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18. 묵상글 들 ( 연중33수. - 하느님 사랑에 우리 사랑을 더하고 곱하는. 등 )
----------------------------------------------------
201118.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33주 수요일-하느님 사랑에 우리 사랑을 더하고 곱하는
지난주일 우리가 들은 마태오 복음의 달란트 비유와
오늘 들은 루카 복음의 미나 비유는 같은 내용이라고 흔히 얘기됩니다.
받은 돈을 어떻게 활용하여 얼마나 벌었는지 종말에 셈하여
성실히 벌은 자는 상 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벌 받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것 같으면서 사뭇 다른 것이 두 비유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각기 다르게 달란트를 주는 데 비해
오늘 미나의 경우는 열 사람에게 똑같이 한 미나를 줍니다.
이럴 경우 달란트와 미나가 각기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해야 합니다.
달란트나 미나가 화폐 단위인데 능력에 따라 달리 준다는 달란트 비유는
그대로 돈이라고 이해해도 우리의 현실 적용에 있어서 별 문제가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각기 다른 부를 허용하시지요.
그런데 미나의 경우는 똑같이 한 미나씩을 주시는데
우리의 현실에서 하느님께서는 정말 똑같이 부를 허용하십니까?
그러므로 미나를 돈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는데
은총 곧 거저 주시는 것이 돈일 수도 있고,
능력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돈이나 능력은 하느님께서 각기 다르게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저런 능력을 주시며,
같은 능력을 주실지라도, 예를 들어 같은 음악적 재능을 주실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더 많이, 어떤 사람에게 좀 적게 주시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다르게 주셔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돈이나 능력을 다르게 주신다 해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차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같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미나는 똑같이 주시는 하느님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미나를 사랑이라고 바꿔 이해해도 괜찮다면
비유가 뜻하는 것은 그러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느님 사랑을 우리는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종들이 주인을 미워하지 않고 그래서
주인을 미워한 것 때문에는 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미나의 비유에서는 사람들이 귀족을 미워하여
귀족이 왕이 되어오는 걸 반대하여 임금의 원수가 되고 처벌도 받게 되는데
우리는 이런 종들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미워하여 원수가 되고,
하느님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은 적어도 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둘째로 미나의 비유에는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의 사랑을 더하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의 사랑을 곱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우리 사랑의 관계에서 두 가지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 사랑이 필요 없이 나의 사랑으로 사랑하려는 잘못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 사랑에 아무런 응답도 보탬도 하지 않는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하되 내 사랑으로만 사랑하려들지 말고
미나 곧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아서 사랑해야 할 것이며
이렇게 사랑을 할 때 우리의 사랑이 배가되어
열 고을도 다스리고, 다섯 고을을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상으로 고을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도 달란트 비유에는 없는,
그러니까 달란크 비유와 다른 점인데 사랑만큼
하느님 백성을 하느님 대신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 대신 하느님 백성을 섬길 사람은 이렇듯 하느님 사랑을
받아 자기의 사랑을 배가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
201118. 연중33주간수요일. 이기우 신부님. 사자, 황소, 사람 그리고 독수리.
오늘 요한 묵시록 4장의 독서에는, 네 생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늘에 열린 문으로 사도 요한이 본 환시의 하나입니다.
하늘의 임금이 앉는 자리 즉 어좌(御座)의 둘레에 네 생물이 여섯 개씩 달린
날개로 날아다니며 가득 달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는 내용인데,
그 네 생물에 대한 묘사가 이렇습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
묵시문학적 암호로 되어 있는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록한 네 복음서의
제1장들을 생물의 특징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의 제1장에는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마치 포효하는
사자의 소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16개장에 이르는 전편에서 가르침을
거의 생략하고 길에서 길로 옮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역동적인 활약상을 묘사한다는 점에서도 마르코 복음은 날쎈 사자에 비길 만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마르코 복음서를 예수님을 모르는 예비자들을 위한 교리서로 활용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사건 묘사만으로 빠르게 전개하며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제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기 때문에 그 상징이 사람입니다.
또한 28개장에 이르는 전편에서 이제 갓 예수님의 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 그분을 본받아
하느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갈 수 있도록 그분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알려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 가르침이 산상설교, 파견설교, 비유설교, 공동체설교 그리고 종말설교입니다.
루카 복음의 제1장에는 유다교의 사제였던 즈카르야가 아들 요한을 갖기 전에
당번이 되어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사의 제물 중 가장 크고 귀한 것이 황소였기에 루카 복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이 구약성경을 알고 있던 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세례를
이제 막 받은 신자들의 신앙을 성숙시키려 했었다면, 24개장에 이르는 전편에서
루카 복음은 구약성경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처음부터 하나하나씩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하는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마르코와 마태오가 각각 하느님 나라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전하는 대목을 루카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고 풀이해 놓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의 제1장은 한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시는 말씀으로서 예수님을 소개하는데, 그 광경이 마치
높은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독수리를 연상시킨다 하여 요한 복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3개장에 이르는 요한 복음의 전편에서 사도 요한은 마르코, 마태오, 루카가 전한
예수님의 공생활을 한 차원 높여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룩하는 파스카에 대해 재조명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으며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본 성숙한 신앙인들을 대상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생활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에 대해서도
요한은 세족례 이야기로 대치하면서 그 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여 먹고 마심으로써 당신을 기념하여 계승하라시던
예수님의 당부는 서로 발을 씻어 주는 행위로 상징되는 상호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알려줌으로써, 다른 복음사가들이 십계명을
압축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이라고 전해준 것을
더 간추려 전해주고 있습니다. 독수리처럼 진리를 꿰뚫어보는 관상의 안목입니다.
그런데 네 복음서를 상징하는 이 네 생물들이 날개를 여섯 개씩이나 달고
사방으로 날아다녔고 또 안으로 눈들이 가득 달려 있었다고 사도 요한이 암호처럼
묘사함으로써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신자들에게 전하려 했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다음 문장을 보면, 그 네 생물들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이라고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 날개와 눈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한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즉 네 복음의 목적은 우리 인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행하는 기도생활의 위계질서를 암시합니다.
즉, 우리는 무언가 필요한 것을 청원하고, 또 저지른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매달리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하고 있지만 이 모든 기도들
그러니까 청원과 속죄와 감사의 기도 지향을 포괄하여 완성하는 지향은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 나라를 살고자 지향하면 우리가
청원하고 속죄하며 감사하는 그 모든 것들은 곁들여서 덤으로 얻어진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알려주신 기도의 공리이지요?
그래서 기도는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도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늘 유지하는 일과, 내가 기도로써 그분을 움직이려들지 말고
그분의 뜻을 헤아려 실천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예수님에 대해 알려주는 마르코 복음, 교회 생활을
가르쳐주는 마태오 복음, 복음화를 묵상하게 해 주는 루카 복음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파스카를 관상하게 해 주는 요한 복음이 전해 주는 진리로
하느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
201118.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
루카 19, 11-28(연중 33 수)
겨울의 길목입니다. 바퀴를 달고 달아나는 가을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고, 길가에 군데군데 몰아다 놓은 가을의 노고, 가을의 땀방울이 쓸쓸합니다. 그런데 잎이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나면, 결실이 더 잘 드러나 보입니다. 곧 그 나무가 속이 꽉 찬 나무인지 속 텅 빈 나무인지가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는 이번 주일 복음으로 들었던 “탈렌트의 비유”(루카 25,14-30)의 병렬복음입니다. 이 비유는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처럼 보여 지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자칫 결과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결실 그 자체’가 핵심인 것이 아닙니다. 곧 결심을 많이 맺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실을 내는 나무가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결실을 통해서 나무의 본질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떤 나무가 결실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루카 6,44-45)
그렇습니다. 열매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한 비유입니다. 곧 ‘착한 종’은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성실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악한 종은’ 주인에 대해서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놓지 않는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루카 19,23)으로 여겼기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요,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빛은 빛의 열매를 맺고 어둠은 어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가꾸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인격을 다듬어야할 일입니다. 열매에 치중하다 자신을 그르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주인의 선물을 악용하지도 말아야 할 일입니다. 선물(미나)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사실, 이처럼 믿음은 능력이요 불신은 무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이 힘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활동하신 분의 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또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성실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미나를 나누어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 19,13)
주님!
당신께서는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사랑과 신의의 표시로 저에게 ‘미나’를 맡기셨습니다.
잘 간직하라고 가 아니라, 잘 열매 맺으라고 씨앗으로 선사하셨습니다.
신의를 땅에 묻어버리고 제 신변안전만 바라는 속 빈 강정이 되지 않게 하소서.
믿음과 사랑이 꽉 찬 열매를 들고 당신 앞에 나서게 하소서. 아멘.
----------------------------------------------------
201118. 연중33주간 수요일.<작은 일에 충실하라>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 천상의 축복은 믿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환상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주십니다. 각자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탈랜트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충실하게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협력의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열 개도 있고, 다섯도 있습니다. 그림과 같은 호숫가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모험을 강행하는 담대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미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총의 삶과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활용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한다면 무엇인가 해야 했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자캐오는‘먼저 달려 나무에 올라 기다렸습니다.’철은 녹이 슬고, 용수철도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 써야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느님의 은혜에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한 미나를 가진 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자에게 주어라.’하고 말하자 주인에게 ‘주인님, 저이는 열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사람입니다. 순명하지 않고 이유를 대는 그들은 결국 마지막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는 물론 이웃을 망가뜨립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탈랜트가 있고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사용한 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을 피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뿌리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소중히 여기는 하루를 기대합니다. 어떠한 큰일도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만큼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은 다 다르고 그것은 단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분수에 맞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많이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귀히 여기는 주님이시니 하나를 가지고 열 개를 늘렸건 다섯으로 늘렸건 그것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한 땀과 노력과 정성, 희생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산다.”고 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뵙고자 노력하면 만나게 되고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기쁨도 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가19,26). 하신 말씀은 노력한 정성과 수고는 크게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함은 결국 잃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빼앗아가기도 전에 잃고서는 남의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이 신앙심이 없다고 넋두리 하고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신앙을 키워주지 못하고 일깨워 주지 못한 저의 잘못을 자책하는 오늘입니다. 대접을 받기에 익숙해지고 독불장군으로 고착되는 오늘을 봉헌합니다. 작은 일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01118. 연중 제33주간 수요일.<미나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님.
루카복음에 있는 ‘미나의 비유’는,
비유 자체는 마태오복음에 있는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와 같은 비유인데,
‘탈렌트의 비유’에는 없는 이야기가 비유 앞뒤에 있습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루카 19,12).”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루카 19,14).”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 (루카 19,15)”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루카 19,27)”
<이 이야기는 마태오복음 2장 22절에 나오는 '아르켈라오스'의
실제 이야기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역을 통치하던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4년경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스가 왕위를 계승하려고 로마 황제를 찾아갔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왕이나 영주들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르켈라오스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왕위 계승을 막으려고 민간 사절단을 로마로 파견했습니다.
로마 황제는 절충안으로 아르켈라오스를 헤로데 대왕의 왕국의 절반인
유다와 사마리아만 다스리는 지방 영주로 책봉했습니다.
아르켈라오스는 로마에서 귀국한 다음에
자기를 반대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잘 기억하고 있는 그 일을 소재로 하여
당신의 승천과 재림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비유에서 ‘어떤 귀족’은 예수님입니다.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간 그 귀족이 떠나 있는 기간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입니다.
그 귀족을 미워해서 사절을 보내어 그가 임금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백성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칭 메시아들도 많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다른 메시아를 믿는
이단 종파들도 많은데, 메시아는 예수님 한 분뿐이시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사도들이 이어받아서 선포한 그 복음 하나뿐입니다(갈라 1,7).
하느님만 믿고 예수님을 안 믿는 종파도 있는데,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안 믿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하느님을 올바르게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 귀족이 왕권을 받고 돌아오는 일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합니다.
왕권을 받고 돌아온 그가 반대자들을 처형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의 심판을(최후의 심판을) 뜻합니다.
(비유의 표현만 보면 정치보복처럼 보이는데, 최후의 심판은 보복이 아닙니다.
구원받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왕권을 받고 돌아온 귀족의 비유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말씀하신 비유이고,
‘미나의 비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루카 19,13).”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루카 19,15-17)”
(한 미나는 육십 데나리온이고, 한 탈렌트는 삼천육백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따라서 탈렌트는 거액의 돈인데, 미나는 그렇게 큰돈은 아닙니다.)
비유에는 ‘종 열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모든 종들’입니다.
심판은 어떤 특권이나 특혜 같은 것은 없고,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 일입니다.
비유에서 ‘미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뜻하고,
미나로 벌이를 하는 것은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속해 있는 시간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시간 동안에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잘 활용해서,
‘은총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비유에서는, 주인은 종들이 한 일의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고, 뜻으로는 ‘과정의 성실함’이 강조되어 있는 비유입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업적을 남기는 등의 결과보다도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한 생활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보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주인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다.”고 말하면서 첫째 종을 칭찬합니다.
그리고 그 종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즉 ‘대단히 큰 상’을 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신앙생활은 ‘아주 작은 일’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대단히 큰 상’입니다.
(이것은 양쪽을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뜻이지,
실제로 이 세상에서의 신앙생활이 그렇게 ‘아주 작은 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받게 될 상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의 신앙생활도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비유에서는 종들이 한 일의 결과에 따라서 ‘열 고을’과 ‘다섯 고을’로
종들이 받게 되는 상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 표현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는 어떤 차이나
차별이 없고, 모두가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은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표현일 뿐이고, 실제로 그런 권한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세 번째 종의 변명은(루카 19,20-21)
‘탈렌트의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의 변명과 같습니다(마태 25,24-25).
세 번째 종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기 싫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은 무섭고, 그래서 ‘죄만 안 지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소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죄 짓는 일은 하지 않지만
신앙인으로서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믿음과 사랑과 회개를 실천한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죄만 안 지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
201118.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9,11-28: 열 미나의 비유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으려고 ‘먼 고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거룩하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아들이고, ‘여행’은 그분께서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 왜 왕권을 받고자 하늘에 오르셨을까?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당신 아들에게도 그것을 주셨다. 그분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이 오른쪽에 앉으시어”(히브 1,3) 당신의 원수들을 발판으로 삼게 될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갖가지 거룩한 선물을 주신다. 이것이 미나/탈렌트의 뜻이다. 이 미나를 받은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무를 받는다. 그들은 직무를 실행하며 이윤을 낸다. 그래서 성실히 일했다는 칭찬을 듣고, 영원한 영예를 누릴 자격을 인정받는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주셨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일러주신다.
그러나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14절) 한다. “일찍이 다른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들을 내가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와 내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요한 15,24)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끊임없이 예고했는데도 그들은 그분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 했고, 그분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의 능력과 준비된 상태에 따라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마태오 복음에는 각 사람이 받은 탈렌트가 달랐다고 한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그리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셨다고 한다.(마태 25,15 참조). 각자에게 그 능력에 따라 그 분배가 이루어졌다. 그것을 잘 받아서 잘 활용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도록 하자.
우리가 바쳐야 할 이자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행실 안에 자리 잡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산다면 주님께 이익을 남겨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주님께 이런 칭찬을 들을 것이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17절) 우리는 주님께 받은 돈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거나, “땅에” 숨겨두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은 당신의 돈이 어떤 면으로든지 이윤을 남기기를 바라신다. 수건에 싸서 두었던 종은 심판을 받았으며, 결국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고 만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24절)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우리가 열 미나를 바치고 다섯 미나를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바친 것을 모두 돌려받는다. 하느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다. 우리가 풍요하기를 바라실 뿐이다. 열매를 맺는 삶이 중요하다.
----------------------------------------------------
201118. 새벽을 열며.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빠다킹 신부님.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어느 보육원에서 몇 개월 동안 일 한 적이 있습니다. 보육원이라고 아이들과 노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바깥 일, 일명 ‘노가다’라고 불리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제까지 공부만 하던 저로서는 이 바깥 일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오시던 분들은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하루 하고서도 온몸이 쑤셔서 파스를 붙여야지만 일할 수 있었는데, 이분들은 연세가 많으신데도 별로 힘들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여쭤보니, “인이 박여서 괜찮아.”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인이 박이면 그렇게 힘들지 않다는 것이지요. 인이 박일 때까지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인이 박이기 전까지는 힘들고 어렵겠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야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나게 됩니다.
평생 공부와 연구를 하신 분은 인이 박여서 공부와 연구가 힘들게 느끼지 않는 것이고, 평생 운동을 하신 분도 인이 박여서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운동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그렇지 않을까요?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시는 분은 어떤 상태일까요? 아직 인이 박이지 않은 것입니다. 봉사와 희생이 어려운 이유는 왜일까요? 이 역시 인이 박이지 않아서입니다. 인이 박일 때까지 한다면 과연 못할 것이 무엇일까요?
미나의 비유 말씀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왕권을 받으려고 ‘먼 고장’으로 여행을 떠난 귀족은 떠나면서 종들에게 미나를 나눠줍니다. 그리고 왕권을 받고 돌아와서 종들과 셈을 합니다.
첫 번째 종은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보상은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습니다. 둘째 종은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어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종은 받은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 미나를 가진 자에게 이 한 미나를 뺏깁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이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저 선물을 줄 뿐입니다. 미나를 주고, 벌어온 미나의 숫자만큼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줍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게 될 때, 그 사업의 수익금을 얻는 것은 주님이 아닌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이 박일 때까지 노력한다면, 그 노력의 결과로 얻는 것은 모두 나의 것입니다.
어느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냥 주님이 무섭다면서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종의 모습이 아닌, 인이 박일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 충실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붙드는 일, 삶에서 우리가 마음이 상해 가며 할 일은 오직 그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
쉼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일로 인해 너무 힘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을 들어보니, 쉬지 않고 일만 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좀 쉬면 어떻겠냐고 물으니, 그러면 누가 가족을 책임지냐고 반문하십니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이 꽉 물고 일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분과 대화를 해 보니 책에서 보았던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 같았습니다. 일에 너무 몰두하고 있어서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것입니다.
쉬는 것밖에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데, 1년 365일 쉬는 날 없이 일만 하고 있습니다. 나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생각에 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 형제님이 없으면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1년에 한 번 해외 성지순례를 가는데(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못 갔습니다), 함께 가시는 분 중에 ‘나 없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가지고 오시는 분들을 만나곤 합니다. 이분들에게 순례를 모두 마친 후에 “집이 어떻게 되었어요? 큰일이 났나요?”라고 여쭤보면, 순례 다녀오기 전과 똑같다면서 웃으십니다.
쉼으로 인해 망가지는 것은 없습니다. 자신을 망가지게 하는 것은 불안, 걱정 등의 부정적 감정일 뿐입니다. 때로는 쉼이 필요합니다. 나의 걱정과 불안을 내려놓을 ‘쉼’이 말입니다.
----------------------------------------------------
201118.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의 묵상
루카 복음서가 전하는 미나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서의 탈렌트의 비유와 같습니다. 화폐의 가치에는 차이가 있지만 비유가 전하는 내용은 거의 비슷합니다. 미나는 당시의 그리스 화폐로 탈렌트보다 작은, 100 드라크마(= 데나리온)의 가치를 가지는 동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길을 나서면서 자신의 종들에게 한 미나씩 나누어 줍니다. 그 귀족은 명확하게 자신의 생각을 알려 줍니다.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오늘 복음의 비유는 아무런 벌이를 하지 못한 종에 초점을 둡니다. 다른 종들은 성실함으로 칭찬받지만 그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 종의 생각은 이러하였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재능을 활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은 사용한다고 해서 없어지거나 줄어들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의 미나로 열 미나와 다섯 미나를 벌어들이는 종들처럼 재능은 쓰면 쓸수록 더 많아지고 풍성해집니다. 단순하게 하느님을 냉혹하시고 벌하시는 분으로만, 엄하신 분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맡겨진 재능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이웃을 위해서도 사용하지 못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허규 베네딕토 신부 -
----------------------------------------------------
201118. 연중 제33주간 수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To the Lake"라는 러시아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모스크바에 원인모를 전염병이 발생했습니다. 도시는 봉쇄되었고, 사람들은 전염병으로 죽어갔습니다. 도시는 약탈과 폭력으로 변해갔습니다. 전염병은 사람들의 품위와 인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부의 정책으로 멀쩡한 사람을 격리하고 죽이는 군인도 있습니다. 빼앗는 사람, 빼앗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질서와 법이 사라진 사회는 전염병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가족들과 옆집 이웃들과 함께 호수를 향해서 떠납니다. 호수는 가운데 작은 섬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호수가 얼어서 작은 섬으로 걸어 갈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예전에 작은 섬에 집을 지었습니다. 먹을 것도 마련해 놓았습니다. 호수에 도착하면 전염병에도 안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있으니 전염병이 사라질 때까지 지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드라마는 호수로 가는 길에 생기는 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라마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몰래 도망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약탈하고 빼앗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덮어버리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재기를 하던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남을 탓하던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드라마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있습니다. 백혈병 환자의 약을 가져오기 위해서 위험한 도시로 가는 의사가 있습니다.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해 주는 의사가 있습니다. 코로나19의 현장에서 자원 봉사하였던 의료진이 생각났습니다. 간호사들이 생각났습니다. 중국에서 온 교민들을 위해서 기꺼이 생활치료 센터를 개방한 주민들이 생각났습니다. 굳이 호수를 가지 않아도 삶의 자리가 호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전염병은 조심하면 됩니다.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전염병 때문에 질서와 법이 무너질 필요는 없습니다. 전염병은 우리의 사랑을 확인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전염병은 연대와 협력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인류의 이상과 가치를 보여 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추운 겨울이 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준비를 합니다. 두꺼운 겨울옷을 꺼내고, 김장도 하고, 난로도 준비를 합니다. 겨울이 춥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언젠가 겨울이 올 것입니다.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우리는 또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오늘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니고, 손해 보는 일이 아님을 나무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뭇잎이 그렇게 가을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우리도 언젠가 인생이라는 나무에서 떨어져야 하는 나뭇잎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떨어지는 것을 슬퍼하기보다 떨어지기 전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떨어지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떨어질 것을 알고 준비하는 것이 참된 삶입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부활의 태양은 떠오르고 새봄 새잎이 또 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
201118.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종의 삶
- 전례와 삶 -
오늘 루카복음의 ‘미나의 비유’는 지난 주일 마태복음의 ‘탈렌트 비유’와 흡사합니다. 그러나 루카는 이 비유를 크게 손질합니다. 우선 이 비유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메시아 임금으로 입성하시는 이야기 직전에 배치합니다. 또 비유를 우의적으로 다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즉 하느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도래할 때, 예수님께서 행사하실 ‘심판’을 예고합니다. 미나의 비유를 마친 후 복음의 마지막 장엄한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으셨다.’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파스카 신비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그러니 오늘 미나의 비유는 연중 마지막 시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유언적 성격을 지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을 줍니다. 열 사람의 종이 모두 한 미나씩 받았고, 세 종의 경우만 열거되고 있습니다.
-1.“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었습니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2.“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3.“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아주 실감나는 세 종에 관한 묘사입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이 비유에서 주인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첫째 종과 둘째 종은 주님을 사랑했고 신뢰했으며 성실히 섬김의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에 참으로 삼실三實했음이, 즉 진실하고 성실하고 절실했음이 분명합니다.
새삼 우리 삶은 선물이요 숙제임을 깨닫습니다. 매일 숙제하는 마음으로 쓰는 강론입니다. 도대체 모두가 주님께 받은 선물이니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능력은 주님의 것으로 주님께 선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종과 둘째 종은 선물의 미나를 최선을 다해 선용함으로 풍부한 결실을 냄으로 숙제에 성공했습니다. 우리 모두 인생 마지막 주님 앞에 오늘 복음의 종처럼 헴바치게 될텐데 과연 받은 선물의 숙제는 잘 수행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고맙게도 최후심판의 헴바침에 앞서 매일 미사때 마다 하루하루 헴바치는 셈이니 마지막 헴바침의 최후 심판정에서 당황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세 번째 종에 대한 주님의 반응을 통해 주님의 실망이 얼마나 컸겠는지 짐작이 갑니다. 셋째 종은 주님을 사랑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무서워했습니다. 참으로 잘못 왜곡된 주님 상을 지닌 종이었습니다. 하여 그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고 아까운 인생 탕진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주님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는 것입니다. 선물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으니 인생 숙제를 전혀 안한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벼락 공부가 통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미루지 않고 성실히 숙제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첩첩산중,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을 넘어야 하는 숙제와도 같습니다. 이 숙제를 포기하거나 미뤄 버리고 주저 앉으면 아무도 내 숙제 대신 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만추의 배밭이 우리들에겐 좋은 가르침을, 깨우침을 줍니다. 2개월 동안의 장마에도 배나무들은 최선을 다해 숙제를 잘 하여 맛좋은 풍성한 배들을 산출하여 우리에게 기쁨을 줬습니다. 하여 수확이 끝난 만추의 배밭은 ‘텅빈 충만’의 배밭이 되어 참 넉넉하고 편안한 느낌입니다. 열매없는 흉작의 쓸쓸한 배밭이라면 말 그대로 ‘텅빈 허무’의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배농사는 일년 단위지만 인생 농사는 평생입니다. 하루하루 평생 최선을 다해 숙제해야 주님께 성공적인 헴바침에 텅빈 충만의 행복한 가을 인생을 맞이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최후심판정에서, 또는 죽음에 앞서 후회는 너무 늦습니다. 세 번째 종에 대한 ‘텅빈 허무’의 충격적 장면은 우리에게 인생 숙제 끝까지 잘하라는 회개의 깨우침을 줍니다. 스스로 자초한 심판이기에 결코 주님을 탓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이 우리가 받은 미나 선물을 끝까지 잘 활용하도록 분발심을 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뻬앗길 것이다.”
그대로 영적생활에도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이 또한 주님 탓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하루하루 인생 선물에 최선을 다해 공부하며 숙제해왔다면 더 받으면 받았지 뻬앗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받은 선물의 활용은 아주 평범하며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어원도 같습니다.
섬김의 삶에 부단한 자극과 힘을 주는 전례입니다. 전례의 샘에서 샘솟는 섬김의 삶입니다. 전례와 삶은 함께 갑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자랑은 전례입니다. 우리의 영성은 전례 영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를 이뤄주는 참 고마운 전례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깊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전례의 아름다움, 전례의 깊이입니다. 참으로 전례 은총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주님을 닮게 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요한묵시록에서 사도요한이 신비체험중에 계시된 천상전례는 얼마나 황홀하고 아름다운지요!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의 희망이자 미래요, 우리 교회의 전례를 통해 미리 맛보는 천상전례의 신비체험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사전례중 다음 감사송 후반부 고백처럼 천상전례중인 천사와 성인들과 함께 동시에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한목소리로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나이다.”
주님 영광을 찬양하는 기쁨으로 사는 우리 수도자들이요, 전례중의 전례가 미사전례입니다. 바로 이런 천상전례를 반영하는 교회의 미사전례가 섬김의 삶에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례 은총없이는 섬김의 삶도 불가능합니다. 오늘 천상전례중 두 찬가는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지요!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분!”
바로 미사전례중 그대로 고백하는 찬가요, 체험하는 주님입니다.
“주님이신 우리 하느님, 당신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누릴 만한 분이시나이다. 당신은 모든 것은 창조하셨고. 만물은 당신 뜻에 의해 생겨났고 또 존재하나이다.”(묵시4,11).
바로 이 찬가는 매주 화요일 저녁성무일도때 마다 바칩니다. 우리의 영성생활을 참으로 풍요롭게 하는 교회 전례의 은총입니다.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종으로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에 마르지 않는 샘이 바로 천상전례를 그대로 반영하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종으로서 섬김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201118.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날을 준비시켜 주십니다.
복음의 비유 안에는 두 개의 축이 교차합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는 이야기 하나, 그리고 그 귀족이 재산을 나눠주었던 종들과 셈을 하는 이야기 하나입니다. 이 두 주제는 언젠가 주님을 맞이할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으로 오실 때 우리는 그분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은총의 열매에 대해 셈을 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루카 19,15)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떠났는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해서 사절을 보내어 반대 의사를 올립니다. 마치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음모를 꾸미던 당시 종교 지도층의 움직임을 투영하는 듯하지요.
그런데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귀족은 왕권을 받고 돌아옵니다. 우리의 예수님도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시면서 세상에서 제거되는 듯 보였지만,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지요. 그리고 언젠가 "사람의 아들의 날"이 오면 세상을 심판할 권한을 가진 평화의 임금으로 오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루카 19,17)
이제 임금이 된 귀족이 종들과 셈을 합니다. 각각 나눠 주었던 한 미나를 어떻게 운용했는지 보려는 겁니다. 주인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성실히 불린 이들은 착한 종이라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불린 배수만큼 고을을 얻지요. 작은 일에 성실한 그에게 주인은 큰일을 선뜻 맡깁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루카 19,26)
각자가 받은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감사하며 가꾼 사람은 자기가 얻은 인간적 수확 이상의 것을 도로 받습니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계산 방식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논리와 합리적 숫자를 초월해서 생각도 기대도 못한 선물이 뒤따르는 겁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중요해 보이든 하찮게 보이든, 크든 작든, 이는 영혼의 종자 씨앗입니다. 왜 주님께서 내게 이것을 주셨는지 진지하게 숙고하고 기도하면서 답을 찾아야 하고, 나에게 걸고 있는 그분의 기대를 등대 삼아 성실히 나아가야 합니다.
제1독서의 환시 속에는 찬양이 가득합니다.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묵시 4,8)
장엄하고 엄위롭고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서 모든 천상 존재들이 그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사자 같고, 황소 같고, 사람 같고, 독수리 같은 네 생물은 네 복음서를 상징합니다. 그들이 쉬지 않고 줄곧 주님 곁에서 환호하며 영광과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 가득하신 하느님 앞에서 피조물이 드릴 것이란 찬양 외에 무엇이 더 있을까요!
하느님께 지음 받아 생명을 얻은 우리는 이 지상에서 삶을 꾸려 가면서도 늘 천국 본향을 그리워합니다. 처음 하느님과 하나였던 존재적 기억이 우리를 그분께로 끊임없이 이끌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물리적으로 이렇게 떨어져 있는 듯 해도 실은 언제나 그분 현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와 찬양이 우리의 존재적 상태여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처음 그분에게서 받은 영혼의 종자씨는 어떻게 커가고 있는지요? 사람들은 비유 속 미나, 혹은 탈랜트를 재산이나 능력, 인기, 인맥 정도로 착각합니다만, 진정 우리가 감사하며 성실히 불리고 키우고 확장시켜 주님께 돌려드릴 재산은 하느님과 우리 영혼의 관계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람의 아들의 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만남의 자리에서 우리가 드릴 것이 무엇인지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세속 재산에 골몰해서 하느님을 위한 빈 자리까지 거래하지는 않았는지, 사람에 집착해 하느님을 차선으로 미루지는 않았는지, 외형과 능력만 돌보다가 영혼이 쪼그라들지는 않았는지...
이 지상의 삶에서 "밤낮 쉬지 않고" 감사와 찬미와 찬양을 멈추지 않고 올려드린 영혼은 그토록 그리던 주님과 충만하고 흡족한 사랑의 일치를 이룰 것입니다. 비록 녹록치 않은 인생살이 안에서도 영혼의 거룩함과 깊이를 더해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
201118.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이 악한 종아,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루카19,23)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미나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탈렌트의 비유'와 내용도 비슷하고,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미나와 탈렌트'는 모두 '그리스의 화폐 단위'로서, '1미나'는 100데나니온(1천만원), '1탈렌트'는 60미나 곧 6000데나리온(6억원)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미나의 비유와 탈렌트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선물'이면서 또한 '과제'라는 것입니다. 이 은총의 선물을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공동선과 공동이익'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 복음에서 야단맞는 악한 종처럼 단죄의 심판을 피할 수 없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마저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례력으로 끝자락에 와 있는 요즘 우리는 독서 말씀으로 요한 묵시록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말씀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인 죽음 저 너머에서 만나게 될 '완성된 하느님 나라에 관한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성령께 사로잡혀 하늘로 올라간 사도 요한이 스물네 명의 원로들과 네 생물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이시라고 외치고 있는 가운데, 하느님을 뵙는 모습을 전합니다.
요한 묵시록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를 천상 예루살렘으로 이끄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그곳에서 누리게 될 영광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지금 깨어나라는 강한 외침'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을 잘 기억하고, 주신 은총에 감사드리고, 이 은총의 선물을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공동선과 공동이익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놓도록 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201118. 연중 제33주간 수요일.<변명은 원망이다>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미나의 비유’입니다. 주일 복음 ‘탈렌트의 비유’와 비슷합니다. 주일 복음은 주인이 세 하인에게 다섯, 둘, 한 탈렌트를 맡기고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이 모진 사람이어서 자신에게만 덜 주었다고 하여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받은 재능을 썩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조금 더 신학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 미나를 종 열 사람에게 나누어 준 것입니다. 한 미나는 천만 원 정도 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도 악한 종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두려움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사랑하면 두렵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능력들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발휘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것에 원망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좋은 분이시니 이미 다 받았으니 핑계는 없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착한 종의 마음입니다.
‘자이언 클라크’는 하반신 없이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당뇨였고 감옥에서 아이를 배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보육원에 맡겼고 아이는 멸시와 학대, 절망과 우울증에서 커야만 했습니다. 그때 그의 삶을 바꿔준 한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핑계는 없다』(No Excuse)
이 책의 저자인 ‘카일 메이나드’는 손발이 없이 태어난 레슬링 선수였습니다. 그런데도 고등학교 4학년 졸업반 때 36승을 기록하고 가장 낮은 체급에서 전국 12등을 달성해 냈습니다. 자이언은 카일에게서 희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레슬링을 하기로 합니다.
미국에서 레슬링은 벽이 매우 높습니다. 초등부에서는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둬보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웃음거리였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레슬링부를 찾아갔는데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코치를 만나게 됩니다. 코치는 손만 가진 자이언에게 알맞은 기술과 근력 운동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첫 승리를 해보게 되었고 이는 자이언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실력 차가 너무 컸던 것입니다. 첫 2년 동안 치른 경기에서 모두 패배를 당했습니다. 보육원에서도, 동료들도 이제 그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이언 자신도 절망의 나락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어떠한 것도 변명거리로 삼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처음의 마음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왔고 이제부터는 레슬링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훈련 시간을 남들보다 두 배로 늘렸고 주말에도 훈련하였습니다. 코치도 더는 물러날 곳이 없음을 알기에 훈련 강도를 높여 전보다 더욱 모질고 엄격하게 가르쳤습니다.
3학년부터 자이언은 다시 승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 아이를 키우는 한 어머니로부터 입양 제의를 받아 가족도 생기게 됩니다. 4학년 때는 초반 18경기를 패배 없이 승리하였습니다. 레슬링의 가장 낮은 체급인 48kg보다 더 낮은 40kg의 그는 지역대표 결승전에서 안타깝게 준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우승을 못 하여 하염없이 울고 있는 그를 7년 동안 지도해 준 코치는 하늘로 들어 올리며 진정한 승리자라며 자이언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자이언의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승전 직후 세 바퀴로 달리는 휄체어 레이스에 도전하였고 3개월 만에 지역대표가 됩니다. 상체의 근육이 뛰어난 그를 따라올 적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2021년 도쿄 패럴림픽을 노리며 지금도 훈련하고 있습니다. 물론 레슬링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최초로 휠체어 경주에서는 패럴림픽으로 일반부에서는 레슬링으로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등에 “핑계는 없다”(No Excuse)라는 카일의 문구를 새기고 언젠가는 자신도 자서전을 써서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동기부여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인은 자신을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이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 더 많이 가진 이들에게 내어줍니다.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느님을 참 임금이요, 좋으신 분이라 믿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 원망하고 부족하다고 핑계를 대는 것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을 원망하고 모질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고 자신의 인생도 실패자로 남습니다.
며칠 전에 한 아는 신자가 아기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그러나 잘 키워보겠다고 아이의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모 마음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먼저 믿어주어야 합니다. 믿음을 주는 카일 메이나드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코치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도 핑계를 댈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믿음만이 우리가 더 많은 것을 갖게 만듭니다. 그때 그분을 참으로 우리 임금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주님이 좋은 분이심을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은 나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전해집니다.
----------------------------------------------------
201118. 양승국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언젠가 우리 역시 성령에 이끌려 하늘 나라로 인도될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하느님 어좌 둘레에 앉게 될 것입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인 요한 묵시록의 분위기는 위엄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한이 성령에 사로잡혀 하늘의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그 안에는 엄청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요한 묵시록 특유의 상징들은 심오하고 난해하기에 약간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제일 먼저 요한의 눈길을 끈 것은 ‘어좌’와 어좌에 앉아 계신 ‘어떤 분’이었습니다. 어좌라 함은 왕이 앉는 자리를 말합니다. 당연히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앉아 계신 분을 하느님이라 칭하지 않고 ‘어떤 분’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유다 관습 안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차원에서 그분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은 하늘의 중심 인물일 뿐 아니라 세상과 역사, 인류의 중심이십니다.
요한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모습에 대해서는 묘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은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강렬한 빛, 너무나 눈이 부셔 쳐다볼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빛속에 거처하십니다. 그분에게서 발산되는 엄청난 빛은 절대적인 신적 권위와 권능, 신적 본질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어떤 분’에게서 발산되는 강렬한 빛은 값진 보석의 빛깔과 비유됩니다. 벽옥(碧玉)은 여러가지 빛을 내는 흰 다이아몬드이거나 무지개 빛깔을 발산하는 단백석(蛋白石, opal)으로 추정됩니다. 홍옥(紅玉)은 아마도 진홍색의 루비(ruby)일 것입니다. 어좌 둘레에 무지개처럼 펼쳐진 취옥(翠玉)은 에메랄드를 지칭합니다.
이처럼 묵시록의 표상들이 주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영광스럽고 전능하시며, 한없이 평화롭고 신비스런 느낌입니다.
“그 어좌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묵시록 4장 4절)
스물 넷이라는 숫자는 열둘에 열둘을 더한 숫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를 의미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로 스물 넷이라함은 하느님 백성 전체의 대표자요 더 나아가서 하느님 백성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변모된 구성원들이 지존하신 하느님 어좌 앞에 모여 앉아, 그분께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모임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어좌에서 터져나오는 번개와 천둥 소리는 시나이 산에서 있었던 하느님의 계시를 연상시킵니다. 어좌 앞에서 타오르고 있는 일곱 횃불은 하느님의 일곱 영, 다시 말해서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은 네 생물을 봅니다. 그 모습이 꽤나 기괴합니다. 각각 사자, 황소, 사람, 독수리같이 생겼는데, 다들 온 몸에 눈이 가득 달려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습니다. 섬뜩한 모습입니다.
네 생물은 온 세상에 살아가는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수많은 눈들은 하느님 면전에서 그들이 느끼는 황홀함과 놀라움, 감탄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요한이 들여다본 하느님 나라는 창조주이신 하느님, 엄위와 영광으로 가득한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구원된 하느님의 모든 백성들뿐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 모든 피조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범 우주적인 전례가 거행되는 자리였습니다.
언젠가 우리 역시 성령에 이끌려 하늘 나라로 인도될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하느님 어좌 둘레에 앉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
2020년 11월 18일 수요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매일미사
_이다한 스테파노 신부 집전
https://youtu.be/swKkX0jIjtk (36:01)
•2020. 11. 18.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이다한 스테파노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집전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1ㄴ-28
*** 신부님 강론 13:21.부터 18:54.까지 입니다. ***
----------------------------------------------------
첫댓글 찬미예수님 평화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