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方[7707]李荇(이행)-題天磨錄後(제천마록후)
題天磨錄後(제천마록후)
李荇(이행)
卷裏天磨色(권리천마색) 책 속에 천마산 빛이
依依尙眼開(의의상안개) 어렴풋이 여전히 눈앞에 열리네
斯人今已矣(사인금이의) 이 사람 지금 이미 가고 없으니
古道日悠哉(고도일유재) 옛길은 날로 아득해지네
細雨靈通寺(세우령통사) 영통사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斜陽滿月臺(사양만월대) 만월대에는 석양이 비끼었네
死生曾契闊(사생증계활) 죽고 삶에 일찍이 서로 약속했는데
衰白獨徘徊(쇠백독배회) 쇠약한 백발의 몸으로 홀로 배회하노라
용재집 제2권 / 오언율(五言律)
題天磨錄後
卷裏天磨色。依依尙眼開。斯人今已矣。古道日悠哉。
細雨靈通寺。斜陽滿月臺。死生曾契闊。衰白獨徘徊。
천마록(天磨錄) 뒤에 적다.
책권 속에 어린 천마산 빛에 / 卷裏天磨色
흐릿한 눈 오히려 번쩍 떴노라 / 依依尙眼開
이 사람 이미 세상 떠났으니 / 斯人今已矣
고도가 날로 아득해 가누나 / 古道日悠哉
영통사에는 가랑비가 나리고 / 細雨靈通寺
만월대에는 석양이 비끼었어라 / 斜陽滿月臺
사생에 늘 서로 만나기 어려웠나니 / 死生曾契闊
백발의 노쇠한 몸 홀로 배회하노라 / 衰白獨徘徊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1998
〈감상〉
이 시는 박은(朴誾)이 죽고 난 후 함께 천마산을 올랐던 기록인
「천마록」 뒤에 쓴 회고시(懷古詩)이다.
「천마록」을 꺼내 읽어 보니, 책 속에 천마산에서 함께 노닐던 일들이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지만 박은은 죽고 없어 함께 걷던
옛길이 나날이 아득해진다. 가랑비 내리는 영통사,
석양이 비껴 있는 만월대를 함께 거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함께 죽고 살자고 약속했는데, 박은은 죽고 쇠약한 백발의 자신만이
홀로 살아남아 배회하고 있다.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위 시와 관련하여 시(詩)에
지명(地名)을 사용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한다.
중국의 지명은 모두 문자로서 시에 들어가면 아름답다.
예를 들면, ‘봄풀 너머 구강이 흐르고,
저녁 배 앞에 삼협이 놓여 있네(진도(陳陶)의 「분성증별(湓城贈別)」)’, ‘물기운은 운몽택을 찌고, 파도는 악양루를 흔드네(맹호연(孟浩然)의 「임동정(臨洞庭)」)’는 지명에 단지 몇 자를 더했을 뿐인데도 시가 빛을 낸다. 이에 반하여 우리나라는 지명이 모두 방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용재 이행의 「천마록」에 ······의 구절이나, 소재 노수신의 「한강」에 ‘저자도(뚝섬)에 봄이 깊어 가고, 제천정(보광동 언덕 한강변에 있던 정자 이름)에 달 오르네’가 있는데, 아름답지 않는가?
시의 아름다움은 오직 단련을 오묘하게 하는 데 있을 뿐이지 [중국 지명과 우리나라 지명의 차이에 있지 않다](世謂中國地名(세위중국지명) 皆文字入詩便佳(개문자입시편가) 如九江春草外(여구강춘초외) 三峽暮帆前(삼협모범전) 氣蒸雲夢澤(기증운몽택) 波撼岳陽樓等句(파감악양루등구) 只加數字(지가수자) 而能生色(이능생색) 我東方皆以方言成地名(아동방개이방언성지명) 不合於詩云(불합어시운) 余以爲不然(여이위불연) 李容齋天磨錄詩(이용재천마록시) 細雨靈通寺(세우령통사) 斜陽滿月臺(사양만월대) 蘇齋漢江詩云(소재한강시운) 春深楮子島(춘심저자도) 月出濟川亭詩(월출제천정시) 豈不佳(기불가) 惟在鑪錘之妙而已(유재로추지묘이이)).”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의 「답이생서(答李生書)」에서는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언급하면서 이행(李荇)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외져서 바다 모퉁이에 있으니 당(唐)나라 이상의 문헌은 까마득하며,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시(詩)가 역사책에 모아져 있으나, 과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었던 것인지는 감히 믿을 수 없소. 신라(新羅) 말엽에 이르러 최치원(崔致遠) 학사(學士)가 처음으로 큰 이름이 났는데, 오늘로 본다면 문(文)은 너무 고와서 시들었으며 시(詩)는 거칠어서 약하니 허혼(許渾)·정곡(鄭谷) 등 만당(晩唐)의 사이에 넣더라도 역시 누추함을 나타낼 텐데, 성당(盛唐)의 작품들과 그 기법(技法)을 겨루고 싶어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高麗)시대의 정지상(鄭知常)은 아롱점 하나는 보았다 하겠지만, 역시 만당(晩唐) 시(詩) 가운데 농려(穠麗)한 시 정도였소.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는 더러 맑고 기이(奇異)하며 진화(陳澕)·홍간(洪侃)은 역시 기름지고 고우나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급기야 이제현(李齊賢)에 이르러 창시(倡始)하여, 이곡(李穀)·이색(李穡)이 계승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김구용(金九容)이 고려 말엽의 명가(名家)가 되었지요. 조선 초엽에 이르러서는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이 그 명성을 독점하였으니 문장(文章)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달(達)했다 칭할 만하여 아로새기고 빛나곤 해서 크게 변했다 이를 만한데 중흥(中興)의 공로는 이색(李穡)이 제일 크지요. 중간에 김종직(金宗直)이 포은(圃隱)·양촌(陽村)의 문맥(文脈)을 얻어서 사람들이 대가(大家)라고 일렀으나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문규(文竅)의 트임이 높지 못했던 것이오.
그 뒤에는 이행(李荇) 정승이 시에 입신(入神)하였으며, 신광한(申光漢)·정사룡(鄭士龍)은 역시 그 뒤에 뚜렷하였소. 노수신(盧守愼) 정승이 또 애써서 문명을 떨쳤으니, 이 몇 분들이 중국(中國)에 태어났다면 어찌 모두 강해·이몽양(康海·李夢陽, 명(明)의 전칠자(前七子)로 시문(詩文)에 능함) 두 사람보다 못하다 하리오? 당세의 글하는 이는 문(文)은 최립(崔岦)을 추대하고 시(詩)는 이달(李達)을 추대하는데, 두 분 모두 천 년 이래의 절조(絶調)지요.
그리고 같은 연배 중에서는 권필(權韠)이 매우 완량(婉亮)하고, 이안눌(李安訥)이 매우 연항(淵伉)하며 이 밖에는 알 수가 없소(吾東僻在海隅(오동벽재해우) 唐以上文獻邈如(당이상문헌막여) 雖乙支(수을지), 眞德之詩(진덕지시) 彙在史家(휘재사가)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불감신기과출어기수야) 及羅季(급라계) 孤雲學士始大厥譽(고운학사시대궐예) 以今觀之(이금관지) 文菲以萎(문비이위) 詩粗以弱(시조이약) 使在許鄭間(사재허정간) 亦形其醜(역형기추) 乃欲使盛唐爭其工耶(내욕사성당쟁기공야) 麗代知常(여대지상) 足窺一斑(족규일반) 亦晩李中穠麗者(역만이중농려자) 仁老奎報(인로규보) 或淸或奇(혹청혹기) 陳澕洪侃(진화홍간) 亦腴艶(역유염) 而俱不出長公度內耳(이구불출장공도내이) 及至益齋倡始(급지익재창시) 稼牧繼躅(가목계촉) 圃陶惕(포도척) 爲季葉名家(위계엽명가) 逮國初(체국초) 三峯陽村(삼봉양촌)
獨擅其名(독천기명) 文章至是(문장지시) 始可稱達(시가칭달) 追琢炳烺(추탁병랑) 足曰丕變(족왈비변) 而中興之功(이중흥지공) 文靖爲鉅焉(문정위거언) 中間金文簡得圃(중간김문간득포), 陽之緖(양지서) 人謂大家(인위대가) 只恨文竅之透不高(지한문규지투불고) 其後容齋相詩入神(기후용재상시입신) 申鄭亦瞠乎其後(신정역당호기후) 蘇相又力振之(소상우력진지) 玆數公(자수공) 使生中國(사생중국) 則詎盡下於康李二公乎(칙거진하어강이이공호) 當今之業(당금지업) 文推崔東皐(문추최동고) 詩推李益之(시추이익지) 俱是千年以來絶調(구시천년이래절조) 而儕類中汝章甚婉亮(이제류중여장심완량) 子敏甚淵伉(자민심연항) 此外則不能知也(차외칙불능지야)).”
〈주석〉
〖天磨錄(천마록)〗 이행(李荇)과 박은(朴誾)이 함께 천마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글. 〖依依(의의)〗 흐릿한 모양.
[출처] 題天磨錄後(제천마록후) / 李荇(이행)|작성자 염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