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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전통시조보존회 원문보기 글쓴이: 운현
1. 신대왕의 즉위와 조정의 안정
(서기 89~179년, 재위기간 : 서기 165년 10월~179년 12월, 14년 2개월)
명림답부의 정변으로 차대왕이 제거되고 신대왕이 등극함에 따라 고구려 백성들은 폭정의 그늘에서 벗어난다. 신대왕은 화합책을 도모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는 한편 백성들에 대한 위무정책을 추진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국제정세가 급격하게 변해감에 따라 고구려와 동한 사이에 패권 다툼이 진행된다. 이로 인해 고구려 백성들은 몇 번에 걸쳐 전쟁을 경험한다.
신대왕은 고추가(古鄒加, 조선 때의 칭호로는 임금의 아버지인 대원군에 해당) 재사의 셋째 아들이며, 태조와 차대왕의 이복동생이다. 서기 89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백고(伯固), 또는 백구(伯句)이다. 누구 소생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차대왕 재위 때에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산 속에 몸을 숨겼다가 서기 165년 10월에 명림답부에 의해 차대왕이 제거되자 77살의 노구로 고구려 제8대 왕에 추대되었다.
신대왕은 맏형인 태조보다 42살 아래이며, 둘째 형인 차대왕보다는 18살 아래이다.『삼국사기』는 차대왕은 태조의 동복아우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신대왕은 단지 태조의 막내아우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이는 신대왕이 태조의 동복아우가 아님을 말해준다. 신대왕이 태조보다 42살이나 어리다는 것 역시 그들이 이복형제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신대왕은 태조 재위 시에 그다지 큰 권력을 이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차대왕 재위 시에는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을 것이다.
백고는 차대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인물이다. 서기 138년, 차대왕이 왕위를 찬탈하려 하자 백고는 목숨을 걸고 그를 찾아가 만류한다. 하지만 차대왕은 그의 만류를 뿌리치고 8년 뒤인 서기 146년 12월에 태조를 상왕으로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차대왕은 태조의 아들들을 죽이고 권력을 독식하여 폭정을 일삼았으며, 그 때문에 민심은 날로 흉흉해지고 곳곳에서 반역의 기운이 감돌았다. 이에 백고는 목숨이 위태롭다는 판단을 하고 스스로 산 속에 은둔해 버렸다. 차대왕에게 항상 눈엣가시였기에 언제 차대왕의 칼날이 그에게 향할지 알 수 없는데다가, 누군가 반정을 도모하기라도 하면 필시 자신도 죽임을 당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백고의 예언은 적중했다. 서기 165년 10월 연나부 조의 명림답부가 주동이 되어 반정이 일어났고, 차대왕은 반정세력의 칼날에 목이 달아났다. 반정을 주도한 명림답부는 정권을 장악한 뒤 차대왕의 근신들을 포섭하여 백고를 새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조정은 백고를 찾기 위해 사람들을 풀었다. 얼마 뒤 백고가 궁궐로 돌아오자 반정공신 명림답부와 차대왕의 근신 어지류 등은 무릎을 꿇고 옥새를 바쳤다. 백고는 관례대로 세 번 사양한 뒤에 옥새를 받아들여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고구려 제8대 왕 신대왕이다.
왕위에 오른 신대왕은 우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는 위무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차대왕의 측근들을 비롯한 대다수의 죄수들이 사면되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차대왕의 아들인 태자 추안은 궐문 앞에 무릎을 꿇고 사면을 요청하였다. 그는 난이 발생했을 때 궁궐을 빠져나가 산 속에 숨어 있다가 대 사면령이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 용서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추안이 사면을 청한다는 소리를 듣고 신대왕과 새 조정은 그에게 양국군이라는 봉작을 내리고, 구산뢰와 누두어 두 곳을 봉토로 내렸다. 그에 대한 이 같은 획기적인 배려는 정권의 주도세력인 명림답부 일파가 확실하게 화합정책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을 대외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새 조정과 새 왕이 이처럼 화합정책 일변도로 나오자 정국은 빠르게 안정되었고, 학정을 피해 산 속으로 달아났던 백성들도 하산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 백성들은 20년 만에 안정된 삶을 되찾고 있었다.
신대왕은 화합정책과 함께 조정의 행정체제를 대폭 개선하였다. 재상격인 좌우보 제도를 없애고 국상제(國相制)를 도입하여 초대 국상에 명림답부를 임명하였다.
좌우보 제도를 혁파하고 국상제를 도입한 것은 근본적으로 왕의 권한이 그 만큼 약해졌다는 뜻이다. 신대왕은 어차피 반정 혁명세력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기에 조정은 반정을 주도한 명림답부 파에 의해 장악되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국상제였던 것이다.
초대 국상에 임명된 명림답부의 작호는 원래 조의였다. 그러나 신대왕 즉위 후에는 패자로 격상되었으며, 국상과 내외 병마사를 겸임하였다. 동시에 양맥부락을 스스로 통치하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그에게는 막강한 권력이 주어졌다. 행정권은 물론이고 병권까지 그가 장악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를 ‘국상(國相)’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고구려 조정이 명림답부에 의해 장악되고 있을 무렵 국제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었다. 북방에서는 선비의 세력이 팽창하여 남하하고 있었고, 부여와 동한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 선비, 부여, 동한 등의 변방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고, 마침내 서기 167년 봄에 부여 왕 부태가 현도군을 공격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부여가 현도를 공격하게 된 데에는 부여와 현도군 사이에 일어났던 무역 마찰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부여는 동한 왕실과 두터운 친분 관계를 형성했고, 그로 인해 부여는 동한 본토와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부여와 동한 조정 사이에 있던 현도군은 이에 불만을 품었고, 이 때문에 부여와 현도군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부여는 선비, 고구려 등의 묵인 하에 현도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부여는 군사 2만 명을 동원하여 현도를 쳤다. 하지만 부여는 현도 태수 공손역의 방어전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한 번 뻗친 전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현도군이 부여의 침략을 가까스로 막아내자, 이듬해인 서기 168년 12월에 고구려는 선비족과 연합하여 동한의 유주와 병주를 공격하였다. 동한은 현도 태수 경림에게 군사를 내주어 응전하게 하였다. 그 후 연합군과 동한군은 한동안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지속하다가 화의조약을 맺고 일시적으로 전쟁을 멈추었다.
당시 동한의 강하에서 만이(蠻夷)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경림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고구려에 화의를 제의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현도와 한의 요동군이 형성한 방어벽을 쉽게 뚫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경림의 화의제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이에 대하여『삼국사기』는 “현도군 태수 경림이 침입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이자 왕이 자진하여 항복하고 현도에 속하기를 요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정황을 따져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한은 만이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에 따라 오히려 동한이 고구려측에 화의제의를 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삼국사기』의 표현은 자신들의 패배를 역사서에 담지 않으려는『삼국지』의 왜곡된 표현을 그대로 베껴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한은 이 때의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서기 172년(신대왕 8년) 11월에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땅을 침략한다. 하지만 고구려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맥없이 퇴각하다가 좌원에서 고구려군에 의해 전멸하는 대패(좌원대첩)를 경험한다.
좌원에서의 승리 이후, 고구려는 한의 요동과 현도를 압박하여 국력을 증강시켰으며, 동한은 그 후 오랫동안 고구렬ㄹ 넘보지 못했다.
좌원대첩의 승리로 고구려의 안정에 크게 기여한 초대 국상 명림답부는 서기 179년 9월에 사망하였고, 그해 12월에 신대왕도 9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고국곡에 마련되었으며, 묘호는 ‘신대왕(新大王)’이라 하였다.
2. 신대왕의 가족들
신대왕은 발기(拔奇), 남무(제9대 고국천왕), 발기(發岐), 연우(제10대 산상왕), 계수 등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리고 왕후와 딸들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l에 맏아들 발기를 비롯하여 삼남 발기와 다섯 째 계수의 삶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고, 고국천와와 산상왕은 각 왕의 실록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발기(拔奇, 생몰년 미상)
발기는 신대왕의 맏아들이다. 하지만 신대왕은 그를 태자로 삼지 않았다. 신대왕은 서기 176년 둘째 아들 남무(고국천왕)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는 마아들 발기가 태자 재목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서기 179년 12월, 신대왕이 사망하자 신하들은 태자 남무를 차기 왕으로 옹립하였다. 발기는 이 일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서기 196년에 연나부의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이 때 반란에 동조한 사람은 각 장군 휘하에 있던 하층민 삼만 구였다고 하니, 반란군은 총 십만에 육박했을 것이다. 이들 반란군은 요동 태수 공손강에게 항복한 후 비류수 가에 진을 치고 있다가 진압군에게 패배하여 뿔뿔이 흩어진다. 이에 발기는 한의 요동으로 도망쳐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낸다.
발기(發岐, ?~서기 197년)
발기는 신대왕의 셋째 아들이다. 서기 197년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죽자, 고국천왕의 왕후 우씨는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은밀히 시동생 발기를 찾아 간다. 그리고 발기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발기는 고국천왕이 죽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왕후가 반역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씨에게 ‘여자가 밤에 출입하는 것은 예절에 어긋난다.’며 핀잔을 주었다. 이에 분개한 우씨는 즉시 발기의 아우 연우를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요청하였다. 왕후의 요청이 있자 연우는 흔쾌히 왕위에 오를 것을 약속하였다. 그런 후 그들은 그날 밤을 함께 보냈으며, 이튿날 왕후는 신하들에게 선왕의 유명을 구실로 연우를 왕으로 세운다. 그가 바로 산상왕이다.
형수 우씨가 계략을 꾸며 연우를 왕위에 앉힌 사실을 알게 된 발기는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공격한다. 하지만 연우와 우씨는 궐문을 굳게 닫고 수비전을 펼쳤다. 그러자 발기의 군사는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고, 발기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처자를 데리고 한나라 요동으로 몸을 피했다.
요동으로 간 발기는 요동 태수 공손도에게 군사 3만을 얻어 내 고구려를 침입했다. 이에 산상왕은 막내 아우 계수에게 군사를 내주고 발기가 이끄는 동한군을 대적하게 했다. 고구려와 동한의 싸움은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나고, 발기는 계수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계수가 발기를 처단하려 하자 발기가 꾸짖으며 말했다.
“네가 지금 감히 늙은 형을 죽이려 하느냐?”
이 말에 계수는 차마 형을 죽이지 못하고 소리쳤다.
“연우 형님이 왕위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정의로운 행동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형님이 일시적인 분을 참지 못하고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에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선조들을 배알하시려 합니까?”
발기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배천으로 도주하여 그 곳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계수(瀱須, 생몰년 미상)
계수는 신대왕의 다섯 째 아들이다. 그는 왕족이었지만, 지략을 겸비한 뛰어난 장수였다. 그래서 서기 184년(고국천왕 6년)에 동한의 요동 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였다. 또 서기 197년에는 셋째 형 발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나라 군사를 이끌고 오자 이를 격퇴하고 발기를 사로잡기도 하였다. 하지만 계수는 발기를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발기는 스스로 목을 칼로 찔러 자결한다. 계수는 이 소식을 듣고 애도하며 발기의 시체를 거둬 빈소를 차렸다.
계수가 한의 요동군을 격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산상왕은 계수를 대궐로 불러 크게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그런데 이 연회장에서 산상왕은 계수가 발기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물었다.
“발기가 타국에 병력을 청하여 나라를 침범하였으니, 이 보다 큰 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전쟁에 이기고도 형제애를 발휘해 발기를 놓아주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터인데 너는 여전히 발기의 죽음을 애통해하니, 이는 나를 무도한 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냐?”
이에 계수가 대답했다.
“저는 죽더라도 이 한마디는 해야겠습니다.”
“무슨 말인가?”
“왕후께서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마마를 즉위하게 하였으나, 마마께서는 예로써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미 형제간에 우애를 지키고 서로 존종해야 한다는 의리를 저버린 것입니다. 또한 제가 발기의 시체를 거두어 빈소를 차린 것은 마마의 닥을 펼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마마께서 노여워하신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마께서 만약 어진 정치를 펴고자 한다면 발기의 죄악을 잊어버리고, 오직 형제의 예로써 상례를 지내주셔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말 때문에 죽는다면 그 죽음을 달게 받겠습니다.”
계수의 이 말에 산상왕은 의심을 풀었다. 그리고 계수의 충언대로 왕례로써 발기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계수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 그 이후의 삶은 전혀 언급된 바 없다. 물론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3. 명림답부와 좌원대첩
신대왕 시대는 명림받부(明臨答夫)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서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대왕을 왕으로 추대한 사람도 그고, 신대왕 때에 처음 시작된 국상제도를 마련한 사람도 그다. 또한 초대 국상이 되어 신대왕의 모든 정책을 이끌어주고 훈계하며 확립한 사람도 그였다. 따라서 신대왕 시대는 명림답부의 시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명림답부는 연나부(椽那部, 절노부라고도 함) 출신으로 서기 67년(태조 15년)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연나부는 유리명왕 이후엔ㄴ 주로 왕후를 배출하던 부족이었다. 때문에 고구려 건국 초기의 연나부는 왕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연나부의 조의에 올라 있었다. 조의는 패자, 대주부, 주부, 우태와 마찬가지로 나부에서 부여받은 작위였다. 이들 작위 가운데 조의는 맨 아래 작위에 해당된다.
연나부 조의로 있던 그는 서기 146년에 차대왕이 태조를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사건과 차대왕의 폭정을 경험한다. 차대왕 재위시의 암흑기는 거의 20년간 계속되었고, 폭정으로 민심은 조정과 왕실에 등을 돌린다. 명림답부는 민심에 힘입어 차대왕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서기 165년 10월에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궁성을 치기에 이른다.
명림답부의 봉기에는 많은 신하가 가담하였다. 심지어 환나부(순노부라고도 함) 출신의 어지류와 같은 차대왕 측근 세력도 동조했다. 이 같은 광범위한 지지세력 덕분에 명림답부는 반정을 성공으로 이끈다.
답부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그의 나이 99세 때였다. 여느 사람 같으면 방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릴 법한 나이였건만 답부는 그 때 반정의 지도자로 활약했으니, 그의 근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1백 세의 노구를 이끌고 칼을 휘두르며 반정을 진두지휘하여 마침내 차대왕을 죽이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는 데 성공한 답부는 새로운 왕으로 신대왕을 지목했다. 신대왕은 당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 속에 은거하고 있었다. 답부는 사람들을 풀어 그를 찾아내고, 마침내 왕으로 옹립하였다.
신대왕은 즉위하자 반정 일등공신인 그의 작위를 패자로 격상시키고, 초대 국상으로 임명했다. 국상이라 함은 종전에 좌보와 우보에게 주어진 행정권을 모두 행사하는 대단한 위치였다. 거기에다 답부는 내외의 병마사를 겸하였기에 병권마저 장악하였다. 행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한 그의 위세는 어쩌면 왕 보다 위에 있는지도 몰랐다. 또한 답부에게는 양맥 부락을 통치할 수 있는 자치권마저 주어졌다. 그야말로 그는 천하를 한 손에 쥔 격이었다.
이 같은 위세라면 왕도 능멸할 소지가 충분했다. 또한 모든 정사를 독식할 기반도 마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답부는 인격자였다. 화합을 제일의 덩치덕목으로 삼았고, 그것을 위해 쏟은 정치적 결단도 많았다. 반정에 성공한 후에 차대왕의 측근들을 모두 수용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정치범과 일반 범죄자들을 대거 석방한 거소 그 좋은 예이다. 특히 차대왕의 아들 추안의 죄를 사면해주고, 오히려 봉작까지 내려 봉토를 지급한 것은 그의 화합정치 이념을 그대로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반정에 성공한 세력은 폐왕의 신하들을 모두 숙청하고, 또 폐왕의 가족들을 몰살시키곤 하였다. 그러나 답부는 달랐다. 자신에게 절대 권력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피를 부르는 일은 결단코 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높은 인격을 대변해주고 있다.
답부의 주도로 이뤄진 신대왕의 정치는 비교적 원만하였다. 급격하게 변해가는 국제 정세에 대한 적응도 빨랐고, 동한과의 패권 다툼에서도 밀리는 법이 없었다. 특히 서기 172년에 있었던 좌원대첩은 그의 뛰어난 판단력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서기 172년 11월, 동한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당시 동한 조정은 외척과 환관의 다툼이 극으로 치달았고, 외부적으로는 선비와 부여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다 고구려가 변방을 위협하자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동한의 대병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고구려 조정은 그들을 대처하기 위해 국무회의를 열었다. 적이 쳐들어왔으니 수비전을 펼칠 것인지 아니면 도중에서 맞붙어 싸울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다. 신하들의 의견은 맞공격을 하자는 측과 수성전을 펼치자는 측으로 나뉘었다.
먼저 맞공격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했다.
“지금 한나라 군사들은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사실만 믿고 겁 없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깔보는 처사이니 속히 군사를 보내 응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나가지 않고 성문만 굳게 닫고 있다면 그들은 우리를 겁쟁이로 볼 것입니다. 이는 적으로 하여금 잦은 침략을 하게 하는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군사를 보내 적을 치소서.”
이에 신대왕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계책을 말하시오.”
“폐하,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적군이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한 명이 문을 지키면 만 명이 와도 막아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를 가진 것입니다. 하여 한나라 군사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어찌 우리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군사를 출동시켜 길목을 지키다가 공격하는 것이 옳을 줄 아룁니다.”
이 말을 듣고, 신대왕은 국상 답부의 의견을 물었다.
“국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부가 대답했다.
“물론 길목을 차단하는 것도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칫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한나라의 군사는 우선 수적으로 우세하고, 다음으로 오랫동안 침략을 준비한 정예부대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기세는 대단할 것입니다. 그런데 섣불리 그 기세를 꺾으려 했다간 오히려 말려들 수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병력이 우세하면 공격을 감행하고, 병력이 열세면 수비전을 펼치는 것이 병법의 기본입니다. 지금 한군은 천리나 되는 먼 길을 오고 있으며, 또 그 먼 길을 따라 군량미를 수송해야 할 입장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단시일에 싸움을 끝내고 돌아가려 할 것입니다. 만약 장기전을 펼치면 스스로 지쳐 쓰러질 것은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해서 우리는 성 밖에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 밖의 들판을 곡식 한 톨, 사람 하나 없이 텅텅 비워놓으면 그들은 적어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갈 것입니다. 돌아가는 그들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있을 것이고, 그때 우리가 군사를 내보내 치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국상 답부의 견해에 따라 신대왕은 수성전을 펼칠 것을 명령했다. 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집결시키고, 가호는 텅 비워 곡식 한 톨 남기지 않았다. 성 주위에는 깊은 도랑을 파고 물을 채웠으며, 다시 도랑 위에는 높은 축대를 쌓아 외성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한군이 몰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구려의 계략을 눈치 채지 못한 한군은 일사천리로 고구려 영토로 진격하였다. 고구려 진영에 들어왔지만 막는 이 하나 없고, 덤비는 이 하나 없으니 그들은 그야말로 신바람이 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모든 인가가 비어 있고, 가축마저 온데간데없으며, 곡간에는 곡식 한 톨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점차 두려움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 도성에 도착했을 때 그들 앞을 막아서는 것은 깊이 파인 도랑과 높은 보루였다.
한군은 수적 우세를 미고 성을 향해 돌진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도랑을 넘기도 전에 보루와 성곽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싸움은 수일 동안 반복되었다. 하지만 한군은 단 한 차례도 도랑을 건너지 못했다.
시일이 흐르면서 한군은 점차 지쳐갔고, 반대로 고구려군은 기세가 올랐다. 마침내 한군이 굶주림과 피로를 이기지 못해 퇴각하기 시작하자 고구려군의 사기는 절정에 달했다.
답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적군이 맥없이 돌아가자 답부는 장수와 병졸들을 이끌고 몸소 추격전을 벌였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아군은 수천 명만 출전하였다. 그리고 좌원에서 적군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지친 한군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구려군은 익숙한 지형을 이용하여 철저하게 적군을 응징했다.
싸움은 고구려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굶주리고 지친 수만 명의 한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단지 수천 명의 고구려군에게 전멸하고 말았다. 이 싸움의 결과를『삼국사기』는 “좌원에서 전투를 벌이니, 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좌원대첩’의 전말이다.
동한은 이 전투 결과가 너무 치욕스러워 기록을 남기는 것조차 피했다. 이를 두고 일본 사학자들은 중국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다 하여 ‘좌원대첩’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삼국사기』는 좌원대첩을 승리로 이끈 국상 명림답부의 출신과 사망연도까지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때 명림답부가 싸운 좌원은 고국천왕 6년(서기 184년)에 요동 태수의 군대를 전멸시킨 장소라는 것도 이 싸움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답부가 좌원에서 대승을 거두자 신대왕은 그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이 때 명림답부의 나이는 106세였다.
그렇게 백발이 성성한 노구를 이끌며 노익장을 과시하던 그에게도 죽음은 찾아왔다. 서기 179년 9월, 노환으로 누워 있던 답부는 기어코 천수를 누리고 11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자 신대왕은 자신이 직접 답부의 빈소를 찾아 애도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하였다. 그 후 신대왕도 그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다가 3개월 뒤인 그해 12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선생이고, 정치적으로는 든든한 후견인이었으며, 사상적으로는 동지였던 명림답부의 죽음은 아흔 살을 넘긴 신대왕에게는 참아내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 신대왕 시대의 세계 약사
신대왕 시대 14년은 중국의 동한 제11대 환제 유지(146~167년)의 말기 2년과 제12대 영제 유굉(167~189년) 전기 12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동한은 사회적으로는 107년 이후 계속되는 농민봉기로 잠잠할 날이 없는 가운데 곳곳에서 도적이 봉기하고, 정치적으로는 환관과 외척의 싸움이 극에 달해 진번이 환관을 죽이려다 되레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외부적으로는 선비족이 강성하여 유주와 병주 등 북방이 위협받고 있었고, 부여와 고구려의 요동 및 현도에 대한 공략으로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로마는 전국에 페스트가 만연하여 인구가 격감하고 변방에서는 게르만족이 밀려들어 사횔ㄹ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루키우스 베루스가 죽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독자적으로 권력을 장악한다. 로마는 이 시기에 동한에 사신을 보내고, 게르만전쟁을 경험하였으며, 카시우스의 반란을 진압한다. 또한 아우렐리우스는『명상록』을 만들고,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많은 치적을 남기고 죽음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