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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84. [역경의 열매] 장요나 (1-25) 고 2때 자는 척 하다 엄마가 계모인 것 알고 충격
♣ "베트남의 언더우드" - 베트남 장요나 선교사ㅣ새롭게 하소서
https://youtu.be/RDKVT4ZtvXE
방학에 시골집 가니 할머니와 동네 어른 자는 줄 알고 죽은 친엄마 얘기 꺼내
31년째 베트남에서 사역하는 장요나 선교사가 최근 성경책을 들고 베트남 국기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나는 일제강점기의 끝자락인 1943년에 태어났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비켜난 시골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린 시절은 넉넉하고 따뜻하게 보냈다. 내 고향 충남 보령군 웅천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어릴 적 살던 접동골은 대대로 황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지만, 타성바지인 우리 집이 그 동네에서 가장 잘 살았다. 머슴을 열두 명이나 둘 정도로 부유했다.
독실한 신자였던 부모님은 집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교회에 다니셨다.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교회에 가기 위해 수요일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횃불을 들고 밤마실 가듯 교회에 가셨다. 어릴 적 추억 중 절반 이상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태신앙에 유아세례를 받은 나는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교회가 놀이터이자 학교였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계모였는데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많은 핍박을 하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고개 한 번 들지 않으셨다. 때리면 맞으셨고 욕하면 들으셨다. 새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는 가족 앞에서나 남들 앞에서 할머니의 권위를 세워주셨다.
바람 잘 날 없었던 우리 집은 아버지가 독립하고 나서야 편안해졌다. 충남 광천에서 표백공장을 하시던 아버지는 홍수로 기계를 다 떠내려 보내고, 군산으로 옮겨가서 메리야스 공장을 차리셨다. 우리 가족과 삼촌을 데리고 군산으로 분가하셨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방학식을 마치면 곧장 시골로 가곤 했는데 그때는 마침 장이 서는 날이라 집에 아무도 없었다. 방에 있자니 답답해서 책 한 권을 들고 대추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구성진 노랫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장에 가서 술 한 잔 걸치신 할머니가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집에 오신 것이다. 어르신들은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노랫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그러다 한 분이 내 발에 걸려 넘어지셨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할머니는 손주가 왔다며 반가워하셨다. 나는 어르신들 사이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기가 민망해 계속 자는 척을 했다. 그러다 한 분이 나를 보면서 혀를 쯧쯧 차시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다. "에고,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이렇게 멀끔하게 자란 것도 못 보고…. 애 엄마가 애 몇 살 때 죽었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자는 줄 아셨던 할머니는 죽은 엄마에 대해서 줄줄이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유난히 어머니를 따랐던 만큼 배신감도 컸다. 친엄마가 아닌 줄도 모르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엄마 젖가슴을 만지고 잤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약력=연세대 상경대학 졸업. 파월 십자성 부대 복무. 한영기업 대표이사, 벽산그룹 기획실장 역임. 감리교신학대 신대원 졸업 후 1990년 1월부터 베트남 선교사로 사역. 베트남에 교회 312개, 선교병원 16개, 초등학교 2개 등 건축.
* [역경의 열매] 장요나 (1) 고 2때 자는 척 하다 엄마가 계모인 것 알고 충격
* [역경의 열매] 장요나 (2) 한·일회담 반대시위서 학교 대표로 혈서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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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2) 한·일회담 반대시위서 학교 대표로 혈서 써
고2때 검정고시로 연세대 상대 진학…정부의 굴욕 수교에 의협심 발동해 시위 주도하다 붙잡혀 경찰서 연행
장요나 선교사(오른쪽)가 1962년 여름 대학교 친구들과 찍은 사진.
그날 밤 할머니는 내게 그동안 숨겨왔던 이야기를 다 해주셨다. 나는 장손도 아니었다. 위로 형이 두 명 있었는데 모두 콜레라로 잃었다고 했다. 나도 약골로 태어나 얼마 못 살 것으로 생각하고 아랫목에 누여 놨는데 신통방통하게 살아났다. 친엄마는 나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셨다.
나는 집을 나오기로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충실하시라 하고, 나는 아버지 도움을 받지 않고 돌아가신 친엄마의 아들로만 살기로 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선생님 댁에 남았다. 아버지의 암묵적 동의로 나를 맡아주신 선생님은 자식처럼 살뜰하게 돌봐주셨다.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인 그해에 검정고시로 연세대 상대에 진학했다. 남들보다 1년 먼저 대학에 간 것이다.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갔지만,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964년도는 한·일협상 반대 운동으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63년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 대통령은 출범과 동시에 한·일 수교를 준비했다. 여론과 상반된 결정이었다. 모든 야당과 사회, 종교, 문화단체 등 저명인사들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한·일회담 성토식을 하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그것이 도화선이 돼 서울의 각 대학 학생들도 거리에 나와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나도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피가 뜨거웠고 가슴은 정의감으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의 의협심을 부추긴 또 다른 원동력은 여학생들의 응원이었다. 연세대 상대를 대표해 혈서를 썼을 때는 정말 으쓱했다. 손가락 끝을 잘라 '한·일회담 반대'를 쓰고 돌아서자 여학생들이 일제히 한숨 섞인 탄성을 내지르며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한 여학생이 뛰어나와 내 상처에 크림을 발라주고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묶어 줬다.
그날 이후 대학 생활의 낭만은 끝났다. 6·3 시위 직후 경찰에 연행돼 졸업도 9월에 했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 주동자란 이유로 군대도 남들보다 2년 늦게 보충역으로 가야 했다. 군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엉뚱하게 보충역으로 빠진 것이다. 그것도 내 전공이나 경험과 전혀 무관한 위생병으로 말이다.
내가 근무한 곳은 청주 23육군병원이었다. 병원 업무가 몸에 익어갈 무렵 내 인생의 행로가 크게 휘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병원장의 호출을 받아 가보니 병원장과 간호부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두 사람은 내게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었다. 크리스천이라고 했더니 내게 이상한 종교에 빠진 간호장교가 병원에 있는데 기독교 이단 계통 같다고 했다. 그녀가 이단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책임지고 설득하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난감했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3) 이단에 빠진 간호장교 구해줬더니 결혼하자며…
청력 잃고 처지 비관하다 이단 늪으로… 끈질긴 설득과 기도에 서서히 마음 돌려
장요나 선교사가 1968년 7월 베트남 나트랑에서 십자성 부대 감찰부에 근무할 때 찍은 사진.
그 간호장교라면 나도 보고 들은 바가 있었다. 옷차림은 수수한데 스타킹은 찢어진 걸 신고 다니고, 옷도 사 입지 않고 헌 옷만 고집했다. 병원 피엑스에서 박카스 병을 줍고 다녀서 한눈에 봐도 이상해 보였다. 그녀는 중위, 나는 사병이었다. 아무리 명령에 살고 죽는 군대라지만 상사를 이단에서 빼 오라는 명령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간호장교를 만났다. 이단 종교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려는데 간호장교는 내 말을 막으면서 자신의 종교에 대해 비판하려거든 한 번이라도 자신이 다니는 공동체에 오라고 말했다.
그곳에 가보니 뭐가 문제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성경책은 같았지만 해석이 달랐다. 찬송가도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 목사 자신이 재림 예수라 하면서 자기가 세상을 구원할 자라고 했다. 이보다 더 명확한 이단의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간호장교에게 그곳의 교리가 잘못됐다고 이야기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오히려 나를 사탄이라 몰아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간호장교의 속사정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간호장교가 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국방부 장학금으로 간호대학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누구보다 똑똑하고 사리 분별이 정확했다고 한다.
그런데 국방부 장학생으로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간호장교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대구 군의학교에서 사격훈련을 받다가 오른쪽 귀를 다쳤고 청력을 잃었다. 청각 장애인이 된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홀해졌다. 그러면서 이단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화를 내며 피하는 간호장교를 따라다니며 진심으로 설득했다. 점심시간에는 식판을 앞에 두고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냉대와 수모를 감수했다. 그러자 간호장교도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때 간호장교와 같은 이단에 빠진 A대학 여대생이 농약을 먹고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단을 반대하는 부모에게 자신의 종교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슨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는 말씀을 잘못 해석한 교주의 말을 믿고 농약을 먹었다 참사를 당한 것이다. 그 신문기사를 보여주자 간호장교도 마음을 돌려 이단에서 스스로 빠져나왔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간호장교가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가 만났으니 한 몸 되어 잘살아 보자고 주말마다 찾아와 졸랐다. 거절해도 소용없고 피해도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더 괴로운 것은 병원 사람들조차 나와 간호장교가 사귄다고 믿는 것이었다. 둘이 설전을 벌이는 것을 사랑싸움으로 오해한 것이다. 부인하고 해명해도 다들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나와 간호장교 사이를 공식적인 관계로 여겼다. 잘못하다가는 뜬소문에 밀려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할 판이었다. 견디다 못해 나는 베트남 파병을 자원했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4) 간호장교 피해 파병 간 베트남에서…
전쟁 공포 속 라디오듣다 파병 동생 위해 노래 부른 여인에 반해 수소문 끝 동생 찾고 편지로 사랑 고백
장요나 선교사(가운데)가 1969년 월남전쟁 당시 베트남 나트랑의 십자성부대 감찰부에서 근무할 때 동료들과 찍은 사진.
내가 베트남에 간 1969년에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빈국이었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하고 풍성했다. 피가 튀는 전쟁터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푸른 바다와 눈부신 백사장 곁으로 우뚝하게 키가 큰 야자수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배치받은 나트랑이 한국군 야전사령부와 십자성부대의 주둔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여유가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십자성부대에서 감찰부로 근무하며 감찰검열을 위해 베트남 구석구석을 다니며 전쟁의 참상을 볼 수 있었다. 곳곳에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밀림은 파괴됐고 삶은 궁핍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이 완전히 망가지진 않았다. 베트남 사람들은 특유의 생명력과 근면성으로 자신들의 일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데는 교회의 역할이 컸다.
1911년 CMA(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 소속 선교사인 제프레이, 호슬러 그리고 허글러스가 다낭에 사무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성경 보급, 문서선교, 사역자 훈련 등을 통해 교회의 부흥을 이끌어 온 북베트남은 공산화되기 전까지 기독교 신자가 10만명 가까이 됐다. 나트랑에는 성경신학원도 있었다.
전쟁 중 믿음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베트남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복음을 전했다. 언제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교회를 찾았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는 특별하고도 은혜로웠다. 겉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불안과 공포를 안고 지내는 파월 장병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됐던 것은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내일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베트남 사람들의 평안한 얼굴이었다.
베트남전 참전은 내 인생에 전화위복을 가져왔다.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를 베트남에서 만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에 있는 아내를 라디오를 통해 만났다.
당시 라디오는 내 유일한 벗이었고 고국의 소식을 전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베트남에는 부대마다 주월한국국군방송국이 있었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송해씨가 진행하는 '파월 장병의 시간'이었다. 아내가 그 방송에 출연해 베트남에서 고생하는 동생과 장병들을 위해 에델바이스를 불렀다.
노래가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목소리가 얼마나 곱고 청아하던지 달콤하고 시원한 물을 들이켠 것 같았다. 마음이 한번 기우니 오매불망 '에델바이스의 그녀' 생각뿐이었다. 결국 베트남에 파병을 와있던 그녀의 동생을 찾아가 사진과 집 주소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진을 보자 더 망설일 게 없었다. 당장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어떻게든 마음을 얻고 싶어 당시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미제 껌을 동봉해 보냈다. 며칠 뒤 도착한 그녀의 편지에서 나에 대한 호감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의 군 생활은 편지를 쓰고 기다리는 일로 채워졌다. 그리고 제대한 뒤에 바로 결혼했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5) 사업 정리하고 들어간 회사… 실력 인정 받아 파격승진
사업 승승장구하다 사업장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 돼 정리… 경력직 입사해 밤새워 일하며 실적 쌓아
장요나 선교사(왼쪽)가 1971년 2월 한영기업 대표이사 시절 직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아내와의 신혼은 깨가 쏟아지거나 알콩달콩하진 않았다. 대신 안온하고 평탄했다. 우리 집 분위기가 180도로 달라진 건 아이들이 태어난 후부터였다. 결혼하고 곧 첫아들 훈이가 태어나고 10개월 후에 둘째 아들 지훈이가 연년생으로 태어났다. 첫아들을 품에 안았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둘째 아들이 태어나자 더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가족을 갈망했는데 내게 진짜 가족이 생겼으니 말이다.
결혼과 함께 나는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하고 싶어 항상 사업 아이템을 구상했는데 마침 베트남에서 기막힌 아이템을 발견했다. 달걀 보관 용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달걀을 지푸라기에 엮어서 팔았다. 그걸 들고 오다 보면 아무리 조심해도 한두 개는 깨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베트남에는 달걀 보관 용기가 따로 있었다. 그걸 보자 한국에서 직접 만들어 팔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달걀 보관 용기를 붙들고 씨름했다. 다양한 재질로 판을 짜고, 모양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러 달 만에 달걀 보관 용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특허도 받았다. 다른 아이템도 눈에 들어왔다. 자연석을 팔면 돈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허가를 받아 강원도 철원에서 자연석과 정원석을 채취해 일본에 수출하는 무역을 했다. 역시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겼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 9월 자연보호운동을 천명했는데 철원도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사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됐다. 결국 사업을 정리하고 벽산그룹에 들어갔다. 경력을 인정받아 벽산의 계열사인 대한종합식품의 판매촉진 과장대리로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대학원에 들어간다는 각오로 입사했다. 중역들은 교수고 업무는 내게 주어진 일종의 미션이라 생각했다. 남들이 퇴근하면 그때부터 넥타이를 풀고 웃통을 벗어젖힌 후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며 일을 시작했다. 나의 첫 미션은 통조림 판매량을 올리는 것이었다. 광고나 통계를 보면서 아이디어를 짜내고 화장실에 갈 때도 혹시 생각이 날까 싶어 메모지를 들고 갔다.
첫 번째로 회사에 제안한 것은 수당 제도의 도입이었다. 판매 실적이 좋은 회사는 대부분 판매에 따른 수당이 있었다. 우리 회사 영업부 사원은 월급제였다. 차량을 운전해 대형 매장에 상품을 배달해주는 게 주업무였다. 잘 팔리지 않는 상품에 대한 판촉도 하고 리어카를 제작해 중소형 매장도 배달하며 영업하도록 했다. 판매 실적에 따라 수당을 지급했다.
그렇게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일하는 재미를 제대로 맛보았다. 날마다 밤을 밝혀 새로운 아이템을 연구했다. 승진도 남들보다 빨랐다. 그러다 획기적인 일이 발생했다. 계열사 부장에서 갑자기 그룹 기획실장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김인득 회장님의 직접 지시라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파격 인사였다. 회장님은 내가 밤늦게까지 일하는 걸 몇 번 목격하고 경비 직원에게 나에 관해 물으셨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내 진짜 수업이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6) 업무 스트레스 술로 달래다 결국 큰 실수
전직원 예배 드리는 자리에서 사회 보다 숙취로 월요일로 착각 새마을 조회 진행
장요나 선교사가 벽산그룹에서 근무하던 1978년 대한종합식품의 경북 포항 통조림공장에서 교육하고 있다.
33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벽산그룹의 기획실장 자리는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입사한 지 고작 4년밖에 되지 않는 내가 감당하기엔 벅찬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김인득 회장님은 일에 있어서 철두철미하고 가차 없기로 유명했다. 작은 실수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군대보다 더 엄격한 김인득사관학교에서 7년간 훈련받았다. 그룹 기획실장이니 업무 영역도 다양했다. 직원 교육부터 각 계열사 지원까지 각종 업무를 총괄하고 담당했다. 그때 건축에 대한 지식도 해박해졌다.
유능한 참모로 그룹의 소유주 대표에게 인정을 받았으니 남들이 보기에는 아쉬울 게 없어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항상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언제 호출을 당할지 몰라 마음 놓고 밥 한술 뜨기도 힘들었다. 그런 내게 유일한 즐거움은 술이었다.
퇴근하고 나면 으레 술집으로 향했다. 월요일은 원래, 화요일은 화가 나서, 수요일은 수없이 마셨고 목요일은 목이 차게 마셨다. 금요일은 금세 금세, 토요일은 토하면서 일요일은 일없이 술을 마셨다. 다행히 술이 세서 엔간히 먹어서는 티가 나지 않았다.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벽산그룹은 매주 화요일 전 직원이 예배를 드렸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회장님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꼭 참석할 만큼 예배를 중시했다. 화요일 아침이면 다른 때보다 더 일찍 준비하고 신경을 썼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아침까지도 술이 깨지 않았다.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들어가 단상 위에 올라갈 때까지도 머리가 맑아지지 않았다.
나는 배에 힘을 주고 직원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전원 기립, 지금부터 벽산그룹 직장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국기에 대하여 경례!"
아뿔싸. 그만 새마을조회를 진행한 것이었다. 매주 월요일 같은 장소에서 전 직원이 새마을조회를 하다 보니 착각한 것이다. 문제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국기에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제창할 때까지 나는 그날이 화요일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관객석을 쳐다봤는데 사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목사님은 어색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계셨다. 회장님은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애국가 3절은 후렴구에 접어들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까지 듣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애국가 4절은 생략하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새마을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의미에서 예행연습을 했다고 둘러댔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는데 다리가 덜덜 떨렸다. 목사님이 단 위에 올라가시는 걸 보고 나서야 겨우 회장님의 안색을 살피는데 '아, 이제 나는 끝났구나' 싶었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회장님은 노발대발 불같이 화를 냈다. 거룩한 예배에 사회자가 고주망태가 돼 애국가를 제창하는 게 말이 되냐며 그렇게 믿을 거면 집사를 그만두라고 호통을 쳤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7) 나이 마흔 넷에 원인 불명 희소병으로 식물인간
경력 바탕으로 건설사업 시작 사업 커지며 매일 업자들 만나 접대 주일까지 접대로 술 취해 자고났더니…
장요나 선교사는 40대 중반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사진은 2002년 분당서울대병원에서 강직성 척추염 판정을 받은 장 선교사.
해고가 돼도 할 말이 없는 사건이었지만, 그동안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터라 회장님은 다시 기회를 주셨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로 비상사태가 일어났다. 벽산그룹은 뜻하지 않게 세무사찰을 받아 큰 어려움을 겪게 됐다. 나는 기지를 발휘해 그 사건을 잘 해결해 회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했다.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80년대 초반에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준비하느라 대형 공사가 많았다. 벽산그룹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건설업에 뛰어들어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을 수주받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돈은 원 없이 벌었다. 옥외광고회사도 차려 전국의 시계탑 광고를 독점했다. 물 쓰듯 돈을 쓰며 흥청망청 세상 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지만 마음은 텅 빈 것 같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쓸쓸함에 외롭고 허전했다. 그때마다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해운대 바닷가를 배회했다. 그때 교회를 다니지 않은 건 아니다. 모태신앙인 나는 예배가 삶의 일부와 같았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예배드리는 종교인일 뿐이었다. 그래서 술 냄새를 풍기며 교회에 가도 창피한 줄 몰랐고, 축도가 끝나자마자 술집으로 직행해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주일에 꼭 교회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느슨해졌다. 업자와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는 평일보다 여유 있는 주말에 접대하는 게 유리했다.
마침 그날도 주일이었다. 아침부터 업자들과 모임이 있어서 예배를 빠지고 부산 범어사 계곡으로 향했다. 절 앞 계곡에 있는 야외식당이 목적지였다. 주로 닭백숙을 팔았는데 가족들이 아닌 이상은 대부분 하루 놀 작정으로 온 사람들이라 백숙을 시켜놓고 고스톱판을 벌였다. 나도 업자들이 기분 좋게 이길 수 있도록 비위를 맞추며 고스톱을 치고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 숙소에 돌아와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왼쪽 뺨이 얼얼해서 만져보니 차가운 게 내 살 같지 않았다. 그래서 숙취로 인해 잠시 안면 마비가 온 거로 생각하고 우황청심환을 하나 물고 출근했다. 그런데 회사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려는데 손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눈도 뻑뻑하고 말도 어눌해졌다. 다리마저 풀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고 바로 김해공항으로 출발했다.
서울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다 받았는데 거기서 정신을 잃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희소병. 이게 한 달 만에 의사가 내린 결론이었다. 혼수상태에 전신 마비가 된 내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의사 앞에서 아내와 가족은 망연자실했다. 그 사이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강남 성모병원,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다녔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멀쩡한 몸으로 나갔는데 한 달여 만에 식물인간이 돼 집으로 실려 왔다. 그때 내 나이 44살, 큰아들 훈이는 중학교 1학년이었고 둘째 지훈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8) 의식 돌아왔지만 말 안 나와… 숨겨둔 '돈' 생각에 끙끙
퇴원 후 귀만 열린 식물인간으로 지내며 상처 주는 말과 사람들 비정함에 분노
장요나 선교사가 2002년 5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강직성 척추염으로 치료받고 있을 때 베트남 사역에 헌신한 김종찬 온누리교회 집사가 방문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
집에 돌아오고 얼마 후 의식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귀도 열렸다. 하지만 다른 것은 전부 마비된 채였다. 의식은 또렷해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안에서 맴돌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음식은 삽관해 유동식 호스로 넣고 아내가 대소변을 받아냈다. 아내가 애처롭고 안쓰러웠지만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뿌옇게 흐린 천장만 바라봐야 했다.
산 송장으로 누워있으면서 나는 사람들의 비정함을 톡톡히 맛봤다. 퇴원 초창기에는 병문안 오는 사람들로 집안이 항상 복작댔다. 교회 식구들은 날마다 찾아왔고 직원과 친구들, 사업차 알게 된 지인들까지도 내 병세가 궁금해 문턱이 닳도록 찾아왔다. 하지만 그중에 나를 진정으로 걱정해 준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다들 내가 걱정돼 한달음에 찾아온 것처럼 설레발을 떨었지만 식물인간이 된 내 모습을 보고는 배려 없는 말을 쏟아냈다.
내가 듣고 있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내를 위로한답시고 이것저것 얘기하며 내 사생활을 까발렸다. 부산에서 여배우와 만난 것도 그때 아내에게 들켰다. 유행가를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여자의 일생'을 끝내주게 부르는 삼류 배우의 목소리에 홀딱 반해 한 달에 한 번씩 만났다. 밤새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다. 손목 한번 잡지 않은 사이였지만 아내가 들어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들에게 나는 산 송장일 뿐이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와 울다 가시는 부모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아이고, 아비보다 먼저 가는 자식이 어디 있다니. 나보다 먼저 가려고 이렇게 고생을 하니" 하면서 슬피 우셨다. '아버지, 저 살고 싶어요. 저를 제일 잘 아시잖아요.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힘껏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오직 나만, 내가 다시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식물인간으로 누워있으면서도 사람들의 말에 상처를 받고 분노하며 병문안 오는 사람들과 소리 없는 전쟁을 벌였다. 그럴 때마다 결론은 숨겨둔 돈을 반드시 찾아야겠다는 거였다. 그것만이 내 마지막 자존심을 살려줄 것으로 생각했다.
사업을 하면서 나는 비자금을 꽤 많이 꿍쳐두었다. 땅문서와 비자금도 상당했고 이름을 달리한 통장도 여럿 됐다. 문제는 그걸 아무도 모른다는 거였다. 이렇게 맥없이 쓰러질 줄 알았다면 아내에게 말했을 텐데….
'직원들이 금고 비밀번호를 알아내 벌써 땅과 건물을 다 처분한 건 아닐까.' 아내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비자금 행방이 궁금해 밤에 잠이 안 왔다. 직원들이 알고도 시침을 떼는지 정말로 모르는지 쓸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다 갔다.
비자금은 물 건너갔고 죽어라 일해 남 좋은 일만 한 셈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8개월이 걸렸다. 나는 비자금을 한 푼이라도 건지겠다는 오기로 살았다. 식물인간이 되고 8개월 이상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돈', 비자금이었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9) “나 아직 살아있어!”… 산소 호흡기 뗄까 가슴 졸여
병세 악화되자 부모님도 포기… 그만 포기하자는 장모님 설득에도 아내는 끝까지 희망 버리지 않아
장요나 선교사(오른쪽)가 2007년 서울 자택에서 치매로 어려움을 겪는 장모의 쾌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전신 마비가 된 지 석 달쯤 되자 자가 호흡이 곤란해져 산소호흡기를 달았다. 숨을 제대로 못 쉬자 위급 상황도 자주 발생했다. 목구멍에 숨이 걸리고 유동식도 넘어가지 못해 막혔다. 가래가 자주 끓어 병원에 실려 가곤 했다. 그때마다 마주하는 건 좌절이었다. 제일 비참했던 건 내 앞에서 나를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었다. 의사들의 냉정한 태도를 볼 때마다 살 수 있을 거란 실낱같은 희망이 툭툭 끊어졌다.
4개월쯤 지나자 부모님도 나를 포기하셨다. 내가 다시 깨어날 거라 기대하진 않으셨지만, 차마 아들을 보내지 못해 집에 오실 때마다 내 손을 붙잡고 우셨던 아버지도 결국 내 손을 놓으셨다. 그날 아버지가 내 이마에 얼굴을 맞대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아버지, 저 아직 살아있어요. 제발 포기하지 마세요.’
다급해진 내가 아버지를 애타게 불렀지만 돌아온 말은 ‘이제 편히 가라’였다. 마지막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아내였다. 생각해 보면 결혼해서 아내와 함께 산 세월이 5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일하기 바빠 밖으로만 도는 바람에 생과부로 살게 했는데 내가 집에 있어도 생과부 신세는 마찬가지라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아내가 조금씩 나를 소홀하게 대해도 서운하지 않았다. 나를 다루는 손길이 거칠어지고 신세타령이 늘어져도 섭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에 대한 확신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발단은 장모님이었다. 창졸간에 식물인간이 된 사위도 안타까우셨겠지만 곱게 키운 외동딸이 고생하는 게 마음이 아파 오실 때마다 눈물 바람이셨다. 그런데 그날은 분위기가 좀 달랐다.
“에미야, 장 서방 못 살겠다. 이제 그만 산소호흡기 떼고 포기하자.”
내 곁에서 훌쩍이던 장모님이 아내에게 무겁게 한마디 하셨다. 아내가 울면서 어떻게 그러냐며 남편이 불쌍해서 그렇게 못한다고 하자 장모님이 버럭 화를 내셨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언제까지 가망도 없는 사람을 붙들고 생지옥에서 살 거냐고 하셨지만, 아내는 울기만 했다. 장모님은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리셨다.
당장이라도 산소 호흡기를 뗄 것 같은 장모님의 기세에 간이 오그라들었는데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니 안심이 됐다. 내 목숨은 내 소관이 아니란 생각을 하자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장모님과 아내가 마음만 바꿔 먹으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아내가 두려웠다. 혹시라도 마음을 바꿔 산소 호흡기를 떼면 어쩌나, 아내의 한숨이 깊어지거나 신세타령이 길어질 때마다 가슴이 졸아들었다.
‘여보, 나 좀 살려줘. 나 죽지 않았어! 나 멀쩡해요. 내 겉 사람만 마비된 거야.’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불렀다. 10개월 동안 한 번도 부르지 않은 이름,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그분을 마지막 순간에 찾은 것이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10) 주님 말씀 내 안에 들어오자 피가 돌고 몸 움직여
방탕하게 살았던 세월 후회하며 절박한 마음으로 살려만 달라 기도…주님 음성 들리며 성령으로 깨어나
장요나 선교사는 식물인간 상태로 죽음의 문턱에 있었을 때 둘째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서원했던 기도가 생각났다. 2003년 3월 베트남 비라카미신학교에서 함께한 둘째 아들 지훈씨(둘째 줄 오른쪽)와 장 선교사(첫째 줄 오른쪽).
‘하나님.’
이 가냘픈 외침이 10개월 만에 드린 나의 첫 기도였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나의 그 외마디에 응답하셨다. 마치 오랫동안 그 말 듣기를 기다리신 것처럼.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제가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걸 알았습니다. 어리석고 타락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허랑방탕하게 살았던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나는 44년 인생 동안 돈에만 충성하며 살았다.
“하나님 저를 다시 살려 주십시오. 병신이 되더라도 좋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시면 제가 손발이 닳도록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겠습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천지를 집어삼킬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를 소유하리라. 이제 네 서원을 갚아라.”
그때 내 귀에 또렷이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라는 음성이 들렸다. 다름 아닌 나의 목소리였다. 10년도 더 이전의 어느 날, 절박한 마음으로 드렸던 기도였다.
둘째 지훈이가 세 살 때 큰 사고를 당했다. 연년생으로 아들을 낳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 한 딸내미 몸보신을 시키려고 장모님이 사골을 끓이셨는데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대청마루에서 고양이와 놀던 아이가 뜨거운 사골 국물에 덤벙 빠진 것이다. 어른들이 달려갔을 때 지훈이는 이미 가마솥에 엉덩이가 녹아 살이 흐물흐물해진 후였다.
의사는 화상이 너무 심해 살릴 방도가 없다며 돌려보냈다. 그 얘기를 듣고 아내는 기절해 쓰러졌고 울다 지친 아이는 정신을 잃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그날 나는 회사 직원들을 데리고 야유회를 갔다가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왔다. 아이의 사고 소식을 듣고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하나님, 지훈이를 살려 주십시오. 이 아들만 살려주시면 제가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 이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아이의 화상이 치료됐다. 깨끗하게 나았다. 하지만 나는 그 기도를 까맣게 잊고 10년 넘게 살았다. 하나님은 그날을 기억하게 하셨다.
“내가 이제 너를 소유하리라. 요나야, 너는 일어나 저 큰 성 니느웨로 가라. 가서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그들에게 선포하라.”
천지를 진동케 하는 폭풍우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요나는 누구이며 니느웨는 어디란 말인가. 명색이 집사였지만, 요나서를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나님 니느웨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천둥 같은 음성으로 내게 대답하셨다. “네가 전에 갔던 곳이다.”
그때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를 뒤흔들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바짝 말랐던 혈관에 피가 돌고 근육이 풀리면서 몸이 움직였다.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온몸이 찌릿찌릿하고 혈관이 따끔거렸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씀으로 새롭게 되면서 내 육체는 성령의 피로 채워진 새 부대가 됐다. 그날은 44년 만에 새 생명을 부여받은 내 인생의 첫날이었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11) 10개월 만에 마비에서 풀려 입 떼자마자 “감림산…”
가족들 내가 움직이자 마지막 몸부림으로 생각… 깨어난 순간 “감림산기도원 가라” 들려
장요나 선교사가 1988년 경남 양산 감림산기도원에서 성경책을 읽고 있다.
나는 10개월 만에 다시 깨어났다. 내가 깨어났으리라고 상상도 못 한 가족은 죽기 전에 몸이 마지막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건 줄 알고 황급히 구급차를 불렀다. 응급실에서 내가 마비에서 풀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부터 회복에 속도가 붙었다. 산소호흡기와 유동식 투입용 호스를 떼고 이틀 만에 목구멍에 미음을 흘려 넣었다. 입가가 실룩거려 발음이 부정확했지만, 말도 할 수 있게 됐다. 처음 입을 떼자마자 나는 “감림산, 감림산”이라고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감림산이 아니라 감림산기도원이었다. 몸이 깨어나면서부터 내 안에 ‘감림산기도원에 가라’는 음성이 들렸다.
경남 양산에 있는 기도원이었다. 회복이 빠르다고 해도 깨어난 지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이었다. 10개월 동안 굳어 있던 몸이 풀리면서 온몸은 흐느적거렸고, 아직 힘을 받지 못한 다리를 세워놓으면 곧 허물어졌다. 한쪽 눈은 실명이 돼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86년 봄 나는 부산에 사는 이모님께 연락했다. 택시를 불러 이모님과 함께 감림산기도원으로 향했다.
1년 만에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몸무게가 반으로 줄어 뼈에 가죽만 남았다. 이모와 몇 사람이 38㎏밖에 안 되는 나를 가뿐히 부축해 산비탈에 있는 기도원의 예배당으로 향했다. 이옥란 감림산기도원 원장님은 이모님의 등에 업혀 가는 나를 보고, 누가 감림산에 시체를 묻으려고 떠메고 온 줄 알았다고 했다.
이모와 사람들이 부축해 가는 동안 마음이 한없이 낮아졌다. 후회와 자책의 눈물이 옷 앞자락을 흠뻑 적셨다. ‘아 나는 탕자구나.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며 그것이 내 것인 줄 알고 자랑하며 살았구나.’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나는 하나님께 생명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둘 중 한 곳에 가야 한다. 전신이 마비된 나를 보고 사람들은 죽었다 했지만, 내 영은 살아서 하늘나라를 자유롭게 오갔다.
천국은 그야말로 생명의 세계였다. 솜사탕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뭐라 규정할 수 없는 다채로운 색깔로 살아 움직이며 오케스트라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아무것도 해할 게 없고 오직 찬양과 감사만으로 충만한 세계,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의 보좌 옆에는 지옥이 있었다. 지옥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찬양도 기쁨도 감사도 없었다. 고통과 아픔, 절규만이 가득했다. 소멸하지 않는 뜨거운 불이 사람들을 견딜 수 없게 했다. 그 불길 안에서 사람들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목말라했고 증오와 갈등으로 적의를 불태웠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만 남아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었다.
지금도 지옥의 그 처참한 모습을 떠올리면 정신이 번쩍 든다. 절대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철저히 경험한 나는, 나를 믿을 수가 없었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12) 기도 중 야자수 숲 보이고 “네가 갔던 곳이다” 주 음성이…
열대 지방 누비며 연설하고 집 짓고… 식물인간일 때 꿈 꿨던 장면과 같아
장요나 선교사는 경남 양산 감림산기도원에 수시로 초청받아 구국철야 집회 강사로 집회를 인도했다. 2016년 장 선교사(오른쪽)가 이옥란 감림산기도원장(가운데)과 기념촬영을 했다.
기도원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혼자 일어서기도 힘든 내가 숙소에서부터 산비탈 위에 있는 예배당까지 가는 건 엄청난 고행이었다. 감사하게도 사람들이 내 방에 줄을 매달아 줘서 그 줄을 잡고 겨우 일어나 한발씩 떼며 사람들의 등에 업혀 예배당에 올라갔다.
내가 감림산기도원에 올라갔을 때 여름 성회가 한창이었다. 알고 보니 감림산기도원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표 기도원으로 성회가 열리는 여름이면 문전성시를 이뤘다. 내가 붙박이로 있던 큰 성전에선 종일 말씀 강의와 찬양 기도 일정이 빽빽하게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 혼자 하나님과 대화하기가 어려웠다. 기도원에서 가장 조용한 시간을 찾아보니 새벽 3시였다. 그 시간이라면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결심한 그 날부터 캄캄한 새벽에 산을 올랐다. 기도의 장소로 정한 곳은 구국 제단이었다. 이옥란 원장님이 구국을 위해 세운 제단인데 많은 사람의 눈물 기도가 쌓인 기도터였다. 그 자리에서 받은 은혜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 마음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내 죄과를 회개케 하시고 심령을 새롭게 하셨다.
그날도 죄 고백의 눈물로 제단을 흠뻑 적시고 기도하고 있었다. 눈을 떴는데 갑자기 몸이 붕 뜨면서 기도원 지붕 위로 올라갔다. 놀랍게도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건 기도원이 아니라 야자수가 우거진 열대 지방 숲이었다. 야자수 사이로 내가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는 모습과 많은 건물을 건축하는 모습이 보였다. 식물인간일 때 꿨던 꿈과 같은 장면이었다.
10개월 동안 누워있을 때 참 많은 꿈을 꿨다. 특히 열대 지방을 누비고 다니며 연설하고 집을 짓는 꿈을 연달아 꾸곤 했다. 그때는 예지몽이라 생각했다. 건강이 회복되면 아마 열대 지방에 가서 건설업을 크게 일으켜 정계까지 진출할 것을 미리 보여주는 꿈이라 생각해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그 꿈의 장면들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한참 후 눈을 떠보니 나는 여전히 구국 제단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 그런데 너무 뚜렷해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 기도원 부흥강사인 최요한 목사님에게 그날 본 환상과 식물인간에서 깨어날 당시 들은 음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목사님은 기도하시더니 “집을 지은 건 교회와 병원 같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연설한 것은 아마 주의 종이 되는 걸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라고 하셨다.
야자수 숲을 보여주신 걸 보면 선교사가 되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내 귀에 “네가 갔던 곳”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가본 곳 중 야자수 숲이 우거진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 베트남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니느웨가 베트남이란 말인가.
***[역경의 열매] 장요나 (13) 나로 인해 실족한 두 여인 위해 애통한 마음으로 기도
환상 통해 베트남 선교사 비전 받고 신학 공부 시작하려 했지만 이들에 회개부터 하란 주님 말씀에…
장요나 선교사(화살표)가 1991년 한국복음선교신학원 동기들과 수련회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환상을 통해 베트남 선교사로서의 비전을 받았을 때 나는 당장 서울로 올라가 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내 안에 가득했던 불순물을 깨끗하게 비우는 작업을 하셨다. 그 시작은 회개였다. 그중엔 알고 지은 죄도 있었지만, 모르고 지은 죄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두 여자였다. 기도 중에 눈앞에 대형 화면이 나타나면서 두 명의 여자가 나란히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한 명은 청주 23육군병원에서 근무할 때 만났던 간호장교였고, 다른 한 명은 입대하기 전 교사할 때 여고에서 가르쳤던 여학생이었다.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두 사람이 왜 같이 나타난 것일까. 하나님께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다. “이들은 너로 인해 이 땅에서 실족한 자들이다. 이들의 핏값을 너에게서 찾을 것이다.”
결혼해 함께 살자고 끈덕지게 졸라대던 간호장교를 피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지만, 그녀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하루가 멀다고 편지를 보냈다. 전쟁보다 간호장교의 편지가 더 두려울 때쯤 나와 같이 근무했던 감찰관 임모 중령이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이 책임지고 간호장교의 마음을 돌려놓겠다고 했다. 임 중령이 한국에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장교로부터 편지가 오지 않았다. 다행이라 여겼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간호장교가 쉽사리 마음을 접지 않자 내가 베트남 여자와 아이를 낳고 잘살고 있으니 그만 잊으라고 임 중령이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간호장교는 낙심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고 한다. 내가 가르쳤던 여고생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유서를 남겨놓고 약을 먹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 물음에 하나님은 회개하라고 답하셨다. 사역을 감당하기 전 먼저 나로 인해 실족한 이들의 영혼을 위해 아파하며 회개하라고 하셨다.
간호장교와 여학생의 극단적 선택이 가슴 아팠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그들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다. 죄를 보여주셨지만 회개하기는 쉽지 않았다. 며칠 동안 금식하며 회개의 영을 부어달라고 기도했다. 에스겔 33장 6절 말씀이 떠올랐다.
깊은 기도 가운데 진정 무엇이 죄인지 깨닫게 됐다. 그들의 죽음엔 직접적인 책임이 없지만, 나의 무관심으로 상대방이 실족했다면 그 책임으로 내게서 핏값을 찾으시겠다는 무서운 말씀이 깨달아진 것이다.
내가 그들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게 죄가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지 않은 것이 죄였다.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내 권리가 먼저였기에 응당 사랑해야 할 자들을 사랑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내 안에 없다. 그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흘려보낼 수 있다. 그제야 나는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제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제 안에 사랑을 창조하사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이 실족지 않게 하시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자들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역경의 열매] 장요나 (14) 선교사로 주님 부름 받고 꿈에도 그리던 베트남으로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 안수… 당시 베트남에선 비즈니스 방문만 허가, 도움 받아 사업가 신분으로 들어가
장요나 선교사가 베트남을 처음 방문한 1990년 1월 하노이 라탄호텔에서 시내를 바라보고 있다.
감림산기도원에서 서울로 올라와 바로 신학교에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기독교대한감리교 소속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같은 교단의 신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나이 제한에 걸렸다. 그래서 규모는 작지만 예수교대한감리회 소속 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도 받았다. 주님께서 베트남 선교사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것을 준비하면서 부흥사로 집회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한쪽 눈은 실명돼 찌그러져 있었다. 전신 마비의 흔적은 그렇게 내 몸에 남아있었다. 그걸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기적의 손길을 경험했고, 다 함께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1990년 1월 23일 베트남에 도착했다. 한국을 떠난 지 일주일 만이었다. 그때는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맺기 전이었기 때문에 베트남을 방문하려면 특정 국가 허가서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 허가서를 받으려면 국가공무원 두 사람이 보증을 서야 했고, 방문 목적도 뚜렷해야 했다.
나는 외교부에 특정 국가 허가서를 신청하고 그걸로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베트남 대사관이 있는 태국의 방콕으로 갔다. H그룹의 베트남 지사장 자격으로 한 달짜리 비즈니스 비자를 신청했다. 당시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비즈니스 업무 외에는 갈 수 없었다. 고맙게도 지인의 도움으로 서류를 갖췄다. 목적은 시장 조사, 체류 기간은 한 달. 제한된 조건이었지만 방콕에서 일주일을 기다려 비자를 받아 베트남 하노이로 들어갔다.
하노이는 1975년 통일되기 전 월맹의 수도였다. 민주주의를 경험한 호찌민보다 복음을 전하기 더 어려운 동토의 땅이다. 파월 장병으로 베트남 나트랑에 왔을 때 구석구석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지리에 익숙했지만, 하노이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첫 선교지로 하노이를 선택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했다.
국제공항 출입국 데스크를 겨우 통과해 시내에 있는 호텔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거리에는 자동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감림산기도원에서 내가 가야 할 곳이 베트남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베트남에 미쳐 있었다. 어디선가 베트남이라는 말만 들으면 무조건 달려가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얻었다. 그렇게 준비하고 꿈꾸던 곳에 5년 만에 왔으니 잠이 오겠는가. 마음에 설레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깐 밖에 나가려고 1층으로 내려갔는데 입구에서 바로 저지를 당했다. 여행허가서가 없으면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했다. 비자를 보여줬지만, 소용없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여행허가서를 신청했지만, 발급받는 데 이틀이나 걸렸기 때문에 꼬박 48시간을 호텔에 갇혀 있었다. 호텔 문밖에 나간 것은 베트남에 도착한 지 사흘 만이었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15) 배고픈 아이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다 유치장 신세
호텔 로비에 구걸하는 아이들 마음 아파 1달러 쥐어주며 눈물로 기도…허가서 없이 접촉했다는 죄로 잡혀가
장요나 선교사가 1993년 베트남 하노이 아가페탁아소에서 아이들을 격려하고 있다.
여행허가서가 나오자마자 바로 호텔 밖으로 나갔다. 호텔 입구에는 넝마를 걸친 아이들이 버글거렸다. 바짝 말라 오종종한 얼굴엔 땟물이 졸졸 흘렀고, 누런 콧물 위엔 파리가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보며 ‘1달러’를 외쳤다. 초점 없는 눈동자와 가냘픈 손을 보자 가슴이 너무 아팠다. 얼굴을 보니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한 것 같았다. 일단 먹이고 싶은 생각에 호텔에 들어가 식당 안에 있는 바게트를 갖다 줬다. 하지만 아이들은 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1달러만 외쳤다. 아이들 손에 1달러를 쥐여주는데 앙상한 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보자 왈칵 눈물이 났다.
“하나님 이 아이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아이들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지켜 주십시오.”
눈물을 쏟으며 기도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기더니 팔짱을 끼었다. 눈을 떠보니 경찰이었다. 내가 접촉허가서 없이 아이의 머리에 손을 대고 기도한 게 잘못이었다. 당시 베트남에는 외국인이 현지인을 만날 때 반드시 접촉허가서를 받아야 하는 법이 있었다.
그 길로 붙잡혀 간 나는 정치범수용소 같은 곳에서 20일간 구류 조사를 받고 쫓겨났다. 접촉허가서 없이 현지인과 접촉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20일 만에 출국당하니 억울하고 실망스러웠다. 동시에 공산주의 국가의 현실을 실감했다.
나는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베트남 비자를 다시 신청했다. 두 번째 비자는 발급받는 데 더 오랜 시일이 걸렸다. 하지만 사명을 주셨으니 반드시 비자가 나올 거란 확신을 하고 기도로 선교를 준비했다.
어렵게 비자를 받아 하노이에 가도 체류 기간이 한 달을 못 넘겼다. 겨우 한 달을 지내다 방콕으로 나와야 했다. 3개월을 기다려서 비자를 받고 또다시 하노이에 들어갔다 출국당하는 생활을 1년 동안 반복했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A씨였다. 그는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베트남 사람이었다. 군인이었을 때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북한말을 꽤 잘했다. 그에게 일당을 주고 베트남 말을 배웠다. 통역 삼아 그와 함께 다니며 현지 상황을 탐사하는 사역에 들어갔다.
그와 제일 먼저 간 곳이 탁아소였다. 그때만 해도 베트남은 협동농장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가 일하는 동안 어린아이들은 탁아소에서 돌봐줬다. 그런데 나라가 가난하다 보니 탁아소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원장은 내게 재정이 부족해 아이들에게 점심을 주는 것도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탁아소를 도우면서 공산주의 국가 시스템을 배웠다. 그리고 그 시스템에 익숙해질 때쯤 탁아소 하나를 넘겨받아 아가페 탁아소로 이름을 바꾸고 다양한 계층의 아이들을 돌봤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16) 베트남 온 지 2년 반 만에 선교의 문 활짝 열려
장요나 선교사(왼쪽)가 1990년 1월 11일 사랑의병원선교회 파송 예배를 드리고 있다.
나는 사랑의병원선교회를 통해 베트남에 선교사로 파송됐다. 선교회는 초교파로 모인 의료선교단체로 의료 혜택이 필요한 곳이나 직접 선교가 어려운 곳에 병원을 세우고 의료 사역을 통해 간접 선교를 한다. 그래서 선교사로 파송되는 부부 중 한 사람이 반드시 의사나 간호사 등 전문적 의료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혼자 몸으로 온 데다 어떤 의료자격증도 없는 나를 하나님은 왜 이 선교회를 통해 베트남에 오게 하셨을까.
기도 중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셨다. 하노이를 두 번째 방문해 목격한 수많은 환우의 모습이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 직전까지 갔던 내 모습과 겹쳤다. 과부가 과부 심정을 안다고 베트남 환우를 볼 때마다 나는 애끊는 심정이 됐다.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이 그들 역시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손을 얹어 기도해 보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감옥에서 나와 병자들을 찾아가 빵을 주고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병이 나은 이들이 많았다. 내게 신유의 은사를 주셨으니 이제 병원을 세워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기도해 주면 되겠다 싶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확신으로 병원을 세우기로 했다. 그와 맞물려 공산당의 한 서기장이 남딩성에 아동병원을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이를 위해 사랑의병원선교회와 베트남선교회가 자매결연을 하고 함께 추진했다.
그러다 내가 세 번째로 감옥에 붙잡혀 가는 일이 생겼다. 안수기도를 하다가 접촉허가서 없이 현지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연행됐다. 하노이에서 탁아소 운영 등을 하면서 신분이 많이 노출되다 보니 조금만 다른 행동을 해도 금세 눈에 띄어 제재를 당했다.
세 번째 감옥에서 나온 후 나는 호찌민으로 내려왔다. 호찌민으로 올 때 세계친선협회(PACCOM)로부터 메콩강 빈롱성에 병원을 세워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빠콤이라 불리는 협회는 베트남 외교부 산하 기관으로 외국인들을 관리 감독한다. 외국인의 의료 교육 구제 사업, 봉사 활동 등의 NGO 활동을 지원하고 동시에 사상을 변질시키는 행위를 하는지 감시한다.
빠콤에서 NGO 단체로 인정받으면 3년 비자가 주어지고 활동허가서를 받을 수 있다. NGO 비자가 있는 사람에게는 접촉허가서 없이 현지인과 만날 수 있는 활동허가서를 발급해준다.
나는 호찌민에 있는 한국식당에 짐가방 2개를 맡기고 메콩강 하류 빈롱성으로 내려왔다. 한 푼이 아쉬울 때라 숙소를 빌리는 돈도 아까웠다. 거처도 없이 빈롱성과 호찌민을 오가며 사역을 감당했다.
초라한 입성에 행색도 남루해 남들 보기에 영락없는 거지꼴이었지만 그때만큼 행복했던 적도 없었다. 베트남에 온 지 2년 반 만에 선교의 문이 열렸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1993년 빈롱성에 농푸 사랑의병원을 짓고 무료로 치료해주는 NGO 자격을 취득했다. 사랑의병원선교회 이름을 아가페라 짓고 빠콤에 정식 NGO로 법인 등록을 했다. 그 활동허가서로 나는 베트남에서 본격적인 복음 사역을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17) 병 고침 받은 자, 목격한 자 모두 하나님 믿기 시작
치료 방법 없는 환자들,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자 깨끗이 나아…핍박하던 부성장도 찾아와 기도 부탁
장요나 선교사가 1999년 2월 베트남 남동성 달랏 오지 마을에서 소수부족을 위한 의료사역을 하고 있다.
첫 선교병원이 세워진 빈롱성에서는 날마다 기적이 일어났다.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 생겼으니 가난한 병자들에게 그보다 더 큰 기적은 없을 것이다. 개원할 때 16명의 현지 의사들과 함께 사역을 시작했는데도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중에는 의사가 고칠 수 없는 병도 많았다. 하나님의 기적 아니고서는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환자들은 위해 기도했다. 하지만 그곳은 베트남이었다. 접촉허가서 없이는 누구에게도 기도해 줄 수 없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나를 감시하러 온 경찰이 나를 돕게 하셨다. 빠콤은 병원을 짓고 운영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지만 치료 이외의 다른 활동을 하는 건 아닌지 철저히 감시했다. 기도해야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니 경찰도 반대하지는 않았다.
지금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기도하니 손 마른 자가 손을 펴고, 중풍 병자가 일어나고 피부병 환자가 깨끗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100% 하나님을 의지하니 하나님께서 고쳐주셨다.
그때 진짜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의 마음속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것이다. 병 고침을 받은 자도, 그것을 목격한 자도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농푸 사랑의 병원’을 시작으로 호찌민 슬럼가에 ‘떤빈 사랑의 병원’, 한센인 마을에 ‘쑤엔목 사랑의 병원’ 등 16개 병원을 차례로 설립했고 205명의 현지 의료인이 사역에 동참했다.
그렇게 사역을 이어가던 때였다. 자정을 넘긴 훌쩍 시각 숙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싶어 문구멍으로 내다보니 A지역의 부성장이 보였다. 부성장은 우리나라로 치면 도지사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육군 대령 출신이라 그런지 선교병원을 세울 때 너무 핍박해 이름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났다. 또 나를 잡으러 왔나 싶어 문구멍으로 바깥을 살펴보니 혼자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나를 만나러 왔다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뒤에 경찰이 없으니 위험할 건 없다고 생각해 들어오라고 했다. 부성장이 급하게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리고 자기의 머리와 가슴에 손을 얹고 ‘이것 좀 (기도)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서 어디 아프냐고 물었더니 갑상샘이 아프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난감했다. 숙소에는 약이 없고 의사들은 모두 잠들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그러자 부성장이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도해 주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나를 핍박하던 자가 기도해 달라니….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이 났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는 작지만 분명하게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의 갑상샘은 깨끗이 나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만져주신 것이다. 2005년 경찰들을 위한 병원도 세웠다. 모든 병원은 내 힘으로 세운 게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감동을 주셔서 한국교회의 헌금으로 병원을 세워나갔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18) 낡고 부서진 화장실 바닥에 숨겨 둔 ‘하나님 말씀’
교회 재건 위해 공산화 이전 교회 찾다 홀로 남아 성경책 읽는 목사 만나 고초·외로움 위로하며 함께 기도
장요나 선교사(가운데)가 1992년 베트남 동나이성 떤힙마을에서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기공식 준비를 하고 있다.
하노이에서 호찌민으로 내려올 때 가졌던 기대 중 하나는 남쪽에는 교회가 더 많이 남아있을 거라는 희망이었다. 나는 숨어서 신앙을 지키고 있는 목사와 신자들을 찾아 교회를 재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도하며 호찌민 시내 땅 밟기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어디선가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아코디언 연주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결혼식에서 한 남자가 축하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가 옆구리를 찌르며 “당신 크리스천이냐”고 물으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트랑 신학교를 나온 전도사로, 아코디언 연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식장에서 성가를 연주하며 믿음을 지키고자 애썼다. 그는 공산화되기 전 교회들의 자료들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동역자가 되어 자료에 나온 주소지를 가지고 샅샅이 찾기 시작했다.
호찌민의 B교회도 그렇게 발품을 팔다 발견했다. 교회는 오랫동안 방치된 채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입구 쪽에 붙어 있는 붉은 글씨의 경고문을 보니 섬뜩했다. 그간 기독교인들이 당한 고난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러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하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뒤쪽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미 그 사람은 내 뒤에 바짝 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 기도를 하셨나요” 하고 물었다.
체념하고 뒤돌아서는데 그 남자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이어 믿기지 않는 말을 들려줬다. 자신은 공산화되기 전 이 교회를 담임했던 C목사인데 홀로 남아 교회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C목사가 아무 말 없이 나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화장실 역시 낡고 부서졌으나 벽은 온전히 세워져 있어 바깥과 단절돼 있었다. 그는 화장실 문을 열더니 땅을 파고 그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바로 성경책이었다. 그는 성경책을 교회 화장실 바닥에 묻어놓고 매일 와서 꺼내본다고 했다. 썩은 내가 진동하고 벌레가 우글거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C목사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C목사는 25년 이상 이런 고초를 겪었으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그때부터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교회에서 함께 기도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C목사가 화장실에서 성경을 읽다가 경찰에 붙잡혔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교회 울타리를 붙잡고 기도하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베트남으로 관광 온 한국인들이었다. 관광 가이드로 두 사람과 함께 호찌민의 명소를 돌고 함께 식사했다. 그분들은 나를 처음 만난 곳이 너무 황폐한 게 이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곳이 원래 교회였다는 것과 목사님이 교회를 어떻게 지켰는지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들은 선뜻 교회를 건축하겠다고 나섰다. 마음에 어려움이 있어 베트남 여행을 왔는데 교회를 지음으로써 하늘의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호찌민에 교회가 건축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19) ‘복음의 뿌리’ 살아있으면 언제든 소생… 오지 돌며 체험
공산체제에서도 꾸준히 복음 전해온 목사님과 동행하며 소수부족들 만나 그들의 언어로 말씀과 은혜 전해
장요나 선교사가 1997년 베트남 꽝치성 케산읍과 라오스 국경의 몽족 마을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대도시가 복음을 전하기 더 좋을 것이라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경찰의 감시와 다른 선교사들의 견제 속에서 운신의 폭은 더 좁아졌다. 하노이와 비교해 윤택한 호찌민 사람들은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해 돈 버는 일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점차 외곽으로 움직이다 중부 고원지방의 럼동성 바오록에서 A목사를 만났다. A목사는 나트랑 신학교 출신으로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도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는 분이었다. 덕분에 화장실 들락거리듯 감옥에 갔다고 했다. 뿌리가 살아있으면 언제든 소생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A목사와 함께 오지 소수부족들을 만나며 생생하게 체험했다.
호찌민에서 바오록까지 가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당시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때라 아침에 출발해도 저녁나절이 돼야 A목사 집에 도착했다. A목사는 항상 내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 식사를 빨리 마치고 다락에 숨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A목사 집에 들어가는 게 발각되면 바로 고발당했다. 친인척을 방문할 때도 허가서가 필요했고 자신의 집 외에 다른 곳에서는 잠을 잘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거주자가 아닌 사람이 집에 들어가면 보는 즉시 경찰에 알렸다. 게다가 외국인은 호텔 외에서는 잘 수 없었다.
나는 부랴부랴 저녁을 먹고 다락에 들어가 한숨 잤고 밤이 깊어지면 나왔다. 그리고 A목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럼동성 고산지대에 사는 소수부족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험했다. 산을 넘지 못한 구름이 능선 자락에 걸려 있어 희뿌옇게 시야를 막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한 적도 있고 느닷없이 원숭이가 공격해 다치기도 했다.
소수부족들은 베트남 사람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했고 고립된 장소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가난을 운명으로 살았다. 그들에게 A목사는 각 부족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셨다. A목사와 내가 도착했다는 소문이 돌면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
믿는 자의 수가 많아져 집에서 더 수용하지 못하게 되면 그들을 도와 몰래 처소교회를 세웠다. 소수부족 중 몇 명은 호찌민의 센터로 데려와 성경을 가르쳤다. 소수부족 마을로 가는 길이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감사하고 보람찼다.
당시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옷이 두 벌 뿐이라 어딜 가나 밤이 되면 옷을 빨기 바빴다. 밤마다 땀내 나고 후줄근한 옷을 좁은 욕실에서 웅크리고 앉아 빨 때면 내 모습이 그렇게 초라하고 옹색해 보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울하지는 않았다. 눈물의 감사 찬양이 나왔다.
깨끗이 빤 옷을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의 날개에 걸어놓고 침대에 누워있노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개운하게 씻은 맨살에 닿는 선풍기 바람은 시원했고 선풍기와 함께 도는 바지와 셔츠는 펄럭거리며 춤을 췄다. 내 마음은 부풀어 올랐고 입에서는 찬양이 흘러나왔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20) 주님의 일꾼 돼 베트남 복음화 위해 일하는 제자들
소수부족 아이들에 베트남어 가르치고 한글과 컴퓨터 공부하며 전도자로 키워
장요나 선교사가 1995년 베트남 선교센터에서 소수부족 등 현지인 청년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
호찌민의 집은 서너 번 세를 옮겨가며 1993년부터 선교센터로 활용했다. 베트남인과 소수부족 청년 20여명을 데려다가 함께 지내며 학교에 보내고 센터에서는 공동체로 성경을 가르쳤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예배를 드렸고 한글로 성경을 쓰게 하면서 한글도 가르쳤다. 그렇게 시작한 공동체의 청년들은 나중에 전도자가 됐다
각기 다른 성향과 모양의 사람들을 질서 있고 화평하게 이끌기 위해선 어느 정도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다. 그래서 리더를 세우고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공동체 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책임을 맡겼다.
어떤 이는 선교센터가 군대 같다고 했다. 어떤 면에선 비슷했다. 센터에 계급은 없었지만, 역할에 따른 위치는 명확했고 무조건 순종해야 할 것도 닮았다. 다 같이 식사할 때도 각자의 자리가 있었다. 내 옆자리에는 첫 번째 제자나 통역을 맡았던 다오 자매가 앉았다. 그다음부터 순서대로 쭉 앉았다.
다오의 일과표를 일일이 점검해 수업이 끝나면 바로 센터로 와서 센터 사역을 돕게 했다. 소수부족 아이들을 돌보고 문서 작업을 도울 수 있도록 한글과 컴퓨터도 공부하게 했다. 다오의 시간을 철저하게 관리한 건 다른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후 나는 모든 감각과 욕망을 잃어버렸다.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기에 음식을 사료라 불렀다. 살을 꼬집어도 아프지 않았다. 심지어 추위도 더위도 타지 않게 됐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간만 생생해졌다. 다시 깨어난 후 신생아 간 기능이 생겨 아무리 일해도 피곤하지도, 지치지도 않았다. 불도저 같은 성격에 신생아 간 기능이 합쳐졌으니 나와 함께 일하는 센터 식구들이 많이 버거웠을 것이다.
혹독한 훈련을 잘 버티고 견딘 제자들은 베트남 사역을 하는 데 중요한 동역자가 됐다. 다오가 그렇다. 공부 욕심이 많았던 그는 호찌민대학에서 영어동시통역을 전공해 그쪽 분야로 나가길 원했다. 그런데 센터에서 훈련받으며 우선순위가 조금씩 바뀌었다. 무엇이든 이해해야만 순종했던 다오는 센터에서 내게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학업에 손해 보지 않으려고 밤새워 공부해 진도를 맞췄고 학점도 평균 이상으로 유지했다.
그런데 센터에서 점점 맡은 일이 많아져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시기가 됐다. 다오는 베트남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선 교회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며 그 일을 위해 자신이 필요하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헌신하겠다고 결심했다.
다오 선교사는 한국으로 와 총신대에서 신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한국에 나올 때만 해도 학업 후 베트남에서 내 선교 사역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현재는 경기도 성남의 분당과 안성에서 두 개의 베트남교회를 담임하며 평택대 채플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베트남 선교센터에서 훈련받고 한국 신학교에 유학해 사역하는 제자들, 풍남 쭉벙 홍년 껌벙 등 14명이 베트남 복음화를 위해 일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21) 혼수상태서 “비라카미를 구원하라” 주님 음성 들려
설교 중 실신… 환상과 함께 사명 주셔
장요나 선교사(회색 양복)가 2006년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에서 선상교회 기공식 예배를 드리고 있다.
1996년 신년 예배에서 설교하다 쓰러졌다. 혼수상태에 빠져 사흘간 깨어나지 못했다. 그때 하나님의 강한 음성을 들었다. ‘비라카미, 비라카미 영혼을 구원하라!’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주셨다. 비라카미(VILACAMY)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등 인도차이나반도 4개국 이름의 첫 자를 딴 거였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바로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비라카미선교회를 구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주님의 사명에 확신을 갖기를 간구했다. 사랑의병원선교회 동역자들을 중심으로 대구 동촌교회 신창순 목사님과 뜻있는 동역자들이 주축이 돼 비라카미선교회를 대구에 창립했다.
비라카미선교회 발족 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와 미얀마를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75년 사회주의화된 라오스도 경제 낙후를 면치 못하다 89년 개방 정책을 시행했다. 비교적 국외 투자가 활발했던 베트남과 달리 라오스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고립돼 있었다. 경찰의 감시는 더 엄격했고 사회 분위기도 살벌했다.
2005년 고난주간에 선교사님 13명과 함께 라오스 국경 라오바오로 향했다. 라오스 소수부족 마을에 교회를 짓기 시작해 3개 교회를 신축, 기공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아침 8시 베트남 꽝치성 케산을 출발해 라오스 국경 이민국에 도착했다. 내 순서가 되자 경찰이 갑자기 멈추라는 손짓을 했다. 내 여권의 비자를 유심히 보더니 “75일 불법 체류로 당신을 체포한다”며 그 자리에서 쇠고랑을 채웠다.
왜 불법 체류냐고 했더니 여권에 비자가 없다고 했다. 문득 내가 여권을 새로 바꾸면서 비자를 옮겨 놓지 않은 게 생각났다. 4년 전 베트남정부 종교성에서 ‘장요나 제거 지시’를 내린 게 생각났다. 2001년 부활절 예배에 닥락성 본멧톡 오지의 한 교회에 무장 군인과 경찰들이 난입해 무차별 사격으로 460여명이 순교했다. 그 사실을 베트남뿐 아니라 한국교회에도 알려 중보기도를 부탁한 사실을 알고 베트남정부에서 나를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교통사고로 위장해 없애려 했지만, 내가 자동차로 여러 사람과 함께 이동했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여기서 붙잡혀 죽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 함께 있던 정유미 선교사가 갑자기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경찰들에게 보여줬다. 분위기가 급반전했다. 경찰들이 깜짝 놀라며 그 종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종이는 구순구개열 환자 6300여명을 무료로 수술해 준 공로로 베트남정부에서 받은 평화수교훈장증 사본이었다.
수차례 거절하다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훈장을 받은 날, 나는 훈장을 버리고 총리실을 나왔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누가 훈장을 준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 훈장을 정 선교사가 챙겨 사본을 만들어 차에 싣고 다녔다. 하나님은 베트남에서 라오스까지, 짧지만 위험천만한 국경을 프리패스로 넘게 하셨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장요나 (22) 어처구니 없는 죄목 4가지로 재판정에 서다
종교법 위반·공산당 사상 비판·의사 행세… 함께 사는 제자들 15명 모두 첩으로 오인
2003년 9월 7일 비라카미 신학교 1기 졸업식 예배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이 학교는 베트남이 공산화된 후 세워진 최초의 신학교다. 장요나 선교사(첫째 줄 마이크를 든 사람)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00년 새해가 시작돼 3주간 금식기도를 했는데 도중에 경찰에 붙잡혔다. 죄목은 4가지였다. 종교법을 어기면서 종교활동을 한 것, 베트남 공산주의 사상과 체제를 비판하고 반대한 것, 의사도 아니면서 의사 가운을 입고 의사 행세를 한 것, 내가 한국에서 가정을 망치고 베트남에 와서 여러 명의 여성들과 산다는 것.
20여일간 조사를 받고 법정에 섰다. 재판장은 첫째 죄목을 조사한 결과 내가 종교법을 어긴 일이 없음을 인정했다. 당시 70여개 교회를 세웠는데 전부 허가를 받았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땐 교회라는 말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법에 저촉되지 않았다.
둘째 죄목에 대해 나는 공산당 사상을 비방한 일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말씀과 예수 전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공산주의를 비판할 새가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셋째 죄목에는 내가 6개 병원을 세운 병원장인데 의사 가운을 입을 수 있지 않냐고 반문했다. 현지인 의사들과 동행하고 그들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의 병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고치시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넷째 죄목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눈물이 났다. 센터에 함께 사는 제자들을 첩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아이들을 첩이라 말할 수 있나. 아이들이 들을까 겁났다.
한국에 두고 온 아내가 간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아 1999년 11월 잠시 귀국했었다. ‘주님, 이 불쌍한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통곡이 터졌다. 아내와 함께 있어야 하나, 하나님 일을 해야 하나 마음이 복잡했다. 고민과 갈등 속에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마음에 강한 응답을 주셨다. “베트남에 가면 고문을 받고 핍박을 당한다. 그러나 가야만 한다. 하루에 560여명의 베트남인이 지옥으로 간다. 죽임을 당하더라도 가야만 한다.” 단호하게 결심하고 뒤돌아섰지만, 베트남에 오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마음 한쪽은 한국에 가 있어 전화가 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때마다 “하나님 제가 베트남 선교를 할 수 있도록 가정을 지켜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데 중상모략까지 당하니 저들이 불쌍하고 답답했다.
재판장은 4가지 죄목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했다. 덧붙여 앞으로 교회를 세우려면 종교성을 통해 건축하라고 했다. 내가 당신네에게 돈을 주면 절반 이상 떼먹을 게 아니냐고 하자 그들도 웃었다. 한국에서 보낸 피땀 어린 돈이기 때문에 절대 허투루 쓸 수 없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바짓가랑이 사이로 구슬 같은 물방울들이 뜨겁게 보글보글 올라오면서 다리를 간지럽혔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것처럼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느껴졌다. 재판장의 무죄라는 소리가 내게는 “이제 때가 됐다. 신학교를 세워라”는 음성으로 들렸다. 그 뒤 석방됐고 2000년 9월 기적적으로 비라카미신학교가 설립됐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23) 미얀마 복음화를 위해 베트남에서 추방하신 주님
날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던 베트남 종교성, 조사받느라 기한 지난 비자 문제 삼아 추방
장요나 선교사가 2015년 5월 6일 미얀마 양곤다일교회의 착공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2014년 8월 5일 한국에 들어가기 위해 공항에서 탑승권을 끊고 심사대를 지나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시간을 끌었다. 짐은 이미 부친 상태라 마음이 급해 빨리 처리해달라고 했지만,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경찰 6명이 나타나 여권과 비행기 탑승표를 압수했고 공항 안에 있는 경찰서로 데려갔다. 내 여권과 항공권으로 뭔가 조회하는 것 같은데 내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는 게 이상했다.
한 시간 후 비행기 탑승 구역으로 데려가더니 여권과 소지품을 모두 돌려주면서 가라고 했다. 뭔가 이상했다. 갑자기 왜 태도를 바꾼 건지 의심스러웠다. 현행범도 아닌데 외국인인 나를 왜 공항에서 잡았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면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야 경찰이 “당신 5년 추방이야”라고 말했다.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2013년 베트남 달랏트 소수부족교회에서 설교했다가 조사받은 게 문제가 됐다. 그때 내 NGO 비자 기간이 유예됐다가 끝나는 날이 그날이었다. 그 틈을 이용해 종교성에서 추방한 것이다.
기가 막혔다. 검사대를 통과하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센터에 전화로 상황을 설명하니 다들 울며불며 난리가 났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주님. 베트남의 수많은 영혼이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베트남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그 순간 큰소리로 “요나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또 한 번 뇌성 같은 큰 소리가 내 귀청을 찢었다.
‘너에게 비라카미를 맡겼는데 미얀마는 어떻게 할래.’ 주님의 음성이었다. 비라카미 선교를 시작한 지 24년이 됐지만, 미얀마 선교는 열매가 없었다. 지리적으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붙어 있어 한 묶음으로 다녔지만, 미얀마는 태국을 건너 접경 지역이라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하나님이 미얀마 복음화를 위해 나를 베트남에서 추방하신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당장 미얀마로 가는 표를 구해 선교지로 떠났다. 미얀마 사역은 유난히 어려움이 많았다. 나를 직접 겨냥한 사탄의 공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자주 다치고 사고도 많이 당했다.
미얀마 사역을 하다 6개월 정도 됐을 때 베트남 빠콤의 신임장관인 판안썬 장관으로부터 한국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급히 귀국했다. 서울 인근에 있는 교회에서 설교하고 밤 10시 30분쯤 일산에 있는 선교센터에 도착했다.
잠깐 눈을 붙인다고 누웠다가 잠에 곯아떨어졌다. 자다 보니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이상해서 눈을 떠보니 방안은 캄캄했고 매캐한 공기가 눈과 코를 찔러댔다.
분명히 불을 켠 채 잠들었는데 방안에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이상해 창문으로 가서 커튼을 열고 봤더니 소방차 수십 대가 내가 있는 오피스텔을 향해 물을 뿜고 있었다.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2014년 11월 30일 주일 밤 자정이었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24) 불길 속 서러움에 “하나님 저를 통닭 만드시렵니까”
화재 현장서 빠져나오며 회개… 베트남 종교성, 체류허가서 내주며 병원·학교 하나씩 더 세워달라 요청
장요나 선교사(가운데 오른쪽)가 2015년 5월 베트남 정부 사무실에서 썬판안 빠콤(PACCOM) 장관(왼쪽)과 NGO 사역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다.
불길은 지하에서 시작돼 6층까지 번졌다. 옥상으로 가려고 문을 여는 순간 처음보다 더 짙어진 연기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옥상으로 가는 것도 포기했다. 기도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다.
“하나님 저를 통닭처럼 만드시렵니까. 저를 식물인간에서 살려주실 땐 베트남 땅에서 순교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천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큰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건물이 무너지나 싶었는데 갑자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음성이 방안을 뒤흔들며 들려왔다. 찬란한 빛이 방안에 쏟아져 들어와 빛으로 가득 찼다. 방안의 모든 사물도 자취를 감추고 오직 내 앞에 있는 책꽂이만 앞 공간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책꽂이에 꽂힌 책에서 수많은 가격표가 도드라지며 움직이더니 숫자들이 겹치면서 5와 0이 하나로 돼 50000이란 숫자가 확대돼 눈앞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미얀마 양곤 건너에 있는 빈민가가 떠올랐다. 한국에 오기 3일 전 방문했던 곳이다.
아이들이 울고 있어 물어보니 일하러 나간 엄마를 기다린다고 했다. 아이들의 아빠는 어릴 때 병으로 죽었다. 5만원만 있으면 세 아이와 가족이 한 달을 살 수 있다고 해서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주고는 이 지역에 보육원을 세우기로 하고 왔다.
“하나님, 제가 책 산 돈을 보니 그간 많은 사람을 굶어 죽게 만든 자로서 영혼 구원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 그땐 무지해서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회개했더니 하늘에서 또 큰 우레 같은 소리로 “요나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음성이 들렸다. 나는 그 말씀에 힘이 솟아나 창문으로 뛰어가 얼굴을 내밀었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고 기뻐서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은 구조대원을 통해 내가 건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셨다.
화재 현장에서 빠져나오느라 뼈가 부러지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지만, 베트남의 빠콤 신임 장관과의 약속을 어길 순 없었다. 내 모습을 보고 놀란 빠콤 장관은 사과하면서 비자 문제를 종교성과 협의해 조속히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6개월 뒤 베트남 빠콤에서 보내온 NGO 입국 비자를 받으러 들어가니 보건성과 교육성, 종교성, NGO 담당 장관 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체류허가서를 주면서 병원과 학교를 하나씩 더 세워달라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보다 베트남을 더 사랑하는 미스터 장, 26년간 우리나라를 위해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당신이 외국인인 이상 종교법은 여전히 당신을 제한할 것입니다. 앞으로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헌신과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공산당 앞에서 떳떳하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내가 추방당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건 여러분께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됐다는 점이었습니다. 오직 베트남에 다시 올 방법을 기도하며 여러분을 그리워했더니 하나님께서 다시 이곳에 오게 해 주셨습니다.”
***[역경의 열매] 장요나 (25·끝) 날 통해 많은 분이 하나님과 만나 영생의 삶 누리길
31년 전 구하지 못한 아이들에 한 맺혀 고난 감수하며 교회·병원 등 세워 사역
비라카미사랑의선교회 임원과 회원들이 지난해 10월 7일 서울 서초구 횃불선교회관에서 ‘베트남 선교 30주년 선교심포지엄’을 마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베트남선교를 한 지 31년이 지났으니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 건 당연하다. 베트남에 처음 입국했을 땐 우리나라와 수교가 되지 않아 비자를 받기도 힘들었다. 입국하려면 제3국에서 비자를 받아야 했다. 공항엔 컴퓨터 복사기 엑스레이조차 없었다. 1969년 베트남전쟁 때 파병돼 군인으로 봤던, 우리나라보다 앞서있던 사이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40여년 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1989년 말 베트남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68달러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3000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발전했다. 처음 베트남 하노이에 갔을 땐 한국인이 15명 있었는데, 지금은 7만6000명이 넘는다. 호찌민의 한국인은 16만명 이상이다.
교회가 폐쇄되고 기독교인이 대부분 숙청당했던 이 땅에서 놀라운 변화로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다. 구원받은 영혼의 수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내 가슴에 자리 잡고 있는 가시가 있다. 베트남에 처음 왔을 때 갔던 하노이 라탄호텔 앞에서 1달러를 달라고 애걸하는 아이들이다. 내 눈에는 아직도 그 아이들의 모습이 선하다. 음식을 볼 때마다 사료처럼 여기는 것도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빵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전하지 못했다. 내 잘못으로 그들이 지옥에 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나는 매일 나무관 위에서 몸부림치며 회개 속에 살아간다.
그 아이들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한이 내 마음에 맺혀 31년간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달려왔다. 교회가 없던 곳에 312개 교회를 신축했다. 이곳에선 32만여명이 구원을 받아 예배를 드리고 있다. 사역자 양성을 위해 세운 신학교에선 860여명이 졸업해 교회 개척에 나섰다. 열악한 지역에 병원 16개를 세워 6300여명에게 구순구개열 수술을 무료로 해주는 등 의료사역을 진행했다. 초등학교 2개와 유치원, 보육원도 세웠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NGO 비자를 받아 복지와 미션 사역을 병행할 수 있었던 것은 피 흘림의 대가를 치른 열매라고 본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9~10)
세상 사람들은 내가 어리석다고 하겠지만, 나는 많은 것을 가져보았던 지난날 식물인간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이 세상을 떠나면 지옥과 천국이 있음을 똑똑히 보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 인생을 드러내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기 위해서다. ‘장요나’라는 시청각 교재를 통해 많은 분이 하나님을 만나길 기도한다. 그분을 만나 영혼의 눈을 뜨고 생명을 사랑하며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길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홀로 모든 영광을 받으소서.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