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1 워치타워 출판물에서는 '진리' 라는 단어를 남용하며 오용하고 있다. 그들은 진리 앞에 온갖 수식어를 붙인다. “the truth”진리, “rich truths” 부요한 진리", “Bible truths” 성서 진리, “great truths” 위대한 진리, “revealed truths” 밝혀진 진리, “precious truths” 귀한 진리 “jewels of truth” 보석 같은 진리, “unsealed truths” 알려진 진리, “Scriptural truths”, 성경 진리, “established truths” 확립된 진리, “liberating truths” 자유케 하는 진리, “pure language” 순수한 진리, “revealed truths of Jehovah” 여호와의 드러난 진리. 그들은 모든 "진리"의 책임을 여호와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떠넘김으로써 더욱 강도 있게 나타내려고 한다. 그들은 현행 가르침을 “현 진리”라고 언급하곤 했다. - 선포자책 121쪽 참조. 그들은 “새로운 진리”를 기대한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를 “진리”라고 말한다. 또한 “실패할 수 없는 진리”, “그리스도인 진리”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왔다. 이상하게도 그들이 사용하지 않은 유일한 용어는 “복음의 진리”이다. 2 바울이 인용한 대부분의 성경 구절은 그 구절을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달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의 구절을 비록 문맥에 맞지 않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맞추어 적용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의 예수를 아들이라고 부른 부분은 시편을 인용한 것인데 시편에 나오는 아들이란 왕의 대관식 때 다윗이 솔로몬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강하게 믿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유추적용시킨 것이다. 많은 다른 부분들도 바울은 그런 식으로 구약 성경을 적용하였다. 3 성서에서 진리라는 것과 참 숭배라는 용어는 신앙적인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절대적인 것 이를테면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와는 다른 종류이다. 그러한 진리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며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또한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1) 우상숭배의 본질은 바울이 말했듯이 인간의 "탐욕"이다. 어떤 형상에 절하거나 행위를 하는 것은 탐욕을 드러내는 방식(=형식)인 것이다. 10계명에서 가장 처음으로 나오고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만 숭배하고 우상을 멀리하라는 것은 바로 인간 "탐욕"을 경계시키는 것이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이다. 이러한 10계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나 왕들이 산당을 짓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고 심지어 성전 안에 우상을 세우는 행위는 인간 탐욕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숭배는 매우 도덕적이고 영적이어서 인간에게 당장에 손해가 오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저울 눈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거래하면 이윤이 거의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야호와 숭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는 그런 것을 어기고 부정직하고 부패한 방법으로 거래하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 자신에게 우선 득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형상에 절하거나 숭배의 표시를 하는 것은 우상숭배를 하겠다는 의사의 형식이지 본질은 아니다. 본질적이 아닌 것을 강조하고 본질적인 것을 정작 외면한다면, 이는 우상 숭배가 무엇인지 모르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흔한 형태의 우상숭배는 물질우상숭배이다. 물질이 신이되어 온갖 종류의 탐욕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물질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과정을 정직하게 바로잡지 않는 한 이 우상숭배의 본질은 계속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한다는 것은 여호와 또는 이와 유사한 발음을 많이 하거나 그 발음을 광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명예스럽게 하는 방식을 생각할 때, 그가 선행을 행하여 표창을 받게 되거나, 혹은 출세하여 고위직에 오르게 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거나 남에게 알릴 때 아버지의 이름을 널리 광고하는 것이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홍 단감의 아버지는 홍 길동이다" 라는 식으로 떠들고 다니는 것이 아버지의 이름을 존중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런 일일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이름은 결코 당사자가 짓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지은 연유는 고대 부족사회에서 자신의 부족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름대로의 신의 이름을 붙여 정신적 지주로 삼았기 때문인데 이스라엘 부족도 이에 예외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마당에서 고대 부족들이 자기의 신을 구별하듯이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늘에나 땅에 많은 신들이 있다고 주장되지만 실은 오직 한분인 하나님이 계시며 곧 우리의 아버지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워치타워 법인은 그들의 분파성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여호와라는 고유명사를 즐겨 사용하지만 신약성서에서 그 분명한 근거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발음을 사용했을 것이다라는 자의적인 추측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3)-4) 진리를 사랑하는지 않는지는 예수의 이러한 말씀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1, 22) 진리는 곧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하심이며 그 자체가 진리이고 선이므로,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내 이웃을 사랑하는 말씀으로 나타나게 되며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사랑이 무엇인지 고전13장에서 정의하는 것은 바로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우리의 매너와 정신 자세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일에서의 동기는 사랑이 되어야 하며 이웃의 유익을 고려하는 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태도이다. 4 믿음이 하나라는 것은 모든 견해가 일치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상황에 대해서도 각자의 생각은 모두 다를 수 있으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아래서 비록 견해가 다르더라도 서로 양보하여 분파를 형성하지 말라는 뜻이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연합하는 것이지 관념이 획일화가 연합의 주요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관념은 시간과 환경이 바뀜에 따라 언제나 달라질 수 있지만 사랑은 영원하여 결코 실패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하나의 사실에 어떤 다른 관념을 가질 수 있는지 좋은 예가 있다. https://blog.naver.com/pokertopia/222253861228
5 컽트의 특징 중 하나는 오직 자신만의 가르침이 유일한 진리라는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만이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라고 하는 것은 진실을 찾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조사해 볼만 시간과 여력이 없고, 또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만으로 충분하다는 의미이지 결코 배타적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다. 진리는 항상 열린 가르침이지 결코 폐쇄된 가르침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