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에서 음반작업을 마치고 막 귀국한 그를 만났다. 덴마크 가수가 한ㆍ중ㆍ일 여가수 한 명씩을 초청해 만드는 컴플레이션 음반인데, 한국 대표로 뽑혀 작업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청바지에 티셔츠,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 듣던 대로 나윤선은 지나치게(?) 수수하고 꾸밈없는 차림으로 나타나 커버 촬영을 앞둔 스태프를 당황하게 했다. 유일한 액세서리인 귀고리도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하고 나왔단다. 덕분에 스케줄에 없던 쇼핑을 함께 하며 그를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먼저 뉴욕 무대에서의 소감을 묻자 “그 정도로 반응이 좋을 줄 상상도 못했죠. 몇 명 안 오실 줄 알았는데” 하며 소탈하게 웃는다. 왼쪽 뺨에만 고이는 보조개가 정형화된 틀을 거부하는 장르인 재즈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올해 4월에 발매한 다섯 번째 앨범 <메모리 래인(Memory Laneㆍ波痕(파흔)>은 그가 추구하는 재즈의 연장선상이지만 대중들에게 한 발 깊숙이 다가가려는 시도로 만들어졌다. 음반 중 첫 번째 노래 ‘그리고 별이 되다’가 MBC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한유주(채정안 분)가 부를 정도니 대중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정작 나윤선은 이런 대중적인 인기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단다. “저 하나도 안 유명해요. 이러고 다녀도 아무도 제가 나윤선인지 몰라봐요” 한다. 1년의 절반 이상은 주로 해외에서 지내니 왜 아니겠는가. 그의 음반은 현재 프랑스ㆍ독일ㆍ벨기에ㆍ덴마크ㆍ스위스 등 유럽은 물론 중국ㆍ일본ㆍ홍콩ㆍ말레이지아ㆍ대만ㆍ호주 등 10여 개 아시아 국가에도 출시돼 있다.
지난 3월 프랑스의 경제 일간지 <레제코>의 ‘재즈 보컬리스트 특집’엔 그의 기사가 크게 실렸다. 다이안 리브스, 다이애나 크롤 등 세계적인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들과 함께 소개된 이 기사에서 나윤선은 헤드라인에 사진과 함께 첫 번째로 이렇게 소개됐다.
‘재즈가 미국과 유럽의 음악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현재 최고의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는 나윤선이라는 한국인이다. … 살짝 베일을 쓴 맑은 메조의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음악광들도 찾기 힘든 작은 뉘앙스까지 찾아낸다. … 우리는 그녀의 깨질 듯한 목소리에 전율한다. 그녀는 세밀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숨을 멎게 만들고, 열정적인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나윤선의 재즈는 폭이 넓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에서 전설의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의 ‘매닉 디프레션(Manic Depression)’, 탱고의 전설 피아졸라의 ‘망각(Oblivion)’까지, 다양한 레퍼토리와 폭넓은 음역을 소화해 낸다. 그래서 그만의 음악적 색채를 딱 꼬집어 정의하기 어렵다. 레퍼토리가 넓다는 건 칭찬일 수도 있고, 정체성이 없다는 비난도 될 수 있을 터, 그가 스스로 생각하는 ‘나윤선식 재즈’는 무엇인지 물었다.
“이번 음반을 두고도 듣는 분에 따라 재즈다, 가요다, 크로스오버다 의견이 분분하세요. 제 음악에는 나윤선 고유의 목소리만 있고, 색채는 듣는 분들이 입혀 주시는 것 같아요. 어떤 노래를 해도 제 소리가 살아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재즈가 어떤 장르와도 소통 가능한 열린 장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나윤선의 재즈는 크로스오버의 정수를 보여준다. 나윤선의 재즈는 관성화된 재즈의 패턴을 거부한다. 그의 재즈에는 흔히들 ‘재즈’ 하면 떠올리는 흑인의 허스키한 음색이나 긴장을 풀어헤친 편안함이 없다. 대신 지적이고 세련되며, 맑고 정제돼 있다. 미지의 숲 속에서 발견한 낯선 새의 지저귐 같다고 할까. 이런 그의 음악을 두고 ‘이채롭다’, ‘생경하다’고들 한다. 나윤선이 부르는 피아졸라의 ‘망각’에는 원곡이 가진 처절한 슬픔과 끈적거림이 거세돼 있다. 담담하고 투명하다.
어떤 노래를 불러도 원곡의 오리지널리티에 매몰되지 않고 ‘나윤선식 소리’를 잃지 않는 건 그가 걸어온 음악적 여정과 맥이 닿는다. 그가 음악을 시작한 건 1994년,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 때였다. 뒤늦게 음악을 시작했기 때문에 재즈 대가들의 목소리나 창법을 모방하기보다 ‘자기만의 소리’를 굳게 지닌 채 원하는 음악을 덧입힐 수 있었다.
건국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나윤선의 꿈은 불어 선생님이었다. 교직과정을 이수하며 소박한 꿈에 한 발 한 발 다가가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싶어 대기업 홍보실에 취업했다.
“카피라이터였는데,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죠. 8개월 만에 그만두고 놀고 있는데, 한 친구가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오디션을 보라는 거예요. 대학교 때 취미 삼아 만들어 놓은 데모테이프를 보냈죠. 등 떠밀려 보낸 거였어요.”
<지하철 1호선>의 연변처녀로 데뷔
그것이 <지하철 1호선> 연출자 김민기 씨에게 발탁됐고, 나윤선은 이 뮤지컬에서 주인공 연변처녀 역을 훌륭히 소화해 냈다. 이듬해 그는 “노래를 좀 더 잘하고 싶다”는 열망에 홀연히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샹송과 재즈를 함께 배우고 싶어 택한 길이었다. 유럽 최초의 재즈 스쿨 CIM에 입학한 그는 음악을 무섭게 파고들었다. 나윤선은 다른 학생들과 태도가 달랐다. 다른 이들은 ‘재즈는 배우는 게 아니다, 연주하면서 느끼는 거다’라는 태도였지만 백지 상태의 그는 한국의 고시생처럼 파고들었다. 그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기 때문에 답답했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재즈의 정의에서부터 역사, 유명 재즈 뮤지션의 음악 세계까지. 틈나는 대로 도서관에 가서 이론을 파헤치고, 파리 거리를 오가면서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살았다. 시간을 쪼개 프랑스 보베(Beauvais) 국립음악원과 Paris Nadia & Lill Boulager 콘서바토리를 함께 다녔다. 집념 어린 공부의 결과는 놀라웠다. CIM 스쿨에서는 4년째부터 장학금을 받았고, 프랑스 보베 국립음악원은 수석 졸업했다. CIM 스쿨 6년차에는 동양인 최초로 교수 제안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그에게 교수직 제안은 대단한 파격이었다.
“교수님이 부르시더니 학교에 남아 달래요. 재즈에 대해 전혀 모르던 학생이 5년 동안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지 그 공부 방법이 궁금하다면서. 그 체험을 바탕으로 강의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한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에서 활동했으면 치열함이 덜했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파리의 재즈계는 경쟁이 굉장히 심해요. 새로운 사람이 오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잘 하면 받아들이고, 못하면 여지없이 내치죠. 살아남으려면 아주 잘하거나 특이해야 했어요. 또 어딜 가든 제가 한국 뮤지션이라는 게 따라다녀서 부담스러웠죠.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한국인 재즈 뮤지션이었으니까 내가 여기에서 못하면 나라망신이겠구나 싶었죠.”(웃음)
CIM 스쿨에서 2년간 교수를 지낸 그는 계속 남아 달라는 학교 측의 제의를 뿌리치고 귀국했다. 6개월 후 프랑스에서 만난 뮤지션들로부터 러브콜이 왔고, 본격적으로 무대 활동을 시작했다. 한 달 동안 프랑스 순회공연을 하며 인지도를 넓혔다. ‘한국에서 온 종달새 같은 재즈 가수’에 대한 찬사가 재즈 시장에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프랑스, 영국 등 서양인 남성 4인조와 나윤선으로 구성된 그룹 ‘나윤선 퀸텟’이 구성된 건 이 무렵이다. 드럼, 콘트라베이스, 비브라폰, 피아노를 연주하는 푸른 눈의 뮤지션들이 나윤선을 중심으로 뭉쳐 ‘한국적 색채 위에 유럽식 재즈를 덧입힌’ 음악을 시작했다. 2001년 첫 음반
아버지는 음대 교수, 어머니는 1세대 뮤지컬 배우
나윤선의 유전적 형질은 그의 음악가로서의 길을 일찌감치 예고한다. 그의 아버지는 한양대 음대 교수를 지낸 나영수 씨고, 어머니는 한국 뮤지컬 1세대 배우로 <춘향전>, <사운드 오브 뮤직>, <지붕 위의 바이올린> 등에 출연한 김미정 씨다. 자라면서 음악가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는지, 부모의 권유는 없었는지 궁금했다.
“전혀 없었어요. 부모님도 음악하라는 얘기를 안 하셨죠. 두 분 다 강요하는 스타일이 아니시거든요. 음악하시는 부모님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 길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시도를 안 한 것일 수도 있어요. 대학교 때 프랑스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샹송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가수 제의가 들어왔을 때에도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거절했죠.”
그럼에도 음악가가 된 것에 대해 그는 ‘팔자’니 ‘운명’을 운운한다.
“한번은 택시 기사님이 저더러 스튜어디스냐고 물어요. 사주와 역학을 공부한 분이었는데, 제가 외국을 자주 들락거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설 관상이라는 거예요. 외국 공연을 자주 하는 가수가 됐으니 예견된 운명이었나 봐요.”
그는 ‘재즈 가수 같지 않다’, ‘클래식하는 사람 같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차분하고 정돈된 말투에 단정한 스타일. 그에게서 아티스트다운 파격적인 면모를 은근히 기대했던 기자는 그와 대화하면서 그 기대를 서서히 버려야 했다.
“날씨 변화에도 민감하지 않고, 감정의 동요도 별로 없는 편이에요. 교수이셨던 아버지 밑에서 별 말썽 안 부리고 조용히 자랐어요. 술자리도 별로 안 좋아해서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에도 연습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왔고. 참 재미없게 살았죠?”
하지만 그에게도 깊숙이 감추어진 끼가 한순간에 분출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무대 위에서다. 무대에 서면 무대가 하나의 완벽한 소우주가 된다. 무대 밖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듯 공연에 몰입한다고 한다. 때론 흘러내릴 듯 나른하게, 때론 부스스한 머리를 격렬하게 휘저으며 열창하는 그를 보며 주위 사람들은 “이중인격자 아니냐”고 놀려대기도 한다고. 공연 때마다 나윤선 특유의 손동작이 있는데, 그는 이 동작을 자각하지 못한다. “어? 제가 그랬나요?” 하며.
공연하다가 감정에 북받쳐 운 적도 많다. 예술의전당에서 독일 피아니스트와 듀엣 공연을 했는데,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부를 때마다 철철 울었다고.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노래 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나지막하게 읊조린 그는 “가사가 죽이잖아요. 양희은 선생님은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쓰셨을까요?” 한다. 그 역시 스스로 작사를 하기에 작사가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의 음반 제작에 참여한 프로듀싱 멤버들이 예사롭지 않다.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제주도 농사꾼이 된 조동익은 나윤선이 곡을 요청한 지 하루 만에 두 곡을 만들어 보냈고, 덴마크의 국보급 재즈 피아니스트 닐스 란도키 역시 두 곡을 선사했다. 인기곡 ‘그리고 별이 되다’는 닐스 란도키 작곡이다. 국내는 물론 세계 유명 뮤지션들과 친분관계의 비결을 묻자 “재즈는 참 인간적인 음악”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재즈라는 장르가 참 매력 있어요. 저는 집도 없고 차도 없는데 저보다 대단하지만 훨씬 소박하게 사시는 재즈 뮤지션들을 많이 만났죠. 나이가 들어도 아이같이 해맑고 순수한 그분들을 보며 많이 배웠어요. 나이가 들어도 늙지 않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비틀스 음악은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고 젊게 느껴지는 것처럼 시간에 퇴색하지 않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나윤선은 8월 말 또 한 번 재즈의 본고장 미국 무대에 오른다. 9월엔 덴마크, 스웨덴을 거쳐 10월 국내 순회공연을 한 후 11월엔 아시아 투어를 떠난다.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풀어헤친 머리를 둘둘 말아 올려 볼펜으로 꽂더니 뿔테 안경을 쓰고 나섰다.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그의 면면을 보면서 ‘소녀 같은 70대 재즈 뮤지션 할머니’를 상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