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이명철
엊그제가 경칩(驚蟄)인데 아직 진달래는 꽃망울도 들지 않았다.
나는 붉은 진달래꽃을 보거나 떠올리면 버릇처럼 소월의 시를 조용히 읊어볼 때가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가녀린 듯 예쁜 진달래꽃은 나 어릴 때를 생각나게 한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다.
우리 집 뒷동산에는 키 작은 다복솔과 진달래꽃 나무가 많이 자라고, 그 중간에 버섯이 나는데, 그 중에서도 국수버섯이 많이 났다.
진달래꽃 한창 아름다울 때 국수버섯도 뾰조롬히 돋아난다.
하루는 해가 서산마루에 한발이나 남았을 무렵 국수버섯을 따려고 나 혼자 뒷동산에 갔다. 정신없이 버섯을 따다가 허리를 펴고 일어서 보니, 버섯을 따느라 너무 산속 깊이 들어 왔는지, 버섯 딸 때는 안 보였던 진달래꽃이 사방에 피어 주변을 환하게 물들여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었다.
온통 분홍빛 진달래꽃으로 뒤덮여 눈이 시린 것 같아 무엇에 홀린 듯 어린 마음에도 숨을 가슴 한껏 들어 마셨다가 내쉬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너무나 황홀한 진달래 산골짜기꽃밭, 숨이 막힐 지경이었던 것이다.
한참을 넉 놓고 진달래꽃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 마시다가 어둠발이 짙어갈 무렵 무섬증도 들고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아마 나는 진달래꽃 피어있는 선경(仙境)을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 후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진달래 군락을 본적이 없다.
커가면서 애련(哀憐)의 상징 진달래는 두견화(杜鵑花)라고도 부르며 그 때문인지 꽃만큼이나 슬픈 전설적 이야기도 들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촉(蜀)나라 원제(元帝)가 억울하게 왕위를 빼앗기고 한을 품고 죽어 밤에 우는 두견새로 변했단다.
진달래 필 무렵이면 두견이 한 번 울적마다 원한 맺힌 피를 토하면 그 피가 진달래가 되어 한 송이씩 피었다.“는 전설이다.
두견새의 다른 이름으로 원조(怨鳥), 두우(杜宇), 귀촉도(歸蜀途), 망제혼(望帝魂), 자규(子規), 촉조(蜀鳥), 촉혼(蜀魂) 소쩍새, 접동새 등으로도 불리는데, 모두 진달래꽃과 연관이 있으며, 근래 두견새 소리 들어본지 너무 오래 된 것 같다.
모양성에서 해마다 진달래꽃을 본다. 그럴 때면 진달래꽃과 연관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가만히 불러본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내 마음도 함께 따 가주//
이 노래를 부르면 딱히 어떤 추억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지만, 허망하게 지나가버린 듯한 청춘의 막연한 감성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때가 있다.
모양성 안쪽 길 따라 한 바퀴 돌면 진달래가 길가에서 수줍게 나를 맞이한다.
바라만 보아도 어릴 때 뒷동산 진달래를 생각하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은 것 같다.
진달래꽃 송이마다 그리움 절절히 가슴 벅찬 아름다움 쌓이는데, 감정을 추스르는 숨을 크게 들어 마셔본다.
성 밖에는 하얀 꼬리조팝꽃이며, 명자 꽃, 박태기나무 꽃 등이 줄지어 봄의 품에서 아름다움을 자랑하듯 깔깔거리며 손짓한다. 이러한 꽃들은 화사함을 자랑한다.
그러나 진달래꽃의 꽃말은 ’절제와 인내‘ ’사랑의 기쁨‘이다. 이러한 꽃말 외에 이별의 아쉬움과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또는 슬픔을 담은 꽃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고독한 이별과 연관되기도 한다.
벚꽃이 봄의 향연이라면 진달래꽃은 봄 속에 녹아있는 수줍은 향기가 가슴에 스며들어 아련하게 하는 추억의 꽃이다.
진달래꽃 지면서 가는 봄은 항상 아쉽다.
해마다 오는 봄이지만, 지난봄과 올봄이 다르듯 인생의 봄은 더욱 그렇다.
인생은 왕복 없는 표 한 장을 쥐고 정박 없이 항해하는 배를 탔다 했던가.
봄을 맞는다.
내년에도 또 내명년에도 쉬지 않고 항해하며 새로운 봄을 맞이할 것이다.
이 봄,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버리고 갈 허망한 것이 아닌, 진정한 봄이 무엇인지 느끼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내려놓으면 마음속에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것이란 걸 알고 있을 것이기에 기대해 보는 것이다.
산책길 우리 앞에 밀어를 속삭이며 걸어가는 다정한 연인들 한가롭다.
소주 반 잔 홀짝 마신 아내의 눈망울에 진달래꽃 아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