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過去)와 미래(未來)와 현재(現在)와는 三일지라도 일념(一念)의 심중(心中)의 이(理)이므로 무분별(無分別)이니라.
작성자:세계광선유포
작성시간:2023.11.30 조회수: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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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음만이 중요하니라를 깊이 인식하고 일념을 정해서 창제할 수 있는 어서말씀(장문이지만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라서..)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은 여러 가지로 다르다 해도 실상(實相)의 이(理)는 하나인 고(故)로 무분별(無分別)이며, 백계천여(百界千如)·삼천세간(三千世間)의 법문(法門)은 다르지만, 십계호구(十界互具)하는 고(故)로 무분별(無分別)이니라, 꿈과 생시(生時)와 허(虛)와 실(實)과 각각(各各) 다르다 해도 일심중(一心中)의 법(法)인 고(故)로 무분별(無分別)이니라, 과거(過去)와 미래(未來)와 현재(現在)와는 三일지라도 일념(一念)의 심중(心中)의 이(理)이므로 무분별(無分別)이니라.
극락(極樂)이란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정보(正報)인 유정(有情)과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의보(依報)인 국토(國土)가 화합(和合)하여 일체삼신즉일(一體三身卽一)이니라.
사토불이(四土不二)로서 법신(法身)의 일불(一佛)이며, 십계(十界)를 신(身)으로 함은 법신(法身)이니라.
※ 사토(四土) : 범성동거토(凡聖同居土) 방편유여토(方便有餘土) 실보무장애토(實報無障礙土) 상적광토(常寂光土) ※
십계(十界)를 심(心)으로 함은 보신(報身)이니라.
십계(十界)를 형(形)으로 함은 응신(應身)이니라.
십계외(十界外)에 부처는 없고 부처 외(外)에 십계(十界)가 없어서 의정불이(依正不二)이고 신토불이(身土不二)니라.
일불(一佛)의 신체(身體)임을 가지고 적광토(寂光土)라 하며, 이런 고(故)로 무상(無相)의 극리(極理)라 하느니라.
생멸무상(生滅無常)의 상(相)을 떠난 고(故)로 무상(無相)이라 하며, 법성(法性)의 연저(淵底)·현종(玄宗)의 극지(極地)인 고(故)로 극리(極理)라고 하느니라,
이 무상(無相)의 극리(極理)인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심성(心性)속에 있어서 청정무루(淸淨無漏)이니라.
이를 이름하여 묘법(妙法)의 심연대(心蓮臺)라 하며, 이런 고(故)로 심외무별법(心外無別法)이라고 하느니라.
이것을 일체법(一切法)은 개시불법(皆是佛法)이라고 통달해료(通達解了)함이라 하느니라.
생(生)과 사(死)의 둘의 이(理)는 생사(生死)의 꿈의 이(理)이고, 망상(妄想)이며 전도(顚倒)이니라.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를 가지고 나의 심성(心性)을 밝히면 생(生)할 시초(始初)도 없는 고(故)로 죽게 될 끝도 없으니, 이미 생사(生死)를 떠난 심법(心法)이 아니겠느뇨.
겁화(劫火)에도 타지 않고, 수재(水災)에도 썩지 않으며, 검도(劍刀)에도 잘리지 않고, 궁전(弓箭)에도 맞지 않고, 개자(芥子)속에 들어가도 개자(芥子)도 넓어지지 않고, 심법(心法)도 줄어들지 않고, 허공(虛空)속에 꽉 차도 허공(虛空)도 넓지 않고, 심법(心法)도 좁지 않으며, 선(善)에 배반(背反)함을 악(惡)이라 하고, 악(惡)에 배반(背反)함을 선(善)이라고 한다.
고(故)로 심외(心外)에 선(善)이 없고 악(惡)이 없으며, 이 선(善)과 악(惡)에서 떨어짐을 무기(無記)라고 하느니라.
선악무기(善惡無記)·이 외(外)에는 마음이 없고 마음 외(外)에는 법(法)이 없는 고(故)로 선악(善惡)도 정예(淨穢)도 범부(凡夫)·성인(聖人)도 천지(天地)도 대소(大小)도 동서(東西)도 남북(南北)도 사유(四維)도 상하(上下)도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소멸(心行所滅)함이라.
마음에 분별(分別)하여 생각해서 말하여 나타내는 언어(言語)이므로 마음의 외(外)에는 분별(分別)도 무분별(無分別)도 없느니라.
말이라 함은 마음의 생각을 울려서 소리로 나타냄을 말함인데, 범부(凡夫)는 나의 마음에 미혹(迷惑)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니라.
부처는 이를 깨달아 나타내서 신통(神通)이라 이름하니 신통(神通)이란 혼신(魂神)이 일체법(一切法)에 통(通)하여 장애(障碍)가 없음이라.
이 자재(自在)의 신통(神通)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마음인 고(故)로 호리(狐狸)도 응분(應分)으로 신통(神通)을 나타냄은 모두 마음의 혼신(魂神)의 응분(應分)의 깨달음이며, 이 마음의 일법(一法)에서 국토세간(國土世間)도 출래(出來)하는 것이니라.
일대성교(一代聖敎)란 이 일을 설(說)한 것이며, 이것을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이라고 하느니라.
이는 모두 일인(一人)의 신중(身中)의 법문(法門)이니라, 그러므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은 자신일인(自身一人)의 일기문서(日記文書)로다.
이 팔만법장(八萬法藏)을 나의 심중(心中)에 내포(內包)하여 갖고, 품어 가졌노라, 나의 신중(身中)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와 법(法)과 정토(淨土)를 내 몸 밖에서 생각하고 원(願)하며 구(求)함을 미혹(迷惑)이라 하고 이 마음이 선악(善惡)의 연(緣)을 만나 선악(善惡)의 법(法)을 만들어 내느니라.
《 본문어서 》
부처의 심법묘(心法妙)·중생(衆生)의 심법묘(心法妙)와 이 이묘(二妙)를 취(取)하여 기심(己心)에 받아들이는 고(故)로 심외(心外)에 법(法)이 없으며, 기심(己心)과 심성(心性)과 심체(心體)의 三은 기신(己身)의 본각(本覺)의 삼신여래(三身如來)이니 이를 경(經)에 설(說)하여 가로되「여시상(如是相)응신여래(應身如來) 여시성(如是性)보신여래(報身如來) 여시체(如是體)법신여래(法身如來)」 이를 삼여시(三如是)라고 하느니라. 이 삼여시(三如是)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는 시방법계(十方法界)를 신체(身體)로 하고, 시방법계(十方法界)를 심성(心性)으로 하며, 시방법계(十方法界)를 상호(相好)로 함이니, 이러한 고(故)로 이 몸은 본각삼신여래(本覺三身如來)의 신체(身體)이니라. 법계(法界)에 주편(周徧)하여 일불(一佛)의 덕용(德用)이므로 일체(一切)의 법(法)은 개시(皆是) 불법(佛法)이라고 설(說)하셨을 때 그 좌석(座席)에 열석(列席)하였던 모든 사중(四衆)·팔부(八部)·축생(畜生)·외도(外道) 등(等),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다 망상(妄想)의 벽목(僻目)·벽사(僻思)·즉좌(卽座)에서 산지(散止)하여,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로 돌아와서 모두 불도(佛道)를 이루었다. 부처는 생시(生時)의 사람과 같고 중생(衆生)은 꿈꾸는 사람과 같으므로, 생사(生死)의 허몽(虛夢)에서 깨어나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로 돌아옴을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고도 평등대혜(平等大慧)라고도 무분별법(無分別法)이라고도 개성불도(皆成佛道)라고도 하니, 오직 하나의 법문(法門)이니라. 시방(十方)의 불토(佛土)는 각각(各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해도 통틀어 법(法)은 일승(一乘)이며, 방편(方便)이 없는 고(故)로 무분별법(無分別法)이니라.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은 여러 가지로 다르다 해도 실상(實相)의 이(理)는 하나인 고(故)로 무분별(無分別)이며, 백계천여(百界千如)·삼천세간(三千世間)의 법문(法門)은 다르지만, 십계호구(十界互具)하는 고(故)로 무분별(無分別)이니라, 꿈과 생시(生時)와 허(虛)와 실(實)과 각각(各各) 다르다 해도 일심중(一心中)의 법(法)인 고(故)로 무분별(無分別)이니라, 과거(過去)와 미래(未來)와 현재(現在)와는 三일지라도 일념(一念)의 심중(心中)의 이(理)이므로 무분별(無分別)이니라. 일체경(一切經)의 말은 몽중(夢中)의 말이라고 함은 비유(譬喩)컨대 부채와 나무와 같으며, 법화경(法華經)의 생시(生時)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란 비유(譬喩)컨대 달과 바람과 같으니라. 고(故)로 본각(本覺)인 생시(生時)의 마음의 월륜(月輪)의 빛은 무명(無明)의 어두움을 비추고, 실상반야(實相般若)의 지혜(智慧)의 바람은 망상(妄想)의 먼지를 없앤다. 고(故)로 꿈의 말인 부채와 나무를 가지고 생시(生時)의 마음인 달과 바람을 알게 함이라. 이런 고(故)로 꿈의 여파(餘波)를 없애고 생시(生時)의 본심(本心)으로 돌아가게 하느니라. 고(故)로 지관(止觀)에 가로되「달이 중산(重山)에 숨으면 부채를 가지고 이것을 예(例)로 하고 바람이 대허(大虛)에 잠자 버리면 나무를 움직여서 이를 가르침과 같으니라」문(文), 홍결(弘決)에 가로되「진상성(眞常性)의 달은 번뇌(煩惱)의 산(山)에 숨으니 번뇌(煩惱)는 一이 아니로다. 고(故)로 이름하여 중(重)이라 함이라. 원음교(圓音敎)의 바람은 화(化)를 멈추고, 적(寂)에 귀(歸)하니, 적리무애(寂理無礙)함은 마치 대허(大虛)와 같으니라, 사의(四依)의 홍교(弘敎)는 부채와 나무와 같다, 내지(乃至) 달과 바람을 알게 하느니라 이상(已上). 몽중(夢中)의 번뇌(煩惱)의 구름은 중첩(重疊)함이 산(山)과 같고, 그 수는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진로(塵勞)로서 심성본각(心性本覺)의 월륜(月輪)을 숨긴다. 부채와 나무와 같은 경론(經論)의 문자(文字), 언어(言語)의 교(敎)로써 달과 바람과 같은 본각(本覺)의 이(理)를 각지(覺知)시키는 성교(聖敎)이니라. 고(故)로 문(文)과 언어(言語)는 부채와 나무와 같다」문(文), 위의 석(釋)은 일왕(一往)의 석(釋)으로서 실의(實義)가 아니니라. 달과 같은 묘법(妙法)의 심성(心性)의 월륜(月輪)과 바람과 같은 나의 마음의 반야(般若)의 혜해(慧解)를 가르쳐 알게 함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함이라. 고(故)로 석첨(釋籤)에 가로되「성색(聲色)의 근명(近名)을 찾아서 무상(無常)의 극리(極理)에 이르느니라」고 이상(已上). 성색(聲色)의 근명(近名)이란 부채와 나무와 같은 몽중(夢中)의 일체경론(一切經論)의 언설(言說)이니라. 무상(無相)의 극리(極理)란 달과 바람과 같은 생시(生時)인 이 몸의 심성(心性)의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이니라. 이 극락(極樂)이란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정보(正報)인 유정(有情)과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의보(依報)인 국토(國土)가 화합(和合)하여 일체삼신즉일(一體三身卽一)이니라. 사토불이(四土不二)로서 법신(法身)의 일불(一佛)이며, 십계(十界)를 신(身)으로 함은 법신(法身)이니라. 십계(十界)를 심(心)으로 함은 보신(報身)이니라. 십계(十界)를 형(形)으로 함은 응신(應身)이니라. 십계외(十界外)에 부처는 없고 부처 외(外)에 십계(十界)가 없어서 의정불이(依正不二)이고 신토불이(身土不二)니라. 일불(一佛)의 신체(身體)임을 가지고 적광토(寂光土)라 하며, 이런 고(故)로 무상(無相)의 극리(極理)라 하느니라. 생멸무상(生滅無常)의 상(相)을 떠난 고(故)로 무상(無相)이라 하며, 법성(法性)의 연저(淵底)·현종(玄宗)의 극지(極地)인 고(故)로 극리(極理)라고 하느니라, 이 무상(無相)의 극리(極理)인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심성(心性)속에 있어서 청정무루(淸淨無漏)이니라. 이를 이름하여 묘법(妙法)의 심연대(心蓮臺)라 하며, 이런 고(故)로 심외무별법(心外無別法)이라고 하느니라. 이것을 일체법(一切法)은 개시불법(皆是佛法)이라고 통달해료(通達解了)함이라 하느니라. 생(生)과 사(死)의 둘의 이(理)는 생사(生死)의 꿈의 이(理)이고, 망상(妄想)이며 전도(顚倒)이니라.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를 가지고 나의 심성(心性)을 밝히면 생(生)할 시초(始初)도 없는 고(故)로 죽게 될 끝도 없으니, 이미 생사(生死)를 떠난 심법(心法)이 아니겠느뇨. 겁화(劫火)에도 타지 않고, 수재(水災)에도 썩지 않으며, 검도(劍刀)에도 잘리지 않고, 궁전(弓箭)에도 맞지 않고, 개자(芥子)속에 들어가도 개자(芥子)도 넓어지지 않고, 심법(心法)도 줄어들지 않고, 허공(虛空)속에 꽉 차도 허공(虛空)도 넓지 않고, 심법(心法)도 좁지 않으며, 선(善)에 배반(背反)함을 악(惡)이라 하고, 악(惡)에 배반(背反)함을 선(善)이라고 한다. 고(故)로 심외(心外)에 선(善)이 없고 악(惡)이 없으며, 이 선(善)과 악(惡)에서 떨어짐을 무기(無記)라고 하느니라. 선악무기(善惡無記)·이 외(外)에는 마음이 없고 마음 외(外)에는 법(法)이 없는 고(故)로 선악(善惡)도 정예(淨穢)도 범부(凡夫)·성인(聖人)도 천지(天地)도 대소(大小)도 동서(東西)도 남북(南北)도 사유(四維)도 상하(上下)도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소멸(心行所滅)함이라. 마음에 분별(分別)하여 생각해서 말하여 나타내는 언어(言語)이므로 마음의 외(外)에는 분별(分別)도 무분별(無分別)도 없느니라. 말이라 함은 마음의 생각을 울려서 소리로 나타냄을 말함인데, 범부(凡夫)는 나의 마음에 미혹(迷惑)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니라. 부처는 이를 깨달아 나타내서 신통(神通)이라 이름하니 신통(神通)이란 혼신(魂神)이 일체법(一切法)에 통(通)하여 장애(障碍)가 없음이라. 이 자재(自在)의 신통(神通)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마음인 고(故)로 호리(狐狸)도 응분(應分)으로 신통(神通)을 나타냄은 모두 마음의 혼신(魂神)의 응분(應分)의 깨달음이며, 이 마음의 일법(一法)에서 국토세간(國土世間)도 출래(出來)하는 것이니라. 일대성교(一代聖敎)란 이 일을 설(說)한 것이며, 이것을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이라고 하느니라. 이는 모두 일인(一人)의 신중(身中)의 법문(法門)이니라, 그러므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은 자신일인(自身一人)의 일기문서(日記文書)로다. 이 팔만법장(八萬法藏)을 나의 심중(心中)에 내포(內包)하여 갖고, 품어 가졌노라, 나의 신중(身中)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와 법(法)과 정토(淨土)를 내 몸 밖에서 생각하고 원(願)하며 구(求)함을 미혹(迷惑)이라 하고 이 마음이 선악(善惡)의 연(緣)을 만나 선악(善惡)의 법(法)을 만들어 내느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56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