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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하게 살게 하는 소망. 生き生きとした希望。(2026년 4월 12일 주일예배)
베드로전서 1장 3절~9절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4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5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십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7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9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3 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が、ほめたたえられますように。神は豊かな憐れみにより、わたしたちを新たに生まれさせ、死者の中からのイエス・キリストの復活によって、生き生きとした希望を与え、4 また、あなたがたのために天に蓄えられている、朽ちず、汚れず、しぼまない財産を受け継ぐ者としてくださいました。5 あなたがたは、終わりの時に現されるように準備されている救いを受けるために、神の力により、信仰によって守られています。6 それゆえ、あなたがたは、心から喜んでいるのです。今しばらくの間、いろいろな試練に悩まねばなら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7 あなたがたの信仰は、その試練によって本物と証明され、火で精錬されながらも朽ちるほかない金よりはるかに尊くて、イエス・キリストが現れるときには、称賛と光栄と誉れとをもたらすのです。8 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を見たことがないのに愛し、今見なくても信じており、言葉では言い尽くせないすばらしい喜びに満ちあふれています。9 それは、あなたがたが信仰の実りとして魂の救いを受けているからです。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감사하며 기쁨과 감동의 말씀으로 배웠습니다. 부활은 문자적으로만 알면 예수님께서 죽었다 살아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사람으로서는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기적을 의미하는 것만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고 또한 고백함으로 기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도 일상에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호흡과 손길을 느끼고 누리며 늘 흐뭇하게 지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사는 것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소망임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는데요.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동행하는 것이 단순한 지식이나 교리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 현실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엄청나고 특별한 권세이며, 권능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은 본문은 사도 베드로의 편지이며 또한 간증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면전에서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이지요. 그렇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 가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세 번 사랑을 고백하는 기회를 얻었던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가 오늘 본문의 3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다”고 하는데요.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 즉 거듭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복음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증언하지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곧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난 주일에도 함께 나눴듯이 예수님께서 부활, 진리, 생명이기 때문이지요. 온전한 새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 곧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거듭난 우리는 한 번 태어난 후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퇴색되어 가는 육체의 삶의 사는 것과 같이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겉사람인 육신이 낡아지면 낡아질 수록 속사람인 내면세계와 영혼은 더욱 새로워진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새롭게 다시 거듭난 삶을 산다는 것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믿은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듯이 변화되어, 신입생과 같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뒤에 점점 믿음이 연로해지거나 쇠약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한 때 뜨거웠다가 지금은 밍숭맹숭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루에 하루만큼을 살며, 매일마다 다시금 새로운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어제와 비슷한 오늘이 있고, 오늘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내일을 막연하게 예측하는 삶이 아님을 거듭난 사람은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사는 것을 우리에게 있어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소망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혹은 어떤 행위의 공로로 소망이라는 실적을 획득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느냐, 혹은 어떤 꿈과 비전을 생각에서 끄집어내야 하느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재능과 소질을 발견한 뒤에 그것을 열심히 개발하고 노력한 결과로 자신의 장밋빛 장래를 기대한다고 한다면 그 소망, 혹은 희망은 자신의 실력과 공로로 획득한 소망일 것입니다.
대부분 육체로 사는 인생 가운데 사람들이 기대하고 또한 예측할 때 갖게 되는 희망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희망의 일반적인 모습이지요.
혹은 그런 현실적인 실력과 상관없이 막연하게 모든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이 순탄하게 되어 가는 것을 소망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장래희망이나 막연한 기대감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에서 주어질 현실에만 국한된 소망인 것이지요.
바울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헤아릴 수 있는 현실의 지경을 넘어서는 소망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8:24]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보이는 범위 안에 국한된 소망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지평에까지 이르는 소망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소망이야말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소망이며, 동시에 우리를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하는 소망인 것을 믿습니다.
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소망의 정체에 대해서 본문의 4절이 밝혀주고 계시는데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유산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있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소망이면서 우리를 생생하게 살게 하시는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인 영생에 속한 소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인정하고 욕망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이 있다고 아무리 외치고 고백하더라도 우리의 육신이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 체감하고 실감하기가 어렵기에 자신이 직면한 문제임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 또한 인생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은 말한 것도 없거니와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실족하기도 하고, 중간에 믿음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육체의 위협을 느끼는 중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극심한 박해 중에 있는 성도들의 마음을 붙들어 주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세에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 지를 이미 경계하시며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8]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주님께서 채우신 소망, 즉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형편과 환경, 그리고 여건에 맞춰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노아의 때에도 그랬고, 앞으로의 말세에도 그럴텐데요. 주님의 심판이 임박한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일상생활의 욕구에만 몰두하며 사는 것을 반성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진단합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눅 17:26-27]
그러니, 일상생활의 성공여부에 몰두하거나, 그 자체에 몰입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일상생활에 몰입하는 것을 경계한다고 해서, 속세를 떠나 산 속으로 숨어들어 은둔생활하며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어리석은 대안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현실의 고난과 시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잊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에게 주실 은혜와 선물은 지금도 안심하며 살며, 또한 말세에도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 앞에 벌어진 슬프고 괴로운 일과 마주한 중에도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다른 어떤 포상보다 더 큰 상급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인내를 갖게 하는 믿음의 가치는 불로 단련한 금보다 훨씬 값지고 귀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순도가 높은 금을 갖고 싶어하지요. 순금을 얻기 위해서는 금 속의 불순물을 제거해야 하는데, 불로 정련하는 과정을 통해 금의 순도는 높아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뜨거운 불의 연단이 불순물을 제거함으로 순전하고 순도가 높은 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얻어진 순금보다 훨씬 더 가격과 가치가 높은 믿음이 삶의 시련과 슬픔, 고난 그리고 인내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고 사는 삶이나 그렇지 않은 삶이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변별력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불로 시험하실 때가 되면 우리 믿음의 순도가 주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고전 3:12-13]
이 말씀이 표현하는 ‘공적’이란 인간적인 노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내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태도와 자세로 자신의 영적인 공로를 쌓아가는 사명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육신적인 보상을 위한 노력과 실력을 쌓는 일상이 아니라, 그 너머의 삶인 “영생”에서 누리게 될 상급을 발견하게 하시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소망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생생하게 살게 하시는 소망을 지금 손에 확실히 쥐고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성경이 약속하시는 그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지내고 지난 한 주간 한국에 연회 참석을 위해 다녀 오면서 이런저런 삶의 이야기들과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저를 이끄신 주님의 손길에 대해서 고백도 하였습니다. 모두 표면적인 삶의 이야기를 주제로 말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금 당장 눈 앞에 있는 것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오늘 말씀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영생의 소망으로 마음과 생각이 요동하지 않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 공통적으로 주님 앞에 나약한 인간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그리고 어떤 이는 현실에 우와좌왕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붙들고, 지금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휘둘리지 않으며,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계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앞으로의 모든 삶 가운데 주님과 동행함으로 모든 시련과 역경과 또한 고난까지도 넉넉히 이길 힘을 얻어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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