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도 여름이었다.
무더웠고 비가 많이 쏟아졌다.
그때 아들은 '부산'부터 '임진각'까지 614킬로 '국토순례' 중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집을 떠난 사이에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발신자는 '생명나눔 실천본부'였다.
주인이 올 때까지 편지는 아들 방 책상 위에서 긴 잠을 자고 있었다.
하지만 뜯어 보지 않아도 난 알 수 있었다.
나도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단체의 회원이었으니까 말이다.
꽤 오랜 나날이 흘렀다.
새까맣게 탄 아들이 흰 치아만 반짝거리며 건강한 모습으로 귀가했다.
건강한 귀환을 자축하며 막걸리 파티를 열었다.
집을 떠난 지 25일 만이었다.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편지를 뜯어 보더니 '장기기증'에 대한 감사편지와 회원증을 확인하고 나에게도 보여주었다.
진작에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었으나 막상 아들이 건넨 회원증과 감사편지를 받아보니 나도 감회가 새로웠다.
저릿한 뭔가가 내 가슴속에서 뭉클하게 흘렀다.
거실에서 아들을 뜨겁게 안아주었다.
그리곤 나즈막하게 귓속말로 한 마디를 건넸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니? 그리고 생각으로 끝내지 않고 과감하게 결단과 실천을 보여준 너의 진정성에 감동했다. 진짜로 멋지다. 아들아"
나는 애들이 유치원생일 때 내 신체의 '장기'부터 사후 '시신'까지 아내의 동의를 얻어서 기증했다.
내 육신은 가능한 한 내 모교인 '경희대' 의대생들의 '해부용 시신'(커대버)으로 사용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매달 5만원씩 지금까지 계속 후원하고 있다.
아들에게 '장기기증'에 대해 부탁한 적도 없었다.
이따금 신문을 보다가 한 사람의 '장기기증'으로 여러 사람들이 새생명을 얻었다는 기사를 보면, 가정 내 밥상머리나 커피타임 때 서너번 아빠의 기증과 후원을 살짝 얘기한 적은 있었다.
"만약에 아빠가 뇌사에 빠지면 지체하지 말고 나의 장기를 적출하여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제공해 주거라.
모르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이 새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시신은 아빠의 모교인 '경희대'로 보내 '해부용 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나의 변함없는 소신이었다.
그런데 이번 여름에 아들이 스스로의 결정으로 '생명나눔 실천본부'에 등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아들이기 이전에 젊은 청년이 이런 결심과 행동을 했다는 것에 대해 인생의 선배로서 기뻤고 기특했다.
'생명나눔 운동'에 동참한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긴 인생길을 가는 스무살 청년이 지갑 맨 앞장에 이런 회원증을 넣고 다니면서 자신만의 철학으로 자신의 길을
당차게 가겠다고 하니 정녕 의미 있는 다짐이라고 생각했다.
'이기'와 '나홀로'가 아니라 '이타'와 '더불어'를 실천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감동과 감사가 또 있을까 싶었다.
특출난 스펙이나 능력도 중요하지만 일생 동안 '하심'의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좀 손해보는 듯하게 살아가는 청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자녀들을 위해 오랫동안 그렇게 기도했고, 내 자신도 그렇게 살기위해 노력했다.
세상살이에 가장 중요한 패스워드는 그 사람의 놀라운 역량이나 능력이 아니다.
능력은 좀 부족해도 그의 넓은 마음, 균형잡힌 인격, 순수한 영혼 그리고 지속적인 배려가 아닐까 싶다.
이런 정성적 덕목과 자질이 가장 소중한 핵심임을 아들도 나이가 들어 '불혹'을 넘기면 더 잘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
아들도 나중에 자신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것이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 삼남이녀에게 그런 가르침을 주셨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딸에 이어 '장기기증'에 대한 아들의 자발적인 판단과 결정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진짜로 멋지다.
그리고 정말로 고맙다.
"아들아"
"사람은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사는 유일한 존재다".
너의 긴 '인생여정'에 주님의 은총과 임재가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한다.
"God Bless You".
2012년 9월 5일.
주인이 떠난 뒤 텅 빈 아들의 방을 바라보면서, 가을 초입 심야에 몇 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