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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인생과 맞짱 뜨다 / 신정근 / 21세기북스
여러 종류의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7부로 나누고 각 부의 주제에 어울리는 사람들을 등장시키킨다. 많은 양의 공부라 머리 속에 안착하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이다.
11, 일반적으로 서양을 모험과 도전의 문화로, 동양을 효도와 희생의 문화로 규정합니다. 이 규정이 동서양의 문화를 바라보는 주류적인 시각입니다. 나는 이러한 주류적인 시각에 도전하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프롤로그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네가 아무리 내 옆에서 옷을 훌러덩 벗고 알몸 쇼를 벌이더라도 네가 나를 어떻게 더럽힐 수 있겠는가?”(爾爲爾, 我爲我. 雖袒裼裸裎於我側, 爾焉能浼我哉?)
17. 전국시대의 '맹자'와 닮은 인물을 서양의 문학사(문화사)에서 찾는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나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 '돈키호테'와 '맹자'가 꽤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 맹자는 전쟁으로 인한 살상의 시대에 성선의 기치를 내걸었다.
26. 한 가지 주장을 가지려면 반드시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사안을 주장하려면 반드시 이치를 갖추어야 한다(持之有故,言之成理) - 순자
26. 순자가 말한 대로 주장이 근거와 이치를 갖추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누가 말한 것인가가 아니라 주장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34. 중국의 경우 오디세우스에 비견할 인물을 꼽는다면 춘추시대 오패, 즉 다섯 명의 패자 중 하나로 이름을 떨쳤던 진나라 문공(재위, BC 636 - BC 628)이다.
1부. 파괴의 문
“양주는 자기몸에 있는 털 한 올을 뽑아서 세상이 평화로워 지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
(孟子曰 楊子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기인우천(杞人憂天, 기우): 기우 그는 하늘(우주)에 대해 과학적 탐구를 촉발 시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64.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종교는 '보편'을 말하지만 그 보편의 실현을 두고 다양한 분파가 생겨났다. 이는 사람이 신의 뜻을 해석하려고 노력해도 그 해석이 모든 이들을 완전히 압도할 수 없다는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65. 중국 문화에는 세계를 설계하고 그 진행을 감시하는 신이 없으므로 세계는 철저하게 자체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연", "기자이, 비유자지"로 설명되었다.
66. 세계가 자체의 힘으로 움직인다고 한다면 책임 문제는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유일신의 세계는 신의 뜻에 따라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고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자연'에 따르는 선인과 악인은 어떤 기준으로 구분하며, 만약 구분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처벌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규정이 없다면 어떻게 살더라도 그 삶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세계가 저절로 그렇게 생겨나서 움직이므로 '나' 또한 스스로 그렇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도 개입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68. 하늘과 땅이 다하지 못하는 '자연'의 작업을 사람이 함께 거들어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천지와 사람이 합작한다면 세상에 적절한 돌봄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영역이 없게 된다. [예기]는 이를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버리지 않는다"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
78. 선악에 바탕을 둔 인이 과연 세상을 평화로운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 묵자
78. 묵자는 "남을 돌보기를 나를 돌보는 것과 같이 하라!"고 단언했다. 즉 "남과 나를 차별하지 마라!" (爲彼猶爲己)는 뜻이다.
2부. 모험의 문
"저를 지금이라도 주머니 속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요. 만약 일찍부터 주머니 속에 있었더라면 자루까지 보였겠지 그깟 끝만 보였겠습니까?"
100. 송견은 업신여김을 당한 후 이를 치욕으로 느끼는 '견모위욕'과 그렇지 않은 '견모불욕'으로 구분한다.
102. 한신은 송견이 말한 '견모불욕'을 완전히 실천한 인물인 셈이다.
113. 모수의 도전을 보면 자신을 먼저 설득 할 수 있어야 상대와 시대를 설득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를 믿는다면 언제라도 자기 자신을 추천하라! 그리고 이렇게 외쳐라. "나는 나를 추천합니다!"
3부. 도전의 문
사람은 원래 누구나 한 번은 죽기 마련이다. 그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기도 하고 털보다 가볍기도 하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140. 여불위는 세상의 질서와 무질서, 혼란과 통일이 바로 공공성에서 갈린다고 보았다. 따라서 새로운 통일 제국이 공공성을 근간으로 한다며뉴사들의 정치적 불만과 분열 욕망이 싹트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200여 년의 분열 끝에 등장한 통일 제국은 언제든지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 여불위는 군주가 공공성에 기반을 두고 통일 제국을 이끌어가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145. 진승과 스파르타쿠스는 100년을 사이에 두고 각자 진 제국과 로마 제국에서 같은 생각을 했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해방을 꿈꾸기 마련이다.
149. 자유가 이념이 아니라 환상으로 느껴지면 제일 가까운 사람이 지도자의 등에 칼을 꼽게 되는 것이다. 결국 진승은 자신의 주위 사람들을 내침으로써 죽음을 자초했자고 할 수 있다.
159. 사마천은 [보임안서] 등에서 심경을 내보일 때 '욕' 자를 써서 자신이 당한 고통을 드러내고 '분'자를 써서 자신을 다시 일으키는 에너지를 표현했다. 특히 후자는 사상 문화와 예술 문학의 창작 계기를 발분, 서분, 즉 울분의 표출로 설명하는 기원이 된다.
167. 왕충은 성현의 말과 글이라고 해서 글자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하나같이 따지고 물어보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바로 파악되지 않으면 마땅히 물어서 밝히고, 제대로 이해되지 않으면 마땅히 따져서 끝까지 파해쳐라!”(不能輒形, 宜問以發之. 不能盡解, 宜難以極之.)
179. 조조는 '유재시거'를 통해 현실에 반대하는 인물을 끌어들여 '공치천하'로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가 이 비전을 얼마나 현실화시켰는가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 또한 달라져야 할 것이다.
4부. 독립의 문
"가난과 출세는 모두 운명에 따르니 어찌 힘들다고 고함치는가? 다만 좋아하는 일을 행할 뿐 앞날이 어찌 될지 묻지 마라! 겨울이 가면 얼음은 반드시 녹고 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나네! 그대여, 이 이치를 살펴보게. 하늘의 도리가 참으로 분명하다는 것을."
212. 원시불교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제법무상, 모든 존재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모든 걱이 괴롭다는 일체개고를 설파했다.
218. 때달음은 뒤로 물러서지 않는 수많으누시간의 축적으로 이루어진 결실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번뇌가 깨달음을 통해 물어났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깨닫기 전에도 밥을 먹고 똥을 누구 잠을 잤다. 깨달은 뒤라고 해서 밥을 먹지 않아도 되고 똥을 누지 않아도 되고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의 시간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깨달은 자도 결국 일상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219. 깨달음은 일상과 교리가 만나는 사건, 달리 말해서 일상에다 교리를 집어넣는 행위이다. 그렇게 깨달은 이후에 교리가 '나'의 몸으로 들어와 육화되는 것이다.
227. 차별 없는 사랑은 인이고,실행해 마땅한 것이 의다. 인과 의를 말미암아 나아가는 것이 도이고 자기에 가득 차서 밖에 기대지 않는 것이 덕이다. 인과 의는 고정된 이름(주인)이고 도와 덕은 텅 빈 자리(손님)이다. - [원도] 한유
5부. 창조의 문
"간단한 공부는 결국 오래가고 크지만 갈피 없는 사업은 끝내 떳다 가라앉았다 할 뿐이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길을 알려면 참과 거짓을 마땅히 지금 당장 가려내야 한다네"
255. 장화(232~300)의 박물지에 따르면 "성인이 지은 것을 경이라 하고, 현인이 풀이한 것을 전이라 한다"고 쓰여 있다. 먼저 경과 전은 쓰는 주체가 다르다. 또 경이 기준이 되는 2차적 자료라고 한다면 전은 경을 풀이해서 그 뜻이 읽는 이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2차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즉 둥 사이에는 시간의 차이와 함께 뛰어넘을 수 없는 권위의 차이가 있다.
256. 경과 전의 뜻을 밝히는 학문을 훈고학, 경학 또는 문헌 해석학이라고 한다.
261. 마음이 이치(이념) 위주가 되면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는 분명해지지만 사람을 실제로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자유가 없어서 부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고귀한 것으로 느껴질 때 자유를 위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269. "진리를 실천할 때 사람은 무엇에 의존해야만 올바르고 적합하게 행동 할 수 있을까?" - 육구연
270. 고갱이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육경도 결국 내가 두 다리로 걸어서 확장할 수 있는 텍스트일 뿐이다. - [어록] 권상
6부. 선언의 문
"나는 50 이전에 참으로 한 마리 개였다. 앞에 있는 개가 무언가를 보고서 '왈왈' 짖으면 나도 따라서 '왈왈' 짖었다. 만약 누구 나더러 크게 짖는 이유를 물어 본다면 아무 말도 못하고 마냥 벙어리처럼 씩 웃을 뿐이다."
283. 공자는 학문의 목표를 자신을 잘 건사해 주위 사람들을 쳔하게 하는 '수기안인修己安人'에 두었다. 수기가 되지 않는 사람이 안인의 자리를 차지하면 사익을 위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 있디 때문이다.
292. 동양철학에는 참다운 '있음'을 묻는 존재론과 선을 지향하는 윤리학은 있지만 진리를 파악하는 인식론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식론 대신에 수양론이 발달 했다고 보는 것이다. / 인식과 수양은 둘 다 앎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겹치는 점이 있지만 차이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 인식은 '인식 주관'과 '인식 대상' 사이의 숨바꼭질(긴장)을 전제한다. '인식 주관'은 이미 아는 것을 바탕으로 밝혀지지 않는 대상의 정체를 밝히고자 하며, '인식 대상'은 미끄러워서 잡기 어려운 물고기마냥 파악될 듯하면서 인식 주관의 규정 작업을 벗어난다.
293. 수양은 파악해야 하디만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미지의 어떤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수양은 지키고 키워야 할 인의예지와 같은 본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수양은 원래 없앨 것을 줄이고 키울 것을 키우고 늘린다는 뜻이다.이때 핵심은 '내'가 본성(이념)에 가까운 욕망을 키우고 본성에 어긋나는 욕망을 줄이는 데에 있다.
300. 앎은 실행의 시작이고 실행은 앎의 완성이다.(知是行之始,行是知之成) - 왕양명
320. 세상 사람들이 바쁘게 구는 일을 느긋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세상 사람들이 느긋하게 하는 일을 바쁘게 하는 일을 바쁘게 할 수 있다.(能閒世人之所忙者, 方能忙世人之所閒.)
7부. 기획과 꿈의 문
"무엇을 하려고 하면 옳아야 하고 문제가 없어야 한다. 편의에 따라 생활하는 다른 사람들은 사상과 견해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확실하고 편안한 주견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369. (량수밍) 그는 세계 문화를 서양, 중국, 인도 문화의 유형으로 나누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양 문화는 문제가 생기면 전향적인 방향으로 해결하여 의욕(요구)을 최대한 충족시키려고 한다.(欲向前要求) 이에 따라 자연은 사람에게 길을 안내하는 도의 세계가 아니고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재화를 가진 창고로서 개조의 대상이 된다. 그 결과 서양 문화는 자연 정복, 과학만능주의, 민주주의의 특색을 지니면서 근대 사회를 지배하는 생활양식의 지위를 차지했다.
중국 문화는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낳는 대상보다 상황을 재설정하여 만족을 구하려고 한다.(意欲自爲調和持中) 예컨대 집에 비가 새면 집을 수리하여 비가 새지 않도록 하는 데에서 만족을 구하는 것이 서양 문화의 방향이다. 반면 중국 문화에서는 집이 없는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비가 새는 상황이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할 상황이 아니라고 여긴다. 즉 자신의 의욕을 상황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인도 문화는 문제가 생기면 문제 자체 또는 해결을 추구하는 요구 자체를 가지지 않도록 한다.(意欲反身向後要求) 즉 서양 문화처럼 문제를 낳은 상황 자체를 근원적으로 뜯어고치려고 하지도 않고 중국 문화처럼 자신의 생각 자체를 바꾸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문제라고 설정하는 사고 자체를 없애려고 한다. 예컨대 집에 비가 샐 경우, 관심을 해탈에 집중시키지 비가 새는 것 자체를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381. 낙감 문화는 서양의 죄감(罪感) 문화, 일본의 치감(恥感) 문화와 구별되는 중국의 특색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중국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서 즐거움과 쾌락을 찾는 반면 서양 사람은 죄의식(죄책감), 일본 사람은 치욕감(수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문화적 특색을 일구어냈다. 반면 중국 사람은 잘못과 실수를, 사람의 근원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시적인 부주의나 태만으로 간주한다. 이로 인해 서양 사람은 현실을 초월하여 내세의 구원을 바라지만 중국 사람은 내세의 구원 관념이 희박하고 현세의 복락을 바라는 것이다
에필로그
"인이 멀리 있느냐? 내가 인을 하고자 하면 곧 인에 이른다."
392. 중국이 이성의 왕국이 아니라 환상의 왕국이었다는 것은 최근이 아니라 이미 중국 근대의 루쉰(1881~1936)에 의해 밝혀졌다.
394. 이렇게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상상의 나래를 무한히 펼치고 있는데, 어떻게 중국을 포함해서 동아시아에 판타지의 세계를 즐기는 모험과 도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겠는가?
401. [위공령]에 나오는 공자의 말 가운데 "인과 관련되면 스승이더라도 양보하지 않는다"(當仁 不讓於師)라는 구절이있다.
402. 학문과 삶의 자세와 관련해 공자는 꽤 흥미로운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자세를 중용 유형, 광자狂者아자 유형, 견자狷者 유형으로 구분했다. 광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다른 것을 고려하지 않고 앞으로 내달리는 특성을 드러낸다. 반면 견자는 돌다리도 두르려보고 건널 정도로 신중해서 생각한 것을 다 말하지 못하는 특성을 드러낸다. 중용은 광자의 진취성과 견자의 신중성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중도를 지키는 특성을 보인다.
403. 중립과 중용은 광자와 견자의 중간이 아니라 광자와 견자를 통합하는 제3의 중심이다.
그때 그때 생각이 미치는 부분을 옮겨 적었다. 다음에 읽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문장들이 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뭘 읽었는지 도통 모르겠다. 고속열차를 타고 아름다운 풍경을 휙 지나간 듯한 느낌이다. 무엇을 보았는지 설명할 수 없으나 경치는 열차 밖에 있었다. 그 중에 아주 미세한 부분이 나의 마음에 들어왔다. (2017. 4.13 평상심)
첫댓글 내가 필자를 좋아하는 것은 유교라는 용어 대신에 유학/유가사상이라는
단어만을 사용한 한국의 유일한 유학자 신교수이죠.
중국에서는 유교라는 단어를 좀처럼 안 쓰더군요.
인도와 중국인의 문화적 차이는
일본의 선불교 사상가로 선불교를 서양에 전파한 스즈끼 다이세즈
박사(1870-1966에 의하면,
중국은 실용적이나
인도는 사색적, 비세속적 (출가주의), 비역사적이랍니다.
최근 98세 철학자 김형석님의 강의를 들어니
그가 개신교 노목사들 100여명 모인 자리에서 공자의 논어를 읽어라고
권유했다더군요.
옳습니다.
모든 종교 성직자는 다양한 시각의 훌륭한 인문학 저서를 읽어야
세상과 소통이 가능합니다
종교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보통 그들의 세계로만 더 깊이 들어가려 하죠.
그렇게하면 할 수록 자신을 더 잃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연히 읽어야하는데 안타깝죠. 맹신의 늪에 빠진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참고로 인도의 종교 사상과 기독교를 비교하면
인도; 인도 아리안 계(유럽 독일까지 포함)로
세계는 시작도 없고, 종말도 없다(무시무종), 다신을 숭배한다
셈족/유태인; 세계 창조론과 유일신 숭배
-소피아의 세계 -에서
212 원시불교(부처 당시의 불교)에서
..모든 걱이 괴롭다는 일체개고를 설파했다.는 아니고
제법이 무상해서 늘 고정되지 않고 변하니까 괴롭다,로 해석해야 옳습니다.
즉 불교는 허무주의가 아니고 고를 멸하기 위한 사실의 관찰일 뿐이죠.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