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
이삭빛
그대는 나에게
요란한 몸짓으로 마음을 흘리지 않는다
다만
해 저문 창가에 등불을 켜 두듯
차가워진 내 손을 가만히 쥐어줄 뿐이다
세상의 거친 바람에 흔들려
내 영혼의 옷깃이 갈가리 찢기는 날에도
그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흐트러진 내 마음을 조용히 다듬어
따스한 화로 곁에 앉혀 둔다
누군가의 곁을 변함없이 지키는 일은
제 삶의 온기를 전부 나누어 주는 숭고한 헌신임을
나는 그대의 깊어진 눈빛으로 배웠다
가끔
그대의 서툰 걱정은
얼어붙은 가슴을 감싸는 낡은 목도리 같고
그대의 고요한 침묵은
끝내 무너지지 말라는 단단한 주춧돌 같다
돌아보면
내 굽은 길의 모퉁이마다
언제나 그대의 환한 미소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이 거대한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겨본 적 없지만
그대가 건넨 나직한 숨결 덕분에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므로
내 거친 생애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오직 하나,
그대라는 이름이다
[시평] 마중물, 제 온기를 다 주어 나를 길어 올리는 존재
ㅡ 이삭빛의 <마중물>을 읽고
시평 윤정 문학평론가
1. 소란스럽지 않은 사랑이 주는 안식
"그대는 나에게 / 요란한 몸짓으로 마음을 흘리지 않는다"
"다만 / 해 저문 창가에 등불을 켜 두듯 / 차가워진 내 손을 가만히 쥐어줄 뿐이다"
이 시에서 사랑은 소란스러운 고백이나 화려한 이벤트로 증명되지 않는다. 시인이 정의하는 참된 사랑의 형태는 ‘해 저문 창가의 등불’이나 ‘가만히 쥐어주는 손’처럼 고요하고 은은하다. 세상의 소음에 지친 영혼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요란한 위로가 아니라, 언제나 그 자리에 켜져 있는 따스한 온기임을 시인은 담담히 서술한다.
2. 허물어진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공간
"그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 흐트러진 내 마음을 조용히 다듬어 / 따스한 화로 곁에 앉혀 둔다"
세상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인간은 자주 중심을 잃고 영혼의 옷깃이 찢긴다. 이때 그대는 무너진 나를 탓하거나 다그치지 않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건네는 평온한 일상은 그 자체로 거대한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듬어 ‘따스한 화로 곁’이라는 안식의 공간에 앉혀 두는 행위는, 존재의 깨어진 조각들을 다시 모아 인간의 모양을 복원해 내는 구원의 과정이다.
3. 삶의 버팀목이 되어준 그대라는 이름
"나는 단 한 번도 / 이 거대한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겨본 적 없지만 / 그대가 건넨 나직한 숨결 덕분에 /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시인은 스스로를 세상에 이겨본 적 없는 나약한 존재로 고백한다. 그러나 이 패배감은 절망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비록 세상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했을지라도, 그대가 나누어 준 ‘나직한 숨결’과 ‘마음의 노동’이 있었기에 오늘을 살아낼 힘을 얻는다. 펌프에 한 바가지의 물을 부어 깊은 샘물을 솟구치게 하는 마중물처럼, 그대의 존재는 시인의 멈춘 삶을 다시 흐르게 만든다.
인생의 가장 환한 길목마다 서서 묵묵히 마중 나와 주던 사람, 그리하여 내 삶의 가장 따뜻한 존칭이자 아름다운 문장이 된 ‘그대’를 향한 이 고백은 독자의 가슴에 깊고 단단한 울림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