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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라.
마가복음 2:1-12
오늘이 2019년 둘째 주일입니다. 좀 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번 주까지는 새해 분위기가 남아 있으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새해 덕담을 하나 전해드릴까 합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착하고 인심 좋은 부잣집의 외동딸이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 농장의 가축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제일 나이가 많은 소가 의장이 되어 “여러분! 우리를 이렇게 보살펴 길러 주신 주인님의 딸이 시집을 가는데 어찌 그냥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잔칫날에 우리 중 누군가는 풍성한 잔치 상을 차리기 위해 희생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두 “옳습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동의하여 결정하였습니다.
소가 말했습니다. “나는 주인님의 농사를 위해 논밭을 갈아야 하고 무거운 짐도 실어 날라야 하니 나는 빠지겠습니다.” 그러자 나귀가 말했습니다. “나는 주인님이 가는 곳으로 어디든지 모시고 다녀야 하고 이번 혼례에도 신랑을 태우고 예식장 까지 가야 합니다.” 이번에는 개가 말했습니다. “나는 도둑으로부터 주인님의 가족을 지켜야합니다.” 고양이도 말했습니다. “내가 없으면 창고에 드나드는 쥐를 누가 잡겠습니까?” 닭도 이에 질세라 “나는 새벽마다 주인님을 깨워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돼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돼지가 마침내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나는 주인의 주신 양식을 먹고 아무 것도 하는 일없이 살았습니다.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주시고 보살펴 주신 그 은혜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주인님께 보답하기 위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잔칫상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가는 길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노래를 하였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몸을 바친 돼지는 죽어서도 웃는 얼굴로 잔칫상에 올려 졌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올 해가 돼지의 해(年)라고 합니다. 그것도 보통 돼지가 아니라 ‘황금 돼지의 해’라고 합니다. 제가 돼지의 해를 만나서, 여러분에게 “돼지처럼 삽시다!”라고 하면 혹 여러분이 기분 나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나보고 그처럼 지저분하고, 미련한 짐승처럼 살라는 말인가?”라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돼지가 그렇게 미련하고 더러운 동물이 아니랍니다. 미국 에모리대학 신경과학과 마리노 박사 팀이 연구한 결과, 돼지의 인지능력이 개와 침팬지, 돌고래에 못지않다고 합니다.
또 돼지의 후각능력은 프랑스 요리의 최고 재료인 송로버섯을 찾을 때 활용할 정도로 뛰어나고, 탁월한 장기 기억력, 미로를 빠져나오는 물체 위치 파악능력, 나와 다른 개체를 식별하고 다른 동료들과 공동 작업을 하는 사회성, 거울을 보고 등 뒤에 있는 음식을 찾아내는 판단력 등 3~4세 어린이에 해당하는 70~85 수준의 매우 높은 지능지수(IQ)를 가졌다고 합니다. 또 돼지의 공감능력은 개나 고양이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합니다.
또 돼지가 매우 깔끔한 동물입니다. 돼지는 코와 항문에만 땀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체온을 조절할 수 없어서 물을 찾고 축축한 진흙 목욕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만약 인간이 축사 청소를 제대로 해 주지 않으면 돼지는 체온 유지를 위해 자신의 배설물 속에서라도 뒹굴어야 합니다. 실제로 축사가 적당한 면적이라면 용변도 한 곳에서만 보는 매우 깔끔한 동물이 바로 돼지라고 합니다.
※출처: 한국성결신문, 2019년 1월 9일(수)자 <편집위원 칼럼> 돼지처럼 삽시다, 박순영 목사
http://www.keh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973
자, 제가 여러분에게 “새해에는 우리 모두 돼지처럼 삽시다!”라는 덕담을 나누었습니다. 이 덕담처럼, 올 해에는 주님의 은혜를 받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몸 바쳐 주님을 위해 일하는 데에도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덕담은 덕담이고, 이제 마음을 열고, 귀를 쫑긋 세워서 다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고친 기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받기 위해서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영적인 질병 걸린 자, 육신의 각종 질병에 걸린 자들이 자신의 병으로부터 치유를 받기 위해 예수님 앞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집의 대문 앞과 마당뿐만 아니라,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습니다.
2절에 보면, 이 때 예수님은 자신에게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道)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제가 확신하건데, 예수님께서는 분명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 주고 계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쳐 주신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의 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4장 17절에 보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외치신 첫 번째 설교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수많은 비유로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막 4:11).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조차도, “나라이 임하옵시며(마 6:10)”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려 40일 동안이나 이 땅에 머물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제가 성경 몇 군데만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사실은 그 이상의 많은 곳들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핵심가치이자, 예수님이 전하고 싶어 하셨던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머무셨던 집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입니까?
무명의 그리스도인들
하나님 나라의 도(道)를 가르쳐 주시기에 여념이 없으셨던 예수님과 군중들 사이에 특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온 것입니다(3절). 이 중풍병자는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님께 나올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예수님께 나올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주변에는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을 때에, 이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중풍병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더구나 이 사람들은 중풍병자의 치유라고 하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무명(無名)의 사람들을 ‘코이노니아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비록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사랑으로 한 팀을 이룬 위대한 코이노니아 공동체였습니다. 이 무명의 사람들은 한 중풍병자의 연약함을 자신들의 어깨에 메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 중풍병자의 침상을 어깨에 멘 것은 네 사람 뿐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사랑의 침상을 어깨에 메고 있는 사람들은 무명의 코이노니아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변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쉽게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포기해야 할까요? 물론 포기해도 됩니다. 그들이 포기한다고 해서 아무도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사회에서 그 정도의 수고와 헌신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존경받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중풍병자는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날따라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도저히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상황을 자주 경험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을 했지만, 상황이 바뀌어서 도중에 그 선한 일을 그만두는 것이 우리에게는 익숙한 삶의 경험이지 않습니까?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그 사람들은 선한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일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 그러나 엄청 번거롭고,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불편함이 있으며, 결코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무모한 일을 벌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코이노니아 공동체는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줄에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도, 남의 집 지붕을 뚫는 수고도, 풀풀 나는 먼지구덩이도 그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그들은 사랑으로 하나 된 코이노니아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는 나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밤 중에 찾아온 배고픈 친구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는 나의 믿음과 함께, 사랑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 침상을 달아 내렸던 코이노니아 공동체는 믿음과 함께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깨알같이 흩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과 사랑으로 연합된 코이노니아 공동체야 말로, 우리교회의 힘이고, 비전이고, 능력입니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바나바훈련원에서 코이노니아의 힘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가을, 훈련원 운동장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치우는 일을 부탁받게 되었을 때 저는 적잖게 당황하였습니다.
“우리가 과연 이 일을 마칠 수 있을까? 우리는 훈련을 받으러 온 것이지 노동을 하러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기타 등등… ”
저는 그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을 끝마치지 못할 변명거리를 찾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 주변에 있던 분들은 저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한 팀이 되어 (목사님이건, 사모님이건, 심지어 원장님까지) 운동장에 모두 나와 어떻게 이 일을 끝마칠 수 있을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떤 분은 빗자루로 낙엽을 쓸었고 (드넓은 운동장에 싸인 낙엽을 언제 모두 치울지는 모르지만…), 어떤 분은 넓은 널빤지 조각을 주어다가 낙엽을 한데 모으는 일을 했고, 어떤 분은 두 명씩, 네 명씩 짝을 이루어 마대자루에 낙엽들을 수북이 주워 담기 시작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낙엽이 다시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자동차 바퀴로 낙엽을 꾹꾹 눌러주는 일을 했습니다. 심지어 원장님은 땀 흘려 일하는 목사님, 사모님들이 지쳐하지 않도록 카메라로 예쁜 사진들을 찍어주셨습니다. 적어도 제 눈에 비친 작업광경은 힘들고 고된 노동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한 축제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비록 정해진 시간 안에 그 일을 끝내지 못해 그 다음 날에도 똑같은 일을 해야만 했지만, 그 다음 날에도 동일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일보다 코이노니아가 더 중요했습니다. 맨 처음에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저 자신도 어느새 코이노니아 공동체에 녹아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분들을 도와 부지런히 낙엽을 쓸어 담고, 소각장에 운반하는 일을 했습니다. 드디어 이 엄청난 작업이 모두 마쳐졌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와, 이 엄청난 일을 우리가 해냈단 말인가! 이것이 믿어져? 이것이 진정 코이노니아의 힘이란 말인가!”
저는 이 경험을 통해 더 깊은 영적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코이노니아로 하나 된 공동체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마음을 합하고, 사랑을 모으면, 어떤 일이라도 능히 해 낼 수가 있습니다. 일보다 코이노니아가 먼저입니다. 코이노니아만 이루어지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즐겁게 해 낼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있는 네 명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 뒤에서 네 명의 친구들을 응원하고 격려하고 있는 무명의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보십시오! 중풍병자를 고쳐야 한다는 한 가지 목적으로 뭉쳐진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퍼져있지 않습니까?
“잘했어, 정말 대단해!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했지? 이게 정말 가능해? 정말 우리가 해낸 일이란 말이지?”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하나 된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
얼마나 감동적인 선언입니까? 여기서 ‘작은 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코이노니아로 하나 된 공동체의 믿음을 보시고, 연약하여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없었던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중풍병자는 사람들의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중풍병자는 사람들의 간증거리가 되었고, 이야기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코이노니아로 하나된 공동체에서는 약한 자가 더 귀한 은혜를 받는 법입니다. 코이노니아 공동체 안에서 중풍병자는 오히려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자, 예수 그리스도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작은 조각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서로의 연약함을 함께 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문제가 있거나, 연약한 믿음을 가진 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 된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이룬다면,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기도의 제목이 되고,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건강한 코이노니아 공동체는 우리에게 안전한 울타리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실의에 빠져 있는 지체에게 다가가 “힘내! 우리가 있잖아.”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누리며, 함께 경험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무기는 코이노니아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6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서기관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물으셨습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과연 예수님께는 네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는 말과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떤 말이 더 쉬울까요? 분명 예수님은 능력의 주님이기에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이 더 쉬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 중풍병자의 치유를 죄 사함과 연관시키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잘 나타내는 단어가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인자’(人子, The son of man)라는 단어입니다. 본래 ‘인자’란 단어는 ‘사람의 아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독특한 호칭입니다. 즉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10절).”
예수님은 육신의 질병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땅에서 사람들의 죄까지도 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향해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심으로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권세를 믿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어떤 분에게 숙명여대 교수를 거쳐 차관까지 지냈던 친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교회도 열심히 나가는 신앙이 돈독한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어느 날 우수개소리로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난 세상에서 아무도 무섭지 않은데 다만 우리 어머니한테는 꼼짝 못해. 어머니는 마땅치 않은 것이 있으면 가만 계시다가 ‘야, 이 녀석아. 내가 너를 낳았다. 할 말이 있느냐?’하고 말씀하시거든.”
그 친구의 어머니의 권위가 바로 사랑의 권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낳아서 길렀다’고 하는 사랑의 권위 말입니다.
※출처: 김형석, 「왜 우리에게 기독교가 필요한가」(두란노),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19년 1월호, p. 31에서 재인용.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권세 앞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겸손하게 그 분의 권세를 인정해 드리고, 그분을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 온전한 코이노니아
온전한 코이노니아는 나와 네가 하나 되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나와 네가 하나 되어, 주님과 하나 되는 것, 이것이 온전한 코이노니아입니다. 온전한 코이노니아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목적에 관하여 고린도전서 1장 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한 개인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너희’라고 하는 교회 공동체로 부르셨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온전한 코이노니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요 요한은 우리가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게 될 때 우리에게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1:3-4).”
온전한 코이노니아는 주님의 구원계획이요,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둘이 하나 되어 주님과 하나 되는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준엄한 명령이자, 기쁨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교회가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교회에는 앞으로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중풍병자의 문제를 가지고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코이노니아 공동체처럼, 우리교회 공동체가 육신의 질병 가운데 있는 사람, 죄 사함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어깨에 메고 예수님 앞으로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의 가정에는 앞으로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 자녀들이 잠시 부모에게 근심이 된다할지라도, 부모님이 사랑으로 자녀들을 양육하여 주님께 인도할 때 가정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자녀의 마음속에 숨은 상처가 치유되고, 주님의 은혜가 그 가정에 머물러, 웃음꽃 피는 가정으로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십시오. 둘이 하나 되어 주님과 하나 되는 이 특별한 코이노니아의 은혜야 말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목적이요, 하나님 나라의 원리요, 마르지 않는 기쁨이 원천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