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성지 국립 4.19묘역을 돌아보다
9반 전명수
통일교육원에서 1박2일 일정으로 연수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삼각산아래에 온 길에 수유동에 위치한 국립 4.19민주묘지를 돌아보았다. 우리의 역사는 고대국가 때부터 왕조정치를 형성하여 왔으며 안타깝게도 일제의 치하에서 식민지 생활을 하게 되어 민족의 정서가 피폐할 대로 피폐해 진 것이 사실이다. 우여 곡절 끝에 독립을 하였으나 이념논쟁으로 사회와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다가 6.25 동란을 겪는 등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우리 국민들의 삶이었다. 민주주의를 경험해 보지 못한 국민들의 귀와 입을 막아버린 체 살아오게 되었으며 위정자들은 권력의 맛을 본지라 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심으로 온갖 부정과 부패를 자행하였으니 헌법을 마음대로 고치는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통령, 부통령 선거 방식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기도 하였고 국회에서 헌법 개정을 하면서 가결 인원에 미달하여 부결 선포한 것을 사사오입의 논리를 들고 나와 가결 된 것으로 번복하는 등 횡포는 끝이 없다가 선거에서 절대 불리할 것 같은 분위기가 확산되자 불법, 부정 선거를 노골적으로 자행하게 되었다. 그것이 1960. 3.15에 실시한 정. 부통령선거인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창피 하리 만치 얼굴 뜨거운 짓을 자행하였으니 사전투표, 3인조, 5인조 감시제, 야당 참관인 투표소 출입제한 등이다. 이렇게 하여 당시 여당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국민들은 이를 수용하지 아니하고 항거하게 되었다. 그 선두에 나선 집단이 학생들이었다. 3.15부정선거 무효를 외치며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은 물러가라며 거리에 뛰쳐나온 학생들의 외침이 바로 4.19혁명인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의 발달은 2.28 대구 학생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2.28 일요일 낮에 대구 수성 천변에서 야당 대통령 후보의 연설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시내 각 고등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명분을 내세워 등교할 것을 지시하여 이에 반기를 든 경북고등학교, 경북대 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경북여자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한 것이 발단이 된 사건이다. 그 후 마산 김주열학생이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체 바다 속에서 떠올라 와 전 국민들이 분노하기에 이르렀고 대학생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정권퇴진 운동을 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경찰을 내세워 진압을 하면서 최루탄은 물론 급기야 무력으로 총탄을 발포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숨진 꽃다운 학생들의 수가 185명에 이른다. 이 혁명으로 인하여 대통령은 하야함과 동시에 정권교체를 촉발하게 되었고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것이다. 위대한 과업을 수행한 이들의 원혼을 위로하고 넋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묘역을 조성하였으니 서울시 강북구 수유리에 위치한 민족의 성지 국립 4.19민주묘지이다.
이곳 성지에 안장할 수 있는 대상은 4.19혁면 사망자와 부상자. 4.19혁명 공로자이며 수용 가능한 묘역은 547기라고 소개하였다. 총면적은 96,837㎡이며 묘역과 유영봉안소, 기념관등의 성역공간은 29,405㎡이다. 삼각산으로 올라가는 길목 옆 작은 다리를 건너 묘지 초입부터 깔끔하게 정돈되어 엄숙한 분위기가 감돈다. 아래쪽에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기념탑을 지나 묘역으로 들어선다. 제1묘역과 제2묘역으로 나누어 져 있는데 여기 온 길에 내가 찾아볼 묘지가 있다. 내 누님과 동갑네기이며 먼 일족의 형님이고 문인의 길을 안내해준 소설가이며 나무 시인인 후박 선생의 당숙이기도 한 분인데 당시 중앙대학교 신문과 1학년에 재학 중에 시위대의 앞장에 섰다가 경찰의 총탄에 쓰러진 것이다. 이른 아침이라 안내소 직원이 출근하지 아니하여 묘역 초입부터 차근차근 돌아보며 형님의 묘지를 찾았다. ‘전무영의 묘’라 쓰여 진 비석 왼쪽에는 작은 태극기가 꽂혀있고 오른쪽에는 조화가 꽂혀 있다. 마음을 모아 재배하고 묵념을 올렸다. 형님과 같이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차츰 성숙해져 가고 있으며 온 국민이 안정된 가운데 잘 살아가고 있으므로 편안하게 영면하시기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 위쪽에 마련된 유영 봉안소(遺靈奉安所)에 들려 묵념을 올리고 한 분 한 분 영정 사진을 들여다보고 밖으로 나와 방명록에 사인하고 내려왔다. 기념관으로 내려오는 길에 조형물이 세워져 있어 가까이 가보았더니 4.19와 관련한 시 귀를 대리석 벽체 양편에 새겨 두었다. 4.19 혁명을 소재로 발표한 시 중에서 공모전을 거쳐 12수를 선정하여 이곳에 새긴 수호예찬의 비라 한다. 그 중에 한 수만 적어본다.
진 혼 곡
이한직
겨레 위하여 목숨을 던져
목놓아 외친 소리 네가 싸워 이긴 것
메아리 되어 우리 거두리
강산을 뒤흔드네 값진 피 식기 전에
가시를 이고 이웃을 위하여
횃불을 높이 든 이 의로움을 위하여
그 뜻 길이 받들어 그 젊음 걸었던 일
우리 피도 뿌리리 헛되게는 않으리
고이 잠들라 고이 잠들라
동지 품에 안겨서 태극기에 쌓여서
먼동이 트기 전에 먼동이 트기 전에
가고만 사람들아 가고만 사람들아
젊은 넋들아 젊은 넋들아
기념관에는 4.19의 배경과 경과 등 관련 자료와 사진은 물론 혁명 당시의 영상물도 시청할 수 있도록 꾸며 놓고 해설사도 배치되어 있다. 기념관 3층 전망대 위에 올라가 보았다. 삼각산의 수려한 명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이곳에 성지로 터를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란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삼각산 자락에 잠들고 있는 것이다. 이준열사, 손병희선생, 이시영 초대 부통령, 신익희선생, 김창숙 임시정부 부의장, 이명룡 3.1독립운동 민족대표, 여운형선생, 조병옥선생, 김병로 대법원장, 양일동의원 등 수많은 분들이 영면하고 있는 삼각산 자락이다. 기념관을 나와 횃불 상징탑을 거쳐 안내소 옆에서 묘역을 향하여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젊은 원혼들의 영면을 빌어 드렸다.
첫댓글 민족의 성지 국립 4.19묘역을 다녀 오셨내요. 3.15부정선거 무효를 외치며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은 물러가라며 거리에 뛰쳐나온 학생들의 외침이다 급기야 정부에서는 경찰을 내세워 강제 진압과 동시에 무력으로 총탄을 발포하여 이로 인하여 숨진 꽃다운 학생들의 수가 185명에 이른다. 이 혁명으로 인하여 대통령은 하야함과 동시에 정권교체를 촉발하게 대는 계기가 대엇으며 꼿다운 젊은 원혼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제조명 해주신 송하님 에게 감사을 드리며 올려주신 좋은글귀 잘 읽고 지나 갑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 하십시요.
2.28대구고등학생궐기 3,15부정선거 4,11 마산 김주열 최루탄사건 4.18고려대학교 궐기 4.19전국민 봉귀 4.25대학교수 선언문 낭독 이승만대통령하야 등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역사의 큰획 저는 그때 고등학교1학년에 재학중전교생이 김주열군 추모키위해 부산에서 마산까지 도보행진 한것등이 생각나네요 송하님 다시 한번 민주주의 대해 생각케 해주심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