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교 외 3편
박춘희
주인공의 이야기가 내 경험인 것만 같을 땐
어디론가 발설되었을 이력을 더듬는다
어린 왕자와 함께 소행성에 대해 들려줬다
모든 꽃들이 사람의 얼굴로 다가왔다
지나온 길이 다 없어지고
여백마저 문양이 되면
흘러가고 흘러온 것들이
계절에게 흥미를 갖는다
모든 걱정은 전당포에 맡기고
도드라진 상상으로
촘촘하게 씨를 뿌린다
새살이 돋듯 싹이 올라오고
통증을 골라낸 불모지가 이름을 바꾼다
플롯처럼 줄기가 자라고
에피소드처럼 꽃봉오리가 돋는다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기다린다
한여름에도 말똥말똥 눈이 내리고
한겨울에도 쑥쑥 장미가 피어난다
옹알거리는 무지갯빛 장미
나는 나의 태교를 들키지 않으려고
어쩜! 놀라워, 추임새를 넣는다
처음이지만 오래전에 만난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건
탯줄처럼 다정한 일
묶은 이야기가 목소리를 갖듯
문득 피어난 목소리에서 살내음이 번진다
꽃밭 공장
무공해다
환경호르몬이 나오지 않는다
한 번도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으니
365일 청정이다
다년생이 정규직이라면
1년생은 비정규직일 게다
뿌리가 사무직이라면
꽃은 생산직일 게다
이곳에선 상하가 없고
명령과 복종도 없지만
질서는 있다
가을꽃을 봄에 만나러 서둘러선 안 되고
여름 꽃씨를 겨울에 뿌려선 안 된다
공장장은 어머니다
꽃밭 달력에 꽃을 피우고
잎을 따고 씨를 받는다
봄엔 흰민들레 패랭이 수선화 튤립
여름엔 장미 해바기 봉숭아 채송화 수국
가을엔 국화 맨드라미 금송화
겨울엔 동백과 눈꽃
봄부터 가을까지 가동을 멈추지 않는다
공장은 마을에 명물이라서
사람들이 개나리 울타리 너머를
자꾸 기웃거린다
눈과 코로 소비한다
소문이 흐드러진다
올해엔 공장 문이 닫혔다
어머니의 입원이 길어지고
풀들만 무성해지고
나비와 벌들은 마실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에게
폐업이 아니라
임시 휴업일 뿐이라고 말한다
1층 정원만 살피는 어머니에게 이젠
눈물꽃만 뭉클뭉클 피어나고 있지만
난 꿀과 향기를 찾는 나비처럼 다가가 속삭인다
엄마, 다음 달에 퇴원이래
종자 볍씨
장독대 옆 고깔을 쓰고
짚 옷 차려입은 신줏단지가 근엄하다
이른 봄 뒤란에서 어머니는 쉿!
신줏단지 옆 큰 항아리에 경고문을
입술에 검지를 세워 얹곤 했다
절대 뚜껑을 열면 안 된다며
내 손을 끌고 나왔다
어느 날 나는 혼자 있는 틈을 타
나무토막을 밟고 올라서서
궁금증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수많은 볍 씨앗들이
물속에서 새싹 띄울 준비로 분주했다
부정 타면 싹이 덜 튼다는 말이
왜 그제서야 생각났을까
서둘러 큰 독의 입을 내 입처럼 막았다
몰래 열어보아서 싹이 덜 날까 봐
몇 날을 걱정했고 또 몇 날을 후회했다
그래서였을까
마당 가에는 눈물방울 두 개씩 맺힌
하얀 밥풀 꽃들이 피어났다
볍 씨앗을 밥 한 공기에 담으면 3,880개
그걸 한 마지기에 심으면 3,880포기
이 기하급수적인 공식을 따르기 위해
볍씨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아주 작은 꽃을 피워 수정했던 것이었다
나는 찰진 쌀밥 한 공기를 볼 때마다
종종 묻고 싶어진다
얼마나 조용한 곳에서 몸 풀고 왔니?
아바타
독수리의 먹이는 바람이다
아지랑이 피어오른 긴 이랑에
초릿대에 의지해 바람 부는 대로 윙윙 맴돈다
날개를 활짝 벌린 채 눈동자를 굴린다
참새 때가 몰려오다
독수리 허수아비에 줄행랑친다
단단히 묶어놓은 저 야성
끊임없는 저공비행
허공이라는 새장에 갇힌 독수리가
밭둑에 묶인 채 호위한다
바람의 양에 따라
동그라미가 맴을 돌고
마른 날개 퍼덕이며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가
추락인 듯 비상인 듯
포물선을 그린다
노인은 매잡이처럼 독수리를 부린다
200일 동안의 파수꾼
일손 없는 시골 마을에서
삵도 없이 손을 덜어주는데
추수가 끝나고 나면
아궁이 속에서 죽는다
허수의 생이라
장례 절차 따윈 없지만
노인은 재를 모아 밭에 뿌린다
나도 죽으면 화장해서 여기 묻힐 것인 게…
애도하듯 독백을 한다
노인의 독거가 또다시 분명해진다
박춘희 시인
제72회 열린시학 신인상,
논술 지도사, 시낭송 지도사
현) 아산시 평생학습관 강사. 어울림문화센터 강사
제1회 마사회 재활 수기 수상. 제13회 시 낭송 전국대회 대상
제13회 독도 문예전 수상. 제18회 화성문협 바다시인학교 백일장 대상
시집 『언어의 별들이 쏟아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