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와 부산
로컬과 글로벌이 만나는 곳…영가대, 한일 선린외교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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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8년 통신사의 화가로 간 이성린이 그린 '부산'이란 제목의 그림이다. 그림 가운데 있는 언덕과 그 위의 큰 집이 영가대이다. 김동철 교수 제공 |
- 국서 전할 통신사 여정 중
- 국내 머무는 종착지이자 일본으로 떠나는 출항지
- 나라·지역·사람·물건·문화…
- 각종 유·무형의 모습 맞는 곳
- 배 만들기·노 젓기·통역 등
- 부산 사람 100여 명 참가
- 일생일대의 기회가 되기도
통신사의 목표는 조선 국왕의 국서를 일본 막부 장군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신사는 조선과 일본의 만남이며, 동시에 서울과 에도(도쿄)의 만남이다.
서울과 에도 사이를 왕복하는 통신사의 길은 6~12개월의 긴 여정이므로, 통신사는 지나는 여러 지역과 만난다. 그러나 그 만남은 통신사가 지나는 지역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지나지 않는 지역 사람도 통신사에 직접 참여하거나, 교류하기 위해 찾아오거나,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통신사는 나라, 지역, 사람, 물건, 정보, 문화가 만나는 장이다.
통신사가 만나는 지역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은 어디일까.
물론 수도(중심지)인 서울과 에도(도쿄)일 수 있다.
통신사는 배를 타고 일본에 갔다.
배 6척 가운데 4척은 통영에서 만들었다.
배의 관점에서 보면 통영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은 부산일 것이다.
통신사의 모든 길은 부산으로 통했다.
조선 후기에 일본과의 교류를 담당하는 행정구역은 동래부였다.
동래부 관아의 바깥 대문에 걸린 '교린연향선위사'란 현판은 이를 바로 보여준다.
통신사의 실질적인 업무에서는 동래가 아니고 부산(부산진)이 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통신사는 동래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문 후, 출발지인 부산진으로 갔다.
부산에 온 통신사는 출발 준비 작업, 날씨 등 여러 사정으로 보통 15일에서 30일 정도 머물렀다.
50일을 머문 때도 있었다.
그러므로 통신사의 실제 업무는 부산진이 담당했다.
부산진에 머무는 동안 동래, 기장을 비롯한 경상도 각 지역에서 나누어 접대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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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부 관아의 바깥 대문인 '동래독진대아문'에 걸린 '교린연향선위사' 현판. 일본 사절을 영접하는 관청임을 나타낸다. |
통신사는 부산에 체류하면서 해운대, 몰운대 등 명승지를 유람했다.
해운대 지역 주민은 이들의 접대를 위해 인적, 물적 부담을
질 수밖에 없었다.
또 통신사가 부산에 머무는 동안 지역 주민과 다투는 등
마찰을 일으킨 일도 있었다.
통신사가 타고 가는 6척의 배 가운데 2척은
수영구에 있는 경상좌수영의 선소에서 만들었다.
이 배를 만드는 책임은 경상좌수사에게 있었다.
배를 만드는 장인들은 힘든 작업을 감수하였다.
이처럼 통신사는 부산 사람들에게 부담이나 민폐가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부산 사람들은 통신사와 만나는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통신사에 100명 정도의 부산 사람들이 참가했다.
부산진, 좌수영, 동래, 초량, 다대포 사람들이 중심이었다.
배를 젓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특히 하급 일본어 통역관인 소통사 10명은 모두 초량 사람들이었다.
통신사에 참가하는 부산 사람들은 일본을 구경할 수 있는, 평생 한 번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잡았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길이지만 무사히 다녀오면 노잣돈이나 선물도 받고, 재수가 좋아
밀무역에 성공하면 많은 돈도 벌 수 있었다.
험난한 바다를 건너는 통신사는 죽음의 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출발하기 전에 부산진에 있는 영가대에서 바다의 신에게 항해의 안전을 비는 해신제를 지냈다.
영가대는 통신사의 출발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소다.
최근 부산 동구가 중심이 되어 자성대에 정자 모습의 영가대를 복원하였다.
그런데 개항기 때 부산 감리서에 근무했던 민건호는 그의 일기에서
"현판의 글귀와 벽화가 유람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제공한다"고 적고 있다.
영가대를 노래한 시가 적힌 현판이나 벽화가 그려진 당시의 영가대 모습은
지금 복원된 영가대의 모습과 어느 정도 닮았을까.
마지막 길을 떠나는 통신사를 위로하기 위해 부산진에서 큰 잔치가 열렸다.
이 잔치는 동래부사나 부산진첨사가 아닌 경상좌수사가 주관했다.
대체로 부산진에 있는 객사에서 열렸다.
동래, 경주, 밀양 등 인근 지역의 기생들이 와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악사들은 군악도 연주했다.
잔치가 열리는 날에는 부산진 성안이 구경꾼으로 가득 찼다.
청사초롱이 벽마다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다.
이것은 부산 사람은 물론 다른 지역 사람들도 통신사를 구경하고, 또한 통신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최대 축제였다.
그리고 마상재나 검무 등이 행해지기도 했다.
부산은 통신사가 국내에 머무는 종착지이자 일본을 떠나는 출발지이다.
통신사와 만나지 않을 때는, 왜관을 통해 늘 일본과 만나는 장소이다.
통신사가 일본에 간 당시 부산은 글로벌과 로컬이 만나는 글로컬의 공간이었다.
따라서 통신사와의 만남은 국가사의 관점은 물론 지역사·개인사의 관점도 중요하다.
부산은 사람, 장소, 문화 등 다양한 유·무형의 모습으로 통신사와 만났다.
통신사는 부산에 많은 유산을 남겼다.
이 유·무형의 유산을 인식하고, 발굴하고, 정리하고, 해석하고, 재현하는 작업이 우리 앞에 숙제로 남아 있다.
부산의 눈으로 통신사를 보고, 만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눈이 부산만의 눈이 되어서는 안 된다.
통신사의 만남과 그 정신이 소통에 있다면, 그 눈도 타자와 소통하는 눈이 되어야 한다.
■ 1763년 통신사와 부산 사람들
- 고구마 종자 보낸 조엄
- 지도·그림 그린 변박
- 계미수사록 남긴 변탁
- 병환에 귀환 못한 김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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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 죽림사의 김한중 묘. |
1763년 통신사 정사인 조엄은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구하여 부산에 보냈다.
이때 들여온 고구마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게 한 사람은
동래부사 강필리였다.
부산은 우리나라에서 고구마 재배가 시작된 곳이었다.
이처럼 부산은 1763년 통신사와 관계가 깊었다.
통신사를 태운 배는 1763년 10월 6일 일본으로 떠났다.
이 배에는 변박, 변탁, 김한중이라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동래 사람인 변박은 기선장이었다.
글에 능하고, 그림을 잘 그려서 조엄이 데리고 갔다.
조엄은 변박에게 대마도지도, 일본지도, 수차 등을 그리게 했다.
변박은 공무 수행용 그림을 그리는 일 외에, 화가로서
사적인 교류도 많이 했다.
당시 그렸던 호랑이 그림이 지금 일본에 전한다.
시즈오카의 세이겐지(청견사)에는 그가 쓴 시도 남아 있다.
동래 장교인 변탁은 조엄의 신임이 두터워, 복선장의 직책을 맡았다.
부산 사람 가운데 사행 기록을 남긴 사람은 변탁이 유일하다.
그가 쓴 '계미수사록'은 통신사 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오사카의 니이야마라는 일본인은 통신사의 관상을 보며 주고받은 필담을 토대로 '한객인상필화'라는 책을 남겼다. 변탁에 대해 호는 형재, 나이는 23세라고 적고 있다.
재예에 뛰어난 관상이라 했고, 변탁은 그가 그린 그림을 선물로 보냈다.
변탁의 그림 중에 대나무 그림이 지금 남아 있다.
'한객인상필화'에 나오는 '변탁'을 '변박'으로 잘못 파악한 연구도 나왔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변탁을 복권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초량 출신인 김한중은 소동이었다.
소동은 정사, 부사, 종사관 등의 시중이나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몸이 아파 도쿄로 가지 않고 오사카에 잔류하였으나, 병이 깊어져
1764년 2월 10일 별세했다.
당시 22세로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지금 오사카 치쿠린지(죽림사)에는 '김한중 묘'라고 쓴 비가 서 있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그의 가족에게 통신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통신사의 메카'라는 부산은 김한중과 그 가족에게는 어떤 장소일까.
조선국왕의 특사, 통신사의 화려한 행렬 뒤에는 개인의 슬픈 이야기가
뒤따르고 있다.
김동철 부산대 사학과 교수·한국민족문화연구소장
※공동기획 : 부산문화재단, 조선통신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