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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들놈이 퀸즈랜드 대학 경영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하였다.
대학때 여기와서 노력한 작은 결실을 맺은것에 대해 온 가족이 기쁘게 생각힌다.
아들놈은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모두를 자기 엄마 모유로 키웠는데,
아이 터울이 자기 엄마 젖을 먹은 기간과 같다.
첫째애가 2년간 젖을 먹었고
둘째애는 터울이 길어 5년을,
세째애는 2년을 젖을 먹은데 비해서
아들놈은 막내라서 무려 7년간 자기 엄마젖을 먹었다.
그러니까 학교 가기전까지 먹었다는 이야기인데 물론 젖이 나온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엄마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애들은 잘 자라 주었다.
그 아이는 유치원대신 체육센터를 보냈다.
어릴때 선행학습보다는 몸이 튼튼하고 좋은 친구관계가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8달반만에 태어난 신체적 약점을 보완하고자하는 뜻도 있었다.
버스를 타니 운전기사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우리가 한국사람이란것을 알아차리고 미리 인사를 건넨것이다.
국제화이고 세계화이긴 한 모양이다.
물론 세명 누나의 동생으로 컸으니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누나들로부터 몰래 몰래 시기어린 구박도
받았을것으로 생각된다.
하여튼 개구쟁이로 잘 자랐다.
장난도 심해서 중학교때는 자기 엄마가 담임 선생님한테 자주 호출당해 가기도 했다.
Asian restaurant.
담임 선생님이 학교에서 장난이 심하다고
나한테도 전화를 했다.
내가 말씀드렸다.
"선생님,
그 아이의 행동에 대해서는학교의 방침대로 처리를 해주시고,
선생님의 의지대로 해주세요.
저는 학교측의 결정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브리즈번강에서 아침 생방송을 하고 있었다.
남의 물건을 훔친것도 아니고,
남을 습관적으로 괴롭히는것도 아닌데
단지 개구장이라는 이유때문에 내가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놈 졸업식때 담임 선생님을 찾아뵙고 그동안 제 자식놈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것에 대해서 사죄를 드렸다.
그 놈이 고등학교 졸업 즈음,
나는 그 놈을 외국에서 공부시킬것을 생각하고 준비를 하였다.
어차피 그 놈이 활동할 시기는 세계화이고 국제화시대일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주로 정했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그래도 아시아권에 가깝고 학비도 그리 높은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비는 국내사립대학 등록금 세배정도의 수준이었다.
브리즈번의 QUT대학을 다녔다.
다행히 호주는
인문사회계열은 3년이고
공과대학은 4년,
건축학과는 5년이고 의과대학은 재학년한이 6년이라 경영학과에 다닌 아들은 3년만에 학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처음 1년은 하숙을 하였다.
엄마가 해준밥만 먹고 자란 막내놈이 할줄아는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숙집은 학교에서 멀었지만 상담을 전공했던 집주인인 앤 아줌마는 엄마를 대신하여 아들놈을 잘 보살펴 주었다.
식사니 빨래부터 아침잠많은 아들을 깨워 학교에 보냈으며 저녁시간에는
호주습성대로 1시간 정도의 고문에 가까운 식사시간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며 호주식 생활에 적응해가는 동시에
현지 영어를 배우고 고쳐나갔다.
그리고 대학때 외국 유학생을 담당하는
교직원의 많은 도움도 받았다.
자기 집이 어부집안이라 이름이 fishman라는 분이었는데 식사도 같이하고 낚시도 따라 다니며 유학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작년 우리가 호주를 갔을때는 별도로 식사자리에 초대해주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왔다 갔다고 했다.
군대갈 나이가 되었다.
대한민국 남자면 당연히 가야했다.
난 자주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너를 군대를 빼줄 힘은 없지만
보낼 힘은 있다."
젊었을때 2년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인생 80년을 살면서 그 경험은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교를 휴학하고 군입대를 위해 잠시 귀국을 하였다.
입대하는 날.
아들놈을 태우고 춘천에 가서 보충대에 내려주고 오는길은
그렇게 심란할 수가 없었다.
제발 아무 일없이 건강하게 제대하기만
빌었다.
양구로 배속을 받았다.
난 양구를 가본적도 들은적도 없었다.
휴전선과 맞닿은 접정지역이었다.
아들놈 이야기로는 하늘과 산만 보인다고 했다.
훈련이 끝나고 사단 사령부 회계병으로 보직을 받아 행정업무를 하였다.
사단에 단 하나뿐인 보직이었는데 마침
인연이 되었다.
아들놈을 뽑은 사수도 서울의 모 대학 교수 아들이었다.
그 아이가 군생활을 하는동안 우리 부부는 세달마다 한번씩 면회를 가서 부대에서 아들을 불러내 먹이고 재웠다.
전방에서는 가족이 오는 경우에 한해서 분기마다 한번씩 외박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고프지 말라고 매달 용돈을 정기적으로 보내 주었다.
군대가는 입대일을 결정할때 2,3월은 이미 마감되었고 1,4월만 남았을때
1월 입대를 선택했다.
훈련은 더울때보다 추울때가 좋고 제대도 10월달에 하게되어 정신도 좀 차리고 복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아 다행이었다.
21개월의 군복무후10월달에 제대를 하고 유럽을 보냈다.
좀더 넓은 세상을 보고 오라고 했다.
처음 보름동안은 자기 엄마와 같이 다녔고, 나머지 한달은 자기 혼자 다녔다.
총 45일간의 여행이었다.
한달반이 지나니 슬슬 집 생각도 나고
지겹기도 해서 마지막 영국은 빼고 귀국하였다.
나의 오랜 여행경력을 바탕으로 한 정보력이 아들놈의 여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호주에 하숙하는 동안 같이 지냈던 홍콩친구를 찾아 자기 누나와 같이 홍콩을 다녀 오기도 했다.
아버지가 홍콩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그 아이도 우리집에 와서 보름 정도 머물다가 갔다.
그리고 다시 공부를 위해 호주로 돌아갔다.
그렇게 일년을 더 다니고 대학을 졸업하였다.
선택을 해야했다.
취업이냐?
진학이냐?
내가 권유하였다.
공부를 좀 더해라.
돈은 좀 있다가 벌어도 되지만 공부는
할 때가 있다.
물론 나이들어서도 공부를
할 수는 있지만 동력이 떨어지고 지금보다 휠씬 힘이 든다.
재수도 안했지,
중간에 어학연수를 위해 하는 휴학도 안했지,
그리고 남보다 1년 일찍 졸업했으니
저축된 시간을 생각해볼 때 공부를 좀 더하는것도 좋을것 같았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이제 24살 되는 아들을 너무 일찍 직업 전선에 내보내기는 싫었다.
그렇게 해서 대학원으로 가는것을 결정하였다.
한국에 있는 대학의 대학원으로 가는것도 좋았으나 여의치 않아 그 쪽의 대학원을 알아 보았는데
브리즈번에는 퀸즈랜드대학이 있었다.
퀸즈랜드주의 주립대학이었는데 세계대학순위에 작년에는 47위,
그리고 올해에는 48위에 랭크되어있는 명문대학이었다.
여기에 응시해서 다행히 통과를 해서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1년 반만에 학위를 끝내는 코스를 선택하였다.
대학원 코스를 하면서 간간히 아르바이트도 했고, 한인 유학생회일도 했으며 재학중 인턴도 두개를 하는등 바쁜 학교생활을 했던것 같다.
그동안 충분치는 않지만 학비와 생활비, 용돈은 매달 보내 주었다.
경험삼아 아르바이트를 하는것은 좋지만 금전만을 목적으로 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했다.
옛날에는 죽을 고생하면서 외국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전설같은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그런 극한적인 방법으로 공부하는것은 내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먹을 끼니가 걱정되고 생활이 어려운 판에 글이 눈에 들어올리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 일부가 도움이 되어 그의 유학비용 상당부분이 해결되었고, 그 나머지는
내 수입으로 충당하여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궁한 유학생활을 하지는 않았던거 같다.
옛날 시골에서 땅가진 부자가 자기 아들에게 땅을 물려주는것은 자식들이 계속 농사를 지으라는 것이지만,
땅을 팔아 자식을 공부를 시키면 몇백배
남는 투자를 하는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조상님들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것도 자기가 타고난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졸업식은 강당에서 이루어졌다.
13억 인구의 위력이다.
자국어인 영어와 중국어로 안내문이 붙여져 있다.
수출을 안하고 내수만해도 걱정이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졸업식은 간소하면서도 엄중하게 진행되었다.
한시간전부터 가족을 비롯한 축하객이 입장을 해서 착석을 했다.
졸업생 한명당 세 장의 방청권이 배부되었다.
우리 손주는 덤으로 들어갔다.
15분 전에 졸업생의 입장이 있었다.
가운 색깔이 하얀색은 학사학위
청색은 석사, 빨간색은 박사학위 수여자였다.
박사 학위자부터 입장을 하였다.
교수들이 입장할때에는 모든 축하객들이 기립하여 존경을 표하였다.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총장의 격려사가 있었다.
중간에 졸업생들을 기립시켜 부모님들에게 인사시키는 순서도 있었다.
교육은 호주의 3대 수출산업중 하나라고 한다.
아시아권에서는 중국인이 압도적으로 많고 한국인은 오로지 아들놈 혼자 입학해서 졸업하였다.
학점은 4.5만점에 3.3.
과목당 낙제율은 1/4 정도라고 한다.
즉 F학점을 맞은 경우이다.
한사람씩 호명하면 나가서 총장과 악수하고 졸업장을 받았다.
객석에서 환호성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 졸업을 하고 무엇을 할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해야했다.
나는 이왕하는 김에 공부를 좀 더하는게 어떠냐고 넌저시 이야기해보지만 그렇게 썩 마음이 내키지는 않은 모양이다.
일자리를 알아 보는데
호주는 여기서 공부를 한 사람에 한해 2년 동안 취업비자를 내주고 있다.
즉 2년을 일할 수 있다는것이다.
그래서 호주에서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는데
먼저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자기가 일 하고 싶어하는 컨설팅 업체였다.
스타팅 업체라 위험부담도 있지만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도 동시에 있는 회사였다.
40분 동안 영어로 진행된 인터뷰끝에 같이 일하자는 통보를 받았다.
해외 프로젝트 매너저.
손주놈은 식장에서 1시간 정도는 겨우 참았는데 이후 지겹다고 통곡을 해서 자기 존재감을 확실히 증명했다.
자기 엄마가 얼른 데리고 나갔는데 나가면서도 계속 울어댔다.
24개월된 손주의 인내심 한계는 한시간이었다.
중앙 광장에서는 간단한 음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토스트, 빵, 김밥, 커피등
점심대용으로는 적격이었다.
이제 이놈 공부도 일단 끝난것 같으니
장가만 보내면 된다.
일찍 장가를 가고 싶다고 하니 다행이다.
자기가 원하는 좋은 배필을 만났으면 좋겠다.
우리 마누라를 빈손으로 만나
4남매 낳아 키워서 세 명을 시집보내고 귀여운 손주 세 명을 봤다.
지금 12명의 식구가 되었는데 완편되면 18명이 되니 어디라도 갈려면 봉고로는 안되고 중형버스를 세내야 된다.
아들놈은 8월 1일부터 출근을 하게되고
나는 8월 31일부로 퇴직을 하게된다.
글쎄
남들이 어떻게 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남에게 크게 해끼치며 살아 오지는 않았던것 같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비굴하지도 않았고,
앞뒤좌우 한군데에만 편들지 않고 살아온 나의 아름다운 은퇴를
그 놈이 이어받은것 같다.
모든것이 고맙고 감사할뿐이다.
이제 시작점에 서있는
우리 아들을 응원한다.
첫댓글 교수님~~ 너무 다복허게 사십니다~~ 정말 조상님들을 잘 모셔서 그러신가요? 막내 아드님 취업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취업이 어려운 상황인데요~~
그동안 일지로 재미있게 구경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교수님 가정에 행복을 기원하며 막내아드님의 성공과 함께 큰 박수 보냅니다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