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섦과 불편의 양가성
김경주 시집 <고래와 수증기> 중심으로
구름은 살냄새를 흘린다
그것도 지나가는 새 떼의 일이라고 믿으니
구름이 내려와 골짜기의 물을 마신다
나는 떨어진 새 떼를 쓸었다
-<새 떼를 쓸다> 부분
환상을 보며 실체를 그려가는 미술적 기법을 무엇으로 말해주면 쉽게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선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읽히지 않는다. 솔직히 김경주 시인의 시 세계에서 상상의 폭과 상징의 의미 사이를 좁혀줄 수 있는 교합점을 심층적으로 인식할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것은 나만의 무지에서 오는 자괴감인지는 모르겠다.
1. 언어 의미와 모호성
하지만, 김경주의 시는 분명한 소비 계층 속에서 부유하고 있고 그런 수요층을 따라 시작詩作이 지속적으로 이뤄질 것을 굳이 가정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그렇기에 평이한 시어로 조어된 낯선 상상력에 당장은 익숙하지 않아 불편해도 감내하여야 하는 까닭이다. 김경주 시인의 시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문장의 나열은 행을 바꿔가며 모호한 경계와 상상력을 유도하지만, 내부를 탐색해야만 하는 부담은 낯설게 다가온다. 그래도 시의 발화 그 자체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근경近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마저도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어서 외면해버릴 수는 없다. 시집 맨 첫 장을 여는 <새 떼를 쓸다>에서 새鳥는 사물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한정한 것이 아니어서 단순하게 지나칠 수 없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사람도 지상에서 순간순간의 시간을 경과한다. 사람들은 냉엄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새처럼 비상을 꿈꾼다. 그렇다고 비상할 때마다 성공적일 수는 없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새 떼’들도 비상의 날개를 접어야 하는 위기를 맞는 것은 당연하다. 새가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은 날개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마저 외부 환경에 따라 의지를 접어야 할 때 “나는 떨어진 새 떼를 쓸었다”며 무용해져 버린 날개를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대체 의지였을 “새 떼”를 쓸어내는 행위를 통해 과거와 단절해야만 하는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다. 위로의 모습들은 다양하게 내면화를 이뤄내고 시로 발화된다. 그 중 새鳥라는 시어는 수 회를 거듭하며 시편의 행간에서 주요한 언표로 인용된다. <네 살을 만지러 갈 때>에서는 시인의 의지를 실현하는 대상으로 동일시되고 있다. 무력해진 시인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어서 “시인은 그 새 떼에 살을 섞는다”지만, 영혼과 육체는 별개임을 깨닫는다. “이 문장에 오른 새는/사건이 될 수 있을까/되지 않을 것”까지 이미 자문자답으로 결론짓고 있다. 그 모든 것은 시인의 몫으로 “새가 떠나버린 문장처럼” 허망하지만, 끌어안아야 할 것들이다. 쉽지 않지만, 그럴 때 가슴으로 파고드는 새를 닮은 사람을 만난다면 행운이겠지만, 그마저 쉽지 않다.
신문이 끊기자
나는 새들에게 싸였다
수도가 끊기자
나는 계곡을 내려오는
물이 되었다
사람이 끊기자
나는 해바라기에 내려앉는
비둘기가 되었다
이해가 끊기자
나는 대기권이 되었다
-<설맹雪盲> 부분
을 보면 “신문이 끊기자/나는 새들에게 싸였다”고 술회한다. ‘새들’에게서처럼 다수와의 관계에서 오는 불화나 불편을 감수하게 된다. 결국은 자신이 다수 속에서 고립되어 있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연약한 자신 즉 홀로 이룰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의지를 약화시켜주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 김경주 시에서 나타나는 불편은 “바람이 끊기자/하늘이 산을 오른다”며 행을 바꿔가며 낯선 얼굴로 돌출하여 당황함을 유발토록 한다. 그 불편을 시의 구조 속에 장치하여 절실함을 인식토록 하는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2. 부정형체로 다가오는 언어들
그것은 끊임없는 표면적 자아와 내면 의식의 부침으로 유동한다. 그러면서 외부와의 단절로 초래된 결과를 절망이 아닌 또 다른 사물로의 전화轉化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오래지 않아 시적 사유는 그러하여 낯섦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시 <설맹雪盲>에서 ‘신문’, ‘수도’, ‘사람’, ‘이해’가 독자적 알레고리로 존재하면서 단절을 유발하는 시어는 예상치 못한 컴플레이션으로 또 다른 상상력을 도발한다. 특히 행과 연을 뛰어넘는 시차와 공간의 간극은 상상하기 어려운 지경까지의 접점과 확장으로 고독을 강요한다. 사람은 고독해지려는 본성을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아 어떠한 환경에서도 금방 익숙해진다. <설맹雪盲>에서 사람들은 많은 노력을 통해서도 원만하게 타자와 동일해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가는 과정으로 인식한다. 고독은 타자로부터 비롯되지만, 어쩔 수 없이 단독자의 자아는 내부로 강화될 것이고 더 큰 편집력으로 환원될 것이다. 고독은 궁극적으로 희망이란 명제로 치환될 수 없고 절대 생존권인 지구에서조차 밀려나게 된다. 생존의 위협이 될 수밖에 없는 ‘대기권’이라면 더는 존재감 없는 의식체로 살아가야 한다. 그런 자화상은 곧 현대인의 모습이다. 어쩔 수 없이 다수에 편입되지 못한 소수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은 시적 감수성으로 익숙해진 자극과 감각에 민감하지 못한 의식의 결여체로 소수자임이 분명하다. 문단에서도 소수인 미래파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 기성 시인들에게 마저 소외된 시인이 어쩌면 김경주 시인이다. 미래파의 주체는 난해한 문장으로 해체의 지면을 거침없이 채워가는 파편적 시 쓰기라고 볼 때 그 거리와는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기성과 미래파에 편입되지 않고 자신의 문학적 경계를 수시로 허물어가는 행위는 전위에 가깝다. 그런 유형은 인디 문화의 한 전형일 수 있겠다는 확신은 늦은 감이 있다. 김경주 시인의 시는 매번 정체되지 않고 변위의 증폭마저 과감하여 뫼비우스의 띠이거나 부정형체로 문학적 공간에서 엄연히 실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당연히 퍼즐처럼 구조되지 않으면서 일정한 모양으로 존재하는 아이러니까지 포함해야 한다. <햇볕에 살이 지나가네>에서는 “느리게 흘러가다/나는 새 떼에 번졌다/너를 기다리며/작은 빙산에 올라/날아온 갈매기를/입속에 넣어 재울 것이다/햇볕에 살이/지나갈 때까지”라며 시간의 경과를 허무는 노력을 통해 몸의 부분으로 존재하는 ‘살’을 떠올린다. 또 다른 사물로 다가온 바다표범의 가죽을 ‘살’로 연상하고, 고픈 배를 채워야 하는 사람처럼 빙산에 올라 심해어를 떠올리는 고단한 노동의 대가는 바다표범에게 태곳적 배고픔으로 유예된다. 캔버스에다 그림을 그리는 통념을 따르지 않고 의식체계라는 상상력으로 스케치를 하여 붓을 쓰지 않고도 자유롭게 색감을 입히듯 한 낯선 불편은 여지없이 고개를 쳐든다. 시인의 의식체계임을 긍정하도록 강요하는 시를 이해해야만 하는 불편을 묵묵히 감수해야만 한다.
새 떼에 걸려,
문장은 기척을 내기도 한다
내 얼굴에서 내려야 하는데
얼굴을 놓쳐버린 뺨처럼
문장은 행진곡을 못 듣고
햇불로 들어가
날을 지새운다
기척도 없이
아무도 모르는 내 난동과
잘 지내야 하는데
꿈속의 새가
내 베개 위에 침을 흘린다
침으로 기울고 있는
내 얼굴처럼
문장은 나의 타향살이다
기척도 없이
나를 떠난다
-<기척도 없이> 전문
그림을 그려 넣지 않아도 시인은 새 떼를 통해 시를 그림처럼 잘 감각하여 표현하고 있다. 날아다니는 새 떼가 이미 마음까지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새 떼는 다름 아닌 주위에 존재하는 사물이어서 하나하나가 고유한 물성을 지녔다. 그런 물성에서 건너온 의미를 인식하여 조어된 문장은 유별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고 민낯 같은 시적 언어로 발화된 언표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새 떼의 일부인 새鳥로 인해 발화된 문장이 “얼굴을 놓쳐버린 뺨처럼” 진면을 보여줄 수 없는 실체라면 시의 세계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세상과 소통되지 않고 겉도는 문장이라면 무용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마찬가지로 시인에게 다가오는 외부의 미동이 죄다 문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일부만이 살아남은 타향살이처럼 억척스럽게 붙박이처럼 살아내야 가능한 것이다. 시적 완성에서 벗어나 살아남지 못한 문장은 찰나의 인연이어서 어디에서도 규정짓지 못한 채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은 문장뿐이 아니고 최소의 의미를 담보할 수 있는 음소音素마저 획득할 기회를 상실한다. 그럴 때 시인에게 “기척도 없이/나를 떠난다”는 것은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비감한 숙명을 떠올려야 한다. 몸을 관통해온 좌절에 맞서 정돈된 시인의 의지만큼 또다시 시 속에서 낯섦으로 다가오는 문장은 오히려 친숙하다. 어차피 김경주 시의 독특한 상상력은 지금의 이해를 뛰어넘어 무한 진폭과 건너 뜀을 유도한다. 그것마저 시인만의 개성이라고 본다면, 무방한 것이지만, 문학의 범주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한 시가 <시인의 피>다.
입김은 수없이 태어나지만
무대에 한번도 나타나서는 안 된다
매일 그는 자신이 지은 입김 속에서 증발한다
종일 그는 자신의 입김을 가지고
놀이터를 짓는 사람이다
입김만으로 행렬을 만들고자
그는 일생을 다 낭비한다
한 발을 숨기고 웃는 고양이처럼
남몰래 출생해버릴래
입김을 찾기 위해
가끔 사이렌이 곳곳에 울린다
입김은 자신이
그리 오래 살지는 않을 것이라며
무리 속에서 헤매다가
아무도 모르게 실종되곤 했다
사람들은 생몰을 지우면
쉽게 평등해진다고 믿는다
입김은 문장을 짓고
그곳을 조용히 흘러나왔다
-<시인의 피> 부분
에서의 입김은 따뜻해야 하고 온정적이어야 한다는 기존의 개념은 일찍이 벗어버렸다. 그 어디에서도 온정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입김이다. 그렇다면 뜨거운 피를 가진 가슴에서는 오히려 불편하여 빨리 버려지거나 사라져야 한다. 그런 ‘생몰’의 흔적은 순간을 넘지 못하고 사라지면서 곧바로 또 다른 입김으로 대체된다. 그렇지만, 쉽게 사라지는 입김도 때로는 불구적 사고에서 생산됨을 알 수 있다. “한 발이 없는 고양이의 비밀처럼” 시詩 속에서도 불구적인 신체의 고통을 상상해야 하고 감내해야 한다. 그만큼 시인으로 살아가는 고뇌가 크다는 방증이다. 시가 되기 전 문장들이 <기척도 없이> 시인의 곁에서 멀어지다가 아예 “나를 떠난다”라고 했을 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마저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시인의 피>에서 “입김은 문장을 짓고/그곳을 조용히 흘러나”오는 침전물로써 내면의 의식을 거쳐 문장으로 인식되어서야 시의 존재가 될 수 있었었다고 술회한다. 긴장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한 발을 숨기고 웃는 고양이처럼” 웃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는다. 시인의 피는 끝없는 초지를 찾아 유목하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유목민 적 습성은 생존의 지독한 방식이어서 불편을 외면할 수 없다. 유목적 삶에서 끝끝내 살아 존재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이 아니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남긴 유흔遺痕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낯섦을 마다하지 않았던 흔적은 시인의 피로 데워진 입김으로 지속되고 실재하여 그 고통을 증거한다. 익숙한 것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유목적인 정신이 곧 시인의 건강한 얼개임을 언증한다. 첫 번째 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서 <시인의 말>은 더 구체적이다. “여기는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밤이라고 쓰고 거기는 지도를 만드는 사람들의 어두운 골방이라고 믿는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비정하고도 성스러운 이 세계 앞에서 경악했고 그 야설夜雪을 받아내느라 몸은 다 추웠다. 어두운 화장실에 앉아 항문으로 흘러나온 피를 닦으며 나는 자주 울었다. 나는 그것을 간직했다”고 고백한다. 긴 고통의 시간 속에서 시인으로서 생몰의 부침이 거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밤은 두렵기 그지없다. 그럴 때마다 시詩의 나침반을 꺼내 들어야 했다. 나침반의 지시어는 북쪽으로 항상 일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김경주 시인의 시는 나침반의 방위 표시처럼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그런 언어의 방향을 따라가면서 또 다른 언어가 수없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침반이 땅속의 기운을 알려줄 수 없듯 언어의 행간에서조차 쉽게 마음속으로 수수되지 못한 시어와 맞닥뜨린다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손등에 데려와
놀다가
놓아준
마른 개미의 숨소리
그건
저녁의 다른 이름
새들이
공책에 집을 짓기 시작한다
그건 내 살을 가진
어느 이슬들의 이름
양말을
두 손에 끼고 잠들면
더 이상 방문으로
찾아오지 않는 울음
그건 내가 만든
고아의 이름들
이를 갈며 자다가
깨어나 보니
혀에 하얀 새 떼가
돋아 나는 일처럼
-<詩作_干涉> 전문
에서 우리는 시인으로서 긴장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익숙함에서 벗어나려는 불편을 초래한다. “아이들이/손등에 데려와/놀다가/놓아준/마른 개미의 숨소리/그건 저녁의 다른 이름”까지는 흔히 볼 수 있는 서정의 전형을 보여준다. 행에 나열된 시적 상상력에 안도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건 내 살을 가진/어느 이슬들의 이름”으로 빠르게 대체되기 때문이다. 시의 행과 연의 구성에 있어 과도한 생략은 전 연과 결속된 의미망을 크게 이탈하는 결과로 보답한다. 대다수 시詩 체계는 행과 연, 연과 연에 시의 징후나 기미가 될 수 있는 언표를 배치하는 최소한의 배려가 있었다. 이와는 다르게 김경주 시는 과감한 생략을 통해 낯선 언어로 상상력의 한계 의지 이상까지를 요구한다. 그럴 때 더 이상 시인도 “이 날숨으론/말(語)에게 돌아갈 수 없다”며 고통을 하소연한다. 그러면서도 “말(語)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항변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김경주 시인의 시는 익숙한 텍스트와 지속적 불일치를 통해 상상력을 확장해가려는 의도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말(語)’에 대한 기존의 테제에서 안티테제로서의 기능을 효과적으로 유인하기 위해서다. 그런 후유증으로 시인이나 독자가 감내해야 하는 불편은 대단한 것이다. 특히 기존 문학 체계 구성을 끊임없이 해체하려는 시도는 문학계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는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에서의 오브제의 예를 통해 그 범주 속 해명은 가능하다고 본다. 현대 미학의 문제가 더 이상 미美가 아니라는 레디메이드를 통해 보여준 마르셀 뒤 쌍의 ‘변기’를 ‘샘’으로 대체하는 파격이 있었다. 그로 인한 텍스트의 불일치로 시대적 다수에 대한 인식에 경악을 초래한 것처럼, 김경주의 시도 새로운 문학적 시도나 형식으로 대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시 미학의 범주를 벗어나 어차피 시도 개인적 표현 추구로 인해 자유롭게 발현하고 다양하게 발화되어야 한다는 의지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김경주 시의 궁극도 시인의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내면화된 시 세계를 구체화하려는 것이어서 그 또한 존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학은 수요층의 시적 감각을 자극하는 은유와 상징으로 상상력이 가능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났을 때 뒤따르는 영향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우려 같지만, 초超 실험적 의식으로 시도된 과도한 문학이나 예술이 외면되는 사례는 동서고금에서 충분하다. 시나 예술의 궁극은 많은 사람의 삶을 통해 향유로 공유되는데 긍정적인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는 이르다는 것을 방증하려면 예시를 통해 살펴 볼 수밖에 없다.
서러운 혼례처럼
흰 이를 반짝이지
겨울에 내 치아는
밤을 세운 뱀처럼 하얗고
여름에 나의 입속엔
파란 눈이 내려
내 눈송이들은
깊은 바닷속까지
내려가
숨을 참는다
-<물속에 내리는 눈_시인의 피2> 전문
그러나 나는 몸이 가려운 오디 빛 시를 앓을 뿐
이불속에서 내 발이 당신의 발에
닿을 때마다 서럽다
이승에 노래로는 실패한 쑥국새처럼
그래도 무덤과 봄비만은 쉬이 떠나지 못하겠다
-<파란 피_ 아내에게> 부분
시의 전개에서 오는 긴장감과 탄력은 언어의 절제다. 그러나 시 행간이나 연으로 전개될 때 과감한 생략은 최소한의 시적 발화나 징후를 포착할 수 있는 기미를 전제한다. <물속에 내리는 눈_시인의 피2>는 시 전반에 매복한 은유가 너무 비약적이어서 시제를 우선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다. 초입부터 “서러운 혼례처럼/흰 이를 반짝이지”에서는 ‘서러운’ 것과 ‘흰 이’는 순수했던 과거의 서정과 아프겠지만, 결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우리가 상상하는 눈雪은 친숙한 이미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형도의 눈은 죽음과 동일시 된 예도 있지만, 차가운 눈이 몸 안의 피로 치환되어 상징하는 시적 이미지로 다가올 때는 냉혹한 고통을 요구하는 수단임을 암시하고 있다. 시인의 피가 서럽고 “겨울에 내 치아는/밤을 세운 뱀처럼 하얗게”처럼 두렵지만, 그것과 친숙해질 때까지 참아야만 한다. 입속에서 한 여름 파란 눈발까지 감내해야 하는 극한 상상의 한계를 요구할 즈음에서는 고통마저도 익숙해진다. 스스로 일반적 관념을 일탈해야만 시인으로 존재할 수 있고 그 긴장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인이기에 그렇다. 그런 노력으로 발화된 시를 통해 누군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파란 피_ 아내에게>처럼 시인의 피가 파랗다면 그 또한 대단한 상상력이다. 그렇다면 일반인과 다른 상징적 의미로써 순교자라고 의미를 확대해도 억지는 아니다. 보통 사람의 피로는 순교자가 될 수 없다는 것까지 독자의 상상이고 몫으로 돌려주자. 시인은 스스로 몸을 상해가며 노을빛에 파란 피를 토해내는 고역을 감내해야 하는 순교자다. 죽어서야 아내에게 진심으로 인식될지 모를 순정 같은 고백은 항상 파랗게 시작해서 붉어지다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내 손이 네 가슴으로 처음 들어갈 때”가 그랬고, “너는 기러기처럼 내 허리를 안"을 때도 그랬다. 함께 ”날아오르려 했다"는 꿈은 현실에서는 그저 꿈일 뿐이다. 시나 사람이나 세상살이가 만만찮아 걸림돌이 된다. 사람답게 사는 것도 개인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민란(民亂) 중엔 삶은 갓난아기 다리도 먹”어야 한다는 지독한 상상까지 해야 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시인이다. 그런 세상에서도 시인은 시를 써야 하는 강박은 지속된다. 그러다 보니 집으로 돌아가는 이정표마저 잊게 된다. 난감해도 감각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 아내라는 나침반은 유일하게 진실하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찾아간다는 무덤으로 가는 길을 아내는 알고 있다. 어차피 사는 것이 서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시인으로 살아가는 고통을 남에게 전가할 수도 없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돌가루를 뱉어가며 멈춰서는 안 될 고역이지만, 시 쓰기를 마다할 수 없다. 시는 이승의 노래여서 무덤 앞에 이르러서는 아내라는 나침반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토록 갈망하던 노래는 더 이상 부를 수 없다. 죽어서야 무덤의 귀를 빌려 온전히 들을 수 있다는 쑥국새의 울음소리만이 실패하지 않는 이승의 노래였음을 깨닫게 된다. 시는 완벽한 노래여야 하듯 완벽한 노래를 꿈꾸는 시인은 항상 안타깝다. 허나 어찌하겠는가. <본적本籍>에서 조차 소원하던 문장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다. 본적本籍을 통해 소환되는 기억들이 못내 불편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무도 몰래/자신의 본적을 다녀온 사람은/그 문장을 다시는 찾아가지 않는다/내가 지금 느끼는 이 본적이/곧 지나가도록/필흔(筆痕)은/이름 없는 백조들의 묘지로 데려갈 것”을 알았다. 물론 그곳에서도 시인의 문장은 부재 상태다. 미완으로 남겨져야 하는 시적 의미는 미의식과는 거리가 멀어 불편하고 아직 우리에게 낯설다.
그래도 아이가 태어났으니
체류 신고는 해야 한다
아직 그 아이를
본 적이 없으나
-<본적本籍> 부분
시를 쪼아 먹는
어린 공룡들이
문건보다 사건 속에
가득하다
새가 떠나버린 문장처럼
-<네 살을 만지러 갈 때> 부분
이 해를
손을 들어 가린다 해도
피하지 못한다
내가 한없이 밝게 그린
그림 속의 너는
-<軸> 부분
너는 오늘 귀국한다
내 出國을 지운다
곰의 키스를
-<이토록 사소한 글썽거림> 부분
저녁은
물방울이 지상의
가장 쓸쓸한
부력이 되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슬픔도
이동시키는 구름
물방울이 밀려와
-<고적운高積雲> 부분
보여주는 몇 편의 시에서처럼 김경주 시는 종결을 유보한 채 시의 완성을 선언한 유형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종결된 시는 또 다른 상상력의 여백으로 의혹한다. <본적本籍>에서는 “아직 그 아이를/본 적이 없으나”로 미련을 유보한 채 종결을 서두른다. 그런 유형은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네 살을 만지러 갈 때>의 “새가 떠나버린 문장처럼”과 <軸>에서의 “그림 속의 너는”, <이토록 사소한 글썽거림>의 “곰의 키스를”를 통해 유보적인 미완의 문장을 지체 없이 드러낸다.
3. 반복해서 읽히는 시
비록 시 문장에서 종결을 의도한 이유가 있다 해도 빈번하게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낯설고 이유 있는 시적 공간을 임의 배치하는 의도가 김경주 시인의 독특한 시의 구조로서 의지일 수 있다. 그것은 고스란히 시인의 개성에서 발화된 문장이지만, 완성되기까지는 독자의 몫이 일정 부분 필요하게 된다. 그렇게 떠넘겨진 몫을 독자가 만약에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시인 자신도 그 문장에 대하여 불편해할지 궁금하다. 그마저도 익숙해질 수 없다면 난감하더라도 김경주의 시에서 멀어질 수 없다.
엄마가 눈 위에 오줌을 눈다
얘야 날 왜 지붕 위로 데려왔니?
여긴 엄마의 흰 머리칼이
하늘로 다 날아갈 때까지 바람이 부니까요
눈이 내리면 나는 노트 위에 물을 그려요
누구의 일부라도 될 수 있는 물을
그런 말 마라 네 몸엔 분명
내 몸의 일부만 흐르고 있다
오랜만에 한 베개에 나란히 누우니 좋다
그런데 얘야 네 흰 머리칼 냄새 때문에
도무지 잠을 못 자겠구나
슬픔이 조금 모자라도 나는 길게 이어진다
당신의 치마 속으로 들어간
수십만 그루의 촛불들이 술렁인다
흰 구름의 일부처럼 당신은 인파 속에 잠들어 있다
대문을 열어두고
나는 당신을 찾으러 간다
당신이 더 이상 나를 못 알아보는 날부터
아무도 모른다
당신이 알아보는 나는
-<아무도 모른다> 부분
사변적으로 시를 읽어가면서 불편해진 눈을 참을 수가 없다. 시의 형식이나 시작법을 들먹일 필요는 없다. 시속에 등장하는 엄마는 우리의 주변에 실재하는 엄마일 수 있다. 그런 모습으로 찾아올 엄마이거나 벌써 “흰 머리칼이/하늘로 다 날아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따라가 버린 엄마일 수도 있다. 그런 엄마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엄폐된 내면 의식은 어디까지일까. 그것마저도 구체적인 상상력을 동원해야 근접해갈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다. “오랜만에 한 베개에 나란히 누우니 좋다”는 엄마를 상상해보다 “당신이 더 이상 나를 못 알아보는 날부터/아무도 모른다/당신이 알아보는 나는” 시 속에 숨겨진 언표를 찾아내려는 상상력을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고 평이한 언어 속에 고도로 은유된 시 세계를 구축해 놓은 김경주 시인의 시를 아예 모르겠다고 외면해버릴 수는 없다. 어차피 당장은 불편해도 익숙해져야만 하는 이유가 타당하고 문학의 범주에서 실재하는 김경주의 시를 긍정해야한다. 그래서 또 시집을 찾아 읽게 되는 중독성이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