夷)도 군자의 나라에 들어가면 어질다는 말을 듣기 어렵고, 요리(要離)도 자객들이 사는 살마도(薩摩島)에 들어가면 용감하다는 말을 듣기가 어렵다. 이것은 훌륭한 대장장이가 대장 기술로 유명한 월(越)나라에 들어가고, 활을 잘 만들 줄 아는 사람이 활 만드는 기술로 유명한 연(燕)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모두 능숙한데 어떻게 자신의 재주를 뽐낼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혼란한 세상은 태평한 세상의 밑천이고 망한 나라는 흥하는 나라의 밑천이며, 소인은 군자의 밑천이고 탐욕스러운 사내는 지조 있는 선비의 밑천이며, 무능하고 비루한 관리는 유능하고 선량한 관리의 밑천이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집안을 망치는 자식은 충성스러운 신하와 효성스러운 자식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해 주는 밑천이다.
임금님도 무서워하는 사람들
숙종이 일찍이 말씀하셨다. “나이 오십이 되도록 제 앞가림도 못하고 궁벽하게 사는 선비와 젊은 과부는 나도 겁내는 대상이다.”
훌륭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두려워할 대상을 아신 것이다.
조상의 공덕과 자손의 흥망
연경(燕京)의 흠천감(欽天監)에 옥으로 기둥을 만들어 세우고 다음과 같이 새겼다.
“착하게 살고도 잘되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그의 선조가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니, 악이 다 해소되면 잘살게 될 것이다. 악한 짓을 했어도 망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그의 선조가 쌓아 놓은 덕이 있기 때문이니, 덕이 다하면 망할 것이다.” 《진서(晉書)》에도 이런 말이 있다. “올곧은데도 망하는 것은 조상이 남긴 재앙 때문이고, 잔혹한데도 보존되는 것은 조상이 남긴 공덕 때문이다.”
하늘과 임금과 남편에 대한 믿음
세속에서 믿을 수 없는 것이 셋이라 하는데, 하늘과 임금과 남편을 이름이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살펴보면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늘과 임금과 남편이다. 화락하고 진실하게 살면서 복을 구함이 부정하지 않다면 하늘이 어찌 나에게 재앙을 내리며, 자신의 직위를 공경히 수행하면서 몸과 마음을 다하면 임금이 어찌 나를 내치겠으며, 잘못한 것도 없고 잘난 체한 것도 없이 부인의 도리만 하면 남편이 어찌 박대하겠는가. 사람으로서 하늘을 믿지 못하고, 신하와 부인으로서 임금과 남편을 믿지 못한다면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그렇지만 자신은 바르지 못하면서 믿기만 하면 죄가 되니, 하늘의 복록을 탐하고 임금과 남편의 총애만을 믿고서 잘못되지 않은 자가 언제 있었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관리
사근 찰방(沙斤察訪) 유정모(柳鼎模)는 행실이 독실한 선비였지만 관리로서의 실무에는 능하지 못했다. 감사(監司) 이조원(李祖源)이 인사고과를 하면서 그에게 하등급을 매기고, 의견서에 “아무것도 모른다[不識不知].”라고 썼다. 그러자 임금은 그 옆에 “기쁘도다, 요순 시절의 백성이여.”라고 쓰고는 상등급으로 고쳤다.
귀신을 부리던 자는 귀신에게 당한다
귀신을 부리는 자는 기가 쇠하면 반드시 귀신에게 해를 입고, 권세를 즐기던 자는 운이 다하면 반드시 권세 때문에 죽게 된다. 사람은 본래 한 번 죽기 마련이니 기운이 다하면 죽을 뿐이다. 그렇지만 귀신 때문에 죽고 권세 때문에 죽는 것이 어찌 제명대로 살다 죽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름은 버리고 명분은 챙겨라
명교(名敎), 명분(名分), 명의(名義), 명절(名節)은 모두 세상을 유지시키는 큰 법이다. 그런데 명(名)자를 앞에 썼으니 명을 가볍게 보아서야 되겠는가. 노자(老子)도 명을 저버린 사람은 아니다. 《도덕경(道德經)》 1장에 명을 도(道)에 짝 지우고, “이름 지어 부를 수 있는 명은 영구불변의 명이 아니다.” 하였다. 도가 있는 곳에 명도 따르니 명을 버리고 도를 행한다는 것을 나는 들어 보지 못하였다. 대저 이름남을 좋아하는 폐단은 참으로 세상을 병들게 하지만, 명분을 저버리는 폐단은 어느 지경에 이르겠는가.
큰 풍년은 큰 흉년을 부른다
풍년과 흉년이 번갈아 드는 것은 상리(常理)이다. 그렇지만 먼저 흉년이 드는 것보다 길한 경우는 없고, 먼저 풍년이 드는 것보다 흉한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농사에 밝은 자는 큰 풍년이 들기를 바라지 않으니 그것은 반드시 큰 흉년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조 때에 경술년(1730)과 정축년(1757) 같은 큰 풍년이 없었는데, 경술년의 풍년은 신해년(1731)과 임자년(1732)의 흉년을 초래하였고, 정축년의 풍년은 을해년(1755)과 병자년(1756)의 기근을 구제해 주었다. 나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술년의 풍년은 재앙이고 정축년의 풍년은 상서이다. 어찌 농사짓는 일만 그러하겠는가. 사람도 먼저는 부귀하다가 뒤에 빈천하게 되고 먼저는 건강하다가 뒤에 병들게 되며, 먼저는 웃다가 뒤에는 울게 되고 먼저는 절개를 지키다가 뒤에 변절하게 되니, 이는 모두가 경술년의 풍년과 같은 경우이다.”
타고난 다리가 짧다고 늘이고 길다고 자르랴
한비자(韓非子)는 세상에서 기르는 것은 쓸데가 없는 것이고, 쓰이는 것은 기른 것이 아님을 안타까워하였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똑같이 슬퍼하는 바이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세상만 탓해서는 안 된다. 난리를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어찌 늘 있겠는가.
몸가짐이 온화하고 한가하게 즐기는 자태는 치세에는 쓸 수 있지만 난세에는 쓸 수가 없고, 위험을 무릅쓰는 기상은 난세에는 쓸 수 있지만 치세에는 쓸 수가 없다. 안락함을 함께하는 자가 환난을 함께하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하여 늘이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하여 자른다면 바로 스스로를 해치는 경우가 되니, 등용되고 등용되지 않는 것에 대해 어찌 세상을 탓해서야 되겠는가.
잘잘못에 합당한 대우
악한 짓을 했는데도 재앙이 없다면 착한 일을 한 이를 무엇으로 대우해 주고, 실패했는데도 벌이 없다면 공적이 있는 이를 무엇으로 대우해 주며, 어리석은데도 나무라지 않는다면 현명한 이를 무엇으로 대우해 주고, 잘못했는데도 탓하지 않는다면 옳은 일을 한 이를 무엇으로 대우해 주겠는가. 그러므로 군자에게는 권면하고자 하고 소인에게는 징계하고자 하는 것이다.
풍년과 귀가(貴家)에 재앙이 따르는 까닭
풍년이 흉년을 부르고 귀한 집안이 재앙을 부르는 것은 모두 교만하고 우쭐해하기 때문이다. 서민들은 무지한지라 한두 해 풍년이 들어 겨우 밥만 제대로 먹을 수 있으면 스스로 만족한다. 그리하여 곡식을 흙처럼 하찮게 여기고 도박이나 하며 실컷 먹고 손을 게을리 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게 되니, 이렇게 되면 흉년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다.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은 문호(門戶)가 강성하여 거마(車馬)가 골목을 가득 메우고 선물이 사방에서 모여들며 자제들과 종과 문객들이 안팎에서 제멋대로 하여 세상 사람들이 속으로는 화를 내면서도 감히 말을 못 하니, 이렇게 되면 재앙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해 풍년이 든 뒤에 흉년이 드는 재앙과 귀한 집안이 받는 재화는 같다. 큰 흉년이 없기를 바란다면 먼저 농가의 교만을 억제시켜야 하고, 큰 옥사가 없기를 바란다면 먼저 벼슬아치들의 교만을 억제시켜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