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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필설(筆舌)로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이 있다. 먼저 이 한 장의 사진! 눈자위가 발갛게 붉어진 조훈현 9단이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참고 있는 이 모습. 이름 석 자 앞에 의당 ‘천하의’란 수식어가 세트처럼 붙어 다니는 ‘천하의 조훈현’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공개해설장에 구름처럼 모인 바둑팬 앞에서 눈물을 보이려는 찰나다.
필자가 기억하는 한, 승부세계에서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치른 그가 공개석상에서 보인 처음이자 마지막 눈물이다. 1988년 11월 22일, 제1회 응씨배(應氏杯) 준결승3번기에서 대만대표로 출전한 린 하이펑(林海峰) 9단을 2:0으로 꺾고 결승진출을 결정지은 직후다.
바둑사의 명승부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제1회 응씨배 결승5번기 최종국(조훈현-녜웨이핑)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어찌하여 뜬금없이 이 한 장의 준결승 현장사진부터 꺼내놓는가. 30년 가까이 바둑기자로 뛰어오면서 찍었던 숱한 사진 중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이기도 하거니와, 조훈현 9단의 감읍(感泣)이 곧 한국바둑의 감읍이자 한국바둑의 찬연한 절정기가 실상 이 순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방금 막 승리를 거두고 공개해설장에 인사차 등장한 조훈현 9단을 향해 사파이어볼룸을 발디딜 틈 없이 채운 700여 명의 바둑팬은 5분간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울렸고, 한국바둑의 명운을 걸고 단기필마(匹馬單騎 )로 고투하고 있는 불세출의 승부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이만이 아는 의미의 눈물, 이것은 한국바둑의 눈물이었다.
바둑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중국 요순시대에 만들어져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래되었다는게 정설로 자리하고 있다. 광복 전까지 우리나라는 흑백 16개의 돌을 미리 포진하고 두는 ‘순장(巡將)바둑’을 두었으며 중국 또한 시대에 따라 몇 개의 돌을 깔고 두는 치석(置石) 바둑이었다. 이것을 일본이 빈 바둑판에서 시작하는(따라서 전략과 수법이 훨씬 다양하고 재미있어진) 자유포석 바둑으로 발전시켰다. 요즘 우리가 두는 바둑을 말하며 이를 ‘현대바둑’이라 구분한다. 일본에서 선진바둑을 배우고 돌아온 조남철 9단이 남산자락에 ‘한성기원(한국기원의 모태)’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현대바둑 보급에 나선 것이 해방 무렵이니 우리나라 현대바둑의 역사는 광복 70년과 궤를 같이 한다. 줄잡아 500년의 치열한 현대바둑 역사를 가진 일본에 실력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폭과 깊이에서 견줄 처지가 아니다.
그랬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일본바둑은 범접할 수 없는 메이저리그였으며 한국은 중국보다도 한 수 뒤지는 변방의 마이너리그 취급을 받았다. 가끔 방한하는 일본의 정상급 기사들은 어디까지나 ‘한 수 지도한다’는 기분으로 공항에 내렸으며, 실제 이창호 9단이 출현하기 이전까지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기사들이 한국 일인자의 계보를 이어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렇듯 한국기사들을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여기던 그들이었지만 딱 한 사람, 조훈현 9단만은 만만히 보지 못했다.
일본이 한국바둑을 안중에조차 두지 않던 시절 일찍이, 1962년 여섯 살 꼬마 조치훈에 이어 이듬해에는 열 살짜리 한국기원 천재소년 초단 조훈현이 나란히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20년 뒤 한 사람은 일본바둑을, 또 한 사람은 한국바둑을 천하통일 한다. 같은 시기에 도일한 두 사람은 본시 같은 무대(일본)에서 숙명의 라이벌전을 펼쳐야 할 운명이었으나 ‘병역의무’가 이들을 갈랐다. 조치훈 9단은 군면제를 받았지만 조훈현 9단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귀국해 공군에 입대했다.
1972년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두 사람의 행보는 네 살 선배인 조훈현이 반 보 정도 앞서 갔으나 이후는 극명한 형세를 보였다. 조훈현 9단이 한국기전을 모조리 휩쓸며 군계일학의 모습을 보였어도 어디까지나 세계바둑의 중심국은 일본이었다. 조치훈 9단은 1980년 꿈에 그리던 명인(名人)을 획득했고 81년에는 본인방(本因坊)을, 82년에는 랭킹1위 기전인 기성(棋聖) 타이틀까지 석권하며 일본바둑사상 대삼관(大三冠)을 차지한 첫 기사가 되었다. 일본바둑의 일인자가 세계바둑 일인자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요즘처럼 오픈된 세계대회가 있어 서로 길고 짧은 걸 대볼 무대도 없었다. 때를 얻지 못하고 좁은 무대에 갇힌 채 승천을 꿈꾸는 잠룡이 조훈현 9단이었다.
또 하나 뼈저린 기억이 있다. 1980년 조치훈 9단이 명인이 되어 금의환향했을 때(이때 전두환 정부는 프로기사에게 처음으로 은관문화훈장을 서훈했다) 한국의 일인자 조훈현 9단과 기념대국 두 판이 급히 마련되었는데, 조훈현 9단이 두 판 다 졌다. 이벤트 성격을 띤 방송용 속기 한 판, 장고대국 한 판이긴 했으나 한 판도 이기지 못한 건 조훈현 9단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과연 조치훈, 역시 일본바둑이 한 수 위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받아들였다. 체질적으로 박카스만 마셔도 취한다는 조훈현 9단이다. 그런데 치사량이나 다름없는 소주 두어 잔을 들이켜고 관철동(예전 한국기원이 있던 거리) 뒷골목에서 그윽그윽 토하다 쓰러졌다는 후일담은 패배의 아픔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하게 한다.
8년 뒤 만들어진 응씨배는 와신상담(臥薪嘗膽)하던 조훈현에게, 2류국의 위상에서 벗어나려는 한국바둑에게 하늘이 준 기회였다. 1987년 대만의 재벌 바둑애호가인 잉창치(應昌期, 97년 작고) 회장이 자기 이름을 내건 세계바둑대회를 내년 8월경 만들겠다고 공표했다. 이때까지 바둑계는 국경을 넘나드는 세계대회가 없었다. 선두를 달리고 있는 일본은 굳이 ‘이겨야 본전’인 국제무대를 만들 이유가 없었고 한국과 중국은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이러한 때 제4국인 대만에서 총규모 116만 달러, 우승상금만 자그마치 40만 달러를 건 매머드급 세계대회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4년마다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개최하는 대회여서 ‘바둑올림픽’으로 불렸다. 4년 주기이기는 하나 우승상금 40만 달러면 1987년 발표 당시 환율로 약 3억 2,000만원이었다. 국내 최대기전인 왕위전의 우승상금이 1,600만원이었으니, 요즘 말로 ‘깜놀(깜짝 놀랄)’만한 거금이었다.
더 놀란 건 일본이었다. 아니 당황했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 그간 바둑 일등국을 자처해 왔는데 최초의 세계대회를 빼앗길 수 없었다. 자존심을 세우고자 새치기해 만든 대회가 후지쯔(富士通)배다. 1988년 8월 개막을 앞둔 응씨배에 앞서 4월에 서둘러 연 제1회 후지쯔배에 한국은 조훈현 9단, 서봉수 9단, 장두진 6단 3명이 출전했으나 전원 1회전 탈락했다.
첫 후지쯔배는 일본의 예상대로 다케미야(武宮正樹) 9단이 차지했다. 호방한 대세력 바둑으로 우리에게 ‘우주류(宇宙流)’로 유명한 기사다. 일본기사가 우승한 건 그들에게 당연한 결과였다. 한국의 간판스타인 조훈현으로선 더더욱 절치부심할 수밖에 없었고, 다가오는 응씨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급조된 후지쯔배가 프레올림픽(Pre-Olympic) 같았다면 응씨배는 일기일회(一期一會)의 본무대였다.
게다가, 일본은 그렇다 치고 중국도 아닌 대만에게조차 ‘바둑 약소국’으로 푸대접받고 있는 현실을 보기 좋게 뒤바꿀 한방이 절실했다. 잉창치 회장은 그간 자신이 전력을 기울여 연구한 바둑룰 ‘전만법(塡滿法)’을 전파하기 위해 응씨배를 창설한다지만, 내심에는 중국이 바둑의 종주국이며 중화민족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러자면 반드시 중국인 기사가 우승해야 했다. 마침 대만출신 기사로는 여전히 일본바둑계의 호랑이로 활약하고 있는 린하이펑 9단이 있었고, 중국 본토에는 걸출한 녜웨이핑(攝衛平) 9단이 있었다. 바로 이 녜웨이핑 9단이 ‘철석같이 믿는 도끼’였다.
그럴 만도 했다. 1985년부터 중국과 일본은 최정상급 기사 7~9명씩이 나서 연승전(한 사람이 질 때까지 계속 두는) 방식의 슈퍼대항전을 벌였는데 예상을 깨고 3년 연속 중국이 우승했다. 3년에 걸쳐 항상 최종주자로 나와 한 번도 지지 않고 무려 11연승을 거둔 주장 녜웨이핑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얻은 별명이 ‘철(鐵)의 수문장’이다. 이것은 바둑계의 ‘일본바둑=세계최강’이라는 인식을 흔들어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결코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던 일본의 아성이 장판교의 장비마냥 버티고 선 대륙의 한 괴물 기사에 의해 민망하게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대한 것과는 달리 일본은 1960년대부터 중국에 공을 많이 들였다. 바둑교류단을 구성하여 해마다 중국을 방문해 기꺼이 ‘한 수 지도’해 주었는데, ‘베이징의 반달곰’으로 불리는 녜웨이핑 같은 기사가 등장하여 일본의 고수를 종종 이기자, ‘그렇다면 어디 본격무대를 만들어서 확실하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작심하고 만든 대회가 중일슈퍼대항전이었다.
일본은 1985년 1회 대회에 당시 최강 트리오인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가토 마사오(加藤正夫),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9단을 포진했고, 최연장자이자 주장인 후지사와 9단은 “이번에 진다면 우리 세명은 책임을 지고 삭발하겠다”고 호언까지 했으나, 말이 씨가 되었다. 3대1의 싸움에서 녜웨이핑 한 사람을 넘지 못하고 국후 “후지사와 선생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스님이 되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라는 위로 아닌 위로까지 들어가며 줄줄이 삭발하는 수모를 겪고 말았다.
일본 최고수 세 명을 한시에 삭발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중국인 기사가 출현했으니 잉창치 회장이 우승을 장담할만했다. 그에게 변방국인 한국은 안중에도 없었다. 한국에 배당한 16강 본선티켓은 달랑 한 장. 호주, 미국과 같은 대접이었다. 일본 5장, 중국 4장, 대만 3장에 견주면 명색 세계대회 구색을 맞추기 위한 생색에 지나지 않았다. 호주대표도 이민 중국기사인 우쑹성(吳淞笙) 9단이었고, 미국대표로 나온 기사는 일본기원 5단인 마이클 레드먼드였으니 실상은 중국세 8명과 일본세 6명을 상대로 홀로 싸우는 형세였다.
이런 푸대접을 받으면서까지 대회에 참가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당장 보이콧 논란이 일었다. 그렇지만 선수인 조훈현 9단이 이를 가라앉혔다. 단체경기가 아닌 한 바둑은 열 명이 출전하나 한 명이 출전하나 어차피 마지막에 단 한 명만 살아남는 개인전이다. 어떡하든 이기면 된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변방국 취급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 4년을 기다려야만 한다. 조훈현 9단은 독하게 이를 악물었던 것이다.
1988년 8월 20일, 중국 베이징의 샹그리라호텔에서 역사적인 제1회 응씨배 막이 올랐다. 조훈현 9단은 본선1회전(16강)에서 대만대표로 출전한 왕밍완(王銘碗) 8단(당시)을 이기고 8강에서 고바야시 고이치 9단과 만났다.
여기가 1차 난관이었다. 조치훈 9단을 밀어내고 일본바둑 최정상에 올라선 고바야시 9단이다. 게다가 불과 4개월 전 열린 후지쯔배 1회전에서 조훈현 9단에게 완패를 안겼던 그다. 기필코 설욕해야 할 상대였지만 역시 일본 최고의 기사였다.
거의 ‘사망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던 바둑을 다들 ‘끝났다’고 단정한 바로 그 순간부터 ‘황홀한 강신무(降神舞)’를 보이며 판을 뒤집었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일수록 상상을 초월하는 좌충우돌,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판을 흔들어대는 조훈현의 마법에 홀린 고바야시 9단은 아홉 가지 이길 수 있는 길을 외면하고 딱 한 가지 지는 코스로 빠져들었다.
4강이 가려졌다. 중국의 녜웨이핑 9단과 대만대표로 나선 린하이펑 9단, 여전히 노익장(당시 63세)을 과시하는 일본의 후지사와 9단이 살아남아 외관상 한-중-일-대만 4국이 기막힌 균형을 이룬 듯 보였으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8강에서 조치훈 9단을 제압하고 올라온 녜웨이핑 9단이었다. 8강전이 끝난 날 밤 낙담한 조치훈 9단은 “나는 바보입니다…내 바둑은 끝났어요!”라고 자책하며 눈물을 보였고 조훈현 9단은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지만 승부사에게 아프지 않은 패배 어디 있으랴.
준결승전은 석달 뒤 서울에서 열렸다. 조훈현-린하이펑, 녜웨이핑-후지사와의 4강 대결이었다. 잉창치 회장이 머릿속에 그린 결승전은 린하이펑과 녜웨이핑 두 중국인 기사의 맞대결이었다. 들러리로 여겼던 조훈현 9단의 투혼이 놀랍기는 하나 ‘작은 물’에서만 놀았던 기사이고, ‘괴물’로 불리는 후지사와 9단은 63세의 노구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녜웨이핑 9단이 고전하기는 했으나 체력이 부친 후지사와 9단을 뚝심으로 밀어붙여 두 판 다 극적인 한점승(우리룰로는 반집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랐다.
그렇지만 린하이펑 9단은 2:0으로 졌다. 단단하고 두터운 바둑 스타일(棋風)로 일찍이 ‘이중허리’란 별명이 붙은 린하이펑 9단에 맞서 조훈현 9단은 특유의 쾌속행마를 앞세워 국면을 리드했다. 한국바둑의 장점으로 ‘모양’이나 ‘이론’에 얽매이지 않는 ‘실전적인 수’를 들곤 하는데, 2국에서 조훈현 9단은 우형(愚形)의 표본인 ‘빈삼각’의 묘수를 세 번이나 두며 전세를 전환시켰다. (바둑에서 3개의 돌이 뭉친 꼴인 빈삼각은 비효율적인 모양이라 두어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앞서 글머리에서 필자가 불쑥 내민 사진이, 이때 롯데호텔에서 벌인 준결승3번기 2국을 이긴 직후 공개해설장에 막 들어서면서 팬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성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사진이다. 마지막 관문을 남겨두고는 있었으나, 그 누구도 단언하지 못했던 결승진출이었고 대단한 쾌거였다. 홀로 ‘사즉생(死卽生)’의 승부정신으로 이뤄낸 기적과 같은 반전이었다. 더불어 한국바둑의 ‘전세역전’을 만천하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초대 ‘바둑황제’ 자리를 놓고 결투를 벌이게 된 동갑내기 두 바둑영웅, 조훈현과 녜웨이핑이 선전을 다짐하는 악수를 나눴다. 가운데는 당시 한국기원 장재식 이사장.
결승5번기는 해를 넘겨 1989년 4월에 열렸다. 4강전이 끝나고 다섯 달 뒤였다. 그렇지만 이 사이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주최측이 결승 다섯 판을 다 중국에서 치르겠다고 통보했고, 한국기원은 일방적으로 상대의 홈에서 싸울 수 없다고 항의했다. 그러자 마지못해 조율해 준 일정이 중국에서 세 판, 제3국(싱가포르)에서 두 판을 두는 것이었다. 싱가포르 또한 화교가 8할에 이르는 도시이고 보면 실상 다섯 판 모두 적지에서 싸우는 거와 다름없었다. ‘창은 날카롭고 방패는 두터우니, 승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矛利盾堅 勝負在天)’ 세기의 대결을 알리는 항저우일보의 헤드라인이 곧 조훈현 9단의 마음이었다. 위기에 처할수록 독한 승부욕을 품는 승부사가 조훈현이었다.
1989년 4월 25일부터 5월 2일까지 중국 항저우(杭州)와 닝보(寧波), 두 아름다운 도시에서 결승 세 판이 두어졌다. 한중수교를 맺기 전이라 홍콩을 거쳐 들어가고 나와야 했거니와 대륙 간 도시를 이동하자면 장시간 기차여행을 해야 했다. 천혜의 절경지 두 곳에서 펼친 열흘 체류일정이야 관전객에겐 찬란한 봄날이었겠지만 조훈현 9단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1국을 이겨 기선을 제압했으나 2국을 내줘 항저우에서는 1:1을 기록했고 승부의 분수령이라고 할 절강성 닝보에서의 3국을 놓쳤다. 사력을 다했으나 ‘대륙의 반달곰’은 거대한 바위산 같았다. 상대가 커 보이면 진다. 지난 몇 달간 자나깨나 일분일초도 상대의 그림자조차 놓치지 않으려 승부의 칼날을 갈고 또 갈았건만, 이때처럼 상대가 도도한 강 같고 우뚝한 산 같은 적이 없다. 2, 3국을 지자 동행한 아내 정미화 씨가 울었다.
“결코 변명이 아닙니다. 너무 지쳤어요. 상하이를 거쳐 항저우와 닝보까지 가는 동안 타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까요. 어떤 때는 걷기까지 했어요. 1국은 그래도 정신력으로 버텼는데 2, 3국은 어떻게 두었는지 잘 모를 정도였습니다.” -조훈현 9단
2승 1패. 남은 두 판 중 한 판만 이기면 우승하는 중국은 희희낙락했다. 1952년 중국 하북성 출신(조훈현 9단과 동갑이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좋지 않아 대국 중 때로 산소호흡기에 의존할 때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이러한 신체적 약점이 승부사로서의 정신적인 면을 더욱 담금질하게 했다. 청년시절 맞닥뜨린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반동의 자식으로 몰리고, 바둑이 척결해야 할 구악(舊惡)으로 지목되면서 장기간 흑룡강성의 한 농장에서 돼지우리 당번으로 지내는 생지옥을 겪었지만, 이러한 시련 역시 훗날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역전을 모색할 수 있는 투지와 끈기를 준 바탕이 되었다.
1976년 여름, 당시 일본의 ‘명인’과 ‘본인방’ 양대 타이틀을 쥐고 있던 ‘컴퓨터’ 이시다(石田芳夫) 9단을 중일친선바둑교류전에서 꺾어 양국 바둑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래 중일슈퍼대항전에서 11연승 신화를 보이기까지, 녜웨이핑은 중국바둑의 대명사이자 자존심을 세운 반상영웅이었다. 중국정부는 그에게 ‘바둑의 성인’이라는 뜻의 ‘기성(棋聖)’ 칭호를 부여했다.
“중국인이 주최한 최고의 대회에서 중국인이 우승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 목표는 우승컵이다.”
1989년 9월1일, 싱가포르 웨스틴 스템포드호텔에서 열린 전야제에서 녜웨이핑 9단은 우승을 자신했다. 감기 기운으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지만 조훈현 9단은 마음을 비웠다. 자신이 즐겨 쓰는 휘호 ‘무심(無心)’을 그저 화두처럼 붙들려고 애썼다. 승부를 떠나 후회 없는 바둑을 두자. 질 때 지더라도 성원하는 바둑팬 앞에 3-1로 무기력하게 주저앉는 것과 3-2로 막판까지 싸우다 지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또 있다. 더는 아내를 울리지 않으리라. 조훈현 9단은 4국에 기사인생을 걸었다.
응씨룰은 덤이 많다. 바둑은 먼저 착수하는 쪽이 유리한 만큼 흑이 백에게 일정 집수를 주는데 당시 한국과 일본은 5집반인 데 비해 집대신 점으로 계산하는 응씨룰은 8점(7집반)이었다. 따라서 백을 쥐는 쪽이 부담 없이 판을 짜나갈 수 있었다. 조훈현 9단은 막판에 몰린 데다 흑번이었다. 이러한 4국에서 조훈현 9단은 대담하게도 완패했던 2국과 똑같은 포석을 펼치고 나왔다. ‘조제비’란 별명처럼 경쾌한 푸트워크로 실리(집)를 먼저 챙겨두고 전광석화와 같은 잽과 실전적인 임기응변으로 국면을 이끄는 조훈현 9단이 세력바둑을 들고 나온 것도 대담한 배짱이었다. 단 이 한판, 절체절명의 싸움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건 실력이 아니다. 기세다.
초읽기에 몰리고, 말 그대로 백척간두의 사투에서 조훈현 9단은 극적인 한점(한국식 계가로는 반집) 차이로 이겼고, 2:2를 만들었다.
“4국이 제일 힘들었죠. 승부 자체도 한점 차이로 났지만 ‘이번에 지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덤 부담을 이겨내기 위해 세력바둑으로 두다보니 끝까지 사투를 벌이게 됐습니다.”
후일 조훈현 9단은 그때의 절박했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무난히 끝낼 줄 알았던 중국선수단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두 개의 화살을 가졌어도 흐름상 동점을 허용한 쪽이 불안해지는 법이다. 초대 응씨배 결승진출자가 가려지고 대다수가 녜웨이핑의 우승을 점쳤을 때 유독 한 사람, 드라마 ‘올인’의 실제모델인 차민수 5단만큼은 묘한 논리로 조훈현 9단의 우승을 일찌감치 호언장담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활동하는 조훈현 9단은 큰 상금이 걸린 기전에서 많이 싸워본 사람이다. 그렇지만 녜웨이핑 9단은 사유재산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바둑을 두어온 사람이다. 우승상금 40만 달러가 걸린 승부라면 실력 외에 담력이 승패를 가를 공산이 큰데, 이 점에서 난 무조건 조훈현 9단에게 건다.”
1989년 9월 5일 오전10시 싱가포르 웨스턴스탠포드호텔 특별대국실, 마침내 최후의 일전을 맞았다. 한국단장 윤기현 9단은 4국에서 초를 읽는 계시원이 중국인이었던 점을 강하게 항의해(실제 느끼기에 ‘고무줄 초읽기’라 오해받을만한 대목이 있었다) 일본인으로 교체했다. 반외 신경전도 반상 승부 못지않았다.
최종국은 다시 돌을 쥐어 흑번과 백번을 가리는데, 조훈현 9단이 4국에 이어 또 흑을 들게 됐다. 8점이라는 큰 덤을 안고 싸워야 하는 흑으로서는 초반부터 적극적인 반면운영을 택할 수밖에 없는 만큼 부담이 크다. 그렇긴 해도 어차피 뒤가 없는 벼랑 끝 싸움, 목숨을 건 오직 이 한판의 승부에서 덤 8점이 중요한 게 아니다.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 끝까지 자기바둑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
끝내리라 마음먹었던 4국에서 끝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역전패해 충격을 받았는지 녜웨이핑 9단은 5국 전날 호텔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고, 다음날 아침 대국장에 들어서는 그의 얼굴은 눈가가 부석부석하고 핏기 없이 창백해 보였다. 절정고수들의 대결이다. 자기 확신을 갖지 못하고 한치 의심이라도 들거나 찰나라도 흔들리는 순간, 진다.
이에 반해 최후의 일전을 대하는 조훈현 9단은 덤덤했다. 조훈현 9단은 또다시 2(9점 완패), 4국(1점 신승)과 동일한 포석을 시도했다. 자신의 평소 기풍과는 달리 큰 덤을 의식해 세력바둑을 구사한 이 바둑을 두고 김인 9단은 “2국과 승점을 기록하긴 했지만 4국은 도대체 조9단으로선 정체모를 바둑이었다”고 평했는데, 5국에서 조훈현 9단은 본연의 실리바둑으로 돌아섰다는 점이 달랐다.
흑1, 백2, 흑3의 포진은 2, 4국과 같다. 다음 백이 ‘가’로 두면 일사천리로 재연될 가능성이 많았는데, 녜웨이핑 9단이 어떤 의심이 들었는지, 아니면 불길한 조짐을 느꼈는지 백4의 화점으로 비껴 받았다. 상대가 “어디 한번 더 가 봅시다!”라고 청한 일합을 당당히 받지 못하고 슬며시 뒷걸음친 꼴이니 초장 보이지 않는 기세싸움에서 한수 밀리고 들어갔다고 할까.
확실히 녜웨이핑 9단은 경직돼 있었다. 백36은 중원 일대를 확장하려는 초일류의 감각이었는데, 백세력에 뛰어든 흑37에 얌전히 물러선 백38이 문제였다.
흑59로 상변을 살리고자 할 때 손따라 두듯 한 백60의 수도 무책이었다. 흑은 59의 수로 ‘가’에 밀어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면 백은 곧바로 ‘나’에 붙이고 흑‘다’ 젖혀받을 때 백‘라’로 끊는 맥점을 구사할 것이다.
느리더라도 두텁게 두는 기풍인 데다, 더군다나 덤 8집을 의식해 느긋하게 두어나가다 종반에 뒷심을 발휘해 승부를 내겠다는 속셈이었겠지만, 백60은 최소한 아래 2도처럼 백1, 3으로 두는 수법을 강구해야 했다. 이랬으면 흑이 실전의 흑63까지 뛰어들어 65로 타개하는 수법은 엄두도 못냈을 터이다.
145수 끝, 흑 불계승
큰 승부에 명국 없다는 말이 있다. 큰 승부에 임하는 심적 압박이 그만큼 심하다는 얘기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최종국은 계가까지 가지 않고 단명국으로 끝났다. 흑의 145수에 녜웨이핑 9단은 10분 간이나 참담한 표정으로 반면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돌을 거뒀다. 검토실에서 모니터로 최종전을 지켜보던 녜웨이핑 9단의 아내 쿵샹밍(孔祥明) 8단은 얼굴을 감싸 쥐고 울음을 터뜨렸고, 잉창치 회장은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졌다. 한국시간 오후 4시경,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자리한 한국기원 4층 공개해설장에서는 “대한민국 만세! 조훈현 만세! 한국바둑 만세!” 삼창이 터져나왔다. 공개해설장에 운집한 200여 명의 바둑팬 앞에서 거구의 김수영 7단이 어린아이처럼 줄줄 눈물을 흘렸다.
단기필마로 고군분투한 조훈현 9단의 응씨배 정복과정은 12척의 배로 명량해전에 나선 충무공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이 2차대전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듯 한국바둑은 응씨배 이전과 이후로 대별된다. 조훈현 9단이 마련한 발판을 딛고 이후 한국바둑은 세계대회를 휩쓸며 일본, 중국을 제치고 단숨에 최강국으로 올라섰다. 4년마다 열리는 응씨배만 해도 잉창치 회장이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중국기사(창하오 9단)가 2005년 우승하기까지 한국기사인 서봉수 9단(2회, 93년), 유창혁 9단(3회, 97년), 이창호 9단(4회, 2001년)이 돌아가며 우승 축배를 들 때까지 16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1 1989년 9월6일 김포공항에 모습을 드러낸 조훈현 9단. 수많은 바둑팬이 ‘바둑황제’를 뜨겁게 맞이했다. 2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외쳤던 홍수환 선수처럼 세계챔프에 오른 조훈현 9단도 마포가도까지 카퍼레이드로 금의환향했고, 시민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
1989년 9월 5일은 한국바둑의 날이었다. 모든 방송, 신문에서 대서특필했고 1미터가 넘는 대형 우승트로피를 안고 이튿날 귀국한 조훈현 9단은 김포공항에서부터 마포까지 무개차를 타고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한국바둑 사상, 아니 세계바둑 사상 유례가 없는 최초의 카퍼레이드였다. 정부는 나라를 빛낸 공을 사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하겠다고 나섰고, 이에 조훈현 9단은 현대바둑의 개척자인 대선배 조남철 9단부터 드리는 게 순서라며 단독 서훈을 고사해 함께 받았다. 우승을 저 혼자만의 공으로 삼지 않고 도리와 은혜를 아는 챔피언이었다.
응씨배 우승으로 얻은 새로운 별칭이 ‘바둑황제’였다. 척박한 땅에서 몸을 일으켜 세계제패의 물꼬를 트고 이창호 같은 후학을 키워 자기 이후를 책임지게 했으니, 팬들이 응씨배를 석권한 기사 중 유독 조훈현 9단에게만 ‘바둑황제’란 존호를 붙여 부르는 연유를 알 수 있다. 조훈현 9단의 응씨배 우승이 전 국민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고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는지,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끈 드라마 ‘미생’의 원작만화(윤태호 작가)가 각 장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한 수씩 소개한 기보가 바로 이 응씨배 최종국(결승5국)이라는 거, 알고 보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