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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 삶이 괴롭고 힘들 때 (사55:1-9)
교회를 잘 다니는 어느 부부에게 예쁜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이가 머리가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걸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다 먹이는 것 정도로만 가볍게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병세가 위중해져서야 서둘러 병원엘 갔더니 뇌종양이 진행되어 몇 달 살지 못할 거라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도 아이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고 그런 아이의 고통을 지켜볼 수만은 없던 아빠는 의사를 찾아가 아이가 사는 동안만이라도 고통을 줄여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강한 진통제를 처방하면 통증은 줄어들지 몰라도 생명은 오히려 더 위험해진다며 망설이기만 합니다.
결국 선택은 아버지의 몫이 되었고, 많은 고민 끝에 진통제를 투여하기로 한 날부터 아이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지내게 됩니다. 재롱도 부리고 웃기도 하며 병세가 좋아진 듯이 보였는지라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사정 모르는 아내는 딸이 나은 줄 알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며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딱 일주일을 지내다가 아이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이 아빠와 엄마는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왜 그토록 예쁜 딸아이를 하나님은 데려가셨을까?”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몇 달의 방황 끝에 그나마 남편은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으나 아내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끝내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는 중에 이런 상황이 닥치면 누구라도 이해가 잘되지 않을 겁니다. 세상에선 물론이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딱히 큰 잘못이나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이들 부부에겐 왜 이런 시련이 닥친 걸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을 겪는 게 비단 그들 부부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잖습니까? 살다 보면 힘들고 괴로워질 때가 얼마나 자주 닥치는지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 대해 성경에선 이런 말을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환경의 장벽과 마음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고.
정말로 그럴까요? 솔직히 하나님을 믿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일이 없기를 기대하며 믿음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믿어도 그런 일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를 모르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말은 쉬어도 실제론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그 이유를 찾자면 이는 ‘사람의 기대’와 ‘하나님의 섭리’ 사이에 너무도 큰 간극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성경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본문 8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요? 길이 다르니 고난이 닥치면 그냥 당하라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본문 8절에 이어 성경은 또 다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잠언 16:3절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고난은 있지만 그런 세상이기에 우리에겐 믿음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을 통해 고난이 해결되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은 항상 개인의 선택에 맡겨지는 겁니다. 누구라도 믿을 자격이 있으며, 안 믿을 권리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믿음의 선택이 사람에게 달렸다고 한다면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도대체 뭘 하고 계시는 걸까요?
‘하실 일’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그 하실 일이란 게 뭘까요?
본문 1절을 보세요.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시며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믿음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고난이 있기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도 그러하십니다. 마태복음 11:28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시며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믿음과는 별개로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들은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단지 지금 닥쳤느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이는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누군 감기에 걸리고 누군 안 걸리는 것과도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감기가 없어서 안 걸리는 게 아닙니다. 감기 병균은 항상 있기에 누구라도 언제든 감기에 걸릴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난도 그러합니다. 원래는 없는 것이 내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세상에 있어 왔지만, 다행히 지금 고난이 없기도 하고 불행하게도 지금 고난이 있기도 하는 겁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고난을 당하여 이런 상황에서 내가 ‘굳이 믿음을 가져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세상살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체념하듯 떠넘기는 운이나 재수가 지배하는 곳이 세상이기에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어야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기 때문이고 믿음은 또한 우리에게서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결과가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인생들을 향해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고 하시면서 “너희는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믿음이 있기만 하면 지금 나에게 있는 약점이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장차 나의 강점이 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지금 내게 있는 불행이나 실패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이제 곧 행복과 성공으로 나타나게 만드는 것이 믿음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누구라도 예전의 괴롭고 힘든 시절의 형편이 오히려 지금의 성공한 내가 있게 했다고 고백하는 간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이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는지라 글을 읽고 쓸 줄을 몰랐기에 취직을 위해 은행 경비에 지원했지만 불합격이 됐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평소처럼 잠자기에 들기 전에 기도를 했는데 이번엔 예전 같은 기도가 아니라 원망과 서운함을 토로하며 “하나님! 글을 못 배운 게 제 탓이 아닌데, 어찌하여 저는 은행 경비도 될 수가 없는 건가요?”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후 어떻게든 후손에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정말 열심히 일한 끝에 미국 월가에서 재력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고 나이가 들며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은퇴식 자리에서 누군가가 ‘선생님! 후손들을 위해 자수성가하신 그 과정을 담아 자서전을 하나 쓰시지요.’라고 하자 그는 ‘죄송합니다. 저는 제 이름밖엔 쓸 줄을 모릅니다.’라고 하니까 상대가 ‘아쉽네요. 선생님이 글을 아셨다면 더 위대한 인물이 되셨을 텐데요.’라고 했답니다.
그때 그는 상대방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글을 알았다면 저는 지금까지도 아마 은행 경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어떤가요? 젊은 날, 그분이 은행 경비 시험에서 떨어질 당시만 해도 낙심과 원망이 있었겠지만, 훗날 뒤돌아본 예전의 실패와 절망이 지금의 자리에서 보면 오히려 얼마나 다행이었겠는지요?
이렇듯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누구라도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러십니까?”라고 할 정도로 힘들고 답답한 때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짜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 우린 우리가 약하고, 추하고, 병들고, 힘들어지고, 마음이 상할 때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이미 예비하셨던 하나님의 기회를 제공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린 내가 만약 인생 중에 그런 때를 지나는 중이라고 한다면 낙심하는 대신 하나님을 더 잘 믿으려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믿는다고 하려면 우린 참된 신앙이 무엇일까를 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적이 사라진 곳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는 것.
어려운 환경에서도 다 잘될 거라는 확신을 놓지 않는 것. 등등이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인생은 이 땅에서의 일로만 승부가 결정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중에 힘들고 괴로울 때가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서 하나님의 은혜받을 기회인 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는 ‘고통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믿음 이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물론, 사노라면 믿음이 있을지라도 세상에서 이해 안 되는 상황이나 이해 안 되는 일들을 만나게 되고, 그런 중에 성경이나 설교에서마저 또다시 이해 안 되는 말씀들을 접하게도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것만 믿고 산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결과도 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든 우린 세상 쪽으로가 아니라 믿음 쪽으로 마음을 바꿔 먹어야 합니다.
내가 탓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기에 환경을 탓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탓한다고 변할 것도 아니기에 사람을 탓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든 내가 마음을 조금만 바꾸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찢어진 옷을 입으면 창피해했지만, 요즘은 개성이라며 일부러 옷을 찢어 입습니다.
이처럼 동일한 일을 가지고도 사람들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우리는 울어야 할 때라도 웃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분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고 생각할 때는 낙심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니까 견고한 심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라고.
지금. 혹시라도 울고 싶은 분이 계시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마음을 바꿔 드시고, 이제 곧 웃게 될 날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 그 믿음으로 할 일입니다.
살다 보면 격려가 필요치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주는 격려라는 게 때론 힘이 되기도 하지만 병든 욥을 찾아와 기껏 격려한다는 욥의 친구들이 그랬듯이 때론 슬픔과 화를 더 부추기는 경우도 있곤 합니다.
그렇다면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격려를 우린 어디서,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본문 6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는 언제일까요?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계실 때는 언제인가요? “지금!”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나를 믿음으로 초대하고 계시는 이때. 우린 지금의 내 형편과 사정으로 인해 조바심을 내거나 사람이나 환경을 원망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환경과 운명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이제부터는 내가 어떤 환경에 있느냐를 보지 마시고, 내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를 보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집착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 하시는 지를 경청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짧은 내용이지만 여러 곳에서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지 몰라도 성경 말씀들을 보다 보면 하나님은 축복하실 때마다 “해라. 그러면.”이라든지, “하지 마라. 그리하면.”처럼 우리가 복을 받음에 있어 매번 어떤 조건을 달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상하지요? 사랑 많으신 하나님이 복을 주심에 있어서 만큼은 왜 받을 조건을 달고 복을 주시는 걸까요?
여러분이시라면 하나님이 그리하시는 걸 소위 말하는 ‘조건부’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하시는 것은 조건부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자격’이 있게 하려 하심이란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실제로도 보면 하나님이 내거신 조건이란 것들이 무엇이든 언제나 다 하나로 집약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엔 하나로 귀결되는 그 조건이란 건 뭘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 이거 하나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사람이면 누구나 복 받기를 간절히 소원하지만 단지 빌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복을 받을 자격이 없으면 뭘 하든 울어도 안 되고, 애써도 안되며, 힘써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 받을 자격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할 때라야 그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지만, 들은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어떤가요?
이게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복 받을 자격은 아무리 힘들어도 말씀대로 살려고 해야만 있게 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어떤 분의 연구를 보니 성경에는 32,500가지의 복에 대한 약속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 많은 복을 받은 방법은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오직 이 한 가지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이게 우리가 믿으면서 복 받기 위해 힘써야 할 부분입니다.
산다는 게 때론 어려운 일이 있고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 살면 하나님은 모든 부정적인 삶과 부정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반드시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 사는 게 어렵다고 실망만 하려 하지 말고 정말 어렵기에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보려고 힘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솔직히 말해서 당장엔 순종하는 것 외엔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때라고 한다면 그때가 정말 어려운 때가 아닐는지요?
나무를 보면 자라다가 바위에 막히면 거기서 멈춰 죽어버리는 게 아니라 온몸을 비틀어서라도 바위를 피해 세상에 싹을 틔웁니다. 또한 사막에서 자라는 풀은 드러난 줄기에 비해 뿌리가 엄청 깊이 내린다고 하는데, 살아남기 위해 지하 어딘가에 있을 한 방울의 수분을 향해 그렇게 뿌리를 뻗고 또 뻗기 때문이랍니다.
그리 보면 우리의 믿음의 삶도 그래야 합니다. 불평보다는 해내려는 믿음이 불타올라야 합니다. 살겠다는 의지가 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매사에 너무도 쉽게 포기를 생각하고 안 될 걸 염려합니다.
전에도 소개했었지만, 유다비라는 사람이 광산을 하나 사서 모든 걸 투자했지만 금이 나오질 않아 결국엔 광산을 헐값에 처분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혹시나 해서 막장에 들어가 몇 번의 삽질을 해보다가는 이내 삽을 던져버리고 돌아섰는데, 얼마 후 광산을 인수한 사람이 막장을 살펴보다가 버려진 삽이 있길래 주워 들고 한 1미터나 팠을까요? 순간 어마어마한 금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유다비는 광산 쪽을 바라보며 ‘1미터만 더 파 볼걸.’이라며 후회하고 낙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얘기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후 유다비는 세일즈사원이 되어 집집마다 물건을 팔러 다녔는데, 그에게는 육신적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이 문전 박대하는 사람들의 무시였습니다.
매번 그런 때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런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1m만 더 파보자!’ ‘한 집만 더 가보자!’
유다비가 외쳤던 이 구호가 믿음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고백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든 1m만 더 파보자는 심정으로, 한 집만 더 가보자는 마음으로 ‘한 번 더 기도하시고, 한 번 더 참아내시고, 한 번 더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도 그런 여러분을 도우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나를 도우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만 믿으시므로 때론 여러분 앞에 답답하고 힘든 환경이 펼쳐질 때라 할지라도 사막 같은 인생에서도 꽃을 피우고, ‘한 번 더의 믿음’으로 결국엔 성공을 거두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