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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끝으로의 긴 여행
루이 페르디난드 셀린(1894-19610
초판 ; 1931
본명은 루이페르디낭 데투슈(Louis-Ferdinand Destouches). 1894년 5월 27일 쿠르브부아에서 태어났다. 루이 데투슈는 파리의 파사주 쇼아쇨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루부아 소공원과 아르장퇴이 가에 인접한 공립학교 및 튈르리 가의 생조제프 학교에 다녔다.
그의 생애는 프랑스 인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의 소설은 소개하면서 성애를 거의 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기억하게 되는 것은 전쟁에 대한 기억이다. 이렇듯 프랑스 문학사에서 그의 이름은 기이하게도 나치에게 협력하고 유태인을 배척한 작가라는 노란 낙인과 함께 늘 거론되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가려 그렇게 전쟁의 아픈 상처와 함께 떠올리게 되는 작가로 남아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아직도 그 전쟁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한 많은 프랑스 사람들의 심정적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 자신 스스로 용서받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또는 용서받을 일은 아예 없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루이 데뚜슈는 1894년 파리 근교의 꾸르브와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다(나중에 의사 생활을 하고 글을 쓰게 되면서 필명으로 사용하는 셀린느라는 이름은 그의 외할머니에게서 따온 것이다).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외아들이라서 그런지 부모의 각별한 보호와 사랑 속에 유년 시절을 보낸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1914년 1차대전 중에 지원 입대를 한다. 기병대원으로 참전 중에 중상을 입고 퇴역을 한다. 그리고 렌느에서 의사수업을 하면서 1919년에 렌느의 의과대학장이 될 폴레 교수의 딸 에디트와 결혼을 한다. 1924년에는 「필립 이냐스 셈멜바이스의 삶과 작품」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결국 문학적인 이 학위논문은 셀린느 자신이 자신의 첫 소설 작품으로 꼽고 있을 정도이다. 곧, 의사소설이라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1924년부터 셀린느는 의사와 작가라는 직업을 동시에 병행했다는말이다.
그리고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독일, 덴마크, 영국 등지를 거의 맹목적으로 떠돌며 의료활동을 한다. 이때의 부침(浮沈)이 많았던, 떠도는 삶이 곧 셀린느의 미래의 삶과 그 여정을 예고해주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을 여행으로 보고 그 끝없는 항해를 시도한 작가 셀린느는 실제로 여기 저기를 떠돌아다니는 방랑생활을 한 것이다. 곧 그의 삶의 이정표는 그가 작품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뿌리 내릴 곳은 밤의 끝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 가능한 여행이었다.
그 뒤 1928년에 귀국한 셀린느는 파리 근교 끌리쉬에서 역시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의사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낮에는 의료활동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생활을 하면서 1932년에 문제의 작품「밤의 끝으로의 여행(Voyage aubout de la nuit)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발표되자 곧 문단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이 작품은 두 가지 면에서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우선 이 작품에서는 이제까지 그 어떤 소설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비어와 속어 등이 그대로 여과 없이 문학언어로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언어의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혁명적 문체와 사회 통념을 무시한 충격적 내용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작품은 문단에서 문제성 있는 작품으로 주목을 끌었지만, 처음으로 문학상 수상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작품이라는 점이다.
「밤의 끝으로의 여행」은 발표된 그 해에 콩쿠르 상의 수상작으로 거론되어 수상이 확실히 되었으나 결국 많은 논쟁 끝에 거부당하고 만다. 그러나 그 뒤 르노도 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랑스 문학에서 셀린느의 등장은 이른바 졸라 성향의 사실주의적인 문학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 문단에 주된 기류를 이루고 있던 초현실주의자들처럼 그도 역시 1차 대전이라는 전쟁을 겪고 그것이 그의 소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자양이 되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은 그 이전의 그 어떤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밤의 끝으로의 여행」은 그 뒤에 등장하게 될 수많은 미래의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이른바 문학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20세기의 위대한 지성으로 회자되는 실존주의 작가 시몬느드 보브와르는 이 작품이 식민지 정책과 인간의 상투어구, 사회를 신랄하게 공격함으로써 앙드레 지드와 알랭과 발레리와 같은 작가들의 대리석처럼 차디찬 문장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사르트르도 또한 셀린느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첫 작품으로 세계 문단의 주목을 끌게 된 셀린느의 1936년 자신의 유년 시절을 그린 자전적 작품이라고 한 소설「외상죽음」을 발표하여, 또 한번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소설「죄의 고백」이나 반유태인적 성향이 농후한「벌레 같은 놈 없애버려라」, 친독일적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은「궁지」등을 발표함으로써 반역적 작가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레지스탕스의 습격을 받게 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셀린느는 덴마크로 망명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1944년 셀린느는 가족과 함께 독일군의 화물차를 타고 프랑스를 떠나 베를린으로 피신했다. 1945년 덴마크로 망명하지만 코펜하겐에서 전범자로 몰려 체포, 투옥되었다. 그리고 1950년 파리 법정은 셀린느에 대해 대독협력 전범자로서 궐석재판으로 징역 1년, 벌금 5만 프랑, 국적 박탈, 재산 몰수 판결을 내렸다.
공산주의 작가들은 셀린느의 사형을 요구할 정도로 그에 대해 극도의 적의를 나타내었다. 그 뒤 특사로 풀려난 셀린느는 1951년 프랑스로 귀국하는데, 그의 귀국은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여러가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53년 파리 근교의 뫼동(Meudon)에서 개업하고, 계속해서 그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망명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소설「이 성에서 저 성으로(D'un chateau a l'autre)」(1957년 출판)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셀린느의 문학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움직임을 일게 하였다. 또한 영국과 미국과 독일 등 세계 문단에서도 그의 작품을 전후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셀린느는 그가 살고 작품을 썼던 뫼동에서 1961년 사망했다. 그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독창적인 주제와 혁명적인 문체로 문단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의 문학적 세계에 대한 이해와 성과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또한 그의 죽음과 아울러 그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와 증오도 사그라져 가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는 아직 문학비평가들의 진정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 듯하다.
그 당시 그는 시대의 조류에 무분별하게 휩쓸리거나 정치적 상황에 영합하려는 계산적인 반유태인 주의자도 아니었고, 어떤 정치적 출세를 꿈꾸는 허황된 기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그 어떤 이즘이나 신념도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철저히 반유태인주의, 반전주의, 반공산의, 반자본주의, 무정부주의적 논쟁 활동으로 좌우양진영에게서 공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가두려는 이념의 사슬을 과감하게 박차고 나와서 자신만의 신념에 철저하게 복종함으로써, 그 자신의 신념의 정조를 끝까지 지키고자 투옥되었으며 끝내 그는 그 자신의 투옥에 대한 그 어떤 설명이나 해명도 더더구나 변명은 결코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침묵하고 글을 썼다. 셀린느의 생애를 전기로 출판한 프랑소와 지보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그 어떤 관례나 규범도 일단 의심했고 한 사회 질서가 내포하는 불의와 위선에 서슴지 않고 욕설을 퍼붓던 서민출신의 귀족'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를 이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로 꼽고 있다. 그런데 프루스트와 거의 같은 시기에 삶을 살았던 셀린느는 그의 뛰어난 문학성에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부유하고 귀족적이고 평생 직업도 갖지 않고 칩거상태에서 품위있게 고요한 삶을 살았던 프루스트의 삶이나 문학은 이제 새롭게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프랑스 소설 셀린느에 의해 동정(童貞) 잃어
"그것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로 시작하는 소설「밤의 끝으로의 여행」은 주인공이 의예과 학생 바르다뮈가 지나가는 부대의 모습을 보고 갑자스럽게 군대에 합류하는 것으로 이 소설이 갖는 여러 가지 돌발적인 상황을 예고한다. 그 우스꽝스런 입대와 전쟁터에서의 방황은 앞으로의 주인공의 삶을 미리 예시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말한 '상상적 여행'의 시작이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셀린느는 인간들에게 진실을 말하려고 했다. 그것은 곧 인간들이 행하고 있는 진실이다. 삶은 죽음이라는 이면이 없이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인 조건을 지닌 진실이며, 인간들 자신에 대한 진실이며, 인간들 자신에 대한 진실이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들의 미음 속에는 예외없이 가난하건 부자이건 간에 '악랄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진실은 파스칼에서부터 프로이드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되풀이되어 오고 있는 사실이다.
육욕에 동정(童貞)이 있는 것처럼 공포에도 동정이 있다고 셀린느는 말한다. 그처럼 소설에도 이를테면 동정이 있다. 그런데 프랑스 소설을 셀린느에 이르러서 그 동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우선 구조의 문란함을 들 수 있고, 또 어휘의 음란함이다. 소설 자체가 음란하고 구역질나는 어휘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을 조소와 야유가 지배한다. 또 가주어와 가목적어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이것은 이 소설이 구어체로 쓰여졌기 때문이긴 하지만, 많은 경우 단어들이 그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곧 동정을 잃었다고 해서 소설이 더럽혀지고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습을 정면에서, 측면에서 충분히 보기 위해서 그는 이렇게 지금 세상과 단둘이 마주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육체란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희생의 제물이 될 것이고 또한 고깃덩어리 자체도 내장과 느슨함과 추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런 갑작스러운 계시'를 깨닫게 됨으로써 이 소설의 주인공 바르다뮈는 구토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비르다뮈는 육체라는 것이 '진열된 내장들과, 누르끄름하고 창백한 비곗덩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바르다뮈는 악에 대한 철학적인 탐구를 계속한다. 다시말하면, 전쟁과 질병이라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무한히 되풀이되는 두 개의 악몽에 대한 탐구이다. 그렇다. 그것은 악몽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인간의 진실은 그렇다면 무의식속에 있다. 무의식에는 또한 어떤 부정적인 힘이 서식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죽음의 충동이다. 가학증과 피학대증이 뒤섞인 충동이다. 셀린느는 바로 이런 것이 세계를 이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진실은 곧 죽음인 것이다 셀린느 자신이기도 한, 피로에 지친 이상주의자 바르다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곳에서나 벌어지는 도살 행위에 몸을 바치는 세계에서 구원받기란 불가능하며 인간은 자리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따라서 이 세계의 진실은 죽음이다"라고.
여행은 필요하다. 그것은 상상력을 움직이게 한다. 그 나머지는 전부 실망과 피로 뿐이다. 우리의 여행은 완전히 상상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그 힘이 있다./여행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 사람, 짐승, 도시, 자연, 이 모든 것은 상상에서 나온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은 리트레가 말했듯이 분명하다./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다. 눈을 감기만 하면 된다./그것은 우리 삶의 저쪽이다.
그러므로 그 진실인 죽음을 향해서 가기 위해서는 여행을 해야 한다. 셀린느가「밤의 끝으로의 여행」모두(冒頭)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삶이라는 이 험난한 항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진실인 죽음, 안정된 그 죽음. 그 죽음을 향해 가기 위해 평생 주변을 떠돌아야 했던 셀린느의 삶.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간에 그는 평생을 파리라고 하는 중심에서 벗어나 주변에서 맴돌았다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 어느 곳에도 뿌리박지 못하고 가난과 질병을 찾아다니며 글을 쓰고 환자들을 치료했던 셀린느. '인생의 괴로움의 순간에 찾아와 주는' 한 사람인 '의사'로서의 직분에 충실했던 셀린느. 그는 우리 인간이 겪는 보잘것 없고 자질구레하고 짐승스럽기까지 한 이 비참한 생을 여과없이 그리면서 동시에 그 괴로움을 치료해주는 의사의 역할을 서슴없이 떠맡은 한 시대의 사제였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의사인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의 첫 소설. 고통과 절망 속에서 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인간의 모습을 격렬한 문체로 그려낸 이 소설로 인해, 그는 20세기 프랑스 문단에서 중요한 혁신적인 인물로 주목받았다. 주인공 바르다뮈와 로뱅송이 술회하고 있는 전쟁, 식민 아프리카, 식민지 왕복선 브라그똥호나 기타 선박들, 뉴욕이나 디트로이트, 파리 근교의 빈민촌 등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씌어진 삶은 굴레이며 혹독한 노동이라고 이야기한다.
보름 가까이 걸린 대장정이다. 빽빽한 조판의 770여면에 달하는 분량에, 지하철 통근 독서족의 바람직하지 않은 사례의 조우가 빚은 결과이다. 그래도 도중에 용기를 잃지 않은 점에 스스로 대견스럽다. 셀린느(셀린 혹은 쎌린느)의 1932년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당대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으로 프랑스 문학사적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피카레스크 소설>(이가형/민음사)에서 20세기의 피카레스크 소설로 분석을 하고 있어 흥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
피카로의 여정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작한 이래 나의 관심은 작품이 어떻게 결말을 맺을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이 소설은 단순한 피카레스크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지향하고 담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였다.1. 작품은 주인공 나, 즉 페르디낭 바르다뮈의 인생 역정을 따라 변화무쌍하게 전개된다. 의학도인 페르디낭은 친구와의 대화 도중 행진하는 군대를 바라보다가 불현 듯 자원입대한다. 정신발작을 일으킨 페르디낭은 군대를 나와서 아프리카 식민지행 배를 탄다. 하지만 식민지에서 극심한 기후와 더위로 기력을 상실한 그는 미국행 화물선에 팔려가는 신세가 된다.
희망의 도시 뉴욕에서 그는 밑바닥 생활을 하며 실망하고 다시 프랑스로 탈출한다. 이후 그의 삶은 프랑스 내 파리 인근과 툴루즈를 오가며 전개된다.언뜻 보아서 피카레스크의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주인공의 방랑과 성장, 사회악과 부조리에 의한 피해 등. 다만 페르디낭은 조금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다. 여기서 피카로의 전형성에서 벗어난다.페르디낭과 레옹 로뱅송은 사물과 그림자의 관계다. 그들은 형제인 동시에 철천지원수다. 그들은 동전의 앞뒤이자 빛과 그늘이기도 하다. 페르디낭은 로뱅송 없이 완전하게 홀로 서지 못한다. 그들의 떠나있음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각하는 기간이다.
그래서 페르디낭은 로뱅송을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그를 완전히 떠나지 못하며 결국 그를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페르디낭은 용기없는 위악적 인물이다. 그는 사랑에 관심을 두지 않지만 호색한이다. 그는 남들처럼 당당하게 비속함을 구하지 못하며 언제나 전전긍긍한다. 다소 가볍고 입이 가벼운. 로뱅송은 용기없다는 점에서 페르디낭과 비슷하지만 그는 위악적이지 못하다. 그 역시 사랑에 관심 없지만 마찬가지로 여자에도 무관심하다. 그는 재차의 시도 끝에 앙루이유 노파를 살해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악인이다. 하지만 독자는 그를 악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악인이되 악인이지 않은 로뱅송과, 악인이 아니지만 악인스러운 페르디낭. 2. 그들의 공통점은 부조리한 삶과 세상을 떠나려고 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처음 마주친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전장. 그들은 독일군에 항복하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죽음이 아닌 삶, 그것이다. 그들은 허망하게 죽고 싶지 않다.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전쟁, 서로 죽고 죽이는 이곳에서 그들은 떠나고 싶어 한다. 전쟁은 삶과 죽음이 무수히 오가는 곳이다. 미사여구는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욕망과 진실만이 드러나는 공간.파리에서 잠시 마주친 그들이 재회하는 곳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그들은 전쟁과 문명세계를 도피한다. 미지의 그 곳, 오로지 자연만이 인간을 압도하는 아프리카에서 육신과 정신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곳 역시 식민지의 부조리와 자연의 야만성이 그들을 집어삼킨다. 인사불성인 상태로 벗어나는데 성공하지만 사제에 속아서 선원으로 팔려가는 신세로 전락한다.어쨌든 페르디낭은 신대륙 미국에 도착하였다. 운 좋게 도시로 잠입하는데 성공한 페르디낭, 그에게 뉴욕의 거대한 도시문명은 비정한 물질성과 비인간성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규격화되고 획일적으로 동질화되는 곳. 그는 미국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귀국을 꿈꾼다. 여기서도 로뱅송은 항상 페르디낭에 한발 앞서 와있다. 그는 페르디낭을 예감케 한다
.전후 프랑스, 이제 평화가 찾아왔으니 그가 염원하던 바가 이루어질 것인가? 그는 의학수업을 재개하여 마친 후 변두리 지역에 개업한다. 여기부터가 작가가 진정으로 의도한 내용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나고 자란 그곳도 이제는 변질되었다. 페르디낭이 가렌느-랑시에서 겪는 옹색한 생활과 동네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 그것은 소박하고 정겨운 그것이 아니라 삶의 불결하며 지긋지긋하게 악착같은 독기서린 것이다. 그 독기에서 앙루이유 부부의 노파 살해 기도가 움트게 되었다. 3. 페르디낭과 로뱅송의 여성 편력을 비교해 보는 것도 꽤나 흥미롭다.
페르디낭은 앞서 말했듯이 호색한이다. 그는 끊임없이 여성의 육체를 애호하며 갈구한다. 부상으로 입원하였을 때 간호사인 미국여성 롤라, 수용소에서 알게 된 뮈진느와의 만남, 그리고 미국에서 매춘부인 몰리와의 감상적 연애, 극장 여배우 타냐, 그리고 로뱅송의 연인 마들랭, 병원 간호사인 소피 등. 그는 뭇 여성을 항상 갈구한다. 여성의 육체가 그를 안정시키고 거기에서 위로를 찾는다. 그와 여성의 관계는 글자 그대로 표피적이다. 그에게 유일한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몰리를 제외하고는.반면 로뱅송은 여성에게 철저히 무관심하다. 그가 유일하게 만난 여성은 마들랭이다. 이마저도 그가 부상을 당하였을 때에 벌어졌으며 둘의 관계도 마들랭의 적극성과 끈질김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마들랭의 성격 부여가 궁금하다. 그녀는 외모와 나이를 고려할 때 로뱅송에게 연연할 연유가 결코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놓아주지 않고 집착하며 마침내 그를 협박하다가 총으로 쏘아죽이고 만다. 로뱅송의 무엇이 그녀를 그에 집착시켰을까? 그의 불안정한 정서, 현실안주 거부적인 방랑자의 심리, 아니면 자신의 사랑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남자에 대한 오기의 발현 등.이처럼 이 소설은 피카레스크 소설적 면모 외에, 반전문학의 성격과 아울러 현대 물질문명에 대한 문명비판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두 주인공을 둘러싼 사회 밑바닥과 소시민의 견고한 궁핍과 간난을 여실히 도려내고 있는 점에서 사회비판의 색채도 아울러 띠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사상은 작품 표제에서 보여주는 그대로가 아닐까? 밤은 인간의 삶을 가리킨다. 어두운 밤에서처럼 인간은 자신의 삶을 방향도 알지 못하는 채 더듬거리며 나아가야 한다. 밤이 끝나면 인간의 삶도 종말을 맞는다. 삶이 어떠한 종말을 맺든 모르는 채 인간의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생의 목적이므로, 밤 끝으로의 여행! 도대체 밤 끝으로 도착은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보면 로뱅송은 페르디낭 보다는 훨씬 순수한 사상을 지녔음에 틀림없다.이렇게 써놓고 보니 꽤 그럴듯한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당대에 화제를 모았던 연유는 내용의 심오함이 아니었다. 일단 구어체와 비속어의 적극적 활용이었다. 아마 당대에는 고상한 문체가 주류이었던 듯하다. 그것을 셀린느가 소위 판을 뒤집어버린 것이다. 셀린느가 쓰고자 하는 내용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겐 사실적이고 비속함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방법이 필요하였다.
또한 극도의 비관주의적 분위기다. 작품에서 간혹 드러내는 실소적 장면을 제외하면 소설은 철저히 어둡고 암담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힘겹고 고달픈 삶, 거칠고 부조리한 세상. 그것은 양차 세계대전의 불안한 세계에 대한 작가와 세인의 암울한 전망을 반영한다.구경 중에 가장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불구경이라고 한다. 한밤중에 활활 타올라서 모든 것을 전소시켜버리는 불길의 압도적 강렬함과 뜨거움은 사람들을 도취시키는 매혹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불 꺼진 현장을 다시 가본 이가 있는지? 지난밤의 황홀한 추억은 찾기 어렵다. 온통 재투성이에 타고남아 무너져버린 잔해와, 시꺼멓게 그을린 흔적 등. 여기에는 오로지 씁쓸함만이 입가에 감돈다. 이것이 셀린느의 작품을 읽는 소감이다.당대인에게는 열광적으로 호응 받고 도취감을 주었을 뿐더러 진부함을 타파하고 생경한 신선함의 우물물을 문학에 쏟아 부은 소설. 시대정서를 반영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와 문명 비판적 원대한 깊이를 제시해준 작품.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미 자체로 진부하다. 통시대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문학작품은 고전으로 살아남지 못한다. 셀린느의 이 작품도 이 시험대 위에서 오락가락한다. 대중의 평가는 당대성에 기우는 듯하다. 오늘날 그의 작품 중 유통되는 번역본이 달랑 이 한 편임이 입증하듯이. 하지만 간단히 외면하기에는 무게감이 제법 만만치 않다. 어찌할 것인가?
이 소설은 대담하고, 활발하고, 단호한 문체와 현학적인 위트, 그리고 신랄한 냉소가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전반적으로는 서정적이고, 유려하며, 속어, 음담패설, 구어 등이 풍부하게 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바르다뮈’는 인간을 두 부류의 인종으로 나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둘 다 경멸한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고통과, 노년과, 죽음 뿐이다.’※ 참고로 이 책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간략한 작품 연보가 전부다. 따라서 셀린느의 이 작품에 대한 분석에 관심있다면 <피카레스크 소설>(이가형/민음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저자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전체적 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