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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4.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5. 기도할 때는
6 : 4.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
전통 사본에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는 말 가운데 ‘드러나게’라는 말이 있어서 “너희 아버지가 드러나게 갚으시리라”라고 되어 있다.
‘은밀하게’라는 말(엔 토 크륍토)과 ‘드러나게’라는 말(엔 토 파네로)이 서로 대조를 이룬다.
사람 앞에 보이려고 한 구제와 선행은 사람의 칭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상이 없을 것이지만, 은밀하게 행한 구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드러나게 갚으실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의 드러난 행위만 보고 칭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밀한 행위를 보시고 보상하신다.
1]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명령으로 사람의 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2] 은밀한 중에 보시는
이 어구는 6절과 18절에 반복된다.
KJV나 Textus Receptus의 자의적 해석에 의하면 본 절과 6절에 '은밀히'와 대구를 이루는 '드러내 놓고'(openly, *, 엔 토 파네로)란 말이 첨가되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갚으시리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지나친 의역이라고 생각된다. 예수께서는 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침묵하실 뿐이다.
우리가 자선을 잊게 되면 잊는 만큼 하나님이 주목해 보신다. 우리가 그것을 높이 생각하면 생각한 만큼 하나님은 그것을 무시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은밀한 중에 그 위선의 내면을 보고 계시는 심판주로 다가오시기 때문에 매우 두려운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의(義)를 드러내지 않는 주의 제자들에게는 자신의 선한 행위를 조용하고 따사로운 눈길로 다 하나하나 보시고 기억해 두시는 '아버지'로 다가오실 것이다. 따라서 그 같은 사실 자체가 크나큰 기쁨과 위로가 될 수 있다.
3]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아포도세이 소이)
직역하면 '그에 합당한 양을 어김없이 되돌려 준다.'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갚아주실 것인지 또는 그 보상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신약이 계시하고 있는 여러 증거를 참고할 때 우리는 그 보답이 현세와 내세에서의 지고(至高)한 기쁨과 원숙한 인격의 완성으로 주어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Broadus).
전통 사본에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는 말에 '드러나게'라는 말이 있다. '은밀하게'라는 말과 '드러나게'라는 말이 대조를 이룬다.
사람 앞에 외식적으로 행한 구제와 선행은 사람의 칭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상급이 있을 거리가 없지만, 은밀하게 행한 구제는 천부께서 드러나게 갚으실 것이다.
사람은 사람의 드러난 행위만 보고 칭찬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은밀한 행위를 보시고 보상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은밀하게 선행과 구제를 하자.
5] 올바른 구제 ( 마 6: 1-4 )
(1) 구제는 좋은 동기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먼저 주의할 것을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을 할 때 동기가 중요하다. 어떤 동기로 하느냐 하나님은 그 마음 보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잠깐은 숨겨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어 있다. 그러나 마음의 동기가 내 의를 나타내려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물질을 맡은 청지기로서 그저 힘껏 충성하려는 것인가? 주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지적하신 것은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다.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범하기 쉬운 육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서기관의 마음이 우리 죄된 인간의 마음이다. 사람은 무엇을 하거나 주고 나면 자랑하고 싶고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심리가 크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교회도 알아주면 좋고, 알아주지 않으면 속상해지는 것이 육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의를 자랑하면 하나님께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나팔 불며 하지 말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나팔을 분다는 것은 구제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럼 모든 구제는 모르게만 해야 옳은가? 그러나 마 5: 16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신 말씀을 보면 반드시 모르게만 하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도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기적을 베푸시거나 사람들 앞에서 병을 고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해서 사용하셨다. 물론 의를 행할 때 구제를 받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도록 지혜롭게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볼 수밖에 없다고 구제를 그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의를 행하는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 다 빼앗기고 많이 맞아서 거반 죽게 된 채로 길가에 버려졌다. 그 길을 제사장이 지나가고,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못 본 척 그냥 지나쳐 버린다. 왜 그랬을까? 가장 주된 이유는 깊은 산중이기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거나 자신도 강도들을 만날까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만약에 똑같은 사람이 장소만 다르게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쓰러져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를 피해서 지나갔을까? 텔레비전 방송에 생중계하는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면 그냥 지나쳤을까?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보면 선행을 하고 사람이 보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은 구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동기가 불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하나님 앞에서 상을 얻지 못한다.
(3) 은밀하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 말씀은 아무도 몰라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구절 역시 앞 절의 설명이다. 자기 의를 자랑하는 태도여선 안 된다는 것이다.
모르게 하므로 우리가 손해 보는 일은 없다. 사람은 모를지라도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만약 방송사에서 길거리 모금방송을 한다면 거기다 교회 이름으로 구제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이름이 아니라 교회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면 됩니다. 몰래 선행했다고 전도길이 막힐 이유가 없다.
어떤 마을에 구두를 수선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활도 넉넉하지 못하지만 좋은 일을 많이 했다. 그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자기 생활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비를 베풀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그의 이웃에는 부자 할아버지가 살았다. 그는 구두쇠로 소문이 났다. 그는 남에게 동전 한 푼 보태주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그를 욕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구두쇠 할아버지가 죽었다. 그가 죽고 나니까 이상하게도 구두를 수선하는 할아버지가 더 이상 구제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구두를 수선하는 할아버지가 구제한 것은 전부 구두쇠 할아버지가 뒤에서 준 돈으로 한 것이었다.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이 더 잘한 걸까요? 저의 생각은 몰래 시켜서 구제한 구두쇠 할아버지나 돈을 전달해 준 구둣방 할아버지나 두 사람 모두 상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구둣방 할아버지가 상을 받는다고요? 저는 받는다고 생각한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구둣방 할아버지의 구제도 마음이 없으면 하지 못한다. 심부름이라도 마음 있으니 동조하는 것이다.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구둣방 할아버지나 우리나 같다. 우리가 지닌 모든 물질은 어차피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 것 아니잖아요. 일부 내가 수고했지만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제가 심부름만 한 구둣방 할아버지와 다를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하나님의 심부름만 해도 하나님의 영광 도둑질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 순종 만해도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 아버지가 갚아주신다. 그러므로 선행 후에는 다 잊기를 바란다. 달리 생각하면 안 된다.
마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 의인들에게 아버지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모두 불순종과 외식의 마음을 버리고 물질을 맡은 청지기의 마음으로 우리의 이웃에게 한 것이 예수님에게 한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늘의 상 받도록 구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도한다.
2. 기도를 가르치시다 ( 6 : 5 – 15 눅 11: 2-4 )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6 : 5. 기도할 때는 -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기도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주께서는 바른 기도의 태도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은밀한 기도이며 다른 하나는 중언부언하지 않는 기도이다.
주께서는 기도할 때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외식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은 그를 보며 “참 기도 많이 한다, 참 경건하다”는 칭찬을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야 하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기도는 외식이다. 그는 사람들의 칭찬이라는 상을 이미 받은 셈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상을 기대할 것이 없다.
uJpokritai
외식(휘포크리타이)은 가면을 쓰다, 위선자를 뜻하는데 자신의 의를 속여서 드러내는 가증한 행위를 말한다. 이들은 구제와 기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 앞에 진실성 없는 행위에 대해서 예수님은 주저 없이 지적하시고 제자들에게 8절에서 저희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1]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직접 아뢰는 것으로서 인간으로서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이는 구제보다 더 즉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때에'(*, 호탄)란 말이 가정법 현재 시상과 더불어 사용됨으로써 규칙적인 기도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넌즈시 비추고 있다(Lenski).
2] 외식하는 자와 같이
외식하는 자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1) 악하면서도 선을 가장(pretence)하는 유형
이들은 자신이 남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마 22: 15-18 –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2) 자기 만족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속이면서 또 타인을 속이는 유형은 스스로 경건한 체하지만, 타인을 속이지는 못하고 곧 발각된다.
* 마 9: 1-5 –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의 책망을 들었던 이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 유형에 속했던 것 같다.
(3) 외식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스스로 가장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유형.
이는 가장 완벽한 위선자이다. 이들은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그 행위를 보는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다.
3] 하지 말라.
이는 제자들의 기도를 전제한 표현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의식적인 기도에 빠지지 않도록 허황된 위선에 대해 경계하신다.
'하지 말라'는 말은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미래 시상의 어구로서 이 경고를 받은 이후부터 절대 그 같은 잘못을 범치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4]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자신의 경건 생활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수단으로서 기도하고 있음을 비난한 내용이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회당에 올라가 기도를 드렸다.
* 눅 18: 9-14 –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 행 3: 1 -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 행 10: 9 -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외출 중에 기도 시간을 맞게 되면 길가에 서서라도 기도하는 열성을 보였다(M.Taanith 2:1, 2).
이렇듯 그들 행위의 의도는 순수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식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기도 시간에 일부러 외출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의 순결한 만남의 장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목적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명성을 얻고자 하는 것은 금을 주고 돌을 사는 어리석음이다.
나아가 창조자의 순결한 사랑을 인간의 음흉한 위선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
* 눅 18: 1-4 –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처럼 예수께서는 기도의 장소나 자세 등을 문제 삼아 그들을 책망하였다기보다는 그들이 기도한 동기와 목적이 불순(impurity)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 진실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는 칭찬을 듣고자 외식적 태도로 장황하게 기도했다.
5]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성경에는 기도의 자세가 몇 가지 언급되고 있다.
(1) 엎드려서
* 민 16: 22 - 그 두 사람이 엎드려 이르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 단 8: 17 - 그가 내가 선 곳으로 나왔는데 그가 나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환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
* 계 11: 16 -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2) 무릎을 꿇고
* 대하 6: 13 – 솔로몬이 일찍이 놋으로 대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다섯 규빗이요 너비가 다섯 규빗이요 높이가 세 규빗이라. 뜰 가운데에 두었더니 그가 그 위에 서서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 눅 22: 41 -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 행 9: 40 -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3) 앉아서
* 삼하 7: 18 –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4) 서서 할 수 있었다.
* 삼상 1: 26 -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 막 11: 25 -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도의 자세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 한 그들의 헛된 동기(motive)이다.
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외식 자들은 관례에 따라 기도 시간(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맞추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 나아가 수려하고 장엄한 언어로 기도한 것 같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영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여지(margin)가 없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오해한 사람 중에는 공적 기도를 폐지하기도 했다. 예수는 모든 공적 기도를 금하지 않았으며 초대 교회는 그것을 오해하지도 않았다.
* 마 18: 19-20 –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행 1: 24 -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 행 4: 24-30 –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공적인 기도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공적인 기도와 사적인 기도의 구분이 기도하는 사람의 동기를 판단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칭찬에 더 관심 있는 사람, 곧 경건보다 명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사적인 기도는 무시한 채 공적인 기도만을 추구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외식을 피하는 방법의 하나가 다음에 이어지는 '골방 기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