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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표적(3)
제목 :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성경 : 요 5:1~9
찬송 : 310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40728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요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요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요 5: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요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요 5: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문명은 발전을 이야기 하지만 성경은 회복을 말합니다. 인간은 퇴보의 내리막길에 서지 않고 발전의 오르막길에 서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진보와 퇴보의 고리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도다”(고후 4:16)
육신의 장막은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새로워질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를 지향하는 소망이 아니라 영원을 지향하는 소망입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변화는 ‘새로운 것’으로의 진보가 아니라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복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7 가지 표적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표적들은 저마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은 본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질적인 변화에 관심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양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면서 양적인 변화를 강조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38년 된 병자를 고쳐준 사건은 무엇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데스다 연못가에 행하신 기적의 독특한 강조점은 아닙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고침 받은 38년 된 병자의 기적은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헛된 자비를 기다리는 사람들(1~4절)
√요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일어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명절일까요? 아마도 유월절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중요한 세 가지 명절이 있는데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 절기들을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명절이 되면 수십만의 인파로 북적이게 됩니다.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명절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월절에 제물로 바쳐지는 모든 유월절 어린양이 자기 자신을 예표하고 있음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 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예루살렘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습니다. 쓰레기나 분료를 처리하는 분문도 있고, 실로암 샘으로 내려가는 샘문도 있습니다. 북쪽에 성전으로 이르는 문이 있는데 이곳으로 양과 염소가 들어갔기에 그 문을 양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 3장을 보면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때 가장 먼저 수축한 문이 있는데 양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왜 가장 먼저 양문을 수축하였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무너진 신앙을 회복하려면 먼저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요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요 5: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양문 곁에 베데스다란 연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북적대는 인파를 뒤로 하고 양문을 빠져나와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란 연못을 찾아가셨습니다. 베데스다란 “자비의 집, 은혜의 집, 긍휼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환자들이 있어 긍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38년 된 병자도 누어있었습니다. 38년 동안 누워 있었다면 아마도 가족들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정확하게 38년 동안 병들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때 요한은 이 사람을 통해서 38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였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막연하게 어떤 일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민족이었습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죄는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없도록 우리의 다리를 절게 만듭니다. 죄는 우리를 무력하게 하며 우리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우리의 모든 혈기를 마르게 합니다. 이런 것들은 죄의 열매들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그토록 많은 환자들이 찾아온 이유가 뭘까요?
요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물이 움직인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도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베데스다 못을 찾아왔지만 안타깝게도 미신과 요행해 근거한 잘못된 믿음으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믿음은 헛된 소망만 줄 뿐입니다.
절박한 상황에서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드는 것이 인간의 실존 모습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간절히 소망한다고 해도 헛된 믿음에 근거한다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헛된 소망으로 살아가는 자들, 죄를 지어 사탄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들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찾아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절박한 상황이라면 어떤 말을 듣던지 솔깃하지 않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성도들도 미신을 믿거나 요행을 바라고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혹시 지금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 세상의 헛된 소망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까? 성도는 헛된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참 소망을 보여 주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또한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되며 그들의 눈에 소망의 장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찾아가서 소망을 전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무자비함을 경험해 온 병자(5~7절)
√요 5: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행각 다섯이 있어 많은 환자들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의 동함을 기다린 것입니다. 물이 소용돌이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면 고침을 받는 다는 전설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일종의 딜레마가 있고 모순이 있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 누가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침상에 누어있는 사람들은 먼저 들어갈 엄두도 못 낼 것입니다. 중병환자는 못 들어가고 오히려 간단한 병에 걸린 사람들이 먼저 들어갈 가능성이 많게 됩니다. 이것이 베데스다의 모순입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는 치유의 장소이면서도 꼭 필요한 사람은 절대로 치유될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던 그런 장소였습니다.
왜 이곳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까? 병 낫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먼저 들어갑니까? 비교적 건강한 사람이 먼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순입니다. 이 모순은 그 당시 온 인류가 짊어지고 있던 모순이었으며 딜레마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율법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 율법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순종하고 싶은데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싶은데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헌신하고 싶은데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 연약한 존재들이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에 모인 많은 환자들 가운데 38년 된 병자에게 주목하십니다. 오랜 병으로 인해 무기력하게 누워 있던 병자에게 예수님은 낫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물어보십니다. 안타깝게도 이 병자는 자신의 병이 낫지 못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이 먼저 연못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좋은 환경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자신의 현실에 대해 분노와 절망이 담긴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보면 엉뚱한 질문 같습니다. 낫고자 하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 말씀은 주님의 자비로운 음성이요, 은혜로운 음성이며, 사랑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환자는 뭐라고 대답해야 옳습니까? “예, 낫게 해주세요.” 그러면 즉시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병자의 대답이 가관입니다. 여전히 인간적인 고집을 버리지 않고, 자기를 버리지 않는 대답을 합니다.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갑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대답입니까? 여전히 자신의 방법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베데스다에 들어가는 방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으니 들어가게 좀 도와주세요.”
예수님을 구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삶의 조력자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정도로 자기의 의를 버릴 줄 모릅니다. 자기 고집을 버릴 줄 모릅니다. 38년 정도 시도했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자기 방법대로 하겠다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문제가 심각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예수님을 조력자 정도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꿈과 자기의 야망과 자기의 방법을 그대로 밀고 나갑니다. 그런 다음에 이렇게 요청합니다.
“내 힘 가지고 조금 부족하니까 주님이 좀 도와주세요. 여기에 장애가 있으니까 이 장애만 없애주면 내가 내 방법대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멋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사용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의 모든 연약한 삶을 내어놓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나를 처리해주십시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빠른 지금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바벨탑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신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38년 동안 침상에 누워서 지낸 환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나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점점 희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럴 때 그에게 예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진짜 낫기를 원하느냐?” 그의 마음 가운데 있는 소망을 키워주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은혜받기를 갈망하십니까? 진정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실질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승리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하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좌절감이라든지, 노예의식, 실패의식만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애굽에서 살던 노예근성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치유 받아야 될 것은 우리 마음의 회복입니다. 심령의 회복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해주시면 나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이러한 믿음의 토양이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 그 위에 능력을 허락하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정말로 낫기를 원하십니까? “아멘, 내가 낫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능히 나을 줄로 믿습니다.”라는 믿음으로 나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대인들은 무한 경쟁 속에서 비교당하며 우월감 혹은 좌절감을 경험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것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세상의 무자비함에 대한 치료제는 은혜로 주어지는 복음뿐입니다. 우리는 노력과 경쟁으로 얻는 구원의 희망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복음의 소망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은혜의 소망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아직도 교회 안에 남아 있는, 비교와 경쟁에서 생기는 어둠의 그림자를 복음의 빛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복음의 정신을 실천하여 낮은 자와 약한 자를 더욱 귀히 여기며 섬길 때 가능합니다.
√참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8~9절)
√요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이제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원망과 의타심과 어두움과 운명의 돗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명령입니다. 타인에 대한 원망, 피해 의식, 절망이 담긴 대답을 했던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은 그가 그동안 간절히 원했던 일, 그러나 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일을 하라고 38년 된 병자에게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그가 38년 동안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할렐루야!
신앙이 무엇입니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그에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불가능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는 즉시 자기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가 낫게 된 것은 미신이나 요행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 때문입니다. 고질적인 삶의 문제와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은혜의 예수님을 만날 때 해결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깊고 간절한 소망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그분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세상에서 헛된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도는 예수님 안에 있는 참 소망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가 가진 문제는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풀려고 하십니까?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이미 알고 계시며 그 소망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 앞에 솔직히 자심의 문제를 아뢰십시오.
여러분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돗자리는 무엇입니까? 왜 주저하시며 앉아있습니까? 주님은 그것을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당장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자비와 은혜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궁극적인 소망과 안식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으로 병든 사람을 고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음성을 듣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