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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세대의 결국에 대하여 가르치심
마태복음 12:43-45(눅 11:43-45)
마태복음 12장 43-45절/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예수께서는 앞서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귀신들려 소경에다가 벙어리가 된 자를 고쳐주시는 이적을 행했으나, 이를 예수님이 귀신의 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며 예수님을 배척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그리하는 것은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열리는 것을 들어서 그들의 마음이 악한 까닭에 악한 말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셨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와서 이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자 악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일수록 이적을 요구한다며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냈듯이 인자도 땅 속에서 사흘을 있게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요나보다 더 크신 분이 왔지만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며 그러한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며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정죄할 것인데, 심판 날에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남방의 먼 땅에서 온 스바 여왕도 일어나 그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 왔는데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그분을 믿지 않음으로써 남방 여왕에서 온 스바 여왕보다 더 악한 죄에 있기 때문입니다. 스바 여왕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솔로몬에게서 와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는 지혜를 들었으나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욱 뛰어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 알게 해주셨으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스바 여왕이 이들 악한 자들을 정죄하는 일에 니느웨 사람과 합세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선지자 요나 당시의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보다도 그리고 남방으로부터 온 이방여인인 스바 여왕보다도 더 악한 죄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이제 본문에서 악한 세대에 있는 이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 자들인지를 알게 해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에서 이들이 자신들이 있는 죄에서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까지 더욱 악하게 될 것이라는데 말씀하시는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들은 말입니다. 마치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과 같습니다. 그 더러운 귀신이 귀신들렸던 사람에게서 떠나 잠시 동안 물 없는 광야를 돌아다니며 쉴 곳을 찾지만 찾지 못하면 더러운 귀신은 “내가 나왔던 그 사람에게로 되돌아가자.” 라고 말하며 그 사람에게로 돌아오는데, 돌아와서 보니까 그 사람의 마음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으나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귀신 일곱과 함께 찾아와서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산다는 것을 통해서 “그러면 그 사람의 형편이 어찌 될 것인가?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은 처음 때보다 더 비참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이 이 귀신들렸던 자에게서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자신의 동료인 일곱 귀신을 데려와 함께 살게 됨으로 귀신들린 자가 더 좋지 않은 상태에 있게 되었다는 것은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귀신이 떠났다가 그 사람에게 다시 되돌아왔다거나 물 없는 광야를 다니며 쉬기를 구하였지만 그러한 곳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떤 것이며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에 이 비유의 초점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가지고 귀신은 어떤 사람에게 들어갔다가 떠나기도 하고 다시 또 들어가서 이전보다 더 나쁘게 만든다는 것으로 이해하여 나가거나, 귀신은 물 있는 곳을 찾아다닌다며 귀신이 쉬기 좋아하는 곳이 물 있는 곳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귀신을 이해하여 나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임하지 않은 자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악한 영의 지배에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한시도 악한 영에게서 떠나 있는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악한 세대에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나중 형편이 처음 형편보다 더욱 악할 것임을 경고하시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 생생하게 표현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사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곧 “이 악한 세대가 마치 이와 같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절에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유대 종교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계명을 좇아 경건에 있는 것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이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따라서 이 특권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호의를 통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성령>을 따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척함으로써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거부함으로 그의 마음은 악한 영인 더러운 귀신이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이 열려져 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악한 영인 더러운 귀신이 들어와 지배할 때에는 이들의 상태는 예수님을 거절한 마음에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아주 완고한 마음을 더욱 강하게 가져나가게 되므로 이들의 형편은 예수님을 거절하기 이전의 하나님의 뜻이 알려지고 있는 율법을 받고 있는 상태에 있는 때보다 더욱 악화된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과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후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그 마음이 더욱 완악한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죽일 생각에 예수님을 사로잡을 음모를 가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사로잡아서는 이방인의 손에 넘기고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할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경우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거룩한 성령이 없는 자의 유대인 모두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하나의 마음이 되어서 같은 악함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이죠. 하나님의 영이신 거룩한 성령이 없음으로 인해서 악한 영인 더러운 귀신의 지배에 있는 악한 마음에 있는 이 세대에서도 보게 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함께 하셔서 말하게 하심에 있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단 한마디도 그들에게서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말하는 선한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성령이 거하시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악한 영인 더러운 귀신에 의해서 지배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말인 예수님을 부인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악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가 어찌 될 것인지요 “…이 악한 세대가 또 이렇게 되리라.” 라고 말씀하신데 따라서 예수님을 부인함에 있는 결국은 자신들이 내 뱉은 악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게 됩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할 것이다.”(마 10:32, 참조. 눅 12:8)에 있을 것이어서, 그들이 한 말 그대로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악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의 결국이 어찌 될 것인지 그 판결을 잘 압니다. 그러한 우리는 이 악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상기하며 그 감사에 있습니다.
야고보는 한 샘에서는 오직 한 가지 물만 낸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이 고여 있는 샘에서는 물이 죽어 부패하여 썩어갑니다. 그래서 죽은 물에서는 부패하여 썩은 물 밖에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샘에서는 결코 살아 있는 생수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물이 솟아 흐르는 샘에서는 살아있는 물을 얻게 됩니다. 이 샘에서는 오직 한 가지 물만 보게 됩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물, 생수입니다.
우리가 말이죠.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하는 고백에 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섬김에 있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생생한 현장 방송을 생명을 하는 생방송처럼 우리 속에서 솟아나오는 샘물과 같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신앙고백이 날마다 나오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단지 육의 몸으로 있는 것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을 때는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항상 죄로 규정되는 악일뿐입니다. 그러나 그 ‘나’가 성령의 함께 하심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정결하신 성령님의 정결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천상계시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와 생명수의 강을 이루고 이 강으로 흐르는 생명수가 강 양쪽 주변에 심어진 열 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달마다 새 열매를 맺고, 그 나뭇잎은 온 세계의 민족들을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이 되었다고 말씀해 주신 것처럼 성령님에 나오는 정결은 우리를 치료하여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의 선입니다. 이 정결은 육의 본성이 시키는 대로 육의 욕망을 따르는 것에서 갖는 마음과 여기에서 나오는 생각과 이 생각을 따라 움직이는 행동, 이것으로 있는 말에 있는 악함을 치료하여 정결케 하심에 있게 하십니다. 우리의 육은 할 수만 있으면 성령님을 거스려 살게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한 육에 있는 자인 우리에게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성령님의 정결케 하심에 있어 누구든지 정결합니다. 혹자는 성령님이 임하신 자의 마음은 정결한데 육신은 더럽다는 이원론적인 사고에 있습니다만, 이러한 사고는 영지주의적 사고에 있는 것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임하셔서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서 죄악 된 우리 육신을 죄 사하심 속에 두고서 날마다 정결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신 자는 죄인을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의 보혈의 공효를 성령님으로부터 받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임하신 자는 모든 죄로부터 정결, 곧 깨끗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신 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성전, 곧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이 성령님이 임하신 자는 이전에 머물며 지배하던 악한 영이 쫓겨남에 있음으로 그동안 난잡하며 황폐하게 되었던 집이 마치 깨끗이 청소되고 잘 정리 정돈이 된 것처럼 깨끗하게 된 정결한 자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렇고 우리 육이 저런 데요!”라고 말하는지요. 그래요 늘 그런 우리인데 말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성령님께서는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레 26:12)는 하나님과 그 백성 된 관계성에 두시고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것이다.”(레 11:45)라고 하신‘하나님의 거룩’에 의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보혈의 공효를 베풀어 주셔서 말입니다. 우리가 정결한 자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렇게 주님의 보혈의 공효가 날마다 효력있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 정결함에 있는 거룩은 다시는 훼손됨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러워짐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의 거룩이 되심으로써, 의로운 자는 더욱[계속해서/그대로; continue to] 의롭고, 거룩한 자는 더욱[계속해서/그대로; continue to] 거룩합니다(계 22:11).
혹자는 그러한 자신일지라도 자신의 불의요 불법스런 모습에 늘 실망하며 자신이 받은 구원에, 그리고 구원 얻은 믿음에 회의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심지어는 구원의 상실조차도 생각하며 이를 염려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행 2:21), 그래서“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는다.”(행 15:11) 라는 것에 있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성령님의 능력]이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에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있게 하시니 정결한 자로 있습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그분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데 문제 제기가 되는 어떤 흠도 결점도 없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 의해서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의 새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를 교리로서는‘중생’, 곧‘거듭남’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영생’,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있는 자에게서 보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이 생명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의로우심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의롭다 함에, 거룩하다 함에 있습니다. 이 의로움, 이 거룩함에 있는 자는 다시는 불의하며 더럽지 않습니다. 불의해 질수가 없으며, 더러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로서도 그렇습니다. 즉, 우리가 불의를 저지르는 행위가, 우리가 더러움에 있는 행위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의롭다 함에 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거룩하다 함에 있는 우리를 불의한 자가 되게 하고 더러운 자가 되게 하지를 못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움에 있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함에 있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도 그대로 하나님의 의로움에 있게 하시며 하나님의 거룩함에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옷을 갈아입듯이 먼지 묻고 때가 낀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으며, 먼지 묻고 때가 낀 손과 발을 씻는 것과 같습니다. 옷에 묻은 먼지, 때가 우리라고 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부정한 자라고 더럽게 규정하지 못합니다. 손과 발에 묻은 먼지, 때가 우리라고 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인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어린 자녀가 이렇게 되어 오면 부모는 세숫대야나 물통에 물을 받아 놓고 손과 발을 깨끗이 씻어 주고, 옷을 깨끗이 빨아 다시 입혀 주면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어린 자녀가 손과 발이 좀 더러워져서 왔다고 해서, 어린 자녀가 입은 옷이 좀 더러워졌다고 해서, 그 자녀를 가까이 하지 못할, 상종하지 못할 더러운 자식이라고 결코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자녀를 오히려 두 팔로 안아 감싸고 예뻐하면서 더럽혀진 옷을 벗겨 새 옷으로 다시 입히고 더럽혀진 손과 발을 씻어 주고 같이 놀아줍니다. 성령님이 임하심으로써 성령님에게 속한 사람, 곧 성령의 사람이 된 사람은 성령님에게서 나오는 정결에 의해서 다시는 더러워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새생명으로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으며, 죄가 발휘되는 족족 모든 죄로부터 그를 깨끗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믿는 모든 자의 주님이 되셔서 구속의 피를 통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선이 말입니다.
혹자는 이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하며 반발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막 살아도 되는 것이냐? 라고 말입니다. 성경은 그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막 살아보십시오. 그래서 불의를 저지르고 불법을 행하여 보십시오. 이는 말이죠. 이방인이라도 주의하고 조심하며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형제요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산다면요. 그는 그렇게 막 산 것에 대해서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벌금을 내든지 감옥의 형을 살든지 또는 그 이상의 형벌을 받든지 말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탐욕대로 살아보십시오. 그 죄가 그 자신을 사형에 해당하다고 파멸로 끌고 갈 것입니다. 불의요 불법이란 그렇게 좋지 않은 것이요 나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놓고 성경은 이야기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이 우리에게 있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시시비비를 논하며 설왕설래 합니다만,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불의요 불법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여 정결케 하신, 그래서 의롭다 함에 있고 거룩하다 함에 있으며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단언하건대 결코 헛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우리가 의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믿음이 없는] 이 세대에서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우리에게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성령님이 우리를 어떻게 권능 있게 지배하여 나가는지를 성령의 소욕을 좇는 것에서 나타내시는 여러 가지 - 소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를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성령을 좇는 삶’, 또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으로 이해를 하며, 성령의 열매를 삶의 행위가 열매 맺어지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하는 행동을 하며 그 삶을 사는 것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사는 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는 말이죠. 우리가 육체의 본성에서 나오는 욕망대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 성령님이 가지신 생각에서 성령님이 발휘하는 생각에 따라 성령님에게서 나오는 생각을 우리가 따르며 사는 것에 우리의 생각이 있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에 있는 우리는 육체의 본성에서 나오는 욕망대로 살 자가 아닙니다. 이 욕망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과 한 몸이 된 것에 있기에 날마다 못 박고, 성령님으로부터 나오는 생각을 좇아 그분이 기뻐하시는 원하심을 받들어 따르는 것에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가 말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해지는 말인 선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무엇이 말해지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입은 변화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고후 5:17) ‘성령의 사람’으로 새사람이 된 데 따라 성령의 열매가 말해지는 것으로, 성령의 열매는 성령님에게서 나와 열리는 열매, 즉 성령님이 맺으시는 열매를 뜻합니다. 악하고 믿음이 없어 오직 육체뿐인 사람들 앞에서 성령으로 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에 있어, 이 모든 열매가 말해주는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있어 우리가 단 한시도 믿음에서 떠나 영혼의 멸망에 있지 않고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벧전 1:9)에 있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육체의 일에서 보게 되는 열매로 말해지는 온갖 악한 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직 육체의 정욕을 따라 육체의 일에 현저하게 있는 악하고 음란한[믿음이 없는] 세대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의로운[정결한] 믿음에 우리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