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에게 말을 걸다 외 1편
김경수
산 너머로 지는 노을에게 말을 걸어본다.
삶은 왜 이리 고단한 것인가?
믿음은 왜 이리 하찮은 것인가?
믿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믿음이 있다고 믿는 것이 성공한 것인지?
마음이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사랑은 없다고 믿는다.
산 너머로 사라지기 전에 산꼭대기에 붉은 물감을 쏟아붓는
노을아, 인생은 왜 기쁨은 짧고 슬픔은 긴가?
삶은 왜 이리 고단한가라는 문장이
일과를 마치면 매일 벤치에 앉아
서산으로 지는 해의 노을을 보고 있는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건다.
인생을 이해하려면 서산을 향해 손을 흔드는 나무들을 보라.
나무들은 단지 소리치고
나무들은 오직 분노하고
나무들은 울부짖기만 하고
강풍이 불어도
나무들은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벤치에 앉아 노을에게 말을 건다.
벤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벤치는 언젠가 영혼을 울리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벤치 위에 앉아 노을을 보내며 문장이 시를 쓴다.
역경이 사람을 울게 하지만
역경으로 인해 사람은 바로 설 수 있다.
문장이 새로운 슬픔 하나를 안고
낙엽처럼 시간의 바다 위에 떠있다.
시간은 흘러가도 벤치는 남아있고
산 너머로 새로운 노을이 지고
인생은 또다시 새로운 슬픔 하나를 맞이하고
벤치는 사람들이 없는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를 낸다.
어떤 문장은 일기를 쓰고
어떤 문장은 역사를 쓴다.
세월이라는 책 속에 적혀있던 문장에서
글자들이 차례로 일어나 노을의 뒤를 따라간다.
키 큰 나무의 녹색 나뭇잎들에서 물고기들이 태어나
투명한 지느러미를 흔든다.
사과에 대한 예우(禮遇)
식탁 위 접시 위에 빨간 사과가 놓여있다.
사과의 속살을 탐하는 과도가 가까이 다가갈 때
아파트 앞 폐선로에서 사라졌던 기차가 덜컹거리며 달려간다.
한때는 냉장고가 사과를 삼켰었지.
나는 침묵을 지키며 침착하게 과도를 기다리는 사과를 사랑한다.
창조와 파괴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이분법만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희망은 어디 있는가?
시내가 소란스러워진다.
도시에서 범죄 용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과가 사라진 시기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한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산책이 필요하다.
선인장이 빨갛다.
빨간 것은 사막이다.
어두워진 사막에 사막여우가 나타나
사막 가까이 내려온 별들을 향해 뛰어오른다.
어릴 때도 그렇고 황혼기의 지금도
추억 때문에 나는 사과를 사랑한다,
어릴 적부터 사랑했던 사과를 위해
과도를 들고 껍질을 깎는다.
사과에 대한 최고 사랑의 표시는
싱싱할 때 사과를 먹고 사과의 관점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이 한 몸인 빨간 사과가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있다.
김경수
1957년 대구 출생. 한양대학교 대학원 의학박사. 199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산 속 찻집 카페에 안개가 산다 편지와 물고기 외.
이론서 알기 쉬운 문예사조와 현대시. 계간 시와 사상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